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3-6

보키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얼굴 표정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둘러보며 몇 마디 말을 했으나 얼핏 스치는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발레트가 방에 들어서자 보키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릴라당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트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보키아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금새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키아경, 누군지 알아 보시겠습니까?"
릴라당이 발티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키아는 비토를 보았으나 비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이틀 전, 오스만 정찰병과 함께 있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릴라당이 보키아를 보며 말을 맺었다. 보키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보키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번, 비토 발티가 살람 메메드가 아니라고 증언하셨지요. 몰타의 안전이 걸린 중대한 일임에도 경은 첩자를 감싸 수사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릴라당이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20년 동안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또다시 연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보키아는 안쓰럽다는 듯 발티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키아는 인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포장했지만 그는 철저히 이해득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보키아의 뻔한 답변에 릴라당과 발레트는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발레트는 방을 나갔고 보키아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방에 들어온 발레트를 보자마자 보키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인!"
보키아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말을 계속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부인,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라당이 정중한 태도로 의자를 권했다. 창백한 얼굴의 보키아 부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베일은 쓰고 있지 않았으나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부인, 부군과 비토 발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알고 계신 전부를요."
발레트가 부인에게 말을 하자 보키아는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키아 부인은 발레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월 전이에요. 평소와 같이 성당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섰지요. 뜰에서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새벽에 누군가 싶었는데 남편과 비토였어요."
보키아 부인이 여기까지 말을 하자 보키아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네가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첩자임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절대로 밝혀내지 못 해...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남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발티는 그 후로 남편의 곁에 있지 않았어요. 집안일도 맡지 않았죠. 헌 옷을 입고 다녔고 남편에게 한 번씩 무언가를 보고했어요. 돈 후안경이 집에 초대되었을 때도 저녁 식사 중 남편에게 따로 보고를 했어요."
"에스파냐의 돈 후안경 말입니까?"
발레트가 물었다.
"네,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발티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고 다른 방으로 돈 후안경을 데리고 갔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눈밑은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어색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발레트는 큰 결심을 한 보키아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보키아 부인은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보키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키아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보키아 부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릴라당의 방을 나갔다.
"비토 발티를 아끼는 마음에 그의 정체를 묵인하였다는 경의 말은 믿기가 어렵군요."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키아의 뒤에 섰다.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 후안은 그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를 5세의 측근이지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가 붙잡은 오스만 정찰병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병력과 함선 규모를 발티에게 전했다고 하더군요. 돈 후안경이 그 정보를 알고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발티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키아는 더 이상은 못 듣겠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스파냐를 비롯한 각국에서는 오스만의 동태를 항시 살피고 있습니다. 경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발티를 이용하여 오스만의 정보를 얻고자 했어요. 그 정보라면 에스파냐로 진출할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발티는 당신의 사익을 위해 이중첩자 노릇을 했던 겁니다."
발레트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보키아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비토 발티가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척 했었던 감정이 결여된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동생을 살려야 했어요... 동생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이 쏟아졌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발티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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