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무늬

#6. 눈길이 수그러들기까지

 

스페인에서는 어딜 가나 성당이 눈에 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더라도 어느 수염 희끗한 수도사가 문을 열고 맞이해줄 것만 같은 예배당이 적어도 하나쯤은 있다. 잠시 잊고 있던 신의 존재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그런 곳 말이다. 어쩌면 지난 이들의 기도가 곳곳에 켜켜이 쌓여 그 고요의 깊이를 더하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이른 아침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성상과 성화,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마주할 때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대도시의 큰 성당은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다. 가령 세비야 대성당 같은 곳이 그렇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줄을 길게 늘어서서 한시도 쉼 없이 들어오고 빠지는 인파에 한 번 휩쓸리고 나면 피로도 금세 쌓일뿐더러 성당도 마음 편히 둘러보기가 어렵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명성에 못 이겨 그다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는 식이다. 누구나 보고 간다고들 하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관광객이 붐비는 성당 근처에는 항상 적선을 구하는 이가 있다.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모른 체 하는데, 불편한 감정은 여간 피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투명한 눈길이 내 뒷덜미를 따라 어깨와 등, 그림자에까지 미끄러진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 시선을 외면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예수님이라면 그 10유로 내외의 입장료를 서슴없이 그들에게 건넸을 거란 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당에서 그 수입으로 이웃을 섬기는 여러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게다. 그럼에도 값나가는 재화로 둘러싸인 성당 그 바로 바깥에 헐벗고 굶주린 이가 있는 현장은 어딘가 께름칙하다. 사실 우리 일상에서도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알고 보면 이건 좀 이상하다 싶은, 그럼에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존재하는 것들 말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 따라 저 멀리서 풍경의 구도만을 보거나 차라리 눈을 잠시 돌리고 싶을 때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수사는 누더기 옷에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며 제 발로 가난을 택했다. 소유에 대한 진정한 복음의 정신은 무엇인가에 하는 치열한 고민을 삶으로 풀어내려 한 것이다. 아마 가난한 이웃과 함께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물음과도 멀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교황 요한 22세는 교황청의 사치와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프란치스코회를 이단으로 몰았다. 어쩌면 프란치스코 수사의 청빈을 질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신앙을 죄여오는 그 불편함에 몇날며칠 잠도 잘 못 이뤘을지도.

 

언제부턴가 세상을 바라본다는 표현보다는 나만의 성을 쌓는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따라 자재를 골라내고 다듬으며 한층 한층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거다. 아마 진짜 세상을 만나 그 전체를 조망할 일은 없을 거다. 볼 수 있다 해도 애써 올린 성을 허물 일도 말이다.

 

다만 가끔 성 균형이 애초에 살짝 맞지 않았음을 기억해낼 때가 있다. 작으면 작을수록 외려 더욱 눈에 도드라져 보일 때 말이다. 그럴 땐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성을 완전히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새로 지어보거나, 흔들림을 애써 무시하며 그 기울어진 대로 계속 쌓아 올라가거나. 어쩌면 이도저도 못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져 시간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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