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글로

청혼의 고백#정하 이야기

 

굳이, 글로

 

청혼의 고백
정하 이야기

 

 


딸랑-

 

“아, 뭐 이런 데로 부르냐, 이것들은.”

 


새카만 밤, 야구모자를 눌러 쓴 한 남자가 투덜거리며 작은 호프집에 들어선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이내 일행을 찾은 듯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정하야. 뭐 때문에 불렀냐니까? 뭔데 그렇게 숨겨!!!”

 

“야, 주유준, 재빈이 오면 얘기할 거라니까. 엄청 급하네, 진짜.”

 

“진짜 더럽게 비싸게 구네. 근데 서재빈 이 새낀 왜 안 오냐.”

 


구석 테이블에서는 남자 두 명이 대화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 유준은 삐친 듯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입을 쭉 내밀고 중얼거렸고, 유준과 반대로 처진 눈매의 남자, 정하는 그런 유준을 보고 피식, 웃어 버린다.

 

재빈은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차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냅다 남은 자리에 앉았고,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놀란 듯 정하와 유준은 토끼눈을 한 채 재빈을 바라본다.
재빈은 태연히 술을 주문한 후 유준을 향해 말한다.

 


“이 새끼 왔다, 이 새끼야. 무슨 일인데?”

 

“...그래, 왔냐, 이 새끼야. 정하한테 물어봐.”

 

“정하, 무슨 일?”

 

“다들 기대하시라. 서프라이즈가 있다.”

 


정하는 가방 속에서 자칫 엽서처럼 보이는 작고 새하얀 종이를 꺼내 유준과 재빈에게 내민다.

 


“...이게 뭐냐.”

 


정하에게 묻는 유준의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정하는 우선 읽어보라는 듯 말없이 종이를 가리켰고, 유준과 재빈은 찬찬히 종이를 훑어본다.

 

하지만 이내 재빈은 당황스러운 표정-이라기 보다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 하다.-으로 종이를 조심스레 테이블에 올려 두고는 턱을 괴고 종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재빈이 올려둔 하얀 종이는 심플하지만 은은한 프린팅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앞면 가운데에는 금색과 은색이 섞인 듯 오묘한 색으로

 

신랑 한정하
신부 윤세지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유준은 한동안 조금 멍하니 종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한다.

 


“...그 뭐냐, 축하한다. 세지 씨랑 결혼하는구나, 드디어.”

 

“고맙다. 야, 청첩장 잘 나왔지? 예쁘지?”

 

“어. 근데 식은 어디서 하냐?”

 

“우리 부모님 댁. 거기 마당이 있는데, 조금 커서 간단하게 식 하려고. 사람도 많이 안 부를 거야. 너네는 꼭 와라.”

 


들떠 보이는 정하의 설명에 유준과 재빈은, 피식 미소지었다.

 


“그래. 진짜 축하한다, 자식아. 죽고 못 살더니 드디어 하는구나.”

 

“고맙다, 자식아. 너도 빨리 해라.”

 

“안 그래도 요즘 얘기 중이야.”

 


재빈은 둘의 결혼 얘기에 끼지 않았다. 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헤어진 그녀가 떠올라 버렸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유도 제대로 모른 채 차이고 말았다. 친구의 좋은 소식에 이러면 안 되지만, 괜히 열이 받았다. 술이 고팠다.

 

그 때, 유준이 술잔을 드는 재빈의 팔을 잡았다.

 


“야, 혼자 마시면 안 돼지. 자, 한정하의 결혼을 위하여!!!”

 

“아, 뭘 또 이런 걸 해. 괜찮아.”

 

“내가 안 괜찮거든? 서재빈, 가자, 한정하의 결혼을, 위하여!!!”

 


재빈은 웃었다. 유준은 날카로운 인상에 평상시 말도 툭툭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참 속이 깊고 어른스러운 친구였다. 지금도 자신을 배려해 준 것이리라.

 

재빈은 벌떡 일어나서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어이구, 그래, 한다. 위하여!!!”

 


호프집 구석 자리, 소중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는 두 남자와 친구들의 축하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한 남자가 술잔을 기울인다.

 

얼마나 마셨을까, 테이블 위에는 빈 잔이 몇 번이나 쌓였다가 치워진다. 안주도 마찬가지. 하지만 세 남자는 취하지도 않는 듯, 기분 좋은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테이블을, 유준을 향해, 웨이브진 긴 머리칼의 여자가 다가왔다.

 


“저기, 오빠.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주실 수 있어요?”

 

“네, 저요...? 으어억!!! 하, 깜짝이야. 이진세, 너 여기서 뭐 해? 집 간다며?”

 

“...왜 이렇게 놀라? 그냥. 집 가는 길이었어. 그러다 보이길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유준 옆으로 정하와 재빈이 여자, 진세에게 인사를 건넨다. 진세도 해맑은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진세는 유준의 여자친구로 활발하고 싹싹한 성격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은 없지만 정하, 재빈과도 잘 지내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구석에 있는데 또 어떻게 찾았대.”

 

“사람이 많이 빠져서 잘 보였어. 여기 좀 앉았다 가도 돼요, 오빠들?”

 

“그럼. 한 잔 할래? 500 하나 시켜줄까?”

 

“꺄-. 좋죠!! ...어, 이거 뭐에요? 정하 오빠, 결혼해요?”

 

“응. 너도 유준이랑 같이 와.”

 

“우와아.”

 


진세는 정하의 청첩장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러다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정하에게 묻는 진세.

 


“정하 오빠는 세지 씨랑 어떻게 만났어요? 저번에 우리 오빠한테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듣는 게 더 실감나니까요.”

 

“음, 얘기 못 해줄 건 없지. 좀 지루할 수 있는데 괜찮아?”

 

“네!!”

 

“음... 아무튼 첫만남도 아직 엄청 생생해. 7년이나 지났는데.”

 


진세는 흥미로운 동화를 기다리는 꼬마처럼 두 눈을 빛내며 숨죽이고 있었다. 그 옆의 유준과 재빈은 몇 번도 더 들은 이야기라 크게 흥미가 없는 듯 했지만, 그 같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쑥스러워하는 정하의 얼굴은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정하는 술기운이 조금 올라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추억에 온전히 잠기고 싶은 건지, 살짝 눈을 감고 말을 이어갔다.

 


“나는 막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세지는 딱 2학년 때라 어학연수니, 교환학생이니, 뭐 그런 거랑 진로에 대해 한창 고민하던 시기였어. 어쨌든 나는 그 때 복학 직후라 만날 사람도 딱히 없고, 공강 시간 떼울 장소도 마땅찮아서 가지도 않던 카페를 갔어. 그 날따라 익숙치도 않던 카페가 왜 그렇게 가고 싶던지.”

 

 

 

 

“세지가 내 주문을 받았었어. 좀 멍한 표정이더라. 아파 보이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했어. 금방 내가 시킨 아메리카노가 나오고, 나는 그걸 들고 창가 자리에 가서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 지루해도 할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모자를 고쳐 쓰려다가 모자를 떨어트린 거야. 아끼던 모자라 당시에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모자가 떨어진 게 참 고마워. 마침 청소를 하며 지나가던 세지가 내 모자를 밟아 버렸거든. 그런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내 모자를 밟은 줄도 모르는 것 같더라고. 아끼던 모자를 밟은 여잔데도 귀엽다는 생각부터 들더라.”

 

 

 

 

“그래서 내가 세지를 불러 세우고 모자 얘길 했더니, 뒤늦게 발견하고는 사색이 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라고. 너무 당황하길래 괜찮다고 했더니, 또 날 멍하니 쳐다보는데 그 표정이 너무 예뻐서 나도 아무 말 못 하고 쳐다봤지. 그런데 시간을 확인하더니, 지금 자기가 강의가 있어서 가 봐야 하니 나중에 연락드리겠다며 번호를 알려 주더라구.”

 

 

 

 

“그 뒤는 뭐, 예상할 수 있을 거야. 괜찮다고 했는데도 죄송하다고, 밥을 사겠다며 연락하고, 만나고, 그러다 친해지고, 안 지 3년째 되는 해에 내가 고백했어. 사실 고백하던 날 예상과 달리 갑자기 비가 와서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지가 울더라고. 고맙다고. 자기도 날 너무 좋아한다고. 그런 세지가 참 사랑스러워서 많이 벅찼어. 그냥, 그런 흔한 이야기야.”

 


얘기를 끝낸 정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진세는 어딘가 홀린 듯, 발개진 볼을 하곤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정말 멋져요, 오빠!!! 이야기가 너무 예뻐요.”

 

“그래? 하하, 고마워.”

 

“세지 씨는 정말 행복한 여자에요.”

 

“...고마워.”

 

“진심으로, 결혼 축하드려요, 오빠.”

 


진세의 말에 잠깐 멍했던 정하도, 유준과 재빈도 웃었다.
작은 호프집 안, 구석 자리, 세 명의 친구와 한 명의 여자, 정말 ‘사랑’을 하는, 할 사람들.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나가는 밤마저 아름다웠다.

 

-

 

1달 후.

 

한 주택 마당에서 하객도 많지 않고, 다소 조촐하지만 세상 어느 부부보다 행복한 결혼식이 진행됐다. 세지는 새하얀 원피스를 차려입었고, 정하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세지의 볼은 연한 붉은빛 홍조를 띄고 있었다.

 


“아- 두 사람 눈빛이 너무 뜨겁네요. 그럼 뭐, 다 건너뛰고 뽀뽀로 끝냅시다.”

 

“뭐?!!”

 

“키스는 너무 야해 보이잖아. 그럼 신랑 신부, 뽀뽀 가겠습니다.”

 


짖궂은 사회자, 유준의 말에 세지와 정하는 새빨개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본다. 어쩔 줄 몰라하는 정하 앞으로 다가온 세지가 까치발을 들고 눈을 감는다. 그런 세지를 잠깐 멍하니 바라보던 정하는 머리 끝까지 붉어진 채 조심스레 세지의 어깨를 잡고 입을 맞춘다.

 

입을 맞추는 순간, 하객으로 온 친구들이 준비한 폭죽이 터지고, 노을 사이에 반짝이와 꽃잎들이 흩날린다. 그리고 사방에서 친구들의 진심을 담은 축하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마법같은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하가 갑작스레 세지를 번쩍 안아들었고, 세지는 정하의 품에 매달려 아이같은 웃음소리를 낸다. 어디서 들리는 건지, 어느새 마당에는 잔잔한 음악이 깔렸지만, 정하에게는 들킬까 두려운, 아니, 오히려 세지에게도 들렸으면 하는 설레는 고동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7년간의 긴 시간을 함께 해준 그대에게.
앞으로의 평생을 함께 해줄 그대에게.
내가 사랑하는 그대에게 이 편지를 바칩니다.

 

한정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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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소리 2016. 08/17

편지에 사랑이 느껴지네요 ^^

연우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연우 2016. 12/29

뭔가... 수기로 쓴 편지를 보니까 더 생동감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