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편지

소개팅

 

 

 

 

    그는 내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무슨 이유에선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내가 내뱉는 한 음절이 바깥의 공기와 만나 이루는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치 해가 가장 긴 날의 낮에 서 있는 누군가의 늘러붙은 그림자 같았다. 아마 내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다음 음절을 쥐어짜내고 있지 않았더라면, 늘어지는 말소리에 취해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천상에서의 1분은 지상에서의 백 년인가 천 년인가와 같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영원한 잠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된 거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 그러니까 천국에서 온 이 남자가 가진 시간의 힘이 나를 압도하여 순식간에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이 지나가버린 거다. 잠 든 내 몸 위로 먼지가 쌓이고, 나는 점점 잿빛으로 변해간다. 그가 손가락으로 나를 살짝 건드리는데, 내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여긴 사먹는 음료수보다 공짜 보리차가 더 맛있네요.”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앞쪽을 바라보았다. 물컵을 흔들며 나를 바라보는 남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컵이라 반 조금 안 되게 남아 있는 보리차가 보였다. 나는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몽상夢想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굳게 다물었던 건조한 입술을 힘겹게 열고, 그에게 무얼 먹고 싶냐고 말했다. 실은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오라는, 나 자신을 향한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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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희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공정희 2016. 03/29

서로 침묵할 때에 느껴지는 독특한 공간감이 잘 표현돼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