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사람

순서

이어폰을 달고 밤거리를 걸었다. 주황색 가로등을 따라 터벅터벅. 어렴풋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가 뒤죽박죽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러다 지독히 외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세상 속에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찰나의 순간 같지만 어쩌면 그냥 분리된 느낌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때는 과거나 미래, 혹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내 안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의 볼륨을 키우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훌쩍 큰 음악 소리가 조금 놀라게 하고 익숙해지고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까, 그런 고민이 드는 밤이다. 중요한 건 말의 내용보다 순서가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순서라는 건 생각보다 정말 중요한 것이다. 어머니가와 아버지 중 누가 먼저 죽는지, 어머니가 죽고 철이 드는지, 철이 들고 나서 어머니가 죽는지, 이런 사소한 순서의 차이가 누군가의 인생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가난하고 얼굴도 못났다. 그저 ‘그 사람 착하지’ 정도의 얘기 밖에 듣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연애 후 결혼했다. 도통 어울리지 않는 둘이 어떤 구애의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네 번째 손가락에 사이즈도 맞지 않는 싸구려 금반지를 밀어 넣은 순간 미래는 불 보듯 뻔 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장 모르는 게 자신인 것처럼 두 사람의 미래를 가장 모르는 것도 당사자들이었다.

 

건장한 남자애를 둘이나 낳은 후 어머니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애초에 어머니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랑받는 여자로 자란 그녀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적절한 입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건달과 바람을 피운 어머니는 곧이어 또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었고, 화를 참지 못한 건달의 손에 죽었다. 정말 우연히 재떨이가 두개골의 가장 약하고 위험한 곳에 향했다.

 

두 집안은 그녀의 이기적인 유희를 모른척하기로 했다. 남달리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으로 포장한 건 그냥 자기들이 편하고 싶어서였다. 집안에서 정해준 자리에 어머니를 묻었다. 건장한 청년들이 관짝을 내려놓고 흙을 덮고 빙글빙글 돌면서 발로 밟았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흙을 촘촘하게 다지는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죽은게 그녀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와 형, 나, 세 남자는 동시에 버림받았다. 빈자리는 컷지만 세 남자는 나름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한 여자의 부재를 메우고 또 다른 삶을 만들어 가야만 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이유는... 귀속에 가득찬 이어폰의 감촉이나 주황색 가로등 불빛, 혹은 발바닥을 짓누르는 아스팔트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고 슬픈 음악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일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지만 어렵게 생각하면 한두가지 이유로 도저히 풀이할 수 없다.

 

머릿 속에 두 여자가 떠오른다. 하나는 어머니, 하나는 어린 시절의 사진이 없고, 행복한 추억을 더듬기도 어려워하는 사람. 그러니까 평생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제멋대로 죽어버린 여자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견뎌온 여자가 내 안에 동시에 자리 잡았다. 나는 둘 사이의 괴리를 가늠하며 아주 느린 속도로 한걸음씩 걸어간다.

 

가끔 그 사람이 과거의 불행을 잠시 잊고 행복할 때마다 나도 조금씩 숨이 트이는 걸 느낀다. 희한하게도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불완전한 원망도 사그라든다. 하지만 확실치 않다. 어머니를 용서하고 이해함으로써 그녀와 만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를 만나서 어머니를 받아들이게 된 된 걸까. 어쩌면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일지도.

 

오랜 시간, 불행한 과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불행하단 생각을 했다. 어쩌면 순서가 바뀐 거 같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현재가 한다. 지금 행복하면 과거도 만족스럽고 지금 불행하면 아무리 좋았던 과거라도 결국 저주하고 만다. 내 옆의 사람도 과거가 불행했다 단정했지만 지금, 그리고 앞으로 행복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면 아직 이른 결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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