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편지

산행(山行)

 

 

 

 

 

    “그만 그만! 내려줘!”

 

  나도 모르게 악다구니를 쓰고 만다. 지나가던 산 손님들이 히죽거린다. 몸을 거꾸로 서게 하는 인버전 테이블(일명 ‘거꾸리’라 불리는 운동기구)의 각도가 슬그머니 조정된다. 옆을 슬쩍 보니 아버지가 내 등을 받치고 서 있다.

 

  “아빠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

 

 

 


 

 

  서른, 회사를 옮겼다. 그것도 연봉을 엄청나게 깎으면서 말이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결정이었다. 나에게는 돈보다 내 여유와 만족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는 철딱서니 없는 선택이라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 아닌 것엔 참 정확하고 이성적이니까. 타인의 꿈이나 생각, 목표, 가치관을 재단의 대상으로 삼아 줄자나 가위 따위를 들이대는, 아주 못생긴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것이 현실의 세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내 영혼을 갉아 먹히는 일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었다. 한없이 시들시들해진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을 매듭지었다. 이게 내 하향이직(下向移職)의 시시한 전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왔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나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가치판단에 매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렇게 굳힌 결심이 반드시 최선의 결론이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철옹성 같던 마음도 나이 앞자리가 바뀌니 결국 야들야들해져, 남들의 눈과 입에 내 만족감의 일부를 맡기게 되니 말이다.

 

  씩씩하고 당당하게 前 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사실 나는 심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특히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들의 시선과 표정에 일희일비하며 체한 듯 지내야 했다. 부모님과 남동생 모두 나에게 아무런 타박을 주지 않았지만, 잊었다 싶으면 다시 떠오르는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동생에게 좋은 선물 하나 사주지 못하게 된 누나로서의 민망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 복합 미묘하고도 못생긴 감정 탓에 한동안 주말에 외출도 자제하고 지냈더니, 가족들이 대뜸 산에 가자며 두꺼운 옷을 던져준다. 등산이 그렇게 좋대, 살랑살랑 웃는 어머니 뒤로 눈을 찡긋 하는 동생과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아버지의 등이 보인다.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등산 고수, 어머니와 남동생의 자취를 쫓으며 열심히 걸어본다. 하지만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크고 작은 돌부리에 자꾸만 걸려 새끼강아지마냥 캉캉거린다. 다행히 내 옆에는 그가 함께 걷고 있다. 평소보다 보폭을 줄여 딸의 엉성한 걸음에 박자를 맞추어주는, 나의 아버지.

 

  여기 있는 건 국산 소나무가 아니야. 아빠 어릴 땐 기온이 영하 20도로 떨어지는 날이 많아서, 바깥에서 놀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언 발이 녹느라 간질간질 했었어. 저기 보이는 건 골프연습장인데, 공이 이쪽까지 넘어와 등산객들을 괴롭게 할까 봐 이렇게 산길에 철조망을 만들어 놨나봐. 조금 뒤에 쉼터가 하나 나오니까, 거기에 앉아서 다 같이 커피 마시자. 믹스도 있고 원두도 있어, 취향대로 골라 마시면 돼.

 

  딸은 그저 ‘응, 응.’ 하는 무뚝뚝한 대답만을 내뱉을 뿐인데,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온다. 묘하게 화제의 중심을 비켜나간 듯한 우리의 대화는, 공허하지만 배려가 가득하고 군데군데 애정이 묻어 있다. 언쟁 없이 느슨하게 이어지는 말의 화음 위로 평온함이 밀려든다.

 

  “아빠 있으니까 넘어져도 괜찮지만, 힘들면 이거 잡아.”

 

  집에서 들고 온 기다란 나무 지팡이를 쑤욱 내밀며, 아버지가 앞서 걷기 시작한다. 두 걸음 정도의 거리는 딸의 걷는 속도를 고려한 배려의 폭이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가 쏟아낸 질문들처럼, 애초에 내가 내린 결론은 중요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나의 결정을 오롯이, 아버지는 믿어주고 있구나. 나는 슬며시 그가 내민 나무 봉을 잡아 본다. 신기하게도 겨울의 차가운 온도가 아닌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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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프로필사진 sosa 2016. 03/11

일상, 그 보다 더 소중한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읽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옮아 가는 일상 전개의 바이러스, 담백한 문체 속에 아름답고 잔잔한 감동의 파장을 품고 있어 붙임글로 공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