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13

"시종이 투르크 노예 출신인 건 확실한 것 같아요."
로메가스는 기사단 숙소로 돌아와 알아낸 정보를 숨가쁘게 전달했다.
"항구에 있는 주점에서 어떤 주정뱅이한테 들었는데 보키아 집안으로 들어간 후 똑똑한 머리 덕분에 눈에 띄였던 모양이에요."
로메가스는 약간 취기가 오른 얼굴로 시종이 보키아의 신뢰를 얻어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름은? 예전 이름은 알아냈어?"
발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살롬이라 불렀다는데 성까지는 기억을 못했습니다."
발레트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지금까지의 상황을 머리 속으로 맞추어 보았다. 이제 시종은 칼에 찔린 사람이 발레트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칼이 발레트의 수중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군가 칼을 찾으러 온다면 그것은 시종 스스로 자신이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반드시 시종은 칼을 찾으려 할 거야. 칼이 중요한 단서라는 걸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테니까."
발레트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 온다면 그날은 축제로 경비가 느슨해진 오늘 밤이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세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지."
발레트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로메가스에게 말했다. 로메가스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여유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달도 잠든 깊은 어둠의 시간, 발레트는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달빛이 열린 창으로 들어와 방에 머물렀고 적막한 밤 공기가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침대 밑에 있는 로메가스는 긴장한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삐걱'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나타났다. 발레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움직이는 그림자에게 향해 있었다. 상대는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발레트는 꼼짝하지 않고 침대 위에 가만히 있었다. 실수없이 한번에 제압하기 위해선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미세한 숨소리가 자신의 위에서 들리는 그 순간, 발레트는 빠르게 몸을 세워 그의 팔을 잡고 무릎을 꿇렸다. 강하게 훈련된 몸이었다. 짓눌려지지 않으려는 힘이 상당했다. 침대 밑에 숨어 있던 로메가스가 나와 굵게 꼬인 줄로 침입자의 상체를 단단하게 묶었다. 로메가스가 복면을 벗기자 매서운 검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누구냐? 누가 시킨거야?"
로메가스가 사내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며 몰아붙였다.
"조용히! 로메가스!"
발레트는 흥분한 로메가스를 뒤로 물러서있게 했다.
"우린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걸로는 부족한가?"
발레트가 상의를 올려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자 로메가스가 있는 힘을 다해 사내의 얼굴을 후려쳤다.
"로메가스! 진정해!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야."
매서운 눈의 사내 입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잡힌 순간부터 지금까지 사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도무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검은 눈동자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
"눈빛이 닮았군. 보키아의 시종이자 당신의 형, 살람 메메드."
사내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발레트는 알아차렸다.
"칼을 찾기 위해 몰타로 다시 들어오다니.. 혈육이 아니라면 이런 위험을 감수할리가 없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감정이 배제된 싸늘한 말투로 사내는 입을 뗐다.
"어떻게 정확히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었지? 칼에 찔린 기사가 나라는 건 시종만이 알고 있어!"
사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발레트는 화려하게 세공된 칼을 사내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이 칼이 네것이라면 넌 다시 몰타에 들어올 이유가 없어! 죽을 각오로 이곳에 온 건 칼에 새겨진 이름, 바로 살람 메메드 때문이야."
"살람 메메드라니..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복면의 사내는 반복적으로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그는 초승달 모양의 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살람 메메드는 투르크 노예였어. 이 칼은 헤어지기 전 그가 네게 주었겠지. 넌 이 칼을 형 대신 소중히 여겼을거야. 그게 네가 여길 찾아 온 이유고."
사내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포박된 줄을 끊으려는 듯 상체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분명 괴로워하고 있었다. 조금 더 압박을 준다면 살람 메메드에 대해 실토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단장님!"
굳은 표정의 릴라당이 몇몇의 기사들과 문 앞에 서 있었다. 릴라당은 화를 간신히 누른 채로 발레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발레트!"
"단장님, 나중에 말씀 드리.."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그자는 누군가?"
릴라당은 상체가 결박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가리켰다.
"발레트! 두 번 말하지 않겠네. 당장 내방으로 오게!"
발레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들어온 물고기를 한순간에 놓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내는 틈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은 일을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박된 사내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오스만 정찰병이 몰타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추적했으나 놓치고 말았습니다. 몰타인 첩자와 연결고리를 찾던 중 정찰병이 떨어뜨리고 간 칼에서 단서를 발견했고 칼을 찾기 위해 저에게 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발레트는 뒤돌아 앉아 있는 릴라당에게 그간에 일어났었던 일을 설명했다.
"발레트, 이런 중대한 사안을 보고도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릴라당이 여전히 화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해야 했다. 기사단 숙소에 오스만 정찰병이 침입한 큰 사건이었다. 이것은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었고 그만큼 기사단 내부가 허술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하지만 사안의 특성상 은밀하게 추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에 밖으로 정보가 새어나간다면 첩자를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발레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릴라당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레트 앞으로 다가왔다.
"몰타인 첩자는? 알아냈나?"
"네, 잡힌 정찰병의 형입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릴라당을 보았다.
"형? 그게 누군가?"
"보키아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확실한가?"
릴라당은 뒤를 돌며 다시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그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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