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12

성 바울 축일은 거리마다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교회는 종을 울려 축일을 축하하고 트렘펫과 북소리는 사람들의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성 요한 기사단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기사단장 릴라당의 연설이 광장에서 곧 있을 예정이었고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식량도 준비해야 했다.
발레트는 자신의 방에서 정찰병이 떨어뜨린 초승달 모양의 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연회에서 어린 여자 하인의 행동은 분명히 고의적이었다. 이제 시종은 자신의 정체를 누가 알고 있는지 파악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가 취할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 시종과 정찰병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찰병은 잡지 못했고 시종은 당분간 오스만과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황은 있지만 물적 증거가 없었다. 오로지 정찰병이 떨어뜨리고 간 이 칼뿐... 초승달 모양의 칼...
칼을 유심히 바라보던 발레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그는 다시 한번 칼을 눈앞에 대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무늬로 세공된 손잡이 아래 조그맣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발레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곧장 숙소에서 나와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로 향했다.
주교와 기사단장 릴라당의 연설이 끝나고 광장은 다시 악기 소리로 가득찼다. 나디아는 크레누와 함께 거리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대추를 넣어 만든 몰타 전통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과자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손을 뻗쳤다. 과자를 담은 바구니는 금새 바닥을 보였다. 신이 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가고 광장 저편에서 발레트와 로메가스가 바쁜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 눈으로 인사하며 크레누 앞에 섰다.
"혹시 주변에 투르크어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투르크어라...
크레누는 흰 수염이 난 아래턱을 슥슥 문지르며 그리스 출신의 인부가 투르크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은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찾아내야 했다.
"오늘 저녁 모임이 있는데 함께 하겠소? 그도 올 거요."
크레누는 발레트가 평상시와 달리 초조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귀찮은 일에는 끼고 싶지 않았지만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말았다.
"물론입니다."
발레트가 환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는 식사 시간에 맞춰 가겠다고 덧붙이고는 로메가스와 함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뜨겁던 광장의 열기도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발레트는 크레누가 알려준 그리스계 남자에게 칼에 새겨진 글씨를 보여주었다.
"이 글자를 읽을 수 있겠어요?"
"말은 하지만 읽는 건 조금밖에 못해요."
남자는 확신이 없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눈을 찡그리며 칼을 들여다보았다.
"음.... 보자.... 살...람...메...메...드."
"살람 메메드?"
그리스인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다시 한번 소리를 냈다.
"살람 메메드... 투르크인 이름 같은데요?"
발레트는 속으로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살람 메메드.. 그 정찰병의 이름인가? 시종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리스인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발레트에게 할 말이 남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렸다.
"저... 이 이름과 같은 투르크인을 알고 있어요. 티노스에서 성벽 공사를 할 때였는데 아래로 추락할 뻔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옆에 있던 소년이 팔을 잡아 주어 목숨을 건졌지요."
그리스인은 그 뒤로 작업장에서 살람 메메드를 마주칠 때 마다 말을 섞기도 했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 투르크 노예는 보이지 않았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의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남자의 말에 발레트의 머리 속에서 무언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 투르크인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리스인은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며 20년 전을 떠올리려 했다.
"글쎄요. 투르크인들이 몰타로 갔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생김새라던가 어떤 특징이라도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음.... 오래전 일이라 얼굴은 가물가물해요. 키가 컸고 투르크인치고는 피부가 하얀 편이었어요."
남자의 말을 들으며 발레트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시종이 투르크인이라면?'
연결되지 않았던 정찰병과의 고리가 한순간 맞춰지는 것 같았다. 발레트는 로메가스에게 시종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디 출신인지, 보키아 집안에서 어떻게 일하게 됐는지 시종에 대한 모든 정보가 필요했다. 로메가스는 신이 나서 재빨리 크레누의 집을 나섰다. 발레트에 대한 충성심은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그였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나요?"
그리스인이 자리를 뜬 후 등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디아는 어느새 발레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크레누를 비롯한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오늘 있었던 축제 이야기에 모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디아, 이 칼이 결정적인 단서가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칼을 맞은 것이 도움이 될..."
발레트는 높아진 목소리로 얘기를 하다 순간 아차하며 말을 끊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며칠 전과는 달리 동요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찰병이 떨어뜨리고 간 칼을 차분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5년 전, 우리 마을은 해적의 습격을 받았어요... 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였어요... 어머니는 오빠와 저를 보호하려다 해적의 칼을 맞았고... 오빠는... 오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해요... 무조건 앞만 보고 뛰라며 소리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어요. 무슨 정신으로 바닷가로 뛰어갔는지 아직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해적들이 들고 있었던 것도 이런 칼이었어요. 이 칼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어떤 위험을 감지했었던 것 같아요."
나디아는 비교적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해졌다. 나디아는 재빨리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치고는 양손을 다시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발레트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강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과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디아,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발레트의 진심 어린 한마디에 나디아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발레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초록빛 눈망울은 밤하늘처럼 고요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것과 같은 평온함이었다. 두 사람은 잠잠히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름밤의 더운 기운과 사뭇 다른 공기가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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