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7

에스파냐의 국왕, 시칠리아의 섭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귀하.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이곳 몰타 섬에 당도했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신앙의 적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지중해를 수호하는 것은 폐하께서 누구보다도 그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기사단이 이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폐하의 깊은 배려심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성 요한 기사단장
필리프 드 라 릴라당

 

릴라당이 서신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기사단 예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발레트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섬에 도착한 후로 이곳 지형을 파악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임디나는 방어 성채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릴라당은 의자에 등을 붙이며 발레트의 보고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우선 성벽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주민들을 다 수용할 공간도 부족합니다. 섬 중앙보다는 동쪽 항구에 요새를 신축하는 것이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할 것 같습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세우면 항구 전체를 통제할 수 있으니 오스만이 쉽게 방어선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발레트는 며칠 동안 몰타를 둘러보며 생각한 바를 릴라당에게 전했다.
"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몰타로 들어올 때 보았던 그 돌출된 산이 스케베라스 아닌가? 항구 사이에 있으니 요새를 건축하기에 적절한 위치인 것 같긴 하군. 분명히 오스만은 동쪽 항구를 목표로 할테니까."
"네, 그렇습니다. 섬 전체를 둘러봐도 서쪽 해안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배를 정박할 수 없고 남쪽은 중심지와 멀어 매복을 당하거나 보급선 문제도 있으니 오스만은 심해항인 마르삼세트를 공략할 겁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세워 항구를 우리가 통제해야 합니다."
발레트는 로도스 공방전을 경험한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8년간을 지중해를 떠돌며 무슬림 적과 싸웠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지만 전투 경험과 지식은 누구보다도 풍부했다. 릴라당은 발레트의 판단을 신뢰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은 잘 알겠네. 그러나 요새를 신축하려면 비용이 적잖이 들걸세. 위원회에서 비용을 문제 삼을 수도 있어. 이대로 가다간 기사단 운영 자금이 바닥을 보일 테니까."
릴라당이 카를 5세에게 서신을 쓴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섬의 영주권을 양도받아 기사단의 존립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운영 자금이 없다면 섬을 지킬 방도가 없었다. 기사단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병력과 무기, 식량같은 물자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요새까지 신축하려면 막대한 공사 비용이 들 터였다.
"기사단 위원회가 곧 열리네. 그 때 요새 신축건을 위원들에게 얘기해 보겠네."
"네, 단장님."

 


기사단 위원회는 며칠 후에 바로 소집되었다. 각 담당별 참모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기사단의 모든 운영과 전략을 논의했다.
"요새를 신축하기에는 기사단의 자금이 많이 부족합니다. 새로운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현재로선 시기 상조인 듯 합니다."
릴라당이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신축하는 의안을 내놓자마자 자금을 맡고 있는 페르디가 반대 입장을 취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요새를 신축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요새의 성벽을 재방비하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지금은 기사단의 상황이 안정되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대부분의 위원들이 요새 신축건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유럽 전역의 지부와 교황님께 자금 요청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부금을 모아 달라 청원하면 비용이 어느 정도 마련되지 않겠소?"
릴라당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말을 꺼냈다.
"기부금을 모은다 한들 신축 공사 비용을 다 충당하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무기와 식량, 병사들의 급여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닙니다. 지금은 기사단 내부가 안정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현재 기사단의 상황으로서는 위원들의 말이 옳았다. 릴라당은 기사단 내부와 외부를 모두 아울러야 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옥신각신하는 위원들의 말을 잠재운 건 전략 담당의 드발롱이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스케베라스산 앞에 두 개의 작은 갑이 있습니다. 두 갑 사이는 헤엄을 쳐서 갈 수 있는 거리지요. 이미 그곳은 성채가 있으니 바다 끝의 요새에 방비를 더 강화하면 될 겁니다. 스케베라스산에 도시와 요새를 신축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 것이고 동쪽 항에 위치해 있으니 요충지로서 괜찮은 차선 아니겠습니까?"
드발롱의 의견에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원들은 동의한다는 듯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마를 짚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릴라당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드발롱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요. 다른 의견이 없다면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소."
릴라당은 미간을 찌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시종에게 발레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발레트가 릴라당의 방에 도착했을 때 릴라당은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발레트는 좁아진 릴라당의 어깨를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릴라당은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거두어 발레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레트, 자네 의견에 나도 찬성하는 바이나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네. 요새 신축건은 기사단이 안정을 찾은 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 싶어. 대신 임디나가 아닌 동쪽 항구의 갑으로 중심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네. 곧 그곳의 요새를 재정비 할 걸세."
발레트는 위원회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사단의 안정도 중요하지만 오스만투르크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지금은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였다. 발레트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단장님, 그렇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는 스케베라스산에..."
"나도 자네 생각을 존중하지만 상황이 쉽지가 않아. 위원회의 결정을 따라주게."
릴라당은 발레트의 말을 자르며 의자에 앉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발레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나와 곧장 말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스케베라스산 앞의 작은 갑으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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