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시나브로

#10

 

‘선생님... 선생님...!!’

 

 

안 돼. 곧 열릴 거야. 도망갈 수 없어. 또 잡힐 거야. 이번에 잡히면 도망치지 못할 거야.

 

불안감이 치솟았다.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악순환에 여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끝내려면 여자가 떠나던지, 저 사람이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불리한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자는 가난하고 처절한 학생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방법이 없었다.

 

감정이 극에 달하자 이제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졌다.

여리지만 강한 여자의 마음이 날카롭게 빛났다.

 

 

주위를 살피는 여자의 눈동자에 과일을 먹느라 꺼내놓은 과도가 보였고, 다음 순간, 과도는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여자의 눈빛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과도를 움켜잡은 여자는 금방이라도 툭, 하고 끊어질 듯 아슬아슬한 문고리를 바라봤고, 밖에 서 있는 남자의 외침과 문고리를 쳐대는 소리는 조금도 멎지 않았다. 여러 가지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눈에 과도를 쥔 자신의 손과 칼날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고, 머릿속에서는 무언가 휘몰아치다가, 올라가다, 올라가다, 결국은, 툭, 하고 끊어졌다.

 

콰앙- 끼이-

 

문이 열렸다.

 

 

“선생님!!!! 선...!!!”

 

 

남자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저번보다 퀭하고 헬쓱해진 남자의 한 손에는 벽돌이 들려 있었다. 떨어진 문고리가 엉망이 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자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벽돌을 놓았고, 벽돌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기울었다. 남자의 눈동자도 여자를 따랐다.

 

여자는 지금, 정말 슬펐다.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에게서도, 여자 스스로의 기억에서도.

그게 참 슬펐다.

 

 

“뭐... 선생님.!!!”

 

“...가까이 오지... 말아 주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여자의 팔에서 새어나온 피는 바닥에 번져가고 있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든 것이 멈춘 공간은 고요했다.

여자는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몸이 조금 나른했고,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붉으면서도 검은 피가 이상했다.

이게 자신의 몸에서 나온 거라는 게 이상했다.

 

남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도 남자를 응시했다. 몇 개월 새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던 남자의 얼굴에 주름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서...”

 

 

남자가 현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

 

 

여자는 눈을 감았다. 눈 앞이 새까매서 미래도, 앞도, 길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 이건 꿈이겠지, 라고 생각하고 여자는 정신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여자의 눈에 담긴 것은 온통 검붉은 선혈뿐이었다.

 

 

-

 

 

“한제...”

 

“시브?”

 

“나로... 님.”

 

 

시브의 눈동자가 커졌다. 시브는 나로를 떼어내고는 방을 둘러봤다.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바닥에서부터 벽,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책꽂이, 옷장, 간이 테이블, 하얀 침대, 침대 옆 작은 탁자와 그 위에 세워진 작은 사진, 마지막으로 침대 위의 남자, 한제까지.

 

 

시브의 몸이 떨렸다. 알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시브는 한 걸음, 한 걸음, 한제의 침대로 다가가 한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미동도 없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고인 것도 같았다. 시브는 한제가 덮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답답했다.

 

그리고 아팠다.

 

나로는 침대 반대편에 서서 시브를 지켜봤다. 시브는 잠깐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떼더니 나로를 바라봤다. 처연한 눈동자. 시브가 말했다.

 

 

"나로 님, 저는 왜, 잊었던 걸까요.“

 

 

시브가 말했다.

 

 

"어떻게 잊었던 걸까요...“

 

 

벚꽃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나로의 시선이 흔들렸다. '법칙'이 깨졌다


'사신은 눈물을 흘릴 수 없다.'

 

그리고 시브가 말했다.

 

 

"한제, 한제... 한제가...“

 

 

기억 조각 따위일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은, 한제는, 시브에게 있어 기억 조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존재가 아니었다. 여자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가족 외에 처음으로 정을 붙이고, 아끼고, 헤어지기 싫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시브의 눈에 금방 고인 눈물이 뚝, 뚝, 굵은 빗방울이 마른 꽃잎을 두드리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한제 위로, 추억 위로, 흘러내렸다.

참 아팠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팠다.

한제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가녀린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너무 아팠다.

 

보고 싶었어, 한제야. 너무 보고 싶었어. 네 하얀 미소가, 네 예쁜 말이, 네 부드러운 목소리가 너무 그리웠는데, 그런데 미안해서 보러 오질 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끝까지, 미안해.

 

 

"...시브, 어서 영혼을 거둬."

 

 

나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시브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앗을 수는 없었다. 기억이,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르게 시브를 서서히 잠식했다. 시브는 마치 스토커처럼 달라붙어 재생되는 기억에 숨도 못 쉴 만큼 괴로웠다.

 

처음 한제를 만난 날, 과외를 시작하던 날, 한제 아버지에게 알 수 없는 관심을 받기 시작한 날, 평온하던 일상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함을 느꼈던 날, 집에 가는 골목길이 유달리 싸했던 날, 납치당했던 날, 방문을 붙잡고 내보내달라며 빌었던 날, 문이 열리고 한영을 만난 날, 한제가 병문안을 온 날, 한영이 집에 찾아온 날, 그 하루하루가 두서없이 짜집기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끝은 한제였다.

어쨌든 기억의 끝은 한제였다.

여자에게 마지막은 언제나 한제였다.

 

 

나로가 시브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시브는 눈물이 번진 눈동자로 나로를 응시했다.

 

기억이 돌아온 시브는 참 약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 입술을 꼭 깨물고 참을 새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참 가여워 보였다, 고 나로는 생각했다.

 

창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시브의 은발을 어지럽힌다. 은발 끝자락의 검붉은 빛깔마저 처연해 보였다. 시브의 눈동자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반짝였다. 나로는 시브를 놓고 침대로 향해 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나로는 사신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신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어떻게... 어떻게...“

 

"...그러게. 손을 뻗은 것 뿐이었는데.“

 

 

나로가 손을 꽉 쥐었다. 한제의 영혼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흩어졌다.

아직 시브는 한제에게 못다한 말이 많았다. 차고 넘쳐 흐를 정도로 많았다. 전하지 않으면 잠겨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항상 불행은 순식간이었다.

이번에도 여자는 한제를 놓쳤다. 용서를 빌 새도 없이 한제가 사라졌다.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여자가 가족 외에 유일하게 아끼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제가, 죽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로가, 사신도 아닌 나로가 영혼을 거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게 '법칙'인데.

 

왜, 도대체 왜. 왜 너는 이렇게 쉽게... 이렇게, 혼자서 가엾게...

 

 

시브는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한편으로는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로 나로를 바라봤다. 다시 한제를 바라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한제는 야속하게도,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는 뜨지 못할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 아까 네 장미에 반쯤은 먹혀 있었나 보지.“

 

"...아아.“

 

"나는 걸려 있던 영혼을 빼내 준 역할인 거고."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슬픈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다시금 눈물이 떨어졌다. 시브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새하얗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시브의 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빛났다.

가늘게 떨리는 등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가, 그리고 내가, 가엾다고.”

 

 

갑작스레 나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경직된 어투였다. 시브의 몸이 움찔, 떨렸다.

 

 

“시브, 아니.”

 

“......”

 

“선생님.”

 

 

시브는 나로를 돌아봤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로가 아닌 목소리였다.

아니, 아니다, 밎다, 나로는, 나로가,

 

 

“이제 알았어. 왜 네 곁을 떠날 수 없었는지. 사신도 아니면서, 왜 존재했는지.”

 

“......”

 

“난 네 허상이야.”

 

 

나로는, ‘그’였다.

 

 

“기억도 없으면서 미련하게 남은 네 그리움과 죄책감, 그리고... 뭐, ‘이 사람들’의 비슷한 마음이 만들어낸, 너와 ‘그들’의 허상일 뿐이야.”

 

 

한제이자, 한영이자, 그들의 아버지였다. 그래, 그들의 ‘감정 덩어리’였다.

 

한제의 애정과 그리움, 한영의 원망과 죄책감, 그리고 아버지의 어긋난 집착이 모여서 만들어진 존재. 여자를 향한 집착, 애정, 미안함, 그리움, 죄책감, 원망 등의 감정으로써 시브의 곁에 존재해 왔다.

 

그래서 나로는 시브에게 일정한 정도 이상의 관심도 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마냥 시브가 괴로워하는 걸 지켜볼 수도 없었다. 시브와 공통점이 있다면 기억이 없었다는 것. 그랬기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시브가 기억을 찾을 때까지 그 곁에서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감정’ 그 자체라 그런 건 모르겠지만, 그래도, 괴로운 것 같아.”

 

 

시브의 눈동자와 손가락이 떨리고 눈물이 끈덕지게도 계속 차올랐다. 정말 지겨운데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계속 저려온 심장이 더 아플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심장이 뛴다는 건 이렇게나 괴로운 일이구나.

 

 

그 때, 시브의 은발과 몸 전체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리고 손끝부터, 발끝부터, 조금씩 흩날려갔다. 꽃잎처럼 시브의 몸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시브는 조금씩 사라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래, 끝인가. 나도 이제, ‘소멸’되는 건가. 기억을 찾았으니, 사라지겠지. 꽃이 지듯 그렇게, 형체도 없이-.

 

 

이상했다. 마음은 여전히 부서질 것 같았지만 그러면서도 편안했다. 사라지는 몸이 싫지 않았다. 조금 개운하기도 했다. 한제를 조금 더 오래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처음보다 많이 진정된 느낌이었다.

 

시브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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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연우 2016. 12/29

기억을 찾는 순간 소멸 된다니... 많이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