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9

592

 

 

 

싸움보단 말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의미한 폭력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하게도 나는 평화주의자이기에 평화롭게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평화 최고. 혼돈은 멀리하고 평화를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평화고 뭐고 없구나.”

 

쓰러져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단검을 집어 넣었다.

 

“카일 씨...왜 그렇게 강해요? 591에서 592로 넘어갔다고 느닷없이 제가 져있잖아요?”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가 남는 그런 기묘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지금은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보다 일기에도 네가 지게 되어있는 거야? 아니면 지금 내가 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일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 일기의 가이드라인을 생각해보면 탈선의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우주로 날아가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과거로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래도 레인은 원망을 하거나 한숨을 짓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레인의 성격상 오히려 일이 엉망으로 되었을 때 수습하는 걸 더 좋아하는 기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쓴 일기도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네. 그래도 지금은 내가 결정한 것에 따라가야지. 그보다 아이리스는 다 완치가 되었다면서?”

 

“카렌 씨는요?”

 

카렌? 아...

그렇지. 어째서 카렌은 활동하지 않는 이유라고 하면...사춘기라고 해야 하나? 자립심이 너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선 보이지 않은 게 흠이다. 돌아갈 장소가 또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어차피 내 복제품과 비슷하기도 하고,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일단 복수에 대한 건 진심이든 아니든 접어둬. 지금 이렇게 해도 별 다른 이득은 없어.”

 

“이익중심으로 움직이는 건가요?”

 

“아니. 평화중심이지.”

 

내 마음속의 1순위는 언제나 평화다. 그런데 현실은 평화가 왜...

자괴감이 든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라니...

 

“이미 미래는 뒤틀리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리제로트가 죽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을 때, 오히려 리제로트가 안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있으니까 죽거나 심하면 침을 흘리겠지.”

 

“최소와 최대가 바뀌었지 않았나요?”

 

이 말버릇 레시아에게 전염된 건가. 빨리 고쳐야겠다. 리베리티아 고원의 특유한 바람은 300년이 지나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곳은 개발도중 청정구역이라고 지정한 모양이다. 사실 청정구역인지 다른 마법적인 요인으로 손을 대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쾌하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뒤로한 채, 뒤에서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리제로트에게 돌아갔다.

 

“너는 아까 내가 위험했을 때 도와주지도 않더라?”

 

“해결사가 해야 하는 일을 의뢰인이 꼭 도와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도 협조나 도움은 줘야 할 거 아냐. 방금 전에 레인이 던졌던 마법공학 유탄을 다른 시공간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이 일대가 지금 다 사라졌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은 기억도 없고,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라 초능력자라서요.”

 

초능력자라고 해도 마나는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의 길을 좀 가란 말이다.

 

“뭐 어떻게든 위기는 넘겼으니 상관 없겠지.”

 

리제로트는 차를 놓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푸른색의 컬러렌즈로 자신의 초능력을 봉인하지만, 어느 사이에 짙은 보라 빛의 눈으로 돌아와있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저를 과거로 데려다 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보라 빛의 눈은 혹시라도 정신오염이 먹힐 거 같아서?”

 

“칫.”

 

인간성이 어디로 간 거냐 넌...

 

“여전히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괴하네. 뭐, 그래도 너의 초능력은 강력한 최면술일 뿐이니까. 결국 망각의 샘물을 먹이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너의 인형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나는 이미 인외의 존재로 되어가는 중이라서, 명계에서 퍼 올리는 망각의 샘물이 아닌 이상 잘 듣지도 않을 걸?”

 

한 때, 내가 만약에 신이 된다면. 이 지상을 평화롭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쨌든 슬슬 이곳도 정리할 거니까 어서 돌아가기나 해. 라 캄베리의 영애는 자신의 일정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되는 거야?”

 

“어차피 오늘 일정은 없는 걸요. 오늘 하루 디즈니에서 나오는 쥐나 보면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싶기도 하고요. 거추장스러운 남자 둘이서 이리저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제가 보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서 문제네요.”

 

“거기서 선정적이란 단어가 왜 나와?”

 

그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잘도 봐온 주제에.

 

“아이고...삭신이야...이럴 줄 알았으면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거 멸망의 지름길이니까 가져오지 말아줄래?”

 

레인의 섬뜩한 소리가 내 귀에 흘러가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서 위험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마법공학 수류탄을 레인이 직접 던지는 바람에, 지도가 완전히 바뀔 뻔했지만, 지금은 우주 어딘가 터지면서 안전한 처리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생각을 해보면 모든 위험한 것들은 우주 밖으로 내던지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블랙홀에 내던지는 방법도 생각해봐야겠다.

물론 블랙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그러면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운명을 바꾼다는 건 모든 걸 바꾼다는 의미야.”

 

나는 주변이 황폐해진 리베리티아 고원으로부터 손을 뻗어 힘을 집중했다.

 

“모든 걸 바꾼다는 건 재창세와 같지. 그걸 원하는 건 레이베리아도 그렇겠지만, 사실상 이 힘은 창조주와 거의 같다고 봐도 괜찮아. 레이베리아는 창조주의 근원 중 일부인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뿐이고,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재창세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거지. 내 모든 힘을 뽑아서 빌려 쓰기 위함이기도 해.”

 

“그러면 당신이 신이 된다면?”

 

“아니. 나는 결국 반신이 한계야. 기껏해야 최대로 할 수 있는 게 엉망인 걸 고치거나, 이 세상에 있는 물품을 보고 이해해야 겨우 제작할 수 있는 정도지. 그 이외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로 나누는 귀찮은 작업까지 해야 하고.”

 

서서히 자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리베리티아 고원을 바라보며, 리제로트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유용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을 손쉽게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그거야 아직 내가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인간이었다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인간의 이해 범위 밖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를 하겠어?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지금 이렇게 수복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솔직히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길을 어느 정도 걸어봤다면 가능한 마법이다. 이런 광범위한 공간을 모두 되돌리기 위해선 거대한 마나가 필요하긴 해도, 마나만 받쳐준다면 이런 일은 마법사라면 가능하단 소리지.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영역에 발자국을 살짝 가져다 댔는데, 안 보이는 벽에 의해 선만 아주 살짝 밟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만일 내가 신이 되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그만두고 지루할 만큼 평화를 가지고 사는 건데.

 

“아냐. 아무것도. 그러니까 결국 너의 의뢰를 해결하려면 모든 걸 다 바꿔야 해.”

 

“모든 걸 다 바꾼다면?”

 

“너의 과거로 가야지.”

 

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와 상반된 리제로트의 얼굴은 마치 썩은 달걀을 본 눈빛이었다. 아니 썩은 달걀을 봐도 지금 저 표정보단 더 좋겠지.

 

“당신 정말 변태네요.”

 

“변태라니. 내가 곤충도 아니고 탈피하지 않는다고?”

 

“하아...저는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닐 텐데요!”

 

헉! 화났어! 무서워!

월터도 주먹을 들었어! 날 때리려고 하다니! 무서워!

 

“그런데? 각본가의 각본을 찢자는 건요?”

 

“아. 그거? 너무 위험해서. 나란 사람은 또 온순하고 평화적이잖아?”

 

“온순과 평화란 단어는 당신에게 절대로 안 어울려요. 그리고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죠? 그보다 제 과거로 가서 뭘 캐낼 생각이에요?”

 

“과거로 가서 지금의 ‘너’를 지울 거야.”

 

어마어마한 시간차를 뚫고 겨우 “네?”라고 대답한 리제로트의 말. 절망이 담겨있는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 서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어떤 사람에게 “지금 당장 당신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 겁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다고 “오! 예!”라고 대답하겠는가?

 

자신의 모든 삶을 부정하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월터가 스스로 움직였다.

 

-슈아악!

 

어마어마한 발차기가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마법방패<Magic Shield>를 전개해 막아내고 있는 동안, 날카로운 외침이 내 귀를 쑤셨다.

 

“어째서요! 당신은 제 편이 아닌가요!”

 

“당연히 너의 편이지. 너는 운명을 거부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월터의 거대한 주먹이 마법방패를 뒤흔들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의 말도, 지금 모든 걸 버리면 우리가 보호해주겠다는 간접적인 메시지였어. 하지만 너는 거부를 했지. 내가 말했잖아? 너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눈에 띄는 거라고, 결국 레이베리아에게 찍힌 거고 각본에 쓰여진 거야.”

 

그리고...그 각본의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각본이든 내 일기장마저 무시하고 다른 선택지를 골랐어. 그 뜻은 결국 이 시간대는 원래 없는 시간대나 마찬가지야!”

 

월터의 공격이 멈췄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리제로트는 자신의 존재가 허황된 가짜라는 사실에, 그만 무릎을 꿇고 넋을 놓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은 내 가설에 불과하지만, 너를 데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개판이 벌어졌길래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어. 유랑극단이 시간을 숨기고 공간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겨우겨우 해결했다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일기장마저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거든. 그리고...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슬슬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엘티노스는 자서전인 마냥 일기 같은 걸 잡화점에 남기고 있어도.

나는 단 한번도 내 일기장을 잡화점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남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내 전용 아공간에만 일기장을 넣고 다닌다고?”

 

그래. 처음부터 레인이 읽은 일기장은 거짓이었다.

=============================================================================================

환상계주는 급커브를 시전하였다!

칭찬하기

작가 프로필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