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2-13

둥, 둥, 둥!!!
검은 얼굴의 해적은 손을 높이 들어 북을 내리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노를 저어라! 더 힘껏!"
발레트는 이를 악 물고 족쇄 찬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생존 앞에서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앞 사내의 등에 긴 채찍이 내리꽂혔다. 사내의 손에서 노가 떨어지자마자 곧 사정없는 매질이 이어졌다.
"계속 저어요."
지아니가 정면을 응시한 채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땀이 비가 오듯 흘러 내렸다. 지하 선실은 덥고 습했다. 발레트는 강렬한 태양이 그리워졌다. 빌구의 성벽 위에서 마셨던 포도주가 간절히 생각났다. 금빛의 스케베라스산과 붉은 바다, 함께 했던 사람들. 다시 한번 그곳에서 몰타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지아니의 말이 옳았다. 버텨야 했다.
발레트는 북소리에 집중했다. 북을 치는 해적의 손이 더욱 빨라졌고 노는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해적들의 엉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레트는 라골레타 항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항구는 북아프리카의 관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괴괴한 모습이었다. 트리폴리를 무참히 함락시킨 해적의 잔인함을 피해 아랍 지도자는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고 튀니스 주민들은 해적들을 상대로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힘쓰지 않고 라골레타 항에 입성했다. 부족 대표들은 해적에게 튀니스 요새를 내어주고 말았다.
갤리선 노예들은 모두 족쇄를 찬 채로 배에서 내렸다. 발레트는 트리폴리에서 사로잡힌 후로 처음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다른 배에서 내린 노예들 사이로 로메가스가 보였다. 로메가스는 걸음을 멈추고 발레트를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오랫동안 걷지 못한 탓에 지아니는 다리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그를 발레트가 붙잡자 해적은 둘 사이를 떼어놓으며 지아니의 등을 밀쳤다. 검은 얼굴의 해적은 발레트를 노려보며 허리춤에 찬 칼을 만졌다. 발레트는 족쇄를 끌며 앞으로 걸었다. 이제 마그레브의 튀니스는 해적의 도시가 되었다.

 

 

지중해의 바람이 갑판 위로 몸을 내민 안드레아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몰타에서 경험한 짧은 환희 뒤에는 텅 빈 허전함만이 남았다. 눈을 감으면 애처로운 얼굴로 항구를 뛰어다니는 나디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드레아는 마지막 순간을 지울 수 없었다. 성 요한 기사단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숨을 내쉬었다. 트리폴리에서 살아남은 자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요새는 해적이 장악하고 있고 대다수의 주민과 병사는 죽임을 당했다.
'에스파냐에는 다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갤리선은 바르셀로나를 향하고 있었다. 제노바는 일찍이 상업으로 도시가 형성된 곳이었다.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으나 베네치아와의 세력 다툼에서 패배한 후 밀라노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게 쇠퇴의 길을 걷던 제노바에게 에스파냐의 카를 5세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그는 제노바의 용병 대장 도리아를 해군 총독으로 삼고 제노바의 자립을 도와주었다. 카를 5세는 해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했다. 도리아 또한 용병으로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쪽으로 움직이는게 당연했다.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두지 않던 카를 5세도 더는 바르바로사의 도를 넘는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전군을 바르셀로나에 집결시켰다.
안드레아는 도리아가 이끄는 해군 선단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는 금융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다의 삶을 택했다. 돈을 저울질하는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피오르 삼촌은 늘 그가 동경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어린 안드레아에게 바다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안드레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파도는 저항없이 순순히 길을 내주었고 돛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바람은 지중해의 서쪽으로 배를 실어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집합한 갤리선과 무장 상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원정에 필요한 수많은 물자를 배에 적재하는 선원들로 항구는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카를 5세는 튀니스까지 점령한 바르바리 해적으로 인해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튀니스는 시칠리아까지 배로 하루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해적은 제국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그것은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카를 5세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더구나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이번에야말로 지중해가 기독교도의 것임을 단단히 일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튀니스 원정은 대규모의 함선과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교황은 자금을 내어 선단을 조직하였고 릴라당은 세계 최고의 무장 상선인 성 안나호를 바르셀로나로 보냈다.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해군도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섰다.
안드레아는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에스파냐 해군에게 트리폴리에 관한 다른 정보가 들어왔는지 알아보았다. 에스파냐 수비대장 멘데스는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병사들과 성 요한 기사들은 갤리선 노예로 넘겨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사망자 명단에 발레트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보면 포로로 잡혔을 확률이 높았다. 해적의 습격이나 해전으로 포로가 된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는 갤리선 노예로 보내져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해전으로 배가 침몰하면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건 노예들이었다. 그렇기에 각국의 갤리선에는 노를 저을 노예가 항상 필요했고 노예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안드레아의 눈에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들어왔다. 돛대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 때 창설된 성 요한 기사단은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된 의료 기사단으로 출발했다. 기사는 청빈, 순결, 순종을 평생토록 맹세했고 기사단에 남은 생을 바쳤다. 안드레아는 트리폴리 요새가 함락되지 않았다면 튀니스 원정에서 발레트를 동맹군으로 만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성당에서 기도한다는 나디아의 말을 떠올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안드레아의 앞뒤로 짐을 맨 선원들의 분주한 발걸음만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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