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사냥꾼

다샴

※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샴 

1. 악마들의 총괄 책임자, 악령들의 제왕.

2. 날씨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 질병과 재난을 몰아내었다고 함. 고대에서 숭배받았음.

                                                 

소년은 동전 한 닢으로 강을 건넜고 얕은 냇가에서 제 발로 걸어와 마을에 당도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빨래하고 물긷던 여자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 그를 흘끔거렸다. 

 한 사람이 여자들의 틈에서부터 잽싸게 빠져나가 반쯤 허물어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작은 여자 하나가 나왔다. 두 손으로는 넓적한 그릇을 받쳐든 채로, 다샴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다. 옷가지를 널어 말리던 아낙 하나가 물가에서 빨래하던 여자를 향해 황급히 눈짓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가지고 오던 소녀의 뒷통수를 갈겼다. 여자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빼앗고 소녀를 꾸짖었다. 아낙들은 사뭇 일상적인 광경을 대하듯 모른 척 빨래에만 몰두했다. 다샴 같은 탁발승이 마을에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생존에 지친 여자들은 그악스러웠고 경계심이 강했다. 낯선 승려에게 보시할 여력이 없었다. 다샴은 직감적으로 다른 마을로 자리를 옮겨야 함을 알았다. 모래 바람 날리는 마을은 다들 비슷비슷했으나 그 안의 양상과 처지는 제각기 달랐다. 긴 걸음을 했건만, 이번에도 수확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다샴은 집 몇 채를 돌며 구걸하다가 종교를 신봉하는 노인 두어 명으로부터 음식 약간을 얻었고 그들이 내어준 헛간에서 잠이 들었다. 헛간은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에 나 있었다. 

 이리의 울부짖음 같은 핏빛 메아리가 공기를 찢었다. 

 다샴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이질적이고 기묘한 느낌이 신경을 흔들었다. 목덜미까지 소름이 쭉 끼쳤다. 낯선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분명히 아니었다. 

다샴은 헛간 문을 열려 했지만 빗장은 바깥에서 잠겨져 있어 허사였다. 낯선 소년이 밤을 틈타 도둑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노인들의 까닭 없는 경계심 탓이었다. 졸지에 갇힌 꼴이 된 다샴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오래된 경첩이 내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적을 매단 달빛 아래 기묘하게 번득이는 남자들의 흰 동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놀라지 말게. 

 

무리의 수장인 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내색하지 않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물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특정한 대가를 바라고 찾아왔음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임을 알았다. 

 수장은 직접적인 대답을 꺼렸다. 따라오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다샴을 향해 눈짓했는데, 노인의 주위에 기립한 남자들의 눈과 자세는 일체의 거절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다샴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순수한 의도에서 노인을 따라갔을 것이었다. 다샴은 횃불을 든 남자들의 선두에 선 수장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불빛이 마을의 끝편,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었고, 곧이어 바닥에 깔린 참혹한 광경을 비추었다. 돼지와 소, 닭과 같은 갖은 가축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숲 속에는 악령들이 살고 있네. 이 악령들의 왕은 사악한 요정인데, 그는 악령들을 마을에 풀어놓지 않는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산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네. 그게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일이로군. 

 

곧이어 남자들이 주둥이 부분을 단단히 묶은 포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능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다샴은 답변을 요구하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남자들에게 물었다.

 

잘 데리고 왔느냐? 착오는 없었고?

 

예, 어르신. 원하신다면 보여드릴까요?

 

노인은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어린 계집애면 충분해. 지금쯤이면 잠에 곯아떨어졌겠느니....

 

남자들이 포대를 이끌고 숲 가까이로 갔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포대 안에 갇힌 제물이 꿈틀거리고, 주위의 것을 발로 마구 차고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호소하고 애원하며 한바탕 난동을 피운 것이었다. 남자들이 포대 위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짓밟았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귓속을 파고들었다. 

 

...꼭 저렇게 해야겠습니까? 제가 숲 속으로 들어가 악령들의 왕과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무고한 사람은 풀어주시지요. 

 

다샴이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서 굳이 이 밤중에 저를 깨워 이곳으로 함께 온 것은 제게 이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어제 이 마을에 와 이곳 분들의 후의를 얻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일은 승려가 아닌 다른 누가 하겠습니까?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나 나한테나 안된 일이지만, 오늘의 제물은 꼭 바쳐야 하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한테 한 번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자네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거야. 오늘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악령을 부리는 그 요정이 진노하고 말게야. 저기 붉은 달이 뜬 게 보이나? 오늘이 바로 그날일세. 자네는 재수 없는 시기에 우리 마을에 온 셈이야. 

 

가축으로 제물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요정은 사람을 선호한다네. 그것도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또 우리가 어디 가축을 주어버릴 형편인가. 그게 전부 우리의 소중한 재산일세. 저게 모두 낭비라는 말이야. 

 

다샴의 눈 아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제가 저 사람 대신 제물로 가지요.

 

난데없는 파격에 노인은 당황했다. 안될 것은 없었지만...

 

난 요정을 쫓아낼 경이나 읊어주기 바랐지 자네한테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아. 자네는 나이 어리나 승려이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악령을 쫓는 신통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애먼 목숨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 아닙니까? 내일 같은 시각까지 차분히 기다려 보시지요. 제가 그리 하겠습니다. 

 

어르신, 하는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둘 사이의 대화를 끊었다. 

 

붉은 달이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악령들이 찾아올 시간이 지났어요. 조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물을 던져넣을까요? 

 

노인은 다샴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짙고 검은 눈은 일체의 빛을 반사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 것처럼 반들거렸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요정이 마음을 바꿨군. 같은 시간에 이 장소에서 보겠네. 

 

 다샴은 짧게 눈을 붙였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헛간에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옮길 것을 권유 받았다. 사람들의 태도와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다샴은 그들에게서 희망과 기대감을 보았고, 번들거리는 욕망 또한 읽었다. 횃불을 든 남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노인의 눈이 그러했다. 

 그가 지내던 헛간의 아래 틈은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너비가 있어서 캄캄한 와중에도 흘러가는 물결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이 일을 끝낸 빨래터, 다샴이 건너온 냇물은 거대한 강과 이어져 있었다. 다샴은 한가히 앉아 있을 때나 그들을 위해 부적을 쓰고 처방을 한 후에면 그 강을 생각하곤 했다. 

 그는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물살이 칼로 자른 듯 깨끗이 끊어졌다. 

 다샴이 노인의 집에서 함께 밥상을 받을 때, 작은 여자 아이는 부엌 안에서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샴이 혼자 남자 소녀는 쭈뼛대며 그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다샴의 옷자락을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고 그는 순순히 따라왔다. 소녀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들릴락말락했다. 소녀가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자 다샴은 그가 전날 밤의 희생물로 지목되었던 아이였음을 알았다. 

 

스님, 저는 오늘이 두렵고 내일이 두렵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나 현실을 자각하면 안도감이 들어야 마땅할 터인데, 실제를 인지하자마자 꿈 속과는 다른 종류의 또다른 지옥이 밀려옵니다. 꿈에서도 괴롭고 현실에서도 괴롭습니다.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손을 비틀며 흐느꼈다. 아이의 피부에는 온통 검보라색과 누런색의 멍이 피어 있었다. 

 

제 친척들은 제가 제물로 선별되었을 때도 군말 없이 저를 넘기신 분들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저는 결국 오갈 데 없이 친척에게 몸 하나를 의탁하는 어린 여자아이일 뿐입니다. 그 분들에게 저는 쓸모가 없어요. 저를 팔아버리거나 내쫓으려는 생각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스님, 기억하시나요? 스님이 오신 날 저는 음식을 들고 스님께 가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스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인심 사나운 이곳 사람들도 후한 대우를 베풀어주실 겁니다. 그때는 제가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스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제가 스님의 사당을 차려 대대로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아이를 축복하고, 그가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다샴에게 조개껍질이며 소라기둥을 받은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정신없이 손 안에 쥔 것을 매만지고 들여다보던 아이가 물었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연유로 방랑하는 중이 되셨나요?

 

다샴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것은 소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제 어미는 간음하여 그 죄질이 더럽다고 하여 사람들이 쫓아냈습니다. 어미가 통정하여 낳은 아이인 저를, 사람들은 경멸하지요. 이와 같은 사건이 10년 전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 이곳에 붙어있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더욱 무자비해서, 간음한 남자는 추방하고 여자는 죽여 숲 속 깊은 곳에 묻은 후, 그 둘 사이의 갓난아기는 들개가 뜯어먹도록 외진 곳에 버려두었다고 합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노파 한 명이 아기의 이름을 손수 지어 옷 아래에 바느질로 새겼는데 다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기가 살아남았다면 스님과 같은 나이일 테지요. 

 

소녀는 그렇게 말했고,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밤이 찾아왔다. 달은 전날의 그것처럼 붉었다. 소름을 동반한 이상한 파동이 다샴의 몸 안팤을 뒤흔들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전날과 다름없이 횃불을 들고 선 남자들은 제 발로 걸어오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 않는 그를 두고 걱정했다. 

 

어이.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다샴은 고개를 돌렸다.

 

마셔. 저기 있는 귀신 새끼들 족쳐버려야 될 거 아냐.

 

다샴은 남자가 건넨 병을 들어 마셨다. 걸죽하고 독한 술이었다. 다샴이 쿨럭대자 남자는 병을 치워버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지독하게 아팠다. 

 

 자. 그만하면 되었네.

 

뒷짐을 진 노인이 고개만 돌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앞에서 까마득하게 솟은 숲은, 그야말로 넓고 깊숙한 미궁이었다. 까만 유리알 같은 노인의 눈이 위로 휘어지며 웃었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게. 

 

횃불의 무리가 일렁이는 어둠을 뒤로 한 다샴은 그보다 한층 깊고 습한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울창한 잎이 우거진 저 위쪽은 새카매서 하늘과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렸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작은 동물이 풀숲을 헤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자 짐승의 기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곳은 오롯한 생명이 있되 동적인 생물은 없는, 얼어붙은 시간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나무와 풀 뿐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이 멈췄다. 정적이 온 몸을 휘감았다. 몸의 내부와 외부를 뒤흔들던 파동이 더욱 거세어졌고, 미약하게 시작되던 두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놀았다. 피가 달아오르고, 사그라들고, 달아오르며 올라오다가 중간에서 차게 식으며 목덜미까지 죽 뻗었다. 

 

- 다샴...다샴....

 

유령들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았다.

다샴은 정신을 잃지 않으며 애썼다. 빠져나가려는 것을 최대한 붙잡으며, 악령들의 숲 사이를 한발 한발 걸어나갔다. 그의 목적은 그들이 아니었다. 

 암흑 속에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숲은 계곡으로 이어진 통로였고, 사당은 계곡이 시작되는 탁 트인 저편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순수한 정념의 결정체가 다샴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잠식했다. 분노, 억울함, 황망함, 슬픔, 혼란스러움. 어떤 감정은 오롯히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악령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의 혼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그것 또한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애꿎은 골칫거리를 더 늘린 셈이었다. 다샴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극한 슬픔이 몰려와 그는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홀려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최악의 경우, 악령들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조종해 숲 밖을 나오게 한 다음 사람들을 해치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정념만이 공명되었지, 그의 정신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치 숭배하는 것처럼 사당을 올려다보았다. 요정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을 해치는 악한 요정에게 어떻게 사당이 존재하는 걸까? 나지막한 집은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아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있었고,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푸른 이끼가 집을 뒤덮었다. 흰 물살이 쏟아져내려 귓청을 적셨다. 붉은 균열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눈이 까마득하게 흐려졌다. 

 그가 깨어난 곳은 모래 바람 부는 사막이었다. 여타의 사람들이라면 즉시 홀리고 말았겠지만, 그 곳은 요정이 만들어낸 환상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붉은 균열이 사막 전체를 번개처럼 내리치며 시선을 혼란케 했다. 다샴은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골랐다. 요정은 그에게 최후의 심판을 선고했으며 최종적 전투를 선언했다. 무엇이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검은 회오리 바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몰아쳐왔다. 부르짖고 우짖는 영혼들로 가득했다. 땅으로 꺼지지도,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지도 못한 뭇 짐승과 인간의 영혼들이었다. 비늘이 달린 검은 새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처럼 울어댔다. 그 세계의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노인은 사내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이동했다. 불타오르는 횃불의 무리는 달과 그 빛을 겨루기라도 하듯 한 자리에서 고요했다. 

 

공간이 깨졌고, 시간이 얼어붙었다. 외계적인 고요함이 함께했다. 거대한 침묵이 그의 미세한 입자를 빨아들였다. 어떤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함을 잊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오리 바람은 잦아들고, 약해졌다. 나비의 날갯짓 만큼이나 미약하게 줄어들었다.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영혼들은 생기 있는 먹잇감을 찾아, 그들을 받아들여줄 그릇을 찾아 거진 빠져나갔다. 

 육체는 구부려진 활이었다.

푸른 이끼로 휩싸인 사당에 절로 균열이 생기더니, 천천히 갈라지다가 맥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집은 흙 부스러기로 돌아갔다.

 숲 바깥의 그들은 붉은 달이 어둠에 먹히고 자취를 감추어버린 과정을 맨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달은 본래의 흰 빛으로 돌아왔다. 경이와 두려움과 경탄에 찬 웅성거림이 일었다. 

 횃불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지만, 숲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에는 더 이상 악령이 출몰하지 않았다. 악령들을 부리는 요정이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숲의 중심부까지 다가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가 숲을 통해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방랑자와 여행객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숲의 중심부 너머 탁 트인 곳에는 흰 계곡이 있다고, 그리고 그 앞에는 허물어져 쓰러진 작은 사당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어린 탁발승은 정말로 자기 일을 잘 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억을 잊었다. 기억만이 진실이 된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죽고 썩었다. 기록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는 열 여섯이 되자 마을을 몰래 빠져나왔다. 숲 속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 사당이 쓰러지고 잎사귀가 우거진 검푸른 곳에는 언젠가 작은 묘석이 세워질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맹세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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