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5

 

주택에 들어선 시브는 내부를 둘러봤다. 밤이라 그런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원목 가구들과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 내부 인테리어가 대부분 원목이어서 그런지 따스함과 서늘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듯 했다.

 

1층 구석에 있는 방에 시브의 시선이 멈췄다. 방문은 보란 듯이 열려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큰 책장이 보였다.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고 그 옆에는 원목 책상이 있었다. 이 집에 어울리는 깔끔한 가구였다.

 

 

"어...?"

 

 

방 구석에는 문이 있었다. 눈에 띄지도, 그렇다고 감춰져 있지도 않은. 문고리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시브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문에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바삭-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에게서 죽음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곧바로 방문 앞으로 다가와서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문이 조금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익-

 

순간 문을 여는 그 순간이 느리게 보이면서 아까 느꼈던 감각이 살아났다.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한, 살아있는 듯한 떨림이.

 

시브는 아플 정도로 울려오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남자를 쳐다봤다. 어딘가에 고정된 남자의 시선은 사랑하는 연인을 보는 것 같았다. 애틋함, 동경, 애정, 그 가운데 아닌 척 숨어있는 갈증과 집착도 느껴졌다. 남자를 따라 시선을 옮긴 시브는 웅웅 울리듯 뛰던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방 안쪽, 작은 침대 위에 사람이 있었다. 달빛에 은은히 비치는 뺨에는 눈물 자욱이 선명했고, 간간히 떨리는 속눈썹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시브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왜. 왜 그랬어요.“

 

 

대답은 없을 걸 알면서도. 사신의 목소리가 인간에게 닿을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럼에도 닿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당신이...“

 

 

시브의 중얼거림은 거기서 멎었다. 심장 고동도, 숱하게 느꼈던 죽음의 감각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도 느꼈던 아득함을 느꼈다.

 

시브의 눈앞이 순간, 하얗게 덮였다.

 

 

-

 

 

한영의 팔을 붙잡은 여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영은 여자를 부축했다. 여자의 떨림이 서서히 멎었다. 한영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정신이 들어요?”

 

“...아.”

 

“괜찮아요.”

 

 

한영은 최대한 여자가 무서워하지 않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부드럽게 말했다.

 

 

"전 윤한영이라고 합니다. 한제 형이에요. 얘기 들으셨을지 모르겠는데.”

 

“...미국, 유학 중이라고...”

 

"들으셨구나. 맞아요. 오늘 들어왔어요.”

 

“한제, 한제, ...한제가 얘기해 줬어요.”

 

“네. 저한테도 과외 선생님 얘기 종종 했어요.”

 

“...네.”

 

 

오랜만에 되뇌이는 한제의 이름에 여자의 머릿속에는 얼핏 한제의 모습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실로 오랜만에 한제를 생각한 여자는 기쁘면서도 괴로웠다. 한제의 아버지를 엉망으로 만든 게 자신인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여자의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저, 괜찮아요?”

 

“...네.”

 

“그래요... 자, 이제 내 말 잘 들어요.”

 

"......”

 

“아버지 일은 미안해요.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지금은 급하니까.”

 

 

'아버지'라는 말에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건조한 입술이 튿어져 피가 새어나왔다. 여자는 멍하니 한영을 쳐다봤다. 한영은 단호한 얼굴이었다.

 

 

"우리, 지금 여기서 나갈 거에요. 내가 도와 줄게요.“

 

 

여자는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 말이 정말인지, 믿기지 않았다.

 

나가자는 말. 도와 준다는 말.

 

여자는 한영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비치고 목소리가 떨렸다.

 

 

"...고마워요...“

 

 

-

 

 

2층 한제 방에서는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최근 기침이 심해졌다. 횟수도 늘고, 심지어는 핏덩이를 토할 때도 있었다. 한제는 옆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유달리 생각났고, 그러면 또 선생님이 생각났다.

 

기억을 더듬던 한제는 보름 전 밤이 생각났다.

선생님이 ‘잡혀’ 와 있던 그 날이.

 

당시 1층에서 대화를 나누던 검은 복장의 낯선 사람들과 아버지의 대화에 따르면, 아버지가 돈을 써서 선생님을 '데려 온' 거였다. 처음에는 잘못 봤겠거니, 잘못 들었겠거니 했다. 아, 내가 많이 아프구나 했다. 꿈인가 싶고, 그랬으면 했고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한제는 뭘 해야 할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였다.

혈육이니 뭐니를 따지며 옳지 않은 일을 눈감는 것도 상당히 찝찝한 일이었지만,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친한 사람도, 변변한 친척도 딱히 없었고 하나뿐인 형은 머나먼 나라에서 유학중이었다. 형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한제는 몸이 아팠고, 누군가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윽고 남자들이 현관문을 나서면 아버지가 아직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는 선생님을 안아들고 안쪽으로 향했다. 서재 방향이었다. 의외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각도상 서재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조용했기에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 천이 펄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잠잠하다가 다시 무언가를 잠그는 소리.

 

한제는 이내 ‘창고’를 생각해 냈다. 그래. 그렇다면 가능했다. 이 소리도, 서재로 여자를 데리고 간 것도.

나중에, 나중에 확인하러 가야지. '나중에' 선생님을 꺼내 드리러 가야지. 아니, 정말 어쩌면, 이건 꿈일지도 몰라.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꾸는 악몽.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목이 간질거렸다. 한제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참았던 기침을 토해냈다. 몽롱함 속에서 눈이 감겼다. 다음 날부터는 전날 밤 일이 꿈인지 아닌지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심한 몸살이 걸렸었다. 며칠간 앓다 몸이 조금 나아졌다 싶을 때쯤 서재로 향했지만, 자물쇠로 잠긴 문과 안에서 들리는 흐느끼는 목소리, 내보내 달라며 문을 두드리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절망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생님을 부를 수조차 없었다.

자신은 이렇게 약해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희망만 주는 것 같아서.

 

 

"...켁, 쿨럭...!!"

 

 

잠깐 멈췄던 잔기침이 다시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한제는 기침을 달래며 문자를 확인했다. 한영에게서 온 문자였다.

 

 

-폰이랑 내 지갑 들고 내려와. 선생님 데려가자.-

 

 

선생님. 데려가자. ...선생님.

 

선생님이 정말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니라고,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형이 '아무것도 없잖아, 인마. 악몽 꿨네.'라며 웃으면서 돌아오길 바랬는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합리화가 깨졌다.

 

 

“하...”

 

 

한제는 한영의 지갑을 챙겨들고 방문을 열었다. 여전히 목이 간지러웠다. 기침은 멈추지도 않고 선생님의 그 마지막 모습처럼, 항상 조심스러웠던 행동처럼, 수업을 하던 조용한 목소리처럼, 그 아련한 잔상처럼 맴돌았다.

 

심장이 묵직했다.

 

 

-

 

 

한영은 빠른 손놀림으로 문자를 보낸 후 초조한 표정의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손을 놓으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나가서 병원에 데려다 줄게요.”

 

“...괜찮아요.”

 

“그래도... 후, 마음대로 해요. 근데 이러...”

 

“윤한영.”

 

 

갑작스레 한영의 말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한영에게도 여자에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여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만큼이나 놀란 눈을 하고서, 여자만큼이나 떨고 있는 그 사람이.

 

 

"아버지."

 

 

한영은 침착하려 애썼다. 여자는 한영의 팔을 더 꽉 잡았고 그걸 본 아버지의 표정이 변했다.

 

 

"...아버지. 이러면 안 돼요. 보내 드려야죠.“

 

"놔 드려라.“

 

"아버지, 모르시겠어요? 잘못된 거라구요!!! 비켜 주세요.“

 

"...놔!!! 놔 드려!!!“

 

"아버지, 제발!!!!“

 

 

겁먹은 것은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한영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아버지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라서, 그래서 한영은 겁이 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나라도 잘못되면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질까봐 겁이 났다.

 

 

서재 바깥에는 방금 내려온 듯한 한제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영은 여자를 등 뒤에 숨기고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아버지는 과격한 행동을 보이진 않았지만 여자에게 다급히 말했다.

그의 여유 없어 보이는 모습도, 한영에겐 낯설었다.

 

 

"서, 선생님, 가시려구요? 어딜요? 여, 여기가 좋지 않았어요? 선생님...!!!“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남자의 두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한영이 한 발 빨랐다.

 

 

"놔, 놔라, 윤한영. 한영아. 놔...!!“

 

"...이건 정말 잘못된 거에요. 한제. 데리고 가.“

 

"선생님은 여기가 편했을 거야. 훨씬 더 좋았을 거야. 어서 놔!!!“

 

 

한영은 아버지와 대치하며 여자를 한제 쪽으로 밀었고, 한제는 가늘게 떨리는 몸으로 여자를 받았다.

이미 눈이 반쯤 풀린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한영의 손을 뿌리치고 여자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한제. 어서.“

 

"한제야. 윤한영. 아빠 말 안 들을 거니? 놔, 좀 놔... 윤한영!!!“

 

 

한제는 선생님을 부축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는 아버지와 한영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거실을 지나 현관에 도착한 후 한제는 여자에게 슬리퍼를 신겨주고 현관문을 열었다. 싸늘한 바람과 함께 빗소리가 들렸다. 낮인데도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여자는 빗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제가 우산을 챙기는 동안 여자는 현관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여자의 손에 떨어졌다.

너무나도 오랜만인 '바깥'의 감촉에 여자의 손끝이, 속눈썹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깥 공기에 심장이 고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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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연우 2016. 12/29

비가... 더 쓸쓸하게 만드네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