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01

 

고급스럽고 깔끔한 넓은 방.

그 가운데 놓인 침대에 이불을 덮은 채 일어나 앉은 남자와 침대 옆 간이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반응에 환히 웃어 보인다.

 

 

"넌 정말 머리가 좋은 것 같아. 부러워, 한제야.“

 

"아니에요. 선생님이 잘 알려줘서 그렇죠.“

 

 

여자의 말에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남자, 한제는 누가 봐도 느낄 정도로 창백했다.

 

아픈 사람.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한제를 차분한 미소와 함께 빤히 바라보는 여자는 고동색 머리칼과 어울리는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자에게서 한제와 비슷한 가녀리고 연약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정말, 좋은 일자리를 얻은 것 같네."

 

 

한제는 그런 여자의 말에 이번에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여자는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해 각종 알바로 생활을 이어 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과외 선생님 모집 공고를 봤고, '운 좋게도' 부잣집 도련님의 과외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부잣집이라 그런지 급여가 높은 것은 물론이고, 한제와 한제 아버지의 차분하고 점잖은 성격에 여자는 가정교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이 과분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여자는 그래도 행복했다.

 

 

"오늘도 수고했어, 한제. 참, 나 내일은 못 온다? 너한테 말했었지?“

 

"네. 부모님 오신다면서요.“

 

"응. 오랜만에 뵙는 거니까...“

 

 

여자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

 

여자는 대학 진학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었고, 부모님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알바를 하느라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부모님께서 여자를 보러 오신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사정을 아는 한제는 여자를 위로하기 위해 평소보다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자가 과외 일을 '좋은 일자리'라고 생각하게 된 건 높은 급여나 좋은 대접도 있지만, 한제를 만난 것 때문이 컸다. 몸이 약해서 침대 밖으로 자주 나올 수는 없지만 그 대신인 걸까. 착한 심성을 가진 한제로 인해 여자는 많이 위로받았다.

 

 

"...너도 형이 많이 보고 싶을 텐데.“

 

"형이야 뭐, 자주 연락하니까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네."

 

 

여자는 한제 방 장식장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은 조금 오래 됐는지 끝이 약간 바래 있었다. 사진 속에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아이가 앞에 서 있고, 그 뒤에는 청순하고 가녀린 여자-미인형으로 한제의 어머니이시고, 10년 전쯤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와 호남형의 남자가 미소짓고 있었다. 한제 옆의 남자아이는 한제의 형, 한영으로 미국 유학을 갔다고 한다.

 

한제는 여자에게 형 얘기를 꽤 자주 했다. 정말 남자답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유달리 아버지를 잘 따른다고도 했다. 하지만 한제 자신은 어머니를 훨씬 더 따랐고, 아직도 어머니가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래서 여자는 한제의 그리움도 자신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선생님. 오랜만에 부모님 뵙는 거니까 좋은 시간 보내고 와요.“

 

"고마워. 그럼 가 볼게.“

 

똑똑-

 

"선생님, 수업은 끝나셨...아, 지금 가시는 건가요? 한제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여자가 가방을 들고 막 일어섰을 때 짧은 노크 후 방으로 들어온 것은 인자한 인상의 중년의 남자. 한제의 아버지이자 여자의 고용주이기도 했다.

 

한제의 아버지는 여자의 손을 덥석 잡고 말을 이어갔다. 종종 감사하다며 여자의 손을 잡았지만, 사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남자에 대한 신뢰를 생각하며 넘어갔던 일이었다. 한제는 아버지의 손에 감싸진 여자의 손을 보고 있었고, 남자는 그저 인자한 표정으로 여자의 손을 토닥였다. 여자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예의바른 미소를 지었다.

 

 

-

 

 

"시브.“

 

 

은발의 여자, 시브가 작은 장미 화단 중앙에 누워 있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색을 띄는 은발의 끝자락이 검붉은 장미꽃과 썩 어울렸다. 그 뒤에서 짙푸른 기운을 가진 남자, 나로가 시브를 불렀지만 시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시브의 벚꽃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나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시브의 눈동자가 멈췄다.

 

 

"네 기억은 언제 돌아오지?“

 

 

그들은 그랬다.

시브는 사신이었고, 사신은 자살한 인간의 영혼.

 

인간이었을 때 무언가 죽을 만큼 괴로워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신이 된 후, 그들은 그만큼 괴로웠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사신으로써 존재하다 괴로웠던 감정만큼의 '소비'가 끝나면 '보통 영혼'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신들은 이 현상을 '해방'이라고 불렀지만 시브는 '소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게요."

 

 

나로의 질문이 닿은 지 한참 만에 시브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른 사신들이 기억을 되찾고 '해방'되는 동안 시브의 기억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후회가 더 괴로워 사라지고 싶었지만 사라질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같은 사신도 아닌 묘한 존재로 시브의 옆을 지킨 나로는 지금 그걸 묻고 있는 거였다.

 

 

"언제가 돼야 사라지는 거지?“

 

 

시브의 기억을.

시브의 '소멸'을.

 

 

"도대체 언제가 돼야 기억해 내는 거야.“

 

 

닿지 않는 시브의 후회를 묻고 있는 거였다.

 

시브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희미해졌다. 그런 시브를 재촉하듯, 그리고 원망하듯 나로는 그 짙은 눈동자로 시브의 투명한 눈동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시브는 눈을 지그시 감았고 나로는 하늘도 없는 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랬다.

시브는 저승에서 누구보다 사라질 수 없어 괴로워하는 존재였고, 나로는 그런 시브의 괴로움을 일깨워 주는 것이 전부였다.

 

 

-

 

 

여자는 한제 아버지의 요청에 담소를 나누다 문득 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제 방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쳐다보는 여자의 순한 눈매에 약간의 불안감이 떠올랐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여자 스스로에게도, 한제와 한제 아버지에게도 민폐라는 생각에 짐을 챙겨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내일 부모님도 오시니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모님이요? 아- 내일 일 있으시다는 게...“

 

"네. 오랜만에 뵙는 거라서요.“

 

 

여자는 싱긋- 웃으며 일어섰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태도에 사뭇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여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아이쿠, 그럼 제가 시간을 뺏은 셈이니 차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아직 버스도 있고,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여자는 벗어나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님께 드릴 선물 포장도 덜 했고, 부모님께 작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보여드리려면 채 못 한 욕실 청소와 설거지도 마저 해야 한다. 한제 아버지는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어떻게든 여자와 대화를 이어가려 했지만, 여자는 그 현실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여자는, 이 공간을 부담스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큰 의미인 이 일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음은 어색했다. 여자는 그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얼른 미소짓고 겉옷을 챙겼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한제에게 눈인사를 한 후 여자는 그 집을 나섰다.

 

여자가 현관과 조금 떨어져 있는 대문을 나선 후 뒤를 바라보니 2층짜리 주택이 보였고, 한제와 한제 아버지가 현관문 앞에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래, 여기까지. 여자는 지금이 만족스러웠다.

 

 

-

 

 

시브는 여느 때와 같이 장미꽃으로 가득한 화단에 누워 있었다. 이 작은 장미 화단은 오직 나로만이 주변을 맴돌 뿐인 시브만의 공간이었다.

 

 

"아직도 기억은 없나 보네. 이러고 있는 걸 보면.“

 

"......“

 

"여전히 대답도 없고.“

 

 

최근, 시브의 후회는 점점 더 짙어졌다. 자신이 왜 사신이 됐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사신이 됐다면 자살을 했다는 건데, 그만큼 괴로웠던 기억이 뭔지,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이 곳의 법칙이 그렇다 하지만, 사실 시간 개념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싶었다. 나로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은지도 꽤 된 것 같다.

 

 

"...나는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죠?“

 

 

시브가 정적 속에서 말을 꺼냈다. 나로는 시브의 장미꽃을 하나 하나 꺾으며 무심히 대답했다.

 

 

"그러게.“

 

 

시브는 절박했다.

알지도 못하는 기억 때문에 얼마의 시간인지도 모를 시간을 웅크리고 지내 온 만큼 절박하고, 무서웠다.

 

 

"나도 알고 싶어.“

 

 

나로는 중얼거렸다.

 

 

"네가 기억해 내야 나도 널 기억할 수 있어."

 

"그게 무슨...뜻이죠.“

 

 

나로는 대답없이 돌아섰다. 돌아서서 그대로 시브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나로는 시브에게 있어 너무나도 무책임한 존재였다. 시브는 안달이 나서, 괴로워서, 아파서 무너져만 가는데 그런 시브에게 비웃음 말고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책임해야 했다. 애초에 나로는 시브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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