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15

"보키아 경이 첩자 사건에 관해 책임을 요청해 왔습니다."
며칠 후 열린 기사단 위원회에서 참모들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발레트는 발티의 출신을 밝히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했으나 투르크인이라는 그의 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신분은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단장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무리하게 수사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위원들은 발레트의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보고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발레트의 방을 침입한 투르크인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가 첩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몰타 내 첩자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사건의 매듭을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러나 위원들의 반발은 거셌다.
"첩자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한 기사단의 명예는 실추됩니다. 보키아는 몰타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기사단의 존속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위원회의 참모들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빌구와 생리아의 요새 방비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증거도 없이 첩자 문제를 부각시킬 수 없었다.
"단장님,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오스만이 우리쪽의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또 하루빨리 요새 작업도 끝을 맺어야 합니다."
릴라당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발레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정황만으로는 더 이상 밀어부칠 수 없었다. 릴라당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참모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를 트리폴리로 보낸다."
 

 

발레트는 스케베라스산을 올려다 보았다. 산은 늘 이 자리에서 누군가를 맞이하기도 했고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트리폴리로 가는 갤리선은 이미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혼자 어딜 가시려구요?"
로메가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뿌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왔다.
"로메가스,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넌 여기 있어야 해."
"있고 말고는 제가 결정합니다."
로메가스는 발레트를 앞질러 걸어갔다. 로메가스가 우기기 시작하면 그 고집은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에스파냐 출신의 로메가스와는 로도스 섬에서부터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그들은 친형제처럼 서로를 위했고 지중해를 누비며 함께 싸웠다. 발레트는 로메가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앞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때 등 뒤에서 다급히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나디아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레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디아!"
나디아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녀의 초록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 보였다.
"나디아, 어떻게..."
발레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가능한 한 조용히 트리폴리로 가고자 했기에 빌구의 성벽에도 찾아가지 않았다. 나디아를 보는 순간 마음속에 작은 일렁거림을 느꼈지만 발레트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트리폴리로 가신다고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그녀는 초록 눈을 들어 발레트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기사단에서..."
"꼭 주고 싶은 게 있었어요."
나디아는 품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오빠가 제게 준 칼이에요. 고조 섬을 나오기 직전에..."
"나디아.."
나디아는 발레트의 손에 작은 칼을 쥐어 주었다.
"이 칼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요.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건강히 돌아와요."
나디아는 칼을 쥔 발레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녀의 깊은 초록 눈망울에서 더 이상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짐때문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트리폴리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에서 나와 자신과 마주한 나디아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트리폴리는 실패의 결과가 아니였다. 그는 주저함없이 다른 문을 열었다. 발레트는 따뜻한 시선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다녀올게요, 나디아."
발레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 갤리선의 돛이 힘차게 올려졌고 바람은 조용히 그들을 이끌었다. 발레트는 다시 푸르른 지중해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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