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편지

서른, 책갈피

 

 

 

 

    나의 전공은 철학. 이상하게도 나는 철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방법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들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는, 그런 방법론. 그래서 철학이 좋았다. 대학생 신분이었던 4년,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던 2년 동안, 내 안에 움츠리고 있던 아집을 없애고 최대한 많은 색깔의 생각들과 표정들, 소리들을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비닐 장막 같았던 편견을 걷어내니 궁금한 것도 많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질문을 늘어놓았다. 친구들은 가끔 날 보고 특이하다거나 웃기다고 말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이십대 초 ․ 중반, 가장 꽃다웠던 나의 청춘의 시기이다.
 
  원래 나는 국문과를 가려고 했던 여고생이었다. 다섯 살 때 밤새 책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반항기가 다분했던 나는 그 다음 날도 또 책상 밑에 기어들어갔다.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짜릿함을 선사해주었으므로, 그 정도 크기의 강압으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글쓰기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고, 이것저것 끄적이는 습관이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떠들고 다녔고, 대학을 간다면 국문과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도 제법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 지원의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혹시 국문과에 가면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문학에 고정관념이 생기는 건 아닐까. 작품을 더 훌륭하게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고정된 시선을 가진 정답형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사실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고등학교 ‘문학 과목’에서는 그리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학생이기도 했다. 시와 소설에 정답이 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는 아이, 그래서 객관식 시험에 꽤나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다. 고 3 말미, 나의 이러한 기질이 훌륭한 국문학도로 성장하기에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철학을 전공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4년 동안 나와 타인을 향해 끝도 없이 질문하고,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또 반성하면서 좋은 정답보다는 좋은 질문에 천착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서른이 된 지도 벌써 아홉 달. 사실 요즘 나는 슬프다. 눈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조금씩 건조해지는, 그런 신체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주 많이 슬프다. 타인의 말에 토를 달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사건이 벌어진 까닭보다는 결과에 나타난 수치들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낀 채로 생존해야 한다. 무미건조하다. 힘이 든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삼십대라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이 있다. 주변 눈치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꼭 내 식대로 살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거냐고 나를 비웃겠지만.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것보다는 비난받으며 철딱서니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소년이 될 거에요?” 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질문이다. 독립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나온 대사이기도 한데, 자기반성을 좋아하는 나는 스스로에게 종종 이 물음을 던진다. 이 말은 내가 과연 이 세상을 철들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민의 끝에 언제나 따라붙는 나의 대답은, 결국 “YES”다. 가능하면 아주 오래도록 이 질문을,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서른의 한 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는 핑계로 일상 곳곳에 책갈피를 끼워 둔다. 선언하듯 다짐하고, 꿈꾸듯 소망한다. 짧은 질문에 매달린 꿈들이 너무 많아 때론 버겁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내내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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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프로필사진
연우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연우 2016. 12/29

정말 나이가 들수록 질문할 기회를 놓친적이 많은 것 같네요. 물음을 삼키는 나이라는 게 슬프네요.

niko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niko 2016. 12/13

같은 소망을 조금 얹고 갑니다.

바다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바다 2016. 09/05

어려을때부터 작가의 꿈을 꾼 소피아님이 눈에 그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