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될 줄 알았지

퇴사 후 남미 여행, 과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까?

약 오년 하고도 반년을 일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 두게 되었다. (뭐, 짤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첫 직장인데다 나는 유난히 모난 성격이라 지난 오년 반은 그야말로 좌충우돌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전세 자금으로 받은 사내 대출 상환만 마무리되면 퇴사를 하리라 벼르고 있던 터였다.

 

마침 사업부 철수로 본사 발령이 떨어지면서 이때다 싶어 1등으로 퇴사 의사를 밝혔다.

말이 씨가 되었다며 S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실은 웃펐지만) 어쩜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가 있을까?

스스로 그만 둘 용기는 없으니, 제발 회사가 날 좀 짤라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하던 나였다.

 

마음 같아선 한 2년 세계일주라도 다녀오면 좋겠지만,

워낙 박봉이었던지라 퇴직금도 쬐끄만해서 남은 빚을 갚고 나니 별로 남는 돈도 없었다.

앞으로 몇 년 안엔 결혼도 하고 싶으니, 빚을 낼 수도 없고.

 

그래도 이런 하늘이 내린 기회를 버릴 순 없어서

그토록 염원하던 아프리카와 남미, 교토 한 달 살기를 두고 고민하던 중에

얼마 전 모로코에 남편과 다녀온 친구가 여자 혼자는 좀 성가실 것 같다, 라고 해서

남미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남미라고 성가시지 않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나름 열심히 여행을 다녔는데 아직 아메리카 대륙을 밟아보지 못한 터,

트럼트 할아버지 때문에 입국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뉴욕도 들르기로 했다.

 

2014년 터키로 떠나던 날, 라운지에서 꽃보다 청춘 페루편을 보면서

언젠가는 페루도 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정말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 말은 씨가 되니 열심히 말하고 다니자.

다음은 아프리카, 다음은 아프리카, 다음은 아프리카.

 

아무튼 조금 쉬다가 여행 준비를 해서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나! 네상에나! 남미 여행의 성수기는 12월에서 2월 사이, 즉 여름 시즌이란다.

제일 가고 싶은 우유니 사막의 우기는 3월까지라고 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부랴부랴 카약을 돌리고 서점에서 가이드북 두 권을 사고 남미 여행 카페에 가입했다.

일단 급한 건 볼리비아 비자를 준비해야 하는 건데, 맙소사, 황열병 예방 접종이 필수라고?

그것도 출국 최소 10일 전에는 접종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안 맞으면 볼리비아에 못 간다고.

 

니들 포비아가 있는 나는 남미의 소매치기나 강도보다 주사가 더 무섭다.

그래도 어쩌겠어, 우유니를 위해서라면 까짓거 기절 좀 하면 되지, 뭐.

동료 디자이너는 "에디터님은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주사에 대한 공포를 이겼네요" 라며 웃었다.

 

남들은 몇 달 간 준비해서 떠나는 남미 여행을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준비해서 떠나려고 한다.

나는 이제 스물다섯 살이 아니어서 여기저기 허락 받을 사람도 많았고

또 원래도 그랬지만 이젠 나이 인센티브까지 더해서 체력이 완전 바닥인지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힘들었던 회사 생활이지만, 오늘 문득 블로그를 보다 보니

회사에 들어오기 전보다 회사를 다니면서 다녀온 여행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고맙다, 덕분에 많은 곳을 다닐 수 있어서.

마지막 선물로 이렇게 두근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줘서 지-인짜 고맙다!

(나는 곧잘 여행 다니려고 일한다는 말을 하곤 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다)

 

엄마는 "넌 커서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라며 혀를 찼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된 것도 기가 찰 텐데,

퇴직금을 탈탈 털어 여행을 가겠다는 서른 두 살 딸을 쉬이 이해해준 부모님께 감사를 전한다.

잘난 딸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뭐라도 되지 않겠냐며, 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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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아기 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영혼아기 2017. 06/19

마흔이 훌쩍 넘은 저로서는 지금 님의 결정에 응원합니다. 스스로 발목잡는 구질구질한 변명이 늘기 전에 잘 다녀오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