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과거에 붙잡힌 사람들(2)

재하가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하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지만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누르려는 그때 문이 열리며 소라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문을 열고 나온 소라는 엉망진창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눈가는 붉게 물들었다. 목소리는 찢어지고 있었고 두 눈은 깊게 잠겼다. 재하가 편의점에서 사온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한잔 할래요?”

딸그락. 봉투 속에서 맥주 캔 소리와 빗소리만 귓가에 들렸다 소라가 멍하니 재하를 바라보았다. 무안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입가가 서서히 떨릴 때쯤 소라가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았다. 슬며시 닿은 손은 차갑고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 그러자. 들어와.”

소라의 뒤를 따라갔다. 불이 꺼진 집은 유난히 춥고 어두웠다. 창밖의 빗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고 그 사이를 두 사람이 걸어갔다. 문득 뒤에서 본 소라는 작게 느껴졌다.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 재하의 눈에 밟혔다.

집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았다. 안주거리로 산 음식들을 꺼내놓고는 천천히 캔을 땄다. 치익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맥주 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벌컥. 맥주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재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어라 얘기할까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어설픈 위로를 할 바에는 그저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맥주 캔이 한두 캔씩 쌓이자 소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소라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를 보는 걸까? 그 시선은 창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주륵주륵 비가 내리는 풍경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네?”

“유나한테 얘기 들어서 일부러 와준 거잖아.”

“아뇨. 그건......”

소라가 재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검지로 재하의 입술을 눌렀다. 살포시 입술을 누르는 손끝이 부드러웠다.

“재하는 여전히 상냥하네.”

소라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기묘한 얼굴이었다.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묘하게 멍한 얼굴이었다. 아니 멍하기보다는 허무했다. 눈동자는 깊고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슬픔이 재하를 짓눌렀다. 이 얼굴, 표정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했으나 생각나지 않았다. 재하로서는 소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을 떼고 소라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딱 이 날이었지. 이 빗소리, 이 시간, 그리고 이 집이었어. 그 사람이 다른 여자를 데려온 게 말이야.”

소라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몸을 살짝 움직였다. 힘없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팔다리는 아찔하게 느껴졌다.

“개자식. 솔직히 완전 개자식이지. 당당히 다른 여자를 집에 데려오고.”

소라의 두 눈가가 촉촉해졌다.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에 재하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개자식. 재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난다면 가차 없이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그때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그 사람이 다른 여자를 데려왔는데 그 와중에 나는 어땠는지 알아?”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맥주를 홀짝거리는 모습은 아슬아슬해보였다. 가느다란 목에 핏기가 돌고 하얀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그 와중에 난 어떻게 이 사람을 다시 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더라. 이상하지 않아? 보통은 화를 내잖아. 욕을 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할 텐데.”

후후. 소라가 웃었다. 여전히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입만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점점 고개를 내려갔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눈을 양 손으로 가렸다.

“더 이상한 건 뭔지 알아? 그게 벌써 십 오년이 더 지난 일이야. 근데 왜 아직도 이렇게 선명한 걸까? 왜 아직도 어떻게 하면 그 사람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는 걸까. 그리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재하에게 차갑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보고 싶어......”

그 순간 참아왔던 것들이 폭발해버렸다. 소라는 더 이상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두 손을 불끈 쥐고는 눈물을 흘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식탁 위를 적셨다. 엉엉 소리를 내면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토해냈다. 재하가 소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끌어안았다.

“왜 내가 아닌 걸까? 왜! 이렇게 사랑하는 데 왜 내가 아닌 걸까?”

한번 터진 진심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소라는 재하의 품에서 계속 외쳤다. 어째서냐고 계속 물어보았다.

재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소라의 남편은 자신이 아니었다. 소라의 사랑을 받는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 소라를 기쁘게 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도 자신이 아니었다. 참으로 기구한 일이었다. 그토록 소라를 바랬던 재하였지만 소라에게 재하는 그렇지 못했다.

만일 내가 그 놈이었다면 어땠을까? 재하가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재하는 비 오는 날에 울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토록 힘들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여자 따윈 없었을 것이다. 오직 소라를 위해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재하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재하가 아닌 그놈이었다.

재하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라를 안고 있었지만 유독 멀게만 느껴졌다. 분명 양손에 크게 끌어안고 있는데도 곁에 없는 것 같았다. 지금도 소라는 그 사람을 생각하겠지? 내 품에 안기면서도 그 사람의 품을 생각하겠지? 재하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저 세게 소라를 안았다. 등을 쓰다듬으며 소라의 머리를 감싸주었다. 어깨가 뜨겁게 젖어갔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소라가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재하의 품에서 나오고는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가관이었다. 세수를 하고 수건에 얼굴을 닦자 화끈거렸다. 문득 재하의 품에 안긴 자신이 떠올랐다.

‘그래도 속 시원하네.’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가자 재하가 보였다. 그 어린 날의 꼬마와는 사뭇 달랐다. 품 안에 들어왔던 아이는 커서 안길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언제까지 꼬마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니…….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재하에게 다가갔다.

“고마워. 혼자였으면 이렇지 않았을 거야.”

“별거 아니에요.”

재하도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마냥 기쁜 것은 아니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씁쓸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소라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또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드디어 소라에게 자신이 도움이 되었구나. 오늘은 잠을 못 잘 듯싶었다.

“재하 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든든했을 텐데. 아버님은 좋으시겠어.”

그때였다. 순식간에 흥분된 기분이 가라앉았다. 재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 어째서 지금 아버지 얘기가 나오는 걸까?

“네? 그게 무슨?”

“재하 같이 속 깊은 아들이 있으니 아버님께서도 분명 힘이 나셨을 거야.”

해맑게 웃는 그 미소가 이상했다. 무슨 말이지? 재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재하는 스스로 좋은 아들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리 좋은 아들이 될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른 여자나 만나는 그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어머니 얘기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너도 어서 집으로 가봐. 아버님께서 걱정하시겠다.”

“아, 네…….”

재하가 멍하니 집을 나왔다. 소라가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재하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재하의 머릿속에 소라의 마지막 말이 남아있었다.

‘재하 같이 속 깊은 아들이 있으니 아버님께서도 분명 힘이 나셨을 거야.’

힘이 난다라. 그건 또 무슨 얘기일까? 내가 모른 것이 있는 걸까? 재하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주륵주륵 내리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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