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글로

청혼의 고백#외전:유준&진세 이야기(1/2)


굳이, 글로

 

청혼 이야기
외전:유준&진세 이야기

(1/2)

 

 

 

20XX년 여름. 외국의 한 도시.

 


“아, 미치겠네.”

 


캐리어를 옆에 두고 계단에 주저앉은 유준이 한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다. 유준은 조금 전, 사무실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숙사 등록하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안 됩니다. 개강 일주일 전부터 받아요.’

 

‘네? 아니, 뭐...!!! 그게 말이 돼요? 학교에서 방을 못 준다니요!!’

 

‘...저한테 말씀하셔봤자...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오세요.’

 


사무실 직원은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고서는 나가보라는 듯, 조용히 문을 가리켰었다.

 

유준은 다시금 열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런 직원의 태도도 가히 열받는 일이었지만, 더운 날씨에 무거운 짐까지 가진 채 난생 처음 와보는 타국의 도시에서 딱히 괜찮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게 더 싫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으려 해도 방학 기간이라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것 때문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갑자기 유학을 간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일을 하면서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고,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는 프리랜서라 회사의 존재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그래도 회사의 요구가 뭔가 불만스러웠다.


그러다 갑작스레 사춘기 때 들었던 생각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고, 이왕 떠나는 거 조금 새로운 환경에서 일이든 공부든 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유준은 잠시 모든 일을 중단하고 자비 유학을 선택하게 됐다. 하지만 꿈꾸던 유학길의 첫 단추부터 뭔가 애매하게 틀어져 버렸다.

 


“성질을 죽이던 해야지, 하...”

 


유준은 고개를 숙이고 팔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가만히 있으니 더 더운 것 같았다. 최대한 즐거운 상상을 해 보려 해도 이거다 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유준의 시야에 작은 샌들과 발이 보였다.

 


“저기... 한국인이세요?”

 


유준이 머리를 감싸안은 팔을 풀고 고개를 들자, 왠 여자가 서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를 굳이 쭉 당겨묶은. 그리고 여자의 옆에는 유준과 같은 큰 캐리어가 있었다. 유준은 캐리어를 발견하곤 여자가 자신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네, 자비 유학생이에요. 바로 다음 학기부터 시작하는데 방이 없다고... 아, 주유준입니다.”

 

“하, 더워. 아, 네. 전 이진세라고 해요. 스물 셋이구요.”

 

“아... 전 스물 여덟이요.”

 


유준의 나이 고백에 손부채질을 하던 진세의 시선이 똑바로 유준을 향했다.
유준은 왜인지 그 올곧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괜히 허공을 쳐다봤다.

 

진세는 그런 유준을 빤히 바라보다 생각에 잠겼다.
진세는 바로 전 학기에는 한 학기 내내 일을 했고, 방학 동안 기숙사 방을 미리 잡아두고 짐을 천천히 옮길 계획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런데 얼마 전 방학 동안 방에 짐을 두고 여행을 다녀온 지인의 방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범인은 금방 잡혔다지만 진세는 그래도 불안했다.

 

그런데 주유준. 이 사람이 있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던 진세는 이내 답을 찾은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유준에게 말했다.

 


“방 없다고 그랬죠? 그럼 개강까지 제 방에서 지내요.”

 

“네...?”

 


유준은 거침없는 진세의 말에 굳은 듯 멍해졌다.

 

그리고 30분 후.
유준은 말 그대로 진세의 기숙사 방에 와 있었다. 진세의 방에는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가지나 책들이 있었지만, 뭐랄까, 상당히 어수선했다.

진세는 캐리어 속 물건들을 옷장과 책상에 대충 정리한 후 멍하니 있는 유준에게 다가왔다.

 


“저기.”

 

“네? 네..."

 

“당분간 이 방 써요. 학기 시작하려면 2주 정도 남았으니까. 그 때까지 쓸 수 있어요.”

 

“아, 저, 감사한데요. 그럼 진세 씨는...”

 

“...풋.”

 


유준은 다시 멍해졌다.
땀이 조금 난 진세의 얼굴과 당황하며 되묻는 유준에 풋, 하고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표정. 왠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하, 걱정 마세요. 전 친구랑 밖에 살고 있거든요. 짐이 많아서 나눠 옮기는 것 뿐이에요.”

 

“아, 네... 그렇구나...”

 

“사실 남아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도난 사고도 일어난 적 있거든요. 저야 뭐, 그렇게 비싼 물건은 없지만, 그래도 빈 방에 물건 쌓아두는 게 조금 찝찝해서요. 아, 여기 열쇠요.”

 

“그렇군요. 아, 감사합니다.”

 


진세가 주머니를 뒤적여 꺼낸 열쇠를 유준에게 건넸다. 유준은 서둘러 진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열쇠를 가방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유준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던 진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는 거에요. 방학 끝날 때까지 유준 씨가 있을 곳을 제공해 드리는 대신, 유준 씨는 제 방을 지켜주는 거에요. 서로 윈윈하는 결과가 될 거 같아서요.”

 

“...아, 그렇죠. 진세 씨. 정말 감사합니다. 곤란했었는데.”

 

“풋, 아니에요.”

 


또, 웃었다.
진세의 그 가벼운 미소가 유준에게는 납덩이라도 얹힌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당시 유준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진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는 이 남자는, 순진한 건지 뭔지 나이에 비해서도,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서도 너무 귀여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진세는 그런 유준의 반응에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 식사나 하러 갈까요? 밥 땐데.”

 

“네, 그래요.”

 

“말 편하게 해요. 다섯 살이나 오빠잖아요.”

 

“아, 어, 응, 그래. 너도 편하게 해. 정말 고마워.”

 

“응... 좋아!!”

 


그 날부터 유준의 속에는 진세가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둘은 연락을 이어갔지만, 유준은 나이도, 현실도, 괜히 겁이 나서 진세에게 먼저 연락 한 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세가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 왔기에 크게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말하지도 못할 마음이 커지기만 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진세는 진세 나름대로 답답했다.
사실 유준이 먼저 연락해 주길 바랬는데 이 바보같은 남자는 겁만 내고, 자꾸 뒤로 숨기만 하고, 결국 진세가 먼저 연락을 취해서 만남을 이어갔지만 어딘가 아쉬웠다. 그와의 관계에 대해,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싶었다.

 

미묘한 그들의 감정선은 그렇게 6개월 동안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칭찬하기

작가 프로필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