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3

 

붉은 장미꽃이 가득한 작은 화단. 시브는 어딘가 가려는 듯 화단을 빠져나왔다. 나로는 언제나와 같이 짙푸른 눈동자로 시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브는 화단의 장미꽃 중 한 송이를 손에 쥔 채 나로를 바라봤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 보였지만 벚꽃잎을 떠올리게 하는 연한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끝났으면 좋겠네요.“

 

"그럴 리가.“

 

 

나로는 코웃음을 쳤다. 시브는 그런 나로를 향해 살짝 미소짓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신'으로써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의 영혼을 거두러 가는 거였다.

 

나로는 장미 화단으로 들어가 시브가 그랬던 것처럼 중간에 누웠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린 나로의 입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한, 듣지 못할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러고 있으면, '잠'이라도 들 수 있는 건가."

 

 

-

 

 

어두운 골목을 지나는 여자가 있다.

골목에는 가로등이 몇 대 있었지만, 반 정도는 수명이 다한 듯 꺼져 있고 남아있는 반 마저도 불빛이 깜빡이는 걸 보니 오래 가지 못할 듯 싶었다. 여자는 문득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지만, 사람은커녕 도둑고양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방 끈을 쥐는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2주째였다.

분명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뒤돌아 보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희미한 가로등에 비춰진 흐린 그림자라면 본 적이 있었다. 여자는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가 떠올라 걸음을 빨리했다.

 

여자는 집에 도착해서도 몇 번이나 문이 잠긴 걸 확인했다. 그래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듯, 부스럭 소리만 나도 화들짝 놀라곤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경비가 부실한 낡은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여자로써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학교와 알바에 치여 사느라 변변한 친구도 하나 없던 여자는 방 구석에 웅크린 채 한제를 생각했다. 한제의 미소를 상상하면 조금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여자에게 있어 한제는 특별한 존재였다. 여자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여자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한제에 대한 여자의 마음은 부러움과 동질감이 뒤섞인 무언가였다.

 

여자는 한제의 미소를 생각하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안심한 듯 피식 웃었다. 요즘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다고 털어놓자 조심하라며 걱정해 주던 한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후로는 과외를 할 때마다 요즘은 괜찮냐고 물어왔었다.

 

그러다 또 문득, 한제 아버지가 떠올랐다.

한제 아버지는 계속 여자에게 접근했다. 과외 이야기 말고도 일상적인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었고 과외가 없는 날에도 매일같이 문자가 왔다. 내용만 보면 단순한 안부 인사처럼 보이지만 여자가 느낀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그런 사람이 자신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그런 행동이 불안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여자는 피곤한지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 조금 남아있는 불안감 속에서 여자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일주일 후-

 

 

"헉, 헉, 허억...!!!”

 

 

여자는 어두운 골목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채로 내달렸다. 등 뒤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덩치 큰 남자들이 여자를 쫓고 있었다. 이유도 모른다. 평소처럼 집 앞 골목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들이 여자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그대로 흘러내렸다. 멈추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여자는 흐느끼면서 숨도 없이 달리기만 했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쾅-

 

“헉, 헉, 하, 하아......”

 

쾅쾅- 쾅-

 

“하아...흑. 하. 헉... 흐윽...윽... 흑...”

 

쾅- 쾅-

 

 

겨우 집에 도착해 문을 걸어잠근 여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덜덜 떨리는 무릎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등 뒤에서는 현관문을 발로 차는 듯 요란스러운 소리와 욕설이 들린다.

 

여자는 정신없이 골목 사이사이로 도망치느라 긁히고 부딪혀 몸 여기저기에 피가 나고 멍이 든 상태였다. 이제서야 고통이 느껴지는지 여자는 자신의 몸을 부여잡았다. 그 때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숙인 여자의 눈에 띈 무언가. 여자는 조심스레 그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헉.”

 

 

여자는 숨을 삼켰다. 장미 꽃잎이 있었다. 한제 아버지가 종종 건네던 장미꽃이 생각났다.

방을 둘러보니 장미꽃 여러 송이와 그 꽃잎, 그리고 물건들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었다. 여자의 방은 마치, 이미 누군가가 헤집고 나간 것 같았다.

 

그걸 인지한 여자의 몸은 가늘게 떨렸고 일순,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여자가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남자들은 우악스럽게 여자를 붙잡고 끌어냈다.

여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시브는 여느 때와 같이 밤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발 아래 펼쳐진 네온사인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시브는 새삼 누릴 수 없는 공기, 바람을 누리고 싶었다.

자꾸만 잃어버린 기억과 ‘삶’에 욕심이 생겼다.

 

시브는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켜 봤지만 역시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시브의 연한 눈동자는 네온사인 빛을 받아 이제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은하수처럼, 그렇게 빛났다.

 

잠시 아래를 바라보던 시브는 이내 죽음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순식간에 이동한 시브의 눈 앞에 보인 것은 화려한 네온사인 대신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리는 가로등 몇 개와 허름한 5층짜리 빌라였다. 왠지 들어가기 싫었다. 허름한 외형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무거웠다.

 

시브는 홀린 듯 한 집의 문 앞으로 이동했다.

낡은 문을 마주하자, 갑자기 심장이 뛰는 소리가 쿵쿵, 하고 들렸다. 시브는 황급히 왼쪽 가슴에 손을 짚었지만 심장은 없었다.

이상했다.

 

무언가에 홀린 걸까? 아니, 자신이 사신인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심장이 없는 사신이 심장 소리를 듣다니.

얼른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여기 있다간 자신이 살아 있다고 착각할 것 같았다.

 

 

집 안으로 이동하자 바닥에는 장미꽃과 그 꽃잎, 물건들이 흩어진 바닥이 보였다. 시브는 방 안의 광경에 다시금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무리 심장 부근을 움켜잡아 봐도 심장이 뛸 리는 없는데, 계속 자신이 살아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시브는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한 발을 내딛은 순간 이미 다른 장소였다. 이번에는 조금 규모가 큰 주택 앞이었다. 시브는 방금 전 일을 회상하려 했지만, 방금 전 본 것, 느낀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악몽을.

 

시브는 고개를 내젓고 주택을 바라봤다. 죽음이 있었다.

주택 안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는 시브의 손에 쥔 장미꽃이 힘없이 흔들렸다.

 

 

-

 

 

"아버지, 오랜만이에요.“

 

"그래. 가방 놓고 내려오렴. 얼마나 있을 거라고 했지?“

 

"한 달이요."

 

 

건장한 체형의 남자가 들어섰다. 그의 짐가방에는 ‘Han-young Yoon’이라고 적힌 네임카드가 달려 있었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아버지를 따르고 좋아했다던 한제의 형이었다.

 

한영은 유학을 가기 전에도 공부와 알바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기에 항상 집이 그리웠고, 한국이 그리웠고, 아버지와 동생이 그리웠다. 그래서 한국에 나올 때마다 벅차고 즐거운 기분으로 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 한제 과외는 어때요?“

 

"어? 응, 잘 하고 있어.“

 

"다행이네요. 한제 말로는 요즘 과외 안 한다던데. 무슨 일 있으시대요?“

 

“크흠... 어서 가방 놓고 오너라.”

 

 

전화로 잠깐 들은 것뿐이지만 평상시와 다른 동생의 말투, 목소리가 이상했다. 가뜩이나 무거운 동생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계속 말을, 눈을 피하는 아버지가 신경 쓰였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이나 말을 모른 척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는, 한제나 자신이 걱정하는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어야만 했다.

 

한영은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둘 사이에 흐르던 묘한 침묵을 깬 것은 조금 가라앉은 한제의 목소리였다.

 

 

"...형, 왔구나.“

 

"아! 한제. 몸은 괜찮아?“

 

"괜찮아. 형, 그거...“

 

"아, 그래. 아버지, 잠깐 한제 방에 갔다 올게요.“

 

"어어, 그래.“

 

 

아버지는 건성건성, 몇 가지 말을 반복했다. 한영은 그런 아버지의 대답에 씁쓸한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한제의 방으로 올라온 후, 한영은 방문을 닫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제를 향해 말을 걸었지만 한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책상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하, 분위기 별론데?“

 

"......형.“

 

"어.“

 

 

한영은 한제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한제는 한영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언제부턴가 집 근처에 누가 있는 거 같다고 하셨었어.”

 

“응.”

 

“그리고 2주 정도 지나고 나서부터 갑자기 안 오셨었어. 난 선생님 번호도 모르고, 안 오신다는 것도 아버지 통해 들었는데, 아버지는 계속 당분간 안 오실 거라고만 하고.”

 

 

한제는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말이 조금 빨라졌고, 말 끄트머리가 약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영은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동생의 작은 등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영은 시선을 돌렸다.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좀 미심쩍어도 그런 줄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한제에게서 호흡을 가다듬는 듯,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 끝의 떨림이 한영에게도 전해졌다. 한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 선생님 봤... 거든.”

 

“...응.”

 

 

한영은 한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제는 한참을 우물쭈물, 불안한 눈동자만 굴리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제의 다음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아니, 어쩌면 딱 생각했던 만큼 충격적이었다.

 

한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한영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제는 그런 한영에게 계속 손끝으로 지분거리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안... 드셨더라.“

 

"...얼마나?“

 

"내가 찾은 건 4달분 정도야."

 

 

한제가 내민 것은 약 봉투였다. 한제의 책상에는 약 봉투가 몇 개 더 쌓여 있었다. 한영은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한제의 눈을 마주하고 수고했어, 라는 한 마디를 끝으로 망설임 없이 한제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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