여름밤

여름밤 #4

세 시가 되었을 무렵 D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사에게 불려갔다 왔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겉으로만 그런척 하는건지 Y는 D의 머리속이 궁금했다. D는 어젯밤에 지방에 내려가서 늦게 출근했다고 했는데 말도 안되는 핑계였다. 이사도 그 말을 믿지는 않을 터였다. K차장은 D를 아주 못마땅해했다. D때문에 이사가 자신을 더 못살게 군다고 생각했다. 팀 회의를 할 때면 K차장은 팀원들에게 자신이 이사에게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토로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오늘도 야근을 예약해 놓은거나 다름없었다. Y는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신경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P에게 짜증내는 K차장의 목소리와 D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Y는 자신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J가 Y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물을 봐달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Y는 J의 자리로 갔다. 모니터를 보고 Y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J를 한 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J는 벤치마킹한 디자인을 섞어 놓고는 어떻냐는 표정으로 Y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J에게 Y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J는 평소에도 연봉이 높은 포지션에 대해 묻고는 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적은 듯 보였다.

"팀장님께 보여드려 봐."

Y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J는 디자인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여섯 시가 다 되어가자 L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L은 어김없이 자신의 저녁 약속에 대해 떠들어댔다. 오늘 업무가 끝난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 Y와 P는 저녁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차장과 D도 뒤따라 나왔다. 정말이지 눈치마저도 없었다. 네 사람은 시간을 아끼려고 회사 앞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네 사람은 아무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 Y와 P는 가끔씩 눈을 마주쳤는데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J는 퇴근한 뒤였다. F차장은 다이어트 중으로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사는 거래처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인상을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언제 불똥이 튈 지 몰랐다. D는 작업한 파일을 보내줄 수 있냐고 Y에게 물었다. Y는 용량이 커서 전송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D는 다른 사람에게 매번 도움을 얻어 일을 했다. Y도 몇 번 일을 알려주고는 했는데 그 후로 신입인 J보다 더 많이 물어와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D가 남자 직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이사는 출근과 퇴근을 모두 늦게 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았다. 이사의 통화가 끝나자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회사에는 Y의 팀을 비롯해 몇몇 사람만 남아있었다. Y는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Y는 파스가 붙여진 시큰거리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붉은색 지붕의 낡은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서 있고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모래사장을 Y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중해는 Y의 오랜 갈망이었다. 어릴적 지중해 연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후로 그곳은 Y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거리가 펼쳐졌고 그곳을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다. 거머리같은 더위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해도 될 우스꽝스러운 회사 사람들과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을 견뎌야만 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17세기 풍의 오래된 집의 테라스에서 지중해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였다. 사시사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터키 블루색 같은 잔잔한 물결의 지중해,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깨끗한 공기, 눈 인사와 정감어린 미소,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제철 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 느긋한 아침 시간과 저녁 식사 후 산책. 크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죽어있는 감각을 깨우고 하루에 한 번 크게 웃고 죄책감없이 게을러지고 싶었다.

 

Y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하철 안에는 긴 하루의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있었다. Y의 맞은편에는 얼굴이 붉은 중년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앉아 있었고 Y의 옆에는 앳되 보이는 얼굴의 커플이 속닥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Y는 출퇴근 시간에 휴대폰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그래도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혹사시키고 있는 터에 조그만 기계에 내 시간을 전부 쓰고 싶지는 않았다. Y는 눈을 감았다.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없는 상태로 있고 싶었다. 지하철은 익숙한 이름의 정거장을 거치고 또 거치고 거쳐 Y의 동네에 Y를 내려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Y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다시한번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눅눅한 습기가 Y의 얼굴로 덮쳐왔다. 역 주변 상점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진 듯 보이는 남자 몇몇이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Y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Y가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멀뚱히 Y 뒤에 서 있었다. Y는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빠른 속도로 걸었다. 뒤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저기요, 어디가세요?"

Y는 대꾸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역 앞에서 술에 취해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남자는 계속 뒤따라 왔다. 심장이 빨리 뛰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큰 길이 끝나면 집까지 가는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어두웠다. Y는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는 집에 있었다. 룸메이트는 자신이 나갈테니 큰 길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큰 길이 끝나는 지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Y가 그들에게 가까이 걸어가자 뒤따라 오던 남자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룸메이트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Y도 룸메이트에게 뛰어갔다.

"괜찮아? 어디 있어, 그자식!"

"사람들이 있는 거 보고 돌아갔어, 미친놈."

Y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 행동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힘들게 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Y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두려움이 엄습했었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흥분하며 얘기하자 지나가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Y와 룸메이트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룸메이트는 Y의 가방을 대신 들고 Y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 앞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한밤의 산책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개들은 밖으로 나온 것에 신이 났는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그러다 Y와 룸메이트를 발견하고는 컹컹대며 짖었다. 두 사람은 순간 소리를 지르며 냅다 집으로 뛰었다. 주인이 목줄을 끌어당기며 개들을 진정시켰다. Y와 룸메이트는 집 앞에서 숨을 고르다 무심코 검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 보았다. 달은 건물 꼭대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 했다.

"달 봐봐."

야근으로 밤 늦게 들어오면서 달을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지친 몸을 이끌며 똑같은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달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겪었던 불쾌한 기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공기는 여전히 옆에 있었지만 달빛은 그들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었다. 여름밤이었다.

“화장실 고쳐놨어."

룸메이트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Y는 룸메이트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목 뒤로 머리카락이 쩍쩍 달라붙었다. 서울은 20일째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었다. 오늘도 달빛 아래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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