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2-7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깊은 어둠 속, 트리폴리 해안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빠르면서도 조심스럽게 해안 근처 마을로 들어가 집집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잠을 자다 놀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때를 기다린듯이 해적들은 정신없이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짓밟고 죽였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잠결에 들리는 시끄러운 바깥 소리에 발레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칼을 들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병사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해적입니다! 급습이에요!"
발레트는 성벽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이미 마을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짐승들이 시체 위를 날뛰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발레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주저앉아 있었다.
"각자 위치로!"
발레트는 중얼중얼거리는 병사를 일으켜 세웠다. 로메가스가 성벽 위로 뛰어 올라왔다.
"이미 마을은 초토화됐어요! 수비대는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물자 조달이 되지 않아 이미 창고에 화약은 동이 난 터였다. 병사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집결할 여력도 없었다. 연병장에는 수비대장 멘데스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요새를 사수해야 한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라!"
"화승총이 부족합니다. 대포를 쏠 화약도 없습니다."
지휘관 한 명이 고개를 떨군 채 멘데스에게 보고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
멘데스는 칼을 뽑아 들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성벽 위에서는 병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공포스러운 괴성과 함께 요새를 뚫을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총탄은 빗발치듯 성벽에 난사되었다. 수비대는 하나 둘 쓰러졌다.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누군가 성문을 열어준 듯 합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알 수 없는 함성과 함께 터번을 두른 해적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수비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자들도 있었다.
"항복해라! 목숨은 살려주겠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해적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거만하게 소리쳤다.
"살고 싶으면 항복해라!"
병사들이 부들부들 떨며 하나 둘 칼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버틸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항복! 항복이요!"
멘데스가 칼을 버리고 손을 들었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도 칼을 버렸다.
"누가 책임자냐? 너냐?"
우두머리 해적의 칼끝이 멘데스의 목에 닿았다. 멘데스는 해적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며 칼에 힘을 주었다.
"이슬람교로 개종을 할 건가?"
"그럴 일은 없소."
멘데스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뱉었다. 우두머리 해적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가더니 뒤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른 해적이 배시시 웃으며 멘데스의 무릎을 꿇려 앉혔다. 멘데스의 눈이 질끈 감기는 것과 동시에 해적이 칼을 내리쳤다.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배에 태워라!"
해적들은 소리를 지르며 기사단의 십자가 망토를 벗겼다. 발레트의 손목에 굵은 밧줄이 동여졌다. 기사단원과 수비대,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한데 묶여 해안으로 떠밀려갔다. 마을은 연기로 자욱해 눈을 뜰 수 없었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들만 흐릿하게 보였다. 평온했던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이곳은 죽은 자의 땅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발레트의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앞만 보고 걸어."
해적은 꼬질꼬질한 얼굴을 들이밀며 비열하게 웃었다. 발레트는 이를 악 물었다. 트리폴리의 기나긴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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