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2-11

나디아는 성벽 위에서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붉은 빛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빌구의 성벽은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 크레누는 공사 기한을 맞추기 위해 때때로 야간에도 작업을 진행했다. 인부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크레누는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나디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릴 듯 했다. 나디아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은 너울너울 춤을 췄다.
크레누는 아내를 하늘로 먼저 보내고 망연자실해 있던 5년 전을 떠올렸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길모퉁이에 앉아 울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소녀에게 음식을 사주며 지낼 곳은 있는지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고통을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에 크레누는 나디아를 거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크레누는 나디아가 환한 웃음을 되찾길 바랬다.
한쪽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부 중 한 명이 크레누에게 달려와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트리폴리 요새가 해적에게 습격을 당했답니다. 지금 항구에선 온통 그 얘기로 난리에요!"
크레누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디아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크레누의 등뒤에 와 있었다.
"나디아!"
미처 붙잡기도 전에 나디아는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마르사 해안을 지나 스케베라스산을 올라갔다. 숨이 미칠 듯 찼으나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고 작은 생채기에서 피가 이슬처럼 맺혔다. 나디아는 정신없이 뛰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떨어진 눈물은 모든 것을 적셨다. 고조 섬,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발레트까지도... 아무리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 깊숙한 모래 더미에 파묻혀 버렸다.
나디아는 땅끝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발을 멈췄다. 어둠은 이미 바다를 삼켰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이 그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나디아는 목에 걸린 십자가 펜던트를 손에 잡고 무릎을 꿇었다. 바람은 그 여느 때보다 세차게 나디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디아는 눈을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의 밤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발레트는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어깨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하루 종일 고되게 노를 저었던 사람들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해적들은 대다수가 육지로 나갔고 노예들을 감시할 몇몇만 남아 있었다. 발레트는 고개를 돌려 수염으로 뒤덮인 남자를 보았다. 사내가 자신의 출신을 밝혔을 때 그와 같은 눈을 어디서 보았는지 발레트는 알 수 있었다.
'나디아...'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이 이름 때문일지도 몰랐다. 몰타를 떠난 이후로 발레트는 나디아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디아를 만나고 간간이 비쳤던 그녀의 쓸쓸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녀가 웃으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고 안심이 되었다. 깊은 상처를 털어놓았을 때는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발레트는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만져졌다. 나디아가 오빠의 칼을 발레트에게 줄 때 그녀는 이전과 달라 보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해 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그 칼을.."
초록 눈의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놀라는 사내에게 칼을 건넸다.
"나디아... 당신의 여동생을 알고 있소. 이제 주인을 찾은 거요."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디아...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사내는 칼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디아를 지켜달라 부탁하며 주신 칼이었다. 그는 지난 5년간 나디아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디선가 살아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그는 노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움푹 패인 사내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발레트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사내의 몸을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내는 감았던 눈을 뜨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발레트를 보며 나디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몰타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은 말아요."
사내는 발레트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한번 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어떻게 발레트가 칼을 가지고 있는지도 물었다. 발레트는 그간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남자는 발레트의 말이 끝나자 칼을 도로 건넸다. 발레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남자는 나디아와 닮은 초록 눈으로 발레트를 바라보며 그의 팔을 잡았다.
"나디아가 당신에게 준 거요."
발레트는 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지아니 레오나디요."
"발레트,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두 사람은 족쇄 찬 손과 손을 마주 잡았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밤이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몸을 웅크리며 마른 기침을 해댔다. 발레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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