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9

거리도 잠든 깊은 밤, 검은 두 실루엣이 동쪽 해안가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디아가 본 게 확실할까요? 배교한 아랍인일 수도 있어요."
발레트의 뒤를 따르며 로메가스는 의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나디아가 봤다는 초승달형의 칼이 마음에 걸려. 배교한 아랍인이 그것도 어부가 그런 칼을 갖고 다닐리가 없잖아."
발레트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던 나디아를 떠올렸다.
"그냥 장식품이 아닐까요?"
"말도 안돼. 귀족도 아니고 바다에서 그물질하는 어부가 장식으로 그런 칼을 찬다고? 보키아 시종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해. 귀족의 시종과 어부가 뒷골목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어부가 정말 오스만 정찰병일까요?"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정찰병이라면 오늘 밤 항구를 통해서 반드시 몰타를 빠져나갈거야."
두 사람은 스케베라스산 밑의 마르사 해안에 도착하자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바다는 잠잠했고 파도 소리만이 해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발레트는 바위에 등을 대고 모래 위에 앉았다. 한밤의 해안은 적막했고 축축한 공기가 그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발레트는 작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주의를 기울여 어둠 속을 주시했다. 밤의 차가운 기운이 그들의 몸에 스며들 때쯤, 서로의 숨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미세하게 들렸다. 발레트는 바위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검은 물결 사이로 쪽배가 노를 저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한 사내가 비탈길을 내려와 재빠르게 바다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발레트는 곧바로 뛰쳐나가 달리는 사내의 어깨를 잡아챘다. 사내의 몸이 돌려지는 것과 동시에 칼이 휘둘러졌고 발레트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뒤이어 달려온 로메가스가 손쓸 새도 없이 모든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내는 이미 바다에 뛰어들어 엄청난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로메가스가 뒤에서 발레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스만 정찰병이 맞았어!"
발레트는 배를 움켜진 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얼마나 다친 거에요? 어디 좀 봐요."
로메가스는 상처를 보기위해 무릎을 꿇었다. 발레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괜찮아, 깊이 배이진 않았어. 엄청난 속도였어! 훈련받은 군인만이 할 수 있는.. 아주 민첩해. 나디아가 본 게 사실이었어! 로메가스!"
발레트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빠르긴 했지만 어두워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오스만쪽 사람이 확실할까요?"
발레트는 아무 말 없이 사내가 떨어뜨린 초승달 모양의 칼을 로메가스에게 건넸다.
"곧 시종에게 얘기가 들어갈거야."

 

 

탕!탕!탕! 고요한 밤을 방해하는 둔탁한 바깥 소리에 나디아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탕!탕!탕! 거센 소리가 이어지자 나디아는 베게 밑에서 칼을 빼내 옷안에 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나디아, 문 좀 열어줘요! 로메가스에요."
다급한 로메가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디아는 급히 문빗장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우선 눕힐 곳이 필요해요."
허리를 반쯤 굽히고 로메가스에게 기대어 있는 발레트를 보자 나디아는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나디아, 어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디아를 향해 로메가스가 재촉하며 말했다.
"이리로요."
나디아는 1층의 자신의 방으로 앞장서 갔다. 발레트를 침대에 눕인 후 로메가스는 나디아에게 럼과 물, 깨끗한 천을 부탁했다. 상처는 깊진 않았지만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위치였다.
"나디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잡아줄래요?"
나디아는 떨리는 손으로 발레트의 발을 붙잡았다. 그녀는 발레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작할게요."
로메가스는 먼저 발레트에게 럼을 마시게 한 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처 부위에 럼을 부었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에요. 조금만 빗겨났어도... 어휴.. "
로메가스는 피가 묻은 손을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마워, 로메가스."
발레트는 몸을 일으켜 피 묻은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일어나시면 안되요."
로메가스는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발레트를 저지하며 말했다.
"크레누씨가 일어나기 전에 여길 나가야 해."
발레트가 힘겹게 겉옷을 걸치려 할 때 문이 열리고 나디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발레트를 다시 침대에 앉힌 후 수프 접시를 내밀었다.
"감자 수프에요, 몸이 따뜻해질 거에요."
나디아는 로메가스에게도 접시를 건넸다.
"고마워요, 나디아. 크레누씨는..."
"아저씨는 잠잘 땐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주무세요."
나디아는 걱정 말라는 듯 수프 그릇에 눈길을 주었다.
"나디아, 정말 고마워요. 기사단 숙소로는 갈 수가 없었어요. 발레트님이 다치신 걸 단장님이 아시는 날엔..."
로메가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봐, 로메가스.. 난 괜찮다니까.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지 말라구."
발레트는 얼굴을 찡그린 로메가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전한 경솔한 말로 인해 발레트가 다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그의 피 묻은 셔츠는 5년 전 지옥같던 순간으로 그녀를 데려다 놓았다. 나디아는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어부가...아니었던 거죠... 내가 한말 때문에 당신이 다쳤어요..."
나디아는 여전히 발레트를 보지 못한 채로 괴로운 듯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나디아,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 덕분에 더 큰일을 막을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에요. 상처는 신경쓰지 말아요. 조금 긁힌 것 뿐이니까."
발레트는 부드럽게 말하며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로메가스에게도 어서 먹어보라고 권했다.
"난... 난 당신이 다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때문에 누군가가 또... 나 때문에..."
나디아는 혼란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떨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발레트는 그릇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나디아 앞으로 갔다.
"나디아, 날 봐요. 어제로 시간을 다시 돌린다해도 당신이 본 것을 내게 얘기하는게 옳아요. 절대로 당신 때문에 다친게 아니에요. 내가 방심한 거에요. 난 정말 괜찮아요. 이렇게 바로 걸을 수도 있잖아요."
발레트는 따뜻한 눈빛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은 눈물이 고인 채 떨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얼굴을 가까스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트는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방안을 이리저리 걸었다. 나디아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피 묻은 셔츠와 초승달 모양의 칼은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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