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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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자장가를 불렀을 때, 레시아와 시나의 정신이 앞들과 뒷동산으로 출타하는 동안, 운명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생명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데. 그걸 자연의 섭리라고 보고 운명이라고 한다. 죽음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네크로멘서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는데 시체로 되살아나버린 경우에는, 그것 또한 그 시체의 운명인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운명 또한 무질서한 무언가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운명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면 운명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의뢰는...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저 앞에 당돌하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소녀.

리제로트에게 받은 의뢰에 대해 정확한 내용으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너를 보자고 한 이유야 의뢰 때문이지.”

 

“그래요? 해결할 수 있나요?”

 

그리고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켜서 틈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짧은 시간.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아니.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대신...”

 

정확한 내용을 수정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뭐라고요?”

 

어처구니 없어서 한숨이 입 밖으로 출타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지만,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빠르게 치고 나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의뢰는 사실상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거든. 그저 이야기 책에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게 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나의 말에 리제로트는 째려보며 대답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죽어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도 맞지?”

 

“당신은 지금 살아있잖아요.”

 

“아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태 새벽부터 고찰한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기로 하자.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는 이유야, 원래 나는 이 평행차원에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야.”

 

는 거짓말이고 사실 그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잡화점의 대마력이 방어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시공간은 본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지, 하지만 과거에도 각본가의 책에 적혀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존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본래 없었던 거야. 그거 있잖아. 죽음의 기사 4명 중에 하나가 왠 이상한 차원에 떨어져서 영문도 모르고 악마와 싸우는 그런 이야기. 아마 내가 케이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지.”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난 이 차원의 사람이 아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려고 절 이곳에 불러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한 거에요?!”

 

“당연하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만 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소망 하나는 들어줄게. 그리고 나는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소망 하나가 분명.

리제로트가 원하는 의뢰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뭐든지요?”

 

“아. 그렇다고 높은 수위의 기묘한 소원은 안 받아줘. 노블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19세 마크가 없다고?”

 

리제로트가 원하는 소망 하나를 들춰내는 것도 정말 어렵구나. 소녀의 마음이라는 건 이런 건가? 내가 잡화점 멤버의 장난으로 소녀가 되어본 적은 있긴 하지만, 음...지금은 무슨 심상인지 까먹었네.

 

“그럼...”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내적갈등에도 입을 연다는 그 자체가 결정했다는 소리니까...

 

“전 죽기 싫어요. 그러니...살려주세요.”

 

과연.

운명에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건가.

 

“방법이야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아.”

 

저런 소망을 듣고 절대로 공짜로 해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살아나는 거니까 최대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잃는 거라면?”

 

“우선 루니아 누나의 말처럼 그 힘을 버려야겠지.”

 

“제 초능력이요?”

 

“아. 물리적으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순하게 봉인하는 절차니까. 위급한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만 잠깐 발동하도록 만들 거야.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발현된 초능력을 마법적으로 봉인한다는 그 자체는 개념이 달라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힘은 근본적으로 마나를 뛰어넘은 자원이다. 그러니 봉인마법과 이미지만 어떻게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죠? 힘이 있어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잠깐 생각을 하고 나는 한숨을 지었다.

 

“애초에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게 아냐. 오히려 힘이 있든 없든 운명은 존재하지. 아니, 난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니까 종착지라고 표현을 하자. 어쨌든 그 끝에 다다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힘이 없어서도 있지만,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 힘이 있든 없든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삼손도 대머리로 죽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넌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힘이라는 그건 어떤 것도 상징할 수 있지. 라 캄베리의 영애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유랑극단의 간부이기도 하고, 너의 초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내 정신방어마저도 흔들어버릴 정도야. 게다가 아이리스를 건드려서 레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했고, 레이베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살려주다가 놓친 이후로, 나와 이렇게 몰래 만나면서 레이베리아에게도 죽을 위기에 놓여졌다. 결국 각본가는 너의 죽음에 대한 각본을 썼을 테고, 너는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지. 맞잖아?”

 

“마, 맞아요.”

 

“각본가의 각본은 또 언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각본을 적기 전에 내용을 본 거 같으니까. 지금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이네.”

 

내가 레이베리아라면 배신자에게 어떤 각본을 써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나라면 깃털로 간지럼을 태워서 죽였을 거 같은데...

 

“당신. 저질이군요.”

 

“아니. 남의 독백을 읽고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사생활침해라는 거 몰라? 나는 뭐 상상의 자유도 없나? 자유도도 없는 GTO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O가 아니라 A겠죠...아무튼 절 볼 때마다 그런 상상만 했어요? 변태.”

 

“그런 상상만이라니. 이 상상은 지금 처음 하는 거고, 앞으로는 안 할 상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형벌 중에 간지럼은 예로부터 내려온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 중 하나란 말이다. 염소가 네 발을 지속적으로 핥아본 적 없잖아?”

 

“당신도 없잖아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궤변을 늘어뜨려도 그 사이에 포인트만 집어서 공격을 하다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철한 아이였다.

 

“뭐 아무튼. 자세히 어떤 죽음을 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쓰여졌겠지. 아니면 지금 쓰고 있거나, 아니면 슬럼프가 와서 마감이 다가와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거나. 그러다가 담당자가 찾아와서 으름장을...아니, 이건 너무 갔구나.”

 

“하아...이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미래가 걸렸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 바보에게 실례군.”

 

“바보에게 실례인가요...”

 

지쳤는지 태클도 밍밍하게 들어오는군. 즐거운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자. 어쨌든 바보에게 미안한 내 입은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어쨌든, 그런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예를 들어 죽는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거나...”

 

“그거 영원히 죽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진실을 덧씌우는 거지.”

 

“그런 능력은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말했잖아.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예를 들자면...그래,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거나.”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는 방법을 상상이라도 했겠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막강해서 그럴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여신 중에서 가장 강력해진 레이베리아의 힘이 깃든 각본을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일 터.

 

“그러니. 각본을 찢고 자유가 되면, 불안정한 운명 속에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불가능해요. 다른 방법은 있나요?”

 

여전히 부정하는 리제로트. 그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있지. 당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야.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리제로트는 날 악인 취급하고 있을까? 심각하게 경계를 하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조심스레 작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안한 것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뭐죠?”

 

“가장 높은 건 당연히...”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각본을 찢고 불태우는 일 밖에 없지.”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했는지 리제로트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리제로트의 동요는 찻잔 하나를 깨먹고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거 레이베리아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나지막하게 웃은 나는 지금쯤 리제로트의 옆머리로 슬쩍 손을 뻗었다.

 

“다, 당신 바보에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점점 가까이 오는 거에요! 설마 소녀의 첫 키스라도 뺏을 작정으로...!

 

-파바박!

 

손에 따끔한 통증이 도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등에 박혀있는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꽂혀있는 상황.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너의 첫 키스를 가져가는 거냐? 지금 당장 살기를 품고 암살하려는 녀석부터 막아야지.

 

“내 한숨이 너의 말 때문에 가출해버렸잖아. 책임져.”

 

“채, 책임을 지라뇨!”

 

“어라? 카일 씨?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암살하려던 녀석이 태연하게 내가 뭘 하는지부터 묻는 거냐? 그리고, 지금 리제로트를 죽이지는 마라.”

 

내 말에 어깨를 으슥이던 레인은 감정이 알 수 없는 가면으로 들이댔다. 그보다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지금 덥지도 않나?

 

“리제로트를 죽이지 말라는 그 말은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가요?”

 

“이용가치가 아니라 의뢰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의 의뢰를 받고 정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있냐?”

 

“없죠.”

 

“그거 자랑 아니거든?”

 

가늠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뭐, 한번 잘 막아보세요? 어차피 피도 흘리지 않는 걸로 봐선, 카일 씨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모양인데 말이죠?”

 

“뭐. 인정은 하지. 그래도...신은 아니잖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은 있어도, 신의 영역에 돌입하는 인간은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레인과 어쩔 수 없이 한판 벌여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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