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7

 

"...시브.“

 

"나로 님...“

 

"가자.“

 

"......"

 

"가면 알게 될 지도 모르잖아.“

 

 

달래듯 조용한 나로의 목소리에 시브의 시선이 다시금 계단으로 향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신들도 이런 과정을 겪었던 걸까. 이렇게 아득하고, 마음이 아리고, 미쳐버릴 것 같은 혼란을 겪고 기억을 되찾았을까.

 

저 위에 있는 것이 시브의 기억, 혹은 기억을 찾을 수 있는 열쇠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시브는 계단 위의 죽음이 자신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아주 작을지라도.

 

시브와 나로는 계단을 올랐다. 시브는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죽음의 기운과 또다시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심장고동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홍빛 입술이 검붉게 빛났다.

 

 

-

 

 

"걸어오는 길, 힘들지 않았어? 여긴 차가 못 들어와서..."

 

 

한제는 걱정된다며 간간히 기침을 하면서도 여자의 집까지 따라왔다. 여자는 그런 한제가 더 걱정돼 병원에 남으라고 했지만 한제는 완강했다.

 

 

“집이 여기에요?”

 

“응.”

 

“위험하겠어요. 가로등도 깨진 거 많던데.”

 

 

오랜만에 돌아온 낡은 아파트. 괜히 반가운 마음에 여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방 앞에 도착한 순간 여자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뒤에서는 경악한 한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여자의 방은 엉망이었다. 방바닥에는 흙과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고, 각종 물건들이 죄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 유달리 눈에 띄는 말라 비틀어진 장미꽃잎들.

 

한제는 먼지 때문인지 기침을 해 댔고, 여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현관 밖 복도로 나갔다.

기침 소리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퀘퀘한 방을 바라보던 여자는 당시의 기억이 손끝부터, 발끝부터 자신을 갉아먹는 듯했다.

 

여자는 순간, 몸을 내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불쾌해졌다.

 

 

"콜록, 선생님, 열쇠부터 수리하죠. 문 닫히지도 않아요.“

 

"어어, 그래야지. 응.“

 

 

한제는 여전히 잔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여자와 함께 집을 살폈다.

 

역시, 이 작은 아파트에 사는 무신경한 사람들이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은 적 없는 이웃집 여자를 신경쓸 리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 씁쓸했다. 상당히 소란스러웠을 텐데도 신고는커녕 문고리가 부서져 덜렁대는 현관문조차 신경쓰지 않다니.

 

여자는 한제가 부른 열쇠 수리공이 도착할 때까지 이웃 주민들의 인색함과 현관문의 상태 따위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자는 뼈저리게 예감하고 있었다.

 

분명, 앞으로는 이 집에서 악몽을 꾸게 되리라고.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빨리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잊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하아...“

 

 

어두운 방 안에서, 여자는 작은 침대에 일어나 앉은 채 머리를 쓸어넘겼다. 긴 머리카락은 쓸어넘겨도 다시 흘러내렸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4시였다. 알람을 설정한 시간보다 2시간은 일렀지만, 항상 이맘때쯤 잠에서 깼다.

 

 

예상대로, 여자는 집에 돌아온 후 거의 매일 악몽을 꾸고 있었다. 처음 한제를 만났던 날과 그 이후의 일들이 끝도 없이 반복됐다. 그리고 꿈은 항상 그 집에서 탈출하기 전에서 멈췄다.

 

잊고 살아도 모자랄 텐데, 꿈으로 거의 매일 그 당시가 회상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여자가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학교도 방학이었고, 알바도 여자 하나 안 온다고 해서 시스템이 안 돌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말없이 장기 결석을 했으니 당연히 잘리긴 했지만.

이전에 쓰던 휴대폰은 찾을 수가 없어 새로 개통했다. 구형 모델이긴 하지만 휴대폰도 새로 장만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원래 매일같이 연락하지는 않았지만 근 한 달간 연락이 안 됐던 데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했다. 둘러대는 여자의 말 다음으로 우리 딸, 바쁜 거 알지만 그래도 연락은 주기적으로 줬으면 좋겠어, 담담한 척 하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 있었다.

 

이래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한제는 여자가 집으로 돌아온 후 3일간 매일 찾아왔지만 3일째 저녁 한영이 퇴원한다는 말을 끝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조금 섭섭했지만 이게 맞는 거였다. 한제와의 인연은 끝나야 했다.

 

 

-♩♪♬♪♩♬♩♪♬

 

알람이 울렸다. 어느새 하늘이 밝아져 있었다. 여자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 동안 여자는 이리저리 알바 자리를 구하러 다녔고, 다행히 좋은 조건의 카페 알바를 구했다. 여자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예전처럼 운이 좋다는 것만으로 앞으로 모든 일이 순탄할 거라는, 바보같은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여자는 변해 있었다. 여러 가지로.

 

'사람'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우연이라도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딱히 남자의 손을 잡을 일은 없었지만, 가끔 스치기라도 할 때면 불안해지곤 했다.

그리고 길에서 한제와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들을 보면 시선이, 걸음이 멈췄다. 어쩔 때는 그 학생들이 여자가 자신들을 쳐다본다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 오래 쳐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고-

 

 

"아, 기분 좋다."

 

 

여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동안 그대로 있다 따뜻한 봄 햇살에 잠이 들 뻔하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똑똑똑-

 

 

여자의 눈동자가 멈췄다.

 

여자를 찾아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택배를 시킨 적도 없다. 여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노크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똑똑, 에서 쿵쿵, 쿵, 쾅쾅쾅, 방을 삼킬 듯한 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기겁하며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아도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소리를 질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여자의 불안감은 극으로 치달았다. 심장 소리마저 잔인하게 들렸다.

 

 

-그리고, 장소를 불문하고 문이나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여자는, 물에 삼켜진 듯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밀폐된 공간이라면 증세가 훨씬 심해졌다.

지금이 그랬다.

 

 

삑-삑-삐빅- 철컥- 쿠당탕-

 

"진정...요!!! ...윤...영...니다...!!!“

 

 

스스로의 비명 중간중간에 요란한 기계음과 말소리 같은 게 섞여 들렸지만, 여자는 공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여자의 비명은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놀라 숨을 삼키는 여자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해요!!! 눈 뜨고 나 봐요, 윤한영입니다!!!"

 

"...헉... 유, 윤한영 씨?“

 

 

여자는 들은 적 있는 목소리에 비명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한제의 형, 한영이 있었다.

한영은 여자가 비명을 멈추자 잡았던 손목을 놓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여자의 손목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래요, 윤한영입니다.“

 

 

한영을 인지하는 순간 여자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여자의 눈에 금세 차오른 눈물이 뚝 떨어졌다. 여자는 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스스로도 놀란 듯 동공이 커졌다.

 

한영은 당황하면서도 여자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

 

 

"...괜찮아요?“

 

 

조심스러운 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심'을 느낀 여자는 서글퍼졌다. 눈물이 차오르고 떨어졌다.

이미 여자의 기억은, 트라우마는 의지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서러워서, 여자는 울고 또 울었다.

 

여자는 한참 만에 눈물을 그쳤고, 그제야 현관문이 열린 것을 눈치챘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대도, 한영이 무슨 수로 도어락을-이것 역시 한제가 반강제로 설치해 줬었다.- 열었는지, 알아야 했다.

 

 

"...아, 죄송해요. 급해서 그만."

 

 

여자의 시선이 현관에 머물다 멍하니 다시 한영에게로 향하자, 한영은 대뜸 머리를 숙이며 사과를 해 왔다. 그리고 해명이 이어졌다.

 

 

"한제가... 비밀번호를 알려 줬어요.“

 

"한제...요?“

 

"네. 저도 입원했었던 건... 들으셨죠? 한제...한테 선생님 얘기도 들었어요.“

 

"...아, 네.“

 

 

한제라는 이름을 꺼내는 한영의 어투가 조심스럽다. 그 어투에 여자는 심장이 부서질 것 같았다. 인생 유일한 사람의 이름이 불편해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러운 기분이었다. 폭력적인 생각 한 번 한 적 없던 여자의 감정이 차올랐다. 한영의 말이 이어졌다.

 

 

"뭐, 어쨌든 저도 퇴원했고 사과도 할 겸 연락드리려 했는데 연락처도 모르고, 그나마 알 수 있는 정보는 주소 정도인데 언제 계시는지도 몰라서 우선 그냥 와 버렸어요. 와 보니까 밖에 초인종이 없길래 문을 두드렸어요.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나는 것 같은데 딱히 반응이 없길래 조금 더 두드리다 나중에 올까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리잖아요. 놀라서 다시 문을 두드렸더니 비명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하...“

 

"아, 죄,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요. 그, 저번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어서요.“

 

 

한영의 말에 여자의 고개가 숙여졌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몸이 가늘게 떨렸다. 한영은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어쨌든, 비명이 심해지길래 신고부터 할까 하다가 너무 성급한 것 같아서 우선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고 한제... 한테 연락했더니 비밀번호를 알려주더라구요. 그래서...“

 

"...아.“

 

"저... 이유야 어찌됐든 함부로 문 따고 들어온 거, 죄송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한영은 다시 한 번,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한영은 말하면서도 변명같고 머쓱했는지, 목까지 붉어져 있었다.

 

도어락 설치 당시 한제가 쭉 옆에 있었고, 비밀번호를 설정할 때에도 같이 보면서 설정했으니 비밀번호를 아는 것도 이해가 됐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가장 다행인 점은, 그걸 아는 사람이 '한제'였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여자의 불안은 눈 녹듯 사라졌다.

 

잠시 동안 어색한 공기가 흘렀고, 여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차를 내오겠다며 일어섰다. 오래 앉아 있었는지 다리가 뻐근했다.

 

한영이 괜찮다고 할 새도 없이 작은 테이블에 간단한 다과를 준비한 여자는 한영의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영의 방문 이유를 듣고 난 후 여자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왜 난 이 사람한테 폐만 되는 걸까. 한제처럼 계속 날 알아온 것도 아니고, 생면부지인 사람을 돕다 다치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먼저 사과하러 오고.

 

아, 어떡하지.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버렸다.

한제 다음으로, 평생 '죄책감'을 가질 것 같은 사람.

 

여자의 눈앞이 일렁였다. 눈물은 없는데도, 마음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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