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상

초식과 육식

따스한 날씨의 나른한 오후, 에녹은 몸이 찌뿌둥하다는 핑계로 피쿠스와 라비에라를 끌고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걷고 있었다. 찌뿌둥한 것보다는 오후 수업의 교사가 맘에 들지 않아 뛰쳐나온 게 훤히 보이지만, 덕분에 연구실에서 실험에 열중하다 끌려나온 피쿠스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툴툴 거리고 있었다.

 

“교사가 맘에 안 드시면 교사를 바꾸시란 말입니다. 매번 이렇게 수업을 빠지지 마시고요. 이러다 들키면 저까지 혼나잖습니까.”

 

“사과가 싱싱하군.”

 

피쿠스의 합당한 불평에 에녹은 과일가게 가판대에 있는 사과 한알을 집어 들었다. 에녹의 한손 가득 잡힌 새빨간 사과는 무척이나 탐스러웠다. 에녹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어 가게 주인장에게 던져주었고, 가게 주인은 아주 유연하게 동전을 받아 챙겼다. 시원스레 사과를 베어 물며 딴청을 피우는 에녹의 모습에 피쿠스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자네도 한입 먹을 텐가?”

 

“됐습니다. 혼자 다 드십시오.”

 

에녹은 싱긋 웃으며 입안의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 넘겼고, 라비에라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나직하게 키득거렸다.

 

“그만 기분 풀지 그래? 덕분에 외출도 하고 좋잖아. 에녹님 아니었으면 또 며칠 밤낮은 그 실험실에 박혀있었을 거면서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나오려면 두 분이서 나오시면 되지 왜 절 끌고 오냔 말입니다.”

 

“자네도 햇빛 좀 봐야지. 그러다 흡혈귀가 친구하자고 하겠어.”

 

어느새 커다란 사과를 다 먹은 에녹은 안쪽 골목으로 걸음을 옮겨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피쿠스는 심호흡으로 약간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뒤따랐고, 라비에라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두 남정네는 따라 식당으로 들어섰다. 푸근한 인상의 주인장이 단골손님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째 요즘 자주 오십니다?”

 

굵직하니 넉살 좋은 목소리에는 은근한 묵직함이 느껴진다. 에녹은 싱긋 웃으며 안쪽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덩치 좋은 주인장이 다가오는 사이 피쿠스와 라비에라도 익숙하게 각자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주인장은 형식적으로 메뉴판을 내밀며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여전히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아니면 새로운 메뉴를 드릴까요?”

 

새로운 메뉴라는 단어에 제일 먼저 호기심을 보인 건 피쿠스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 억지로 끌려나온 불쾌감은 이미 저만치 잊어버리고서, 피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인장을 올려다보았다.

 

“새로 나온 메뉴요?”

 

“예. 저 멀리 동방에서 건너온 거랍니다. 어찌, 내올까요?”

 

세 사람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끄덕거리고, 주인장은 거구와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멀어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에녹은 들고 있는 메뉴판을 비어있는 옆 테이블에 내려두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앳된 소년이 커다란 쟁반을 가져와 작은 접시들에 담긴 음식을 내려놓았다.

 

“주문하신 메뉴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우선은 먼저 드시고 계세요.”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앞으로 소년은 익숙한 듯이 손님들의 취향에 맞추어 접시를 내려놓았다. 고기가 들어간 걸쭉한 스프와 베이컨, 소시지가 담긴 접시는 피쿠스의 앞에, 야채가 들어간 담백한 스프와 샐러드는 에녹의 앞에, 부드러운 크림스프와 상큼한 과일이 담긴 접시는 라비에라 앞에 놓았다.

 

얼핏 본다면 근육질의 탄탄한 체형을 지닌 에녹과 마른 체형인 피큐스의 메뉴가 바뀐 것이 아니냐고 할 테다. 소년도 처음에 두 사람의 메뉴를 바꿔서 내려놓았던 적이 있는데, 의외로 에녹은 채식위주로 식사를 하는 편이고 피쿠스는 육식 위로 식사를 하는 편이라는 걸 알고 꽤나 놀랐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 릭.”

 

릭은 빈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여전히 의문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봐도 에녹 왕자님이 육식인데 말이야.’

 

선이 굵고 남자다운 미남형의 에녹이 채식주의자라는 것이 릭에게는 참으로 불가사의였다. 반면에 키만 크고 샌님처럼 생긴 피쿠스가 육식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고 말이다.

 

‘뭐, 라비에라 누님이야 상큼한 과일을 좋아하실 것처럼 생기셨지만.’

 

곧 점심시간의 준비하고 있는 형과 에녹 일행이 주문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아버지를 번갈아보며, 릭은 누구를 도울지 고민했다. 그런 고민도 잠시, 릭은 아버지를 돕기로 했다. 아버지의 요리가 끝나면 셋이서 같이 점심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채소는 다듬어서 잘게 썰고 살짝 데친다. 고기는 반쯤 익혀서 준비해두고, 릭이 양념을 만드는 동안 그의 부친은 잘 다듬은 재료를 크고 넓은 양철 팬에 순서대로 넣고 볶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호흡에 척척 진행된 요리는 모락모락 따끈한 김을 피워 올리며 넓은 접시에 담겼다.

 

“제가 갈게요.”

 

릭은 동그란 접시 모양에 맞춰 둥그런 나무쟁반에 올려서 양손으로 들고 주방을 나왔다. 릭이 다가가는 기척을 알아차린 라비에라는 테이블 중앙을 치웠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요리가 세 사람의 눈앞에 등장했다. 에릭은 미심쩍은 듯이 갸웃거렸고, 피쿠스는 포크를 집어 접시 위로 뻗었다.

 

“동방에서 건너온 요리로 잔치가 있는 날이나 특별한 날에 먹는 ‘잡채’라고 합니다. 들어간 재료는 양파와 당근, 어묵과 고사리, 시금치와 소고기, 그리고 당면입니다.”

 

피쿠스는 어느새 빈 접시에 덜어서 포크로 면을 말고 있었고, 에녹은 포크 끝으로 면을 몇 가닥 집어 올리며 릭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면은 무엇으로 만드는 거지?”

 

“감자와 고구마를 이용한 녹말가루로 만든 것입니다.”

 

라비에라는 반투명한 면발이 신기하다는 눈치였고 피쿠스는 입맛에 잘 맞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요. 짭짤하니 싱겁지도 않고 씹히는 식감도 나쁘지 않아요.”

 

피쿠스의 평에 에녹과 라비에라도 접시에 덜어서 한입씩 시식했다. 그 와중에도 재주도 좋게 소고기와 당면만을 골라 덜어내는 피쿠스를 보며 릭은 자신도 모르게 힐끔거렸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라비에라는 쿡- 웃으며 입안을 음식을 넘겼다.

 

“의외지?”

 

“네? 아, 네.”

 

에녹과 피쿠스는 어리둥절하게 라비에라와 릭을 바라보았다. 라비에라는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에 꽤나 신기했거든요. 에녹님 식단은 전부 풀이고, 피쿠스는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게 말이죠. 뭐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요.”

 

라비에라의 말에 릭은 격하게 공감하며 머리를 연신 끄덕거렸다. 에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고, 피쿠스는 당면과 고기가 수북하게 담긴 접시를 앞에 놓으며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마법사라는 직업이 워낙에 에너지 소비가 많아서요. 흡수하는 에너지의 거의 대부분을 뇌에서 쓰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책만 들여다보고 실험만 하는 것 같아도 그게 은근히 고난이도의 노동이라는 소리다. 덕분에 릭은 마법사라는 생물은 심장이 뇌에 달리기라도 한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릭. 안 들어오고 뭐해?”

 

주방에서 릭과 닮은 청년이 머리를 내밀고 불렀다. 릭은 그제야 농땡이 부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릭이 자리를 뜨고 잡채를 먹는 동안 에녹은 주로 채소 위주로 접시 담았고, 피쿠스는 고기 위로 접시에 담았다. 극명하게 나뉘는 두 사람의 식성을 보며 라비에라는 토끼와 늑대를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칭찬하기

작가 프로필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