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5

"이곳은 뭔가 음습하네요."
칼 손잡이를 손에서 놓치 않은 채 로메가스는 주변을 연신 경계하며 걸었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야. 로메가스, 다를 거 없다구."
발레트가 로메가스의 어깨를 툭 치자 로메가스의 칼이 칼집에서 반쯤 빠져나왔다.
"하하하, 놀라기는."
발레트는 로메가스의 놀란 표정에 웃음을 터뜨리며 앞을 가리켰다.
"음.. 여긴 것 같은데?"
몰타 섬의 모든 건물은 모래색과 같은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섬의 일부처럼 보였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 있어 한번 방향을 잃으면 출구를 찾기 어려웠다. 성벽을 연상케 하는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발레트와 로메가스 외에는 어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어느 집의 녹색 대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앳된 여자 얼굴이 반쯤 보였다.
"누구시죠?"
날이 선 목소리와 함께 경계하는 눈빛이 좇아왔다.
"성 요한 기사단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입니다. 이쪽은 제 부하기사 로메가스. 크레누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앳된 얼굴과 대조되는 깊고 오묘한 초록 눈동자가 발레트의 눈에 잠시 머물렀다 기사단의 십자가 망토로 옮겨갔다.
"무슨 일로?"
"요새 건축에 관해 크레누씨와 나눌 얘기가 있어요."
여자는 허리춤에 찬 발레트의 칼에 시선을 주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문을 마저 열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안락한 공간이 나타났다. 불을 피운 아궁이 위에는 작은 냄비가 올려져 있었고 식탁에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홀로 앉아 식사 중이었다.
"무슨 일이요."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 듯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고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보에몬 크레누씨입니까?"
"그렇소만."
"성 요한 기사단의 발레트라고 합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건설할 계획인데 이 섬에서 축성 기술자인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군요."
"스케베라스산? 난 관심없소."
크레누는 여전히 발레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음식을 먹는데 열중했다.
"오스만투르크에 대비해 요새를 만들어야 합니다. 스케베레스산은 해협에 돌출되어 있어 요새화 하기에 최적의 장소에요. 그곳에 성벽을 쌓으면 오스만은 쉽게 섬을 공략할 수 없을 겁니다."
발레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발레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외지인인 당신이 우리보다 이 섬을 잘 안다고 생각하나요? 2천년 전부터 이곳은 늘 다른 민족의 침략을 받아왔어요. 우리는 늘 약탈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죠. 이 섬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죠?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이곳이 침략 당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외지인인 당신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발레트는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 자신에게는 이 몰타 섬을 오스만투르크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몰타 사람들에게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섬을 휘젓고 다니는 외지인에 불과했다. 그제서야 그녀의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우리는 몰타 출신도 아니고 이 섬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외지인이니까요. 우리가 해야 할 일에만 너무 빠져 있었나 봅니다. 몰타와 이곳 사람들을 알아가고 같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어요. 크레누씨에 대한 얘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와서 요새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경솔하게 행동한 것 같군요.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과드립니다."
발레트의 정중하고 진심어린 사과에 오히려 놀란 그녀였다. 기사단은 유럽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레 알고 있던 터였다. 발레트도 프랑스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거만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깊고 오묘한 초록 눈을 가진 그녀의 경계 가득한 눈빛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나디아, 손님들을 오래 서 있게 한 것 같구나. 두 분 여기로 앉으시죠. 식사 하시겠습니까?"
크레누는 비로소 발레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는 접시를 한쪽으로 치우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나디아, 두 분께 포도주 한 잔씩 드리거라."
나디아는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발레트와 로메가스 앞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발레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디아의 격양된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스케베라스산이 있는 해협은 매우 복잡한 해안선을 갖고 있소. 변덕스러운 바람 때문에 갈레온선이 정박하기란 쉽지 않지. 그곳에 요새를 세워 적의 침략에 대비한다면 몰타를 쉽게 공략할 수는 없을 거요. 하지만 스케베라스산에 성벽을 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지대도 높을 뿐더러 흙이 아니라 돌로 이루어진 산이라 인력과 장비가 많이 드는 대규모 공사가 될거요."
크레누는 흰 수염이 난 아래턱을 만지며 말했다. 그는 불같은 성미를 지녔지만 사람의 본성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 젊은 기사의 패기를 더 알아보고 싶었다. 크레누는 잠자코 발레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쉬운 작업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오스만의 이동 경로를 생각한다면 그곳에 성벽을 쌓고 요새화 하는 것이 몰타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오스만은 쉽게 성벽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크레누씨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발레트는 정확하게 몰타 섬의 지리적 이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섬 사람은 육지의 외지인을 달가워하지 않소. 그들은 잠시 들렸다가 떠나는 사람들이니까. 헌데 당신은 이곳을 쉽게 떠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
크레누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식탁 위에 내려 놓은 후, 발레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은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크고 투박한 크레누의 손을 발레트는 힘껏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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