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4

 

한영은 1층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한영은 그대로 1층 서재 구석 방, 어릴 때 한영과 한제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과 각종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방으로 향했다.

 

그 방은 가족들 사이에서 '창고'라고 불렸었다. '창고'는 많이 넓지는 않았지만 텅텅 비어 있어서 물건을 보관하기에도 좋았고, 어릴 적 한제와 숨바꼭질을 할 때도 유용하게 쓰인 장소였다. 그런 용도로 쓰기는 했지만, 창고 내부에는 따로 작은 화장실도 딸려 있어 사실 엄연한 하나의 방이었다.

 

그렇기에, ‘한제가 본 것‘이 정확하지 않더리도, 집에서 ‘누군가’를 숨기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한영은 짧은 심호흡을 한 후 창고의 문을 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에 걸린 자물쇠는 풀린 상태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열린 문 틈으로 ‘그녀’가 보였다.

 

 

"...아...“

 

"......“

 

 

한영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니길 바랬는데. 끝까지, 절대, 아니길 바랬는데.

 

여자는 한영의 등장에 놀란 듯 멍하니 서 있다 갑자기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영은 그런 여자가 언젠가 한제에게 들었던 대로,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고동색 머리카락도, 선한 인상도, 하얀 피부도, 항상 뭔가 슬픈 듯했던 그 눈동자도, 모두 다.

 

비틀거리면서도 끝까지 걸어온 여자는 한영의 팔을 붙잡았다. 여자의 다리가,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구타를 당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아 보였지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힘이 많이 없어 보였다.

 

한영은 여자가 넘어지지 않게 부축했고, 여자의 입에서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도와... 주세요."

 

 

-

 

 

나로는 시브가 없는 장미 화단에 한참을 누워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브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지도. 이미 죽은 사람인데 왜 장미 화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서 자꾸 시간을, 감정을, 기억을 찾으려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로는 문득 시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까지고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지겹게 봐온 시브의 은빛 머리카락과 피처럼 검붉은 색을 띄는 은발의 끝부분. 나로를 돌아보던 투명한 벚꽃색 눈동자. 날카로운 눈매와는 상반되는 처연한 눈빛. 미소를 지어도 슬퍼 보이던 진한 다홍빛 입술.

 

모두 선명했다.

지나치리만치 선명했다.

 

나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나로의 눈앞에는 어두운 밤하늘과 고급진 주택이 있었다. 시브의 화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 세상이었다.

나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나로는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여기서는 문제의 답이 나올 것 같았다. 나로는 몸을 일으켰고 다음 순간, 어둠 속에 스미듯 사라졌다.

 

 

-

 

 

여자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바닥은 푹신했고 몸 위로는 부드러운 천이 덮여 있었다. 여자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위쪽에 위치한 작은 창문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방 안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여자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구조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방이었다. 간단한 살림살이가 구비되어 있었지만 왠지 모를 싸늘함이 있었다.

 

여자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기억해 내려 했지만 사고(思考)는 생각보다 훨씬 느렸고, 한참이 지나서야 이전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집으로 가던 도중 어두운 골목에서 덩치 큰 남자들에게 쫓겼었다. 그리고 나서는? 겨우 집에 들어가서 문을 잠궜는데, 집 안이... 그래, 누군가가 들어왔던 것처럼 어질러져 있었다. 다음에는 문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고, 잡혀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뒤늦은 공포가 밀려왔다. 혼란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는 것.

 

하지만 악의적인 의도의 납치하고 하기에는, 이 방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여자를 위해 준비된 방인 것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느낀 부드러운 이불과 방에 은은하게 감도는 향기까지도.

 

그 괴리감이 여자를 더 불안하게 했다.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분명 처음 보는 방인데도 그 온기와 향기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여자는 지금 이 상황도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당장 휴대폰을 찾아 신고를 하고,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 판에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익숙해서...

 

 

끼익-

 

"...어, 선생님.“

 

"......"

 

"...하하, 빨리 일어나셨군요. 갈아입을 옷은 행거에 걸려 있습니다. 골라 입으세요. ...샤워하시려면 안쪽에 화장실이 있으니까 사용하시면 돼요. 아, 조금 오래 주무신 거 같은데,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살며시 방문을 밀고 들어온 남자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멈칫하더니 말을 걸며 들어왔다. 그는 평소의 인자한 표정과 말투로 여전히 여자에게 무언가를 권하고 있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머릿속을 채운 말은 하나뿐이었다.

 

설마. 설마. 설마.

 

확인이 필요했다. 아닐 걸 알지만 그래도 확인은 필요했다.

 

여자는 조심스레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고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여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말할 때마다 남자의 눈가와 입 옆의 주름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늘 봐왔던 미소였지만 달랐다. 한제가 있을 때 짓던 미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저, 한제 아버님. 저를 어디서...“

 

"네?“

 

"제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여긴... 어디죠?“

 

"아아, 여기는 저희 집입니다만. 안 쓰던 방을 좀 꾸며봤죠.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다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핀트가 뭔가 어긋난 것 같았다. 여자가 궁금해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한다.

 

제발.

설마.

제발.

설마.

 

여자의 입가에 살짝, 어색한 미소가 번진다. 남자의 표정은 중학생이 처음 하는 고백에 스스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쑥스러움과 머쓱함이 섞인 그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이며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애틋함이 번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의 입이 열리고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선생님.“

 

 

...제발.

 

 

시간은 흘렀다. 잔인하게도 멈추지도 않고 흘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감각도 없었다. 1주? 2주? 어쩌면 그보다 더 지났을지도 모른다. 벽에 시계가 걸려 있었지만, 날짜가 없으니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여자는 매일같이 방문을 두드리며 내보내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하지만 방음이 잘 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평소에 문 밖에는 사람이 없는 건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남자가 식사를 챙겨 주거나 잘 계시는지 보러 왔다며 잠깐 얼굴을 비칠 때를 제외하고는 문도 열린 적이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해 보기도 했지만 남자는 점잖은 미소를 띄고 여자를 일으켜 줬을 뿐, 다른 어떤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는 핑계도 대 봤지만, 남자는 약을 사다 주겠다, 정 힘들면 의사를 집으로 부르겠다며 여자를 도닥였다.

 

어떤 것도 여자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남자는 확실히 이전보다 친절했다.

아니, 중간에 딱 한 번 남자의 무서운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한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남자는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여자를 한참이나 쳐다봤었다. 결국 여자가 죄송하다고 말하기 전까지 남자는 절망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그 때부터 행여 남자와 대화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여자는 갇혀 있던 도중 어차피 나갈 수 없을 바에야 그냥, 이대로 주는 걸 받으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었다. 실제로 남자는 여자에게 필요한 건 다 제공해 줬으니까.

 

그래도 여자에게는, 여자에게도 가족이 남아 있었다. 연락이 오랫동안 안 되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다. 여자의 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 만에 하나 찾아온다면 엉망이 돼 있는 방을 보고 기겁하실 게 뻔하다.

 

싫다. 싫어. 어쩌지?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 ...나갈 수 없어.

 

생각이 이리저리 얽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을 없애보려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은 채 맴돌았다.

 

 

"후...“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세수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장 머리에, 몸에 찬 물을 끼얹지 않으면 손목이라고 그을 것 같았다. 남자가 주는 밥을 대부분 먹지 않아 한 걸음 내딛을 힘도 없었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때, 기적처럼 문이 열렸다.

 

 

끼익-

 

"...아.“

 

 

낯선 남자가 보였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본, 한제 아버지가 아닌 외부인이다. 누구지? 무슨 일이지? 대학생 같은데, 뭐하는 사람이지? 처음 보는데.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보지만 과부하가 걸린 머리는 생각조차 힘들었다. 그러던 중 문득,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 사람이 자신을 여기서 빼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았다.

 

잡아야 한다.

잡아서 애원하고 부탁해서,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잡아야 한다.

 

여자는 비틀거리며 남자에게 걸어갔다. 남자는 말없이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봤다. 이윽고 남자의 앞까지 온 여자는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넘어지기 직전 반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잡았고, 남자도 여자를 부축했기에 쓰러지지는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 남자가 자신을 내팽겨치기 전에, 다시 방 안쪽으로 데려다 놓기 전에, 말해야 했다.

 

나가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여자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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