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2

 

"선생님, 오늘 저녁 같이 하실래요?“

 

"괜찮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여자는 남자를 거절했다.

 

요즘 남자는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한제 일이라는 핑계라도 대고 담소를 나누거나 한 게 다였지만, 최근에는 작정한 듯 여자에게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것들을 요구했다.

 

여자는 차라리 대놓고 설마, 설마 저를 좋아하시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대답이 무엇이건간에 '좋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여자가 불편해서라도 그만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미 여자 인생의 대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이 관계를 잃게 된다는 말과 같았다.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싫었다.

 

 

"아이고, 선생님. 휴일인데도 나와 주시고, 감사합니다. 오늘 수업은 이쯤 하고 산책이나 하시죠.“

 

 

그건 싫었다.

 

 

"아...네, 그게 좋겠네요. 한제도 같이 가는 거죠?“

 

"...흠, 그럼요. 한제, 준비하고 나가자."

 

 

그나마 한제를 사이에 두는 게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거절한 적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제와 같이 한다는 조건 하에 웃으며 넘어간 여자였다. 이렇게 밖에 나오기라도 할 때면 한제는 말없이 뒤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걸었다.

 

여자는 그것도 싫었다. 왠지는 모르지만 한제에게 상처를 주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온 김에 식사라도 하고 들어가시죠?“

 

"아...“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작은 성의의 표시니까요.“

 

 

여자는, 어떻게든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는 없을 것 같은 이 관계를.

 

 

"...네. 감사합니다.“

 

 

-

 

 

나로는 시브의 곁이 아닌 곳을 맴돌고 있었다. 어차피 시브의 장미 화단이 아니면 갈 곳도 없어 그저 발이 가는 대로, 앞, 아니, 앞이라고 믿는 곳으로만 향하는 것일 뿐이지만.

 

나로는 조금 전 시브의 반응을 회상했다.

 

 

'...나로 님.'

 

 

시브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금 잠겨 있었다. 울먹거리는 것도 같았다.

 

'사신'에게 '눈물' 따위는 없겠지만.

 

 

'오늘은 세 명의 영혼을 거뒀어요.'

 

'......'

 

'어제는 다섯 명이었어요.'

 

'......'

 

'여기서 오늘 내일 하는 개념은 없지만, 전 그랬어요.'

 

 

나로는 대답 없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처연히 장미꽃 위로 흩날리는 시브의 은발을 바라볼 뿐이었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면 내일이겠죠.'

 

 

나로는 잘 들리지도 않는 시브의 말소리를 거기까지 듣고 뒤돌아 걸었던 것 같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나로는 뭐든 아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도 시브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시브가 인지하는 '감정'도, '감각'도, 나로에게는 없는 '현실'이 시브에게는 너무도 많았다.

 

나로는 피식, 쓴 웃음을 뱉고는 자리에 멈춰 섰다. 시브의 말대로 눈을 길게 감았다 뜨는 게 하루가 지나는 것이라면, 나로는 이제야 첫째 날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로의 눈꺼풀이 감겼다.

 

 

-

 

 

"한제. 선생님과 나눌 얘기가 있으니 먼저 들어가 있어."

 

"...선생님도 들어가셔야죠. 아버지도 저랑 가요.“

 

"네, 그러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대접할게요.“

 

"아니, 그래도... 크흠... 그러시다면야..."

 

 

여자는 점점 난감해지는 상황에 어쩔 줄 몰랐다. 여자의 고동색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여자는 어릴 적부터 처절하고 치열하게 살아오느라 20대 중반을 들어서면서도 그 흔한 연애도, 짝사랑도 해 본 적 없었고, 더군다나 이런 일은 겪은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어디로든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한제는 그런 여자를 간간히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여자의 편을 들었지만 아버지는 정말이지 끈질기게도 여자를 붙잡았다. 한제는 언젠가부터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아버지는 여자에게 과외 외적인 일로 연락을 했고, 여자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한제가 동석하는 조건을 걸어 종종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버지는 여자에게 장미꽃을 선물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 자주 가지고 오셨던 장미꽃을.

 

아버지의 연락은 날이 갈수록 잦아졌고, 마지막으로 봤던 선생님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집 근처에 이상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리고 10일쯤 전부터 여자가 오지 않았다. 한제는 아버지에게 선생님에 대해 물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과외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제는 불안했다.

 

집 근처에 이상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여자의 말이 떠올랐고, 귀찮을 정도로 여자에게 연락을 해대던 아버지도 떠올랐다.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많은 생각이 뒤섞였다.

 

그 때 한제의 방에 은은하게 흐르던 음악 사이로 잘 쓰지도 않는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어릴 때부터 아팠던 몸 탓에 사람을 제대로 사귀지 못 한 터라 연락이 올 곳이라고는 뻔했다. 한제는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여, 한제, 요즘 몸은 좀 어때? 아버지는 잘 계시고? 약은?]

 

"그럭저럭. 아버지... 약은 모르겠어. 형은 어때?“

 

[나야 뭐. 네 걱정이나 해.]

 

"하하. 응.“

 

 

한제는 통화를 하며 침대 옆에 놓인 가족사진을 바라봤다. 사진 속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다, 문득 어머니의 모습에 과외 선생님이 겹쳐 보였다. 예전부터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닮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한 번 불붙은 생각은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 아버지의 최근 행동으로 이어졌다. 침착해졌던 한제의 눈동자가 다시금 불안한 듯 흔들렸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자꾸만 젊은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과외 선생님과 겹쳐 보였다.

 

아버지가 지독히도 '사랑했던' 어머니를.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가 끝까지 놓으려 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연이어 최근 아버지의 행동에 난감해하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이대로는 안 된다, 고 생각했다.

 

 

"있잖아, 형...“

 

[응. 말해.]

 

"아버지가 계속, 과외 선생님을... 쫓는 것 같은데, 어떡해야 하지?"

 

[과외... 아, 저번에 얘기했던 사람?]

 

"응. 어머니한테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을 찾아."

 

[...무슨 일이야.]

 

 

전화 너머, 한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아니, 단호해졌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한영은 언제나 한제의 속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한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 나 다음 주에 한국 가니까 그 때 얘기하자.]

 

"...어? 아, 그랬지. 응...응."

 

[...그래.]

 

 

통화는 그대로 끊어졌다. 한제는 그래도 한영과 통화를 하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형이 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고, 다 해결될 것 같았다. 그래야만 했다.

 

잠시 꺼진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던 한제의 시선이 책꽂이로 향했다. 한제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책을 꺼냈다. 괜히 책 표지를 문질렀다. 제목은 없었다. 한제가 병상에 있던 어머니에게 선물로 드렸던 다이어리였다. 어머니가 다이어리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일부러 형과 용돈을 모아 이때까지 쓰시던 다이어리와 비슷한 걸로 샀었다.

 

사락-

 

첫 페이지를 펼쳐 보면, 서툰 한제의 글씨체와 단정한 어머니의 글씨체가 보인다.

 

 

-엄마, 사랑해요! 한제가.-

-예쁜 아들 한제, 사랑해.♡-

 

 

그리고 다음 페이지부터, 어머니의 글씨는 없다. 엄마는, 얼마 안 가 돌아가셨으니까.

 

한제는 1년 전, 아직 그대로 남겨진 어머니 방에서 다이어리를 가져와 책장에 꽂아 뒀었다. 이제는 다이어리에 담긴 어머니의 생각을 이해할 정도는 되니까. 그리고 찬찬히 어머니의 다이어리를 읽다 읽다, 이해하다 이해하다, 이해하지 말 걸, 하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알지 말 걸.

 

한제는 조금 더 낡은 다이어리를 꺼내 종이를 한 장, 두 장, 넘겼다. 약간 퀘퀘한 냄새가 배어나왔다. 읽고, 읽고, 또 읽었던 어머니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페이지를 넘기자,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더 버틸 수 있었던 어머니를, 사지로 내몬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사실 그 다이어리는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한영과 한제를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고 특히 한제의 형 한영에게는 평생의 멘토지만, 어머니를 너무 '사랑'해버린 탓에 집착 또한 강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증상이 나타기까지 했다. 어머니 근처에 아들들도 가까이 두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를 '독차지'하려 애썼고, 그렇게 미쳐가는 듯 보였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체념 섞인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다이어리에는, 어머니의 불안감과 걱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마지막 표정을 기억해 보면, 왠지 어머니의 아픈 감정이 묻어나는 듯 했다. 한제는 아버지가 여전히 불안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다이어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한동안 집에만 계시다 언제부턴가 상담도 받고, 약도 처방받으면서 증상을 이겨내려 애쓰셨다. 증상은 서서히 회복되어 갔고, 조금씩 '예전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끔, 우연히 어머니 얘기가 나올 때면 며칠간 예의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곤 했다.

 

 

'안녕하세요! 저, 과외 구하신다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1년 전쯤, 한 여자가 과외 선생님 모집 공고를 보고 연락을 취해 왔다. 처음 여자를 봤을 때는 그냥 작고 하얀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웃으며 살아가는 여자를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몸이 아픈 자신은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작은 여자가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여자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생각해 보면 여자가 온 이후 아버지는 어머니 얘기가 나와도 예전처럼 슬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들떠 보였다. 한제는 반복되는 생각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예민해서 그런 거다. 생각하다 보니 진짜인 것 같은 거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래도, 이제 형이 곧 오니까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한제는 다이어리를 원래 자리에 꽂아두고 방을 나섰다. 불안감을 씻어내고 싶었다.

 

 

"...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한제의 몸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한제는 들킬세라 벽 뒤에 몸을 숨겼다.

 

계단 난간을 붙잡는 한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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