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8

스케베라스산과 마주하는 빌구와 생리아 두 갑은 탁월한 전략적 요충지까지는 아니어도 몰타의 입구를 지키는 요새로서의 장점은 갖춘 곳이었다. 두 갑 사이는 헤엄쳐 건너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로 유사시 부교를 놓아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킬 수 있었고 두 갑의 바다 쪽 끝 지점을 쇠사슬로 봉쇄해 갤리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도 있었다. 육지로 연결되는 성채와 생리아 서쪽 연안을 잘 방어한다면 오스만 대군도 쉽게 몰타를 공략하지는 못할 터였다.
탕!탕!탕!
빌구는 성채를 방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땀이 비가 오듯 쏟아지는 한 낮에도 인부들은 돌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성채 지도를 보며 취약한 부분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카스티야 구역의 성벽이 미흡해 보입니다. 오스만이 허약한 부분을 알아채 포격을 계속 가한다면 성벽이 뚫리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펼쳐진 지도 위의 한 지점을 발레트가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빌구의 성채를 둘러보다 오래된 돌벽 사이로 작은 틈을 발견했다. 손바닥으로 벽을 치자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빌구의 성벽도 임디나 만큼이나 견고하지 못했다. 육지와 연결되는 이 성벽은 더 두껍게 보수되어야 했다.
"알겠소, 인부들을 몇 명 보내리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할 인력이 많이 부족하오.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 현재 인원으로 기한까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무리요."
크레누는 지도에 고개를 파묻은 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보고 있는 발레트를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 보수 공사로 빌구의 성벽 위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어 크레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상부에 보고할 테니 크레누씨가 필요한 인력을 보충해 주세요."
태양은 그들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내리쬐었고 저 멀리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바람이 성벽 위로 지치지 않고 불어오고 있었다. 발레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더위를 식혀줄 포도주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나디아, 무슨 일이냐?"
크레누가 성벽을 올라오는 나디아를 반기며 말했다. 나디아는 큰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점심 식사 하셔야죠. 모두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챙겨 왔어요."
나디아의 깊고 오묘한 초록 눈동자는 햇살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어두운 갈색 머리는 풍성하게 물결 쳐 흐르고 살짝 그을린 피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당찬 면모를 보여주는 듯 했다.
"같이 드시겠어요?"
나디아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발레트에게 말을 건넸다.
"안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고마워요, 나디아."
발레트는 부드러운 말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자, 이쪽으로 와서 점심 먹지."
크레누가 인부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가져온 빵과 양젖으로 만든 치즈, 말린 과일, 포도주를 먹고 마셨다. 아침부터 계속된 보수 공사에 인부들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덮여 있었지만 담소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넘쳤다. 고단한 일상과 달리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여유로웠다.
8년간의 긴 방랑에서 발레트를 이끌었던 것은 신념이었다. 신께 한 맹세, 기사로서의 명예와 대의. 아니 어쩌면 신념이라 생각했지만 로도스 섬 공방전의 패배로 오스만을 향한 복수심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했는지도 몰랐다. 몰타의 성벽 위에서 소박한 점심을 먹으며 발레트는 오랜만에 그를 사로잡고 있는 상념에서 벗어나 현재를 온전히 즐겼다. 누군가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누군가는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로메가스는 인부들 사이에 앉아 그들과 어울리며 포도주를 금새 비웠다.
"몰타의 포도주는 신이 주신 선물이죠."
어느새 다가온 나디아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건넸다.
"포도주 한 모금에 삶은 더욱 풍요로워져요."
발레트는 잔을 받아 들어 포도주를 들이킨 후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네요. 삶의 풍요로움이라.."
나디아는 손에 턱을 괸 채 두 눈을 깜빡거리며 발레트의 말을 읊조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경계심 가득한 싸늘한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수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지중해로 가 있었다.
"여기서는 스케베라스산이 한눈에 보여요. 이렇게나 평온한데...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게 믿겨지나요? 절대로 도망칠 수 없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스케베라스산을 바라보았다. 금빛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스케베라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웅장했다.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보다도 장엄했으며 몇천 년 동안 깊고 푸른 지중해와 맞서서 살아간 몰타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척박한 환경과 잦은 외세의 침략에도 스케베라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무수한 사람들이 이곳을 짓밟았지만 스케베라스는 변함없이 지중해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발레트는 쓸쓸함이 서려있는 나디아의 말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전 고조 출신이에요. 몰타 위쪽에 있는 작은 섬이죠. 15살에 몰타로 왔어요. 부모, 형제없이 거리를 떠돌던 절 아저씨가 딸같이 보살펴 주셨죠. 정말 좋은 분이에요. 말투는 좀 거칠지만."
여전히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디아는 침묵을 깼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툭툭 내뱉는 말이 이젠 정감있게 들려요. 인부들을 많이 생각하세요. 자신보다 더. 저기 봐요, 나디아."
한 뼘 떨어진 곳에서 인부들에게 크게 소리치고 있는 크레누를 보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찰나의 순간 서로의 눈길은 마주쳤고 나디아의 초록 눈동자가 발레트의 눈속으로 들어왔다. 잠시 비췄던 슬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디아의 웃는 모습을 보자 발레트는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아까 성벽으로 오는 길에 보키아의 시종을 봤어요. 아저씨가 임디나 성채를 보수한 적이 있어서 시종 얼굴을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어요."
나디아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초록 눈은 심각한 빛을 띄었다.
"이상한 것이요?"
발레트는 갑자기 변한 그녀의 눈빛을 주시하며 물었다.
"네, 그 시종이 어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부가 조금... 그는 몰타인 같지가 않았어요.
이곳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몰타인이 아니에요. 틀림없어요."
나디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몰타로 이주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허리춤에 찬 칼을 봤어요.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이곳에서는 쓰지 않는 칼이죠."
"칼을 차고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발레트는 나디아의 말을 되뇌었다.
"네, 잘못 봤을리가 없어요. 그건 절대 잊을 수 없는 거니까. 어부 옷차림을 한 외지인과 귀족의 시종이 뒷골목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요?"
나디아는 발레트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눈을 바로 보았다.
"어부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옆모습만요. 중간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어요. 지나갈 때 시종과 눈이 마주쳤는데 뭐랄까... 아주 차가웠어요. 그 느낌이란..."
나디아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팔을 감쌌다. 그녀의 표정에서 언뜻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발레트는 나디아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승달 모양의 칼이라면 아랍인이나 투르­­크족이 쓰는 것인데.. 이슬람 노예 출신인가? 그렇다해도 어부가 그런 칼을 차고 있는 건 이상한데..'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디아."
"이상한 것이 맞죠?"
나디아는 조심스럽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본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크레누씨에게도."
발레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도 그정도는 알아요."
나디아는 스케베라스산으로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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