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04. 과거에 붙잡힌 사람들(1)

04. 과거에 붙잡힌 사람들(1)

 

추적추적. 빗방울이 창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먹구름 탓에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비가 오는 날 세상은 뭔가 슬퍼보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럴 때면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유나가 연주를 하다가 재하를 보았다.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재하는 한 가지 생각이 밀려왔다. 어머니. 그는 늘 비를 보면서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탓일까? 비가 오는 날이면 유난히도 말이 없어졌다. 밀려오는 생각에 잡아먹혀서 아무것도 못할 지경이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딱히.”

아니라는 말과는 다르게 몇 번을 보아도 달랐다. 목소리도 낮았고 무엇보다 사람이 기운이 없었다. 물에 젖은 휴지 마냥 축 처져 있었다. 유나는 연주를 하다가 멈추고 자신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아.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무언가 답답한 날이다.

‘그러네. 오늘은……’

문득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벌써 그 날이 됐나? 소라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재하 못지않게 어두운 표정을 짓고서는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기운이 빠져버렸다.

 

 

“미안한데 오늘 유나랑 밖에서 밥 좀 같이 먹어줄 수 있어?”

수업이 끝나고 소라가 재하에게 다가왔다.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평소의 명랑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목소리는 짙게 가라앉았고 그림자가 얼굴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힘겹게 재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재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재하는 본래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다 생각했다. 어두운 부분이 있기에 빛이 있는 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밝은 사람도 그 안에는 추악하고 더러운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소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렇듯이 재하에게 소라는 빛나고 밝은 사람이었다.

재하가 눈을 크게 뜨고 소라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 걸까? 그 순간 머리가 뜨거워졌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도대체 무어가 이토록 만들 수 있는 걸까?

“네. 그렇긴 한데.”

“고마워. 돈은 여기 있어.”

대답도 할 새 없이 소라는 돈을 주고 사라졌다.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아버렸다. 굳게 닫힌 문은 차가웠다. 재하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안방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씰룩씰룩 움직였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가서 어떻게 할 건데? 어쩔 수 없다. 알고 싶었지만 지금은 물어보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나가서 같이 밥 먹을래?”

유나는 태연하게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인지 핸드폰을 열심히 누르고 있었다. 유나 또한 오늘은 뭔가 차분한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들뜬 강아지 같았다면 지금은 조용한 고양이 같았다. 비단 유나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따뜻하고 온기가 넘치던 저녁이었건만 오늘은 차갑게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저야 좋죠. 오늘은 날도 안 좋으니까요.”

유나가 안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역시 아직도 잊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유나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친구 집에서 자야겠다.

 

 

투둑투둑. 우산을 펼치자 빗방울들이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는 거리는 조용했다. 사람들도 없었고 지나가는 차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첨벙.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물웅덩이를 지나는 소리를 빼면 빗소리만 거리를 채웠다.

재하는 멍하니 길을 걸어갔다. 유나를 따라 걷고 있었지만 자기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저 기계적으로 유나의 발걸음에 맞춰 걸어갔다. 재하의 머릿속에는 어머니 생각이 가득하였다. 기억들이 파편이 되어 재하에게 달려들었다. 집을 나가는 어머니,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까지 하나하나 빗방울처럼 재하에게 달려들었다.

“선생님 안 들어가요?”

가게에 도착하자 유나가 입을 열었다. 그제야 재하는 정신을 차리고는 우산을 접었다.

“아. 그래. 어서 들어가자.”

두 사람은 가게에 들어가서 테이블에 앉았다. 가게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가 온 탓에 사람이 없었다. 메뉴판을 보았다. 각종 우동이 나와 있었다. 개중에는 군침을 돋게 만드는 사진도 있었다.

날이 추우니 우동을 먹자는 유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동 국물을 마시니 으슬으슬 떨리던 몸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재하의 정신도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저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우동을 먹다가 유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우동을 음미하였다. 따뜻한 우동 국물이 몸 안을 데워 나갔다. 우동 국물을 마시고 눈을 뜨고 유나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 어쩌면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던 걸까? 아니면 우동이 정말 그리 맛있어서 그랬던 걸까? 무어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재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가 오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어머님이요?”

“응. 딱 이때 즈음에 집을 나갔거든.”

누구에게도 쉽게 하지 못했던 얘기이다. 재하는 사실 아직도 이런 날만 되면 그날로 돌아갔다. 그 어린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몸뚱이만 커졌지 정신은 그대로였다. 이럴 때면 소라를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꼬옥 안아주는 그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유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우동을 먹었다. 그리고는 재하가 했던 것처럼 눈을 감고 입 안의 우동을 음미하였다. 그리고는 나긋하지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도 아빠가 그랬거든요.”

“아빠?”

재하는 순간 망설였다. 소라의 남편에 대한 얘기는 처음이었다. 그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넘쳤으면 넘쳐났지. 수업을 마치고 집을 나올 때는 늘 그 남편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 망할 놈의 행운아는 누구일까?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물어볼 기회는 많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안방으로 들어가는 소라가 떠올랐다.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내린 그 얼굴은 잊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런 소라와 연관이 있다면? 그렇다면 재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아까 엄마 봤죠? 딱 오늘이에요. 아빠가 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온 거.”

다른 여자? 설마? 재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여자? 그러면 설마?”

“네. 맞아요. 저희 아빠 바람나서 집 나갔어요. 그것도 상당히 어린 사람이랑 그랬나봐요.”

이럴 수가. 재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망할 자식! 개자식! 복에 겨워 죽을 놈이었다. 자기 복을 발로 차는 멍청한 놈이다. 재하는 그토록 꿈꾸던 생활을 그리 망치다니. 아니 그것보다 감히 소라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주먹으로 흠뻑 패고 싶었다.

재하와는 다르게 유나는 이 모든 것이 태연해 보였다.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 마냥 조용조용 얘기했다.

“그렇구나. 고생이 많았겠네.”

“아뇨. 저는 괜찮아요. 사실 아빠라고 해도 기억도 잘 안나요. 그냥 옛날부터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엄마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한동안 계속 오늘 같겠죠.”

그 순간 재하는 소라를 떠올렸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눈가가 시렸다. 그랬구나. 당신에게도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지금쯤 집에 홀로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다 먹은 우동 그릇이 눈에 밟혔다. 밥은 먹었으려나……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 우산을 펼쳤다. 인사를 하고는 유나가 왔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안 가냐는 재하의 물음에 유나는

“오늘은 친구 집에서 잘 거예요.”

라고 말하고 가버렸다. 홀로 남겨지는 재하는 거리에 서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먹구름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날 얼른 집에 가서 잠이나 자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재하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술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고는 소라에게 돌아갔다.

재하로서는 이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틀린 행동일 수도 있다. 또 간다고 한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소라에게 가고 싶었다. 어떻게 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해도 좋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따스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 옛날 비 오는 날 소라가 재하에게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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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연우 2017. 02/07

같은 아픔을 가져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