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8

 

"...죄송해요.“

 

 

여자의 갑작스런 사과에 한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의 미소는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감사한 게 너무 많은데, 폐만 끼치네요.“

 

"폐라뇨.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한 게 더 많아요. 많다기보다는, 큰 거죠.“

 

 

한영의 손가락이 찻잔을 흔들고, 찻잔에 남아있는 한 모금 정도의 차가 반동에 의해 찰랑거렸다.

 

 

"...저희 아버지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았다면, 같이 책임지고 사과하는 게 맞는 거죠."

 

 

생각보다 한영의 어조는 담담했다.

 

 

"...죄송한 부분도 있지만, 감사하기도 해요.“

 

"...네?“

 

 

여자는 감사하다는 한영의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한영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희 아버지... 신고 안 하셨잖아요.“

 

"아.“

 

"...뻔뻔한 거 알지만, 어쨌든 아버지니까...“

 

"......“

 

"욕해도 할 말 없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없으면 한제가 힘들 거에요. 지금도 아픈... 아, 결국 핑계네요.“

 

 

여자는 스스로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은 생전 처음이었다.

화는 나지 않는데 유쾌하지도 않았다. 좋은 감정은 절대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이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럽고, 여자 스스로의 행동이 기특하면서도 경멸스러웠다.

 

이상할 것도 없는 정적이 이어졌다. 여자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한영 씨.“

 

"......“

 

"저는 괜찮지 않아요.“

 

"......“

 

"아무래도, 괜찮지 않아요.“

 

 

여자의 입술이 떨렸다. 목소리는 표정에 비해 담담한 편이었다.

 

 

"이해할 수는 있어요.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런데요. ...많이, 고맙고 불편해요.“

 

"......“

 

"안심하세요. 신고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한영의 고개가 깊이 숙여졌다. 여자의 목소리는 한영의 고갯를 쫓았다. 쫓고 파고들어서, 할퀴고 상처를 내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 똑같이 놓인다면 여자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면서.

 

 

"한영 씨한테는 많이 고마워요. 미안하기도 해요. 하지만, 끝났으면 좋겠어요.“

 

 

뒷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된다.

 

 

"한제에게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에요. 그래도,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역시 뒷말은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 때'도, 오늘도, 신경써 주셔서 고마웠어요.“

 

 

마지막으로 온전히 진심인 말을 끝마친 여자는 찻잔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한영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개운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영도 찻잔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한영은 눈앞의 이 여자가 생각보다 더 당차고 단호할 수 있는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제가 부러워하고 동경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담담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건 다 보였지만, 그래도 여자는 걱정했던 것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한제를 걱정해 주고, 한제가 이런 사람을 동경한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기까지 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그냥 녹차인데, 다행이네요.“

 

"네, 향이 아주 좋았어요."

 

 

여자의 미소는 밝았다. 아직 볼에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맑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이내 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도 따라 일어났다.

현관문까지 한영을 배웅한 여자는 문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 말을 꺼내며 현관문 밖에 있는 한영과 눈을 마주했다. 조금씩 닫히는 문 틈새로 서로의 시선이 좁아져 간다.

 

여자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담긴 한영의 표정은 어색한 미소였고, 한영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담긴 여자의 표정은 눈물 고인 눈과 밝게 미소짓는 입매였다.

 

여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마지막 시선을 감췄다.

 

 

"잘 가요.“

 

 

문이 닫혔다.

 

 

-

 

 

3개월 후-

 

 

"읏샤- 후, 많기도 하다."

 

 

여자는 오랜만에 이불도 빨고, 옷장 정리도 하고, 오래 쓴 물건들 중 필요없는 물건, 버릴 물건 등을 구분해서 현관에 쌓았다. 화창한 햇살이 작은 창문을 통해 여자의 방을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다.

 

여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움직이면 짧아진 여자의 머리가 어깨 조금 위에서 찰랑거렸다. 고동색 머리카락은 햇살 아래 한층 밝게 빛났다. 약간 주황빛을 띤 여자의 입술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여자의 미소는 햇살 아래 더욱 하얘 보였다.

 

여자의 발에 쪽지가 하나 밟혔다. 여자는 쪽지를 주워들었다. 반으로 접힌 메모지였다. 벌어진 틈으로 정갈한 글씨가 보였다.

 

 

-저는 남은 학교 일정이 있어 오늘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한제 쪽으로 연락하세요. 끝까지 이기적이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로 끝나는 메모지의 밑단에는 한제의 번호인 듯 010으로 시작하는 11자리 번호가 쓰여 있었다. 한영이 갑작스레 방문한 지 며칠 후인 1주일 전쯤 여자 집 현관문에 끼워져 있던 메모였다.

여자는 한제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 앞으로 전화도 문자도, 한제에게 보낼 일 따위 없을 테니까. 그래도 아직 욕심은 남았는지, 이 쪽지를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 생각에 잠긴 여자는 쪽지를 다시 반으로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이내 정리를 끝낸 여자는 비닐봉지를 들고 분리수거함으로 내려갔다. 여자는 문득, 아파트 앞에 이어진 골목을 바라봤다. 환영인지 착각일지 모를 그림자가 보였다.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여자는 황급히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갑자기 달려서 숨이 찼다. 문을 닫고 주저앉았다.

 

아니야. 이제 그럴 일은 없어. 괜찮아. 이젠 끝났어. 정말 없어. 아무것도. 난 괜찮아. ...괜찮아.

 

되뇌고 되뇌어도 잔상이 맴돌았다. 심장이 아팠다. 여자는 이런 떨림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익숙해지고 싶다. 익숙해져야 했다.

 

아직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빨리 극복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잔상이 마음을 후려칠 때마다 괜찮아지는 연습을 해 왔다. 하지만 절대 쉽지는 않았다.

오늘처럼. 지금처럼.

 

 

"...하...“

 

 

여자는 손을 내려다봤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주먹을 쥐어 봐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버텨도 버텨지지 않아서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고, 몇 시간 동안 운 것처럼 눈가가 따끔거렸다.

 

작은 현관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주저앉은 여자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여자는 한제의 미소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봄햇살을 닮은 그 새하얀 미소를,

따뜻하게 여자를 감싸던 그 예쁜 미소를.

 

언제부턴가 갑자기 희미해졌지만, 기억해 내고 싶었다.

한제가 희미해지는 건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아픈 것보다 훨씬, 싫었다.

 

 

-

 

 

콰앙-

 

"...아.“

 

 

한제는 뭔가 큰 소리에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요즘은 툭하면 잠이 들곤 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피로가 몰려왔고, 잠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 잦아졌다. 아, 고통을 버티느라 피곤한 것도 같다.

 

부스럭-

 

한제는 몸을 덮은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것만도 힘이 들었다. 한참이나 머리가 어지러워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조금 진정이 됐다 싶을 때쯤, 이불을 마저 걷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순간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눈앞이 뿌얬다.

 

한제는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형이 생각났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던 한제는 한 걸음, 한 걸음, 벽을 짚고 걸었다.

 

 

-

 

 

여자는 스스로가 한심하다고도 생각했다. 다짐했는데도 매번 끝에 찾는 것은 한제였다.

여자의 환상 속에서 한제는 여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미소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너무 환해서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생각나는 한제의 말을 곱씹었다. 가장 최근부터,

 

 

'...죄송하고 감사했어요.‘

 

'...선생님도 일찍 들어가셔야죠. 아버지도 저랑 집에 가요.'

 

'오랜만에 부모님 뵙는 거니까 좋은 시간 보내고 와요.‘

 

'선생님이 잘 알려줘서 그렇죠.‘

 

 

점점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처음까지.

 

 

'그럼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죠?‘

 

'어? 으응. 이름이 한제...라고 했지? 그럼 난 한제라고 부를게?‘

 

'...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봄처럼, 그 따스한 향기처럼, 봄을 맞아 피어나는 꽃들처럼 환하게 피던 미소를 짓고 내 인생에 시나브로, 아무도 모르게 스며든 네가, 이젠 마음대로 잊을 수도 없을 정도로 당연해진 네가, 기억 끝에서 날 바라본다.

 

그러던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소음이 시작됐다.

한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까이 가고 싶어도 다리가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한제의 목소리는 물에 잠긴 것처럼 웅얼거릴 뿐이었다.

 

 

쿵-

 

네가 날 바라보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아. 미안.

 

쿵쿵- 쿵쿵쿵쿵쿵쿵-

 

...잠깐. 귀가 너무 시끄러워. 들릴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아.

 

쿵쿵쿵- 쾅쾅쾅쾅- 쾅쾅-

 

뭐? 안 들려. 가까이 와 줘. 들리지 않아. 뭐라고?

 

 

그러던 중, 갑자기 소음이 멈추고 한제의 목소리가 흩날리는 공기처럼 가볍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들려왔다.

 

 

'선생님, ...약해서 죄송해요.‘

 

 

그 말을 끝으로 한제는 여자가 1년여 간의 시간 동안 본 것 중 가장 새하얀 미소를 머금고 사라졌다. 그리고 곧, 소음은 검은 기운이 되어 한제를 뒤덮었다.

 

 

"...헉.“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현실과 추억, 혹은 꿈의 경계에 있었던 것 같다.

 

여자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현관문 앞에 쭈그려 앉은 채였고, 몸을 감싼 두 팔도 여전했다. 어떻게 이런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방금 그건 다 허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만은 확실히 기억이 났다.

 

 

'선생님, 죄송해요.'

 

 

여자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고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래 앉아 있었는지 다리가 저려왔다. 멍한 정신 사이로 자꾸만 방금 한제의 표정과 말이 파고들었다. 저린 다리를 붙잡고 잠깐 서 있으면,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쾅- 쾅쾅-

 

몸을 흠칫 떨 정도로 큰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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