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3-1

아주르... 아주르...
푸른 바다, 쏟아지는 햇빛,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바람, 흩날리는 짙은 머리카락과 너울거리는 치맛자락, 누군가 고개를 돌린다. 얼핏 보이는 옆모습, 초록빛으로 감싸인 눈동자.
안드레아는 눈을 떴다.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은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다. 그는 세수하듯이 얼굴을 쓸고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집 밖으로 나선 그는 항구로 방향을 정했다. 아니, 발걸음이 목적지를 정했는지 모른다. 안드레아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골목을 홀로 걸었다.
거리에 나오자 앞사람의 얼굴이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집집마다 문과 창문이 굳게 걸어 닫혀 있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람들의 말소리. 그는 항구 근처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에는 선원 몇몇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리보다는 그를 반기는 듯 했으나 여기서도 그가 기대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코가 빨간 주인장이 눈빛으로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럼이라는 짤막한 안드레아의 대답에 빨간코의 주인장은 큼지막한 손으로 잔에 가득히 술을 채웠다. 안드레아는 입에 잔을 갖다 대었다. 빈속에 술을 털어넣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선원들은 거친 입담을 서로 자랑하고 있었고 주인장은 그들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속이 쓰라렸지만 남은 술을 비웠다. 그리고 술값을 탁자에 올려두고 주점을 나와버렸다. 항구의 주점도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면서 하늘을 맴돌았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 제노바에서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에서도. 안드레아는 흐릿한 눈으로 해무로 뒤덮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저편을 보기 위해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해무에 갇힌 바다였다. 해무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고 싶었다. 풍족한 바다를 느끼고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깊게 드리워진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안드레아의 머리 위에서 소리내어 울던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위에 사뿐히 앉았다. 갈매기는 보란 듯이 해무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이어서 다른 갈매기들도 주저 없이 해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좀 전에 마신 럼이 이제야 작용하는 것 같았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해무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발레트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선형으로 생긴 계단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고 어둠으로 가득했다. 발레트는 숨을 짧게 내뱉으며 걸음을 떼었다. 한 손에 횃불을 들었지만 어둠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발레트는 횃불을 들어 철창 안을 비춰 보았다. 컴컴한 굴 속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발레트는 철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검은 눈동자의 사내는 발레트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일어났다.
발레트는 릴라당의 방문을 짧게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창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릴라당은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발레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검은 눈동자의 사내를 앞으로 이끌었다. 릴라당은 그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날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릴라당은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결심한 듯 대답했다.
"기독교로 개종하겠습니다."
"배교를 하겠다는 건가?"
릴라당은 사내의 의중을 읽기 위해 다시 한번 물었다.
"제 어머니는 그리스인입니다. 저도 반은 기독교도입니다."
"넌 투르크 정찰병이야. 무엇을 보고 널 믿어야 하지? 모국과 종교를 배반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텐데."
발레트가 날카롭게 사내를 몰아세웠다. 남자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몰타 첩자를 잡는데 협조하겠습니다."
"그건 우리선에서 할 수 있네."
"조금 있으면 본국에서 다른 정찰병을 보낼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자는 더욱 몸을 사릴테고 기사단에게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뿐입니다."
투르크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를 둔 이 정찰병은 릴라당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발레트는 투르크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한 태도였다.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게."
릴라당은 발레트에게 방에 남으라고 말했다. 사내는 발레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른 기사에게 이끌려 방을 나갔다.
"어떻게 생각하나?"
릴라당이 발레트에게 물었다.
"도망칠 구실로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네."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만약 투르크인을 통해 발티를 잡는다 하더라도 그가 보키아에 대해 털어놓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네. 발티는 보키아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걸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보키아가 발티를 이용해 에스파냐에 환심을 사려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사단이 추측한 정황이었다. 그동안 기사단은 발티를 감시해왔고 그는 투르크 정찰병과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보키아는 돈 후안 경을 몰타로 초대하여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었다. 보키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발티의 신원을 숨겨준 것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보키아가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보키아는 온갖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였다. 그보다 더 정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라면?'
말이 모이는 곳. 그곳은 오래전부터 아주 가까운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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