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6

 

"...나로 님.“

 

 

다시 눈을 떴을 때, 시브의 앞에는 중년의 남자도, 서재 안의 또 하나의 방도, 이름 모를 여자도 아닌 나로가 있었다. 장소는 그대로였지만 방금 본 모든 것들이 환영이라도 된다는 듯, 더 이상 이 방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순간 느꼈던 죽음의 느낌도 멀어져 있었다.

 

 

"...아.“

 

 

시브는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다. 나로는 동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시브. 저기.“

 

 

자신을 부르는 나로를 올려다본 시브의 시선은 나로의 손끝으로 향했다. 시선을 조금 더 옆으로 옮겨 보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위에서 죽음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었다.

 

시브는 멍하니 나로의 손끝과 계단을 번갈아 보다, 나로를 응시했다.

나로는 어둠에 젖어 더 짙어진 눈동자로 시브를 마주 응시했다.

 

 

"...나로 님은, 사신이 아니잖아요.“

 

"그러게.“

 

 

나로는 무표정이었고, 그 표정만큼 무심하고 무책임한 말만을 뱉었다. 시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조금은 웅얼거리는 듯했다.

 

 

"...죽음을... 느낄 수 있나요?“

 

"몰라.“

 

"이상해요. 이상해요...!!"

 

 

비어 있는 듯 투명한 시브의 벚꽃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때까지 이런 일은 절대 없었고,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없어야 했다. 이건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법칙'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나로는 무엇도 아닌 존재로 시브의 주변만을 맴돌며 끈질기게도 괴로움만 안겨주던 그런 존재였다. 이렇게 인간들의 세상에 나오지도 않고, 시브의 길을 알려 주지도 않고, 항상 무책임하고 비웃음만 가득하던,

 

그런.

 

 

"...정말 이상해요.“

 

"뭐가?“

 

"저는 자꾸 아득해지고, 나로 님이... 나오고.“

 

 

시브는 무너질 것 같은 목소리를 뱉었다.

 

 

"...자꾸,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단 말이에요.“

 

"......“

 

"저는... 저는 죽었는데."

 

 

나로는 대답도 없이 시브의 말을 듣기만 했다. 시브는 머리를 감싸쥔 손을 더듬거렸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

 

 

뒤에서 두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여자의 귀에는 모든 게 몽롱했다. 꼭 꿈 같았다.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었다. 이게 다 여자를 마지막에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위한 속임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제는 말없이 우산을 펴고 여자를 부축했다. 대문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도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거였다.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선생님.“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너무 의지했던, 너무 아꼈던, 여자 인생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그가, 한제가 있었다. 한제는 행복해야 하는데. 여자의 인생에 색을 입혀 준 유일한 사람인데. 스스로도 정체모를 원망에 찬 여자의 눈동자가 한제를 향했다. 한제는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려 해도 목이 메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손가락이 한제의 머리칼에 닿았고, 그와 동시에 한제의 말아쥔 손등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 한제야.“

 

 

여자는 웃어주고 싶었다. 한제 잘못이 아닌데.

한제는 어리고 약했다. 그래, 이만큼 용기를 내준 것도 가슴이 아리도록 고마웠다.

 

여자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한제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한제의 등이 가늘게 떨렸다. 여자의 눈에도 눈물 방울이 맺히고 떨어졌다. 한 갈래, 두 갈래, 곧이어 여러 갈래로, 멈추지도 않고.

 

빗소리는 두 사람의 울음도, 한숨도 모두 삼켜버릴 것처럼 거세졌다.

두 사람의 처음도 마지막도, 비에 그렇게 휩쓸려갈 것만 같았다.

 

 

-

 

 

"하, 한영... 윤한영. 아들, ...한영아.“

 

 

먹구름 때문에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 불이 켜지지 않은 방 하나.

중년의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남자의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눈을 감은 젊은 남자, 한영과 바닥에 번지는 검붉은 액체가 비쳤다.

 

하염없이 불러도, 몸을 흔들어 봐도, 한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들 옆의 원목 책상 모서리에는 마르지 않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은 서재 창문을 무참히 두드려 댔고, 난폭한 빗소리는 안개처럼 남자의 시야를 덮었다. 한영의 머리에서 새나온 피는 조금씩, 카펫을 적시며 그 영역을 넓혀갔다.

아이처럼 온몸을 떨며 휴대폰에 대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했고, 그들을 실은 구급차는 인근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는 고통 소리가 가득했다. 의료진은 방금 실려온 남자의 소식에 분주해진다. 들것 위에 누워 있는 한영의 후두부에서 새어나온 피가 꽃송이처럼 하얀 시트에 번지고 있었다.

 

 

"한영아, 한영아!!! 안 돼, 우리 한영이, 우리 아들...!!"

 

 

중년의 남자는 들것을 밀며 빠르게 이동하는 의료진 옆에서 무너질 듯 울부짖었다. 남자의 눈매는 일그러져 있었고, 손에는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한참을 '우리 아들', '한영아'를 외치던 남자는 들것이 수술실로 들어간 후에야 숨을 삼키며 대기석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남자의 혼란과 슬픔이 어떠한 기운으로 표현된다면, 수술실 앞 이 공간만큼은 남자의 기운으로 가득 찰 정도로, 그는 슬퍼하고 있었다. 숨막히게 아픈 마음이 번져갔다.

 

 

-

 

 

달칵-

 

"아, 안녕하세요!! 과외 모집한다는 글 보고 연락드렸었는데..."

 

"...아, 하하, 들어오세요.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 몰랐어요.“

 

"네, 감사합니다.“

 

 

아, 인상 정말 좋으시다. 학생 아버지인가 봐. 좋은 사람 같아.

 

산뜻한 봄바람이 불어와 어깨선을 조금 넘는 여자의 머리칼을 헤집는다. 여자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중년의 남자를 따라 2층짜리 주택에 들어선다.

 

 

여자는 얼마 전 골목을 지나다 한 전단지를 발견했다.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칠 과외 선생을 구한다는 내용. 과외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잠깐 망설였지만, 다른 알바를 그만두면서 생활비가 아슬아슬한 상태였기에 덥석, 그 '손'을 잡았다.

 

순조롭게 연락이 이루어지고 한제의 집을 방문하던 날은 바람마저 향기로웠다. 기대감과 설렘 때문이었을까. 이렇다 할 추억거리 하나 없던 삶에 특별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예감이 좋았다.

그 땐, 미래 같은 건 몰랐으니까.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는 걸로 하죠. 교재는 오는 길에 사서 오시면 되겠네요.“

 

"아, 네. 음... 한제라고 했지? 내일 보자. 아버님, 내일 뵙겠습니다.“

 

"네, 선생님.“

 

"하하, 보기 좋네요. 그럼 가시죠. 현관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여자는 '선생님'이라는 처음 듣는 호칭이 쑥스러워 살짝 상기된 얼굴로 주택을 나섰다. 이제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이제 행복한 일만 생길 거야.

 

여자의 고동색 눈동자는 햇볕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

"...하아.“

 

 

여자는 눈을 떴다.

 

허리까지 오는 고동색 머리칼이 시트 위에 흩어져 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다. 깼는데도 꿈이 생생했다. 처음 한제의 집에 갔던 날이 꿈으로 반복되었다.

아직 어깨선을 채 넘지 않던 생머리. 맑아 보이는 미소.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까지, 선명했다.

 

꺾어 버리고 싶을 만큼.

 

여자는 이불을 끌어안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어스름한 빛은 반투명한 커튼을 뚫고 여자를 비췄다.

 

 

여자가 입원한 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인근 병원이었다. 여자는 집으로 바로 가겠다고 했지만 힘없는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한제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진료 후 영양부족에 스트레스로 인한 잔병이 많아 단기간이라도 입원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여간호사의 말에 말릴 새도 없이 한제가 병원비를 계산해 버렸었다.

 

한제는 매일 여자의 병실에 들렀다. 그리고 여자는 한제를 통해 한영이 책상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심각하지 않다고. 후유증이 있을까 조금 걱정되지만 우선 상처만 아물면 퇴원할 거라고도 했다.

 

여자는 한영에게 미안하고 걱정도 됐지만, 한제 아버지가 하루종일 한영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말에 병문안을 갈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같은 병원에 매일 온다는 말에 여자가 몸을 흠칫 떨자 한제는 아버지에게 여자의 입원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 거라며 여자를 다독였다.

 

아직 그는 여자에게 악몽이었다.

잊을 수 없는 ,짙은 악몽.

 

-

 

 

“선생님. 옷 가지고 왔어요.”

 

 

시간은 흘렀고, 여자가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한제가 쇼핑백을 들고 여자의 침대로 다가왔다. 쇼핑백 안에는 여자가 지내던 서재 안쪽 방에 있던 옷이 들어 있었다. 여자는 미소지었다.

 

 

“고마워, 한제야.”

 

“선생님.”

 

“응?”

 

“...그간 죄송하고 감사했어요.”

 

 

한제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여자는 한제를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그런 한제의 얼굴을 모른 척, 되물었다.

 

 

“뭐가-.”

 

“...그냥, 다요.”

 

 

한제의 대답에 쇼핑백을 뒤적이던 손을 멈칫, 미소짓는 여자의 입꼬리가 살짝 떨린다.

 

 

“...나도, 고마웠어. 많이.”

 

“...뭐가요. 해드린 것도 없는데.”

 

“그냥, 다.”

 

 

여자가 한제의 대답을 따라하자 한제는 선생님 유치해요, 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도 웃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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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연우 2016. 12/29

가슴이 아프네요 .... 저렇게 웃는게 더 아파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