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타

발레타 1-1

불규칙한 해안선 너머로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돌출된 스케베라스산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모래색과 가까운 거친 느낌의 산, 바다와 함께 지난 세월을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성 안나호 갑판에 서서 발레트는 그 산을 응시했다. 로도스 섬을 나온 후 8년간의 방랑끝에 간신히 오게 된 곳.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던 비통한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로도스 공방전 이후, 1530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몰타 섬의 영주권을 내어 주기까지 성 요한 기사단은 8년간 지중해상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시칠리아 섬을 위한 보루로 자신들을 이용하는 것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근거지없이 더 이상 기사단이 존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사단장 필리프 드 릴라당은 카를 5세의 정치적 이용이 뻔히 보이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사단을 이끌고 지중해의 중앙 몰타로 향했다.
발레트는 로도스 섬을 나오던 날을 떠올렸다. 오스만의 쉴레이만과 기사단장 릴라당간의 긴 협상 끝에 성 요한 기사단은 200년간 그들이 지켰던 곳을 떠났다. 둔탁한 북소리가 울리고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성 요한 기사단원들은 십자가 깃발을 들고 당당히 걸었다. 그들은 끝까지 위엄을 잃지 않았고 오스만 군대는 예우를 보였다.
눈을 감은 채 몇 분이 지났을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눈이 떠지고 과거는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뒤를 돌아보니 기사단장 릴라당이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나.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더군."
"아, 잠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장님."

발레트는 자신의 생각이 들킨 것 마냥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릴라당은 바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말을 이어갔다.

"8년 만이군."
"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 로도스를 떠나온지 말이야."

발레트는 대답 대신 릴라당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코와 그 밑으로 우직하게 닫힌 입술이 보였다.
강인한 인상 뒤로 그의 눈은 바다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했다.

"앞으로 더 힘들어 질걸세."
"알고 있습니다."
"우린 뒤로 물러날 곳이 없네, 반드시 이 섬을 지켜내야만 해. 그 어느 곳에서도 이제 대의는 찾아볼 수 없네. 신념은 사라졌어. 군주들은 오직 영토 확장에만 관심이 있고 지중해는 그들 머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야. 우리는 지금 지중해의 한복판으로 가고 있는 걸세. 오스만의 끝없는 야망을 여기서 끊어야 하네."

로도스 섬을 떠난 후 릴라당은 유럽의 군주들을 만나 기사단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해 주기를 청원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군수 물자를 조달해 주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군주들은 지중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루살렘 해방을 위해 십자가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던 신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1500년대 초의 유럽 군주들은 성지 탈환같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고리타분하게 여겼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왕권 강화였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도 성 요한 기사단은 로도스 섬 공방전 이후에도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지 않고 8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근거지를 찾아 헤맸다. 그들은 기사 정신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봉건 시대 마지막 기사들이었다.
십자가 앞에 맹세한 신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발레트는 릴라당의 강인한 옆얼굴을 응시하며 힘주어 말했다.

"성 요한 기사단에 제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몰타는 로도스와 같지 않을 겁니다."

릴라당은 발레트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흰 수염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8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증명하듯 피곤하고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름 잡힌 두 눈에선 여전히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자 릴라당은 발레트의 곁을 떠났다.
뱃머리는 마르삼세트항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스케베라스산 옆, 움푹 들어간 모양의 마르삼세트는 지중해의 모든 배들이 모이는 몰타 최대의 항구였다. 크고 작은 상선들과 돛이 여러 개인 대형 갈레온선이 보였다.
발레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덥지근한 지중해의 공기가 그의 폐 깊숙이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몰타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성 안나호는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멈춰섰다. 발레트는 지중해의 중앙, 몰타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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