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무늬

#5. 파도의 리듬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일상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마치 어느 작은 극장에 홀로 어둠 속에 앉아 내 이야기가 은막에 비추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흑백 무성영화로 말이다. 얼마 전, 해안가를 따라 자전거 산책을 나섰다. 주변 풍경을 이리저리 훑어보다 천사가 보였다. 그는 어느 높고 하얀 벽 위에 서서 땅을 굽어보고 있었다.

 

입구에는 두 개의 여인 석상이 자리했다. 그 표정만 보고도 맞게 찾아왔음을 알았다. 바로 공동묘지였다. 그저 궁금해서 들르는 게 실례가 아닐까 싶어 조심히 걸음을 옮기며 들어섰다. 그곳에는 묘지기 아저씨가 가지를 치며 홀로 한낮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벽 하나를 넘어섰을 뿐인데, 시간이 묘비를 따라 지면에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다. 햇살 따스한 봄날, 주택가 바로 옆 공원에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잠들었다.

 

누구나 이렇게 죽고 잊힌다는 걸 새삼 떠올렸다. 등 뒤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던 불안이 잠시 자취를 감춘다. 항상 따라붙어 다녀, 그것이 불안이었다는 것마저 가끔 잊곤 하는,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결말로 나를 떠나거나 내가 떠나보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치 저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가 해변에 다다르면 푸른 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라스팔마스로 온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다녀온다. 장을 봐온다. 가끔 미겔과 외식을 한다. 해변 산보도 종종 나선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상이 도시의 풍경으로 자리잡아간다. 말과 행동, 주변 길과 사물이 낯섦을 잃어간다.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 속내를 잘 모르지만, 삶이 다시 낯설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미겔에게 잠시 섬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스페인 남부도시와 리스본, 포르토를 둘러보겠다며. 섬이 그리울 거라고 덧붙였다. 세비야로 떠나는 점심, 미겔이 라자냐륾 만들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빵을 하나 싸줬다. 세비야에 도착하면 늦은 밤이라 먹을거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단다. 비행기에서든 세비야 숙소에서든 챙겨 먹으란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삶이 멀어지면서 가까워진다. 익숙해진 불안을 다시금 낯설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에 미겔은 나를 서퍼(Surfer)라고 불렀다. 인생을 서퍼처럼 산다고, 흐름에 몸을 내맡기며 사는 것 같다고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가 싶었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모래사장에 떠밀릴 때까지는 끝없이 일렁일 게다.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는, 그러면서 또 새로운 불안을 찾아가는 그 리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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