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14

정적만이 감도는 이른 아침이었다. 기사단 숙소의 안뜰에 단장인 릴라당을 비롯한 기사단 전원이 모였다. 뜰의 중앙에는 검은 복장의 투르크인이 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투르크인은 어젯밤 릴라당이 발레트의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의연해 보였다.
"단장님, 보키아 경이 도착했습니다."
릴라당의 시종이 보키아의 도착을 알리자마자 높은 음의 목소리가 뜰안에 울려 퍼졌다.
"단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보키아는 급히 나오는 길임에도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어떠한 틈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 했다. 발레트는 보키아 뒤에 서 있는 발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결박된 사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결례가 많습니다. 중요한 일이라 부득이 모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젯밤에 제 보좌관 발레트의 방에 저 사내가 침입했습니다."
릴라당은 무릎을 꿇은 사내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몰타인 복장을 하고 있지만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투르크인이죠."
투르크인이란 말에 보키아는 그제서야 사내를 쳐다보았다.
"단장님, 그게 아침부터 제가 여기로 와야 할 이유와 상관있습니까?"
"이게 그 이유입니다."
릴라당은 화려하게 세공된 초승달 형의 칼을 보키아에게 보였다.
"저 자는 이것 때문에 여기 있는 겁니다. 우리는 몰타내 오스만 첩자를 쫓고 있던 중 이 칼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첩자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이 안에 있습니다."
"그럼 저 사내가 오스만 첩자라는 말입니까?"
보키아가 결박된 사내를 가리키며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투르크인을 쏘아보았다.
"저 자는 첩자가 내통한 오스만 정찰병입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요."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릴라당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살람 메메드.. 살람 메메드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살람 메메드가 누굽니까?"
살람 메메드라는 이름이 나오자 발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발레트는 그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이 칼의 주인이 살람 메메드입니다."
릴라당은 칼을 보키아에게 건넸다. 칼날은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날렵해 보였다.
"20년전, 살람 메메드라는 이름의 투르크 소년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습니까?
보키아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칼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 밑에 새겨진 투르크어.. 살람 메메드... 당신의 시종 비토 발티의 예전 이름."
릴라당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릴라당에게 칼을 도로 건넸다.
"단장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제 시종은 살람 메메드가 아닙니다. 투르크 출신도 아니구요. 비토는 시칠리아에 계신 제 숙부 밑에 있던 사람의 자식입니다. 집안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해 제가 숙부님께 부탁했지요. 이런 일로 저를 부르시다니.."
보키아의 말투는 아주 침착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살람 메메드, 그렇게 뒤에 숨어 있을건가? 저 자를 봐! 할 말이 없나?"
발레트는 발티에게로 걸어가 그의 몸을 돌려 세워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보게 했다.
"자, 얼굴을 보고 말해봐!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나? 똑똑히 봐!"
발레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말했다. 형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기사단 숙소에 침입한 아우를 비토 발티가 제대로 보기를 원했다. 검은 옷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비토를 바라보았다. 사내에게서 원망의 눈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입과 눈을 닫았다.
"당신 때문에 저 자는 몰타로 다시 들어왔어. 살람 메메드! 당신을 지키고자. 형으로서 할 말이 아무것도 없나?"
"난 살람 메메드가 아니요."
비토는 발레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발레트는 발티의 텅 빈 눈동자를 보자 소름이 끼쳤다.
"단장님,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제 사람이 저 자와 내통했다는 겁니까? 첩자라니요?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이렇게 저를 모욕해도 되는 겁니까?"
보키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따지듯이 물었다.
"보키아 경, 우리는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첩자를 추적해 왔습니다. 저 자는 비토 발티의.."
"어디서 나온 정보입니까? 비토의 출신은 제가 증명하지요. 단장님도 이 문제를 확실히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보키아는 등을 돌려 뜰을 가로 질러 나갔다. 발티는 사내 옆에 잠시 걸음을 멈추는 듯 싶더니 이내 보키아의 뒤를 따랐다.
"단장님, 보키아 경이 발티를 보호하려는 듯 보입니다. 혹시 보키아.."
릴라당은 발레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을 들었다.
"발레트, 확실하지 않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다 보고한건가? 처음 이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지?
"단장님, 정보 제공자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발레트는 나디아가 시종과 정찰병의 얼굴을 본 사람임을 말할 수 없었다. 비토는 동생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나디아가 목격자인 것을 비토가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 어떤 위협을 가할지 몰랐다. 나디아를 이 일에 끌어들여서는 안되었다.
"모든 경위를 내게 얘기해야 하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어. 시종이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보키아는 가만있지 않을 걸세.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똑같이 돌려주는 사람이야."
발레트는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비토의 동생을 사로잡았을 때만 하더라도 오늘 벌어진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동생을 앞에 두고도 자신을 부인하다니, 지독한 인간이군. 보키아는 왜 발티를 감싸는 거지?'
보키아의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비토의 신원을 밝혀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검은 옷의 사내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로메가스가 그의 등을 툭치며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기사단 숙소를 나와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보키아는 말 고삐를 풀며 속도를 늦췄다.
"널 믿고 모든 권한을 네게 줬다. 그런 내게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나?"
보키아의 싸늘한 눈초리가 비토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혔다. 비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보키아는 말 위에서 발티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릴라당 앞에서 널 변호했지만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발레트는 너의 정체를 증명할 수 없을 거야. 동생의 목숨은 살릴 수 있을 거다."
발티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는 땅에 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혔다.
"네가 하던 일을 계속해라. 그리고 그들에게서 중요한 것을 받아내."
보키아는 에스파냐의 카를 5세가 성 요한 기사단에게 몰타 영주권을 왜 양도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카를 5세와 쉴레이만의 힘겨루기 상황에서 몰타에 첩자 사건이 대두된다면 에스파냐로 상업 활동을 넓히려는 자신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기사단은 오스만으로부터 몰타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거야. 릴라당, 서로의 영역은 침범하지 말자구.'
그는 뒤꿈치로 말의 배를 차며 고삐를 다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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