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쓰는 단편선

혼자하는 사랑

“나 여자 친구 생겼어.”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예측하지 못한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학교가 끝난 후 늦은 점심을 먹을 때처럼 말이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A를 보았다. 설마 밥 먹다 이런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전에 A가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

땡그랑. 손에서 흘러내린 수저가 테이블 위에서 시끄럽게 울었다. A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뭐라고?”

“여자 친구 생겼다니까.”

“여자 친구? 아니 그러니까 여자 친구 말이야?”

“응. 얼마 전에 생겼거든. 그래서 너한테 얘기해주는 거야.”

멍하니 A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다. 오년이라는 세월을 알고 지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여자 친구 같은 거 관심 없다면서!”

순간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러자 조용한 가게 안에서 내 목소리가 울러 펴졌다. 때 아닌 소란에 점원이 우리를 힐긋 쳐다보았다. 점원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왜 그래? 깜짝 놀랐잖아.”

A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A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에 여자 친구 같은 거 관심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사귄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랬지.”

천연덕스럽게 얘기하고 물을 마셨다.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컵에 물을 따르고 다시 마셨다. 그리고 다시 따르고 또 마셨다.

“그래서 누구랑 사귀는 건데?”

“알바 같이 하는 여자애랑. 우리랑 동갑이야.”

“아 그래? 같이 알바 하는 친구구나.”

알바라…….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같이 알바 하는 아이? 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알바 한 것이 아직 두 달도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난 오년이나 알고 지냈다. 두 달은 오년에 비하면 발톱의 때 같은 시간이다. 그런데 어째서?

“근데 왜 갑자기 사귀기로 한 거야? 이런 얘기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그냥. 뭐 일하다보니 서로 좋아하게 된 거지. 그래서 사귀기로 했어.”

무심히 말하는 너의 모습이 눈에 박혔다. 유리 조각처럼 내 눈알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지금쯤 피눈물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아. 그렇구나. 어쩌다 사귀게 되는 구나. 그냥 그렇게 된 거구나. 하하. 웃음이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미치도록 시리면서도 웃음이 계속 새어나왔다.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야?”

“저번에 친구 얘기가 나와서 너 얘기하다가 생각해보니까 말 안한 것 같아서.”

친구. 그 얘기를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덜커덩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몸을 돌리고 가게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A가 뒤에서 무어라 얘기했다.

고개를 돌려 A를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그 얼굴. 지겹다. 지겨워.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이토록 티가 나도록 행동해도 모르는 걸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모든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지나가는 사람들, 뜨거운 날씨, 시끄러운 소리까지 무어 하나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개중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웃음소리였다.

왜 일까? 오늘따라 연인들이 눈에 밟혔다. 눈앞에 많은 연인들이 있었다. 아주 작정을 하고 모인 듯싶었다. 연인들은 모두 손을 붙잡고 걷고 있었다. 무어가 그리 신나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A가 떠올랐다.

A도 분명 저렇게 다니겠지? 그 여자랑 손을 붙잡고 다니는 모습에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해보면 난 A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오년 이라는 세월을 알고 좋아한 나조차도 잡지 못한 손을 왜 그 여자가 잡는 걸까? 몰려오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달. 고작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이다. 그 사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바라고 해도 겨우 서빙이다. 서빙 하는 것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두 달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만드는 마법 같은 알바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 여자는 너에 대해 무어를 안다고 사귀는 걸까?

눈을 뜨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가게 구석으로 들어가 소주병을 보았다. 다양한 소주병이 즐비하고 있었다. 과일 소주, 순한 소주, 그 중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소주를 골랐다. 양손으로 세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이 나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그에 맞춰 나도 점원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점원이 아무 말 없이 계산을 했다. 카드를 내밀자 소주병을 봉투에 담았다. 점원이 주는 봉투를 건네받자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오자 또 다시 연인들이 보였다. 이를 악물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컵을 가져와 식탁에 앉았다. 소주병 뚜껑을 따고 병에 부딪히자 팅하고 소리가 울렸다. 콸콸. 소주가 병을 타고 흘러 내려 컵을 채웠다. 채우다 못해 넘쳐 흘러나왔다.

“아. 망할.”

컵을 들어보았다. 식탁 위로 소주가 뚝뚝 떨어졌다. 머리를 긁적이고 휴지를 가져왔다. 대충 식탁 위를 닦고는 휴지를 집어던졌다.

소주를 마셨다. 찰랑거리던 소주가 입술에 닿자마자 술 냄새가 코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컵을 기울어 소주를 입으로 집어넣었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뜨거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잔 다 마실 때까지 컵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쿵. 컵을 내려놓자 소리가 울렸다. 다시 한 번 컵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가 또 들렸다.

“나왔어.”

다시 술을 따르려고 하던 때 B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아직 네시도 되지 않았다. 오늘 휴강이라 집에 빨리 온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긴 그런 건 상관없다.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다.

“뭐해?”

B가 거실로 와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없이 소주병을 들었다. 그러자 한숨을 내쉬며 내게 다가왔다.

“A 때문이야?”

B가 식탁에 앉아 나를 보았다. 소주병을 들더니 내 컵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술이 가득 찰 때 즈음에 조용히 한마디 건넸다.

“여자 친구 생겼다고 하더라.”

그 순간 B의 손이 멈췄다. 소주병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무어를 하나 봤더니 B도 컵을 가져와 식탁에 앉았다. 뒤이어 자신의 컵에도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낮부터 대학생 둘이서 소주를 까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없었다. B와 함께 살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 따라 어이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B가 술을 마셨다. 나는 눈알을 굴리다 B를 쳐다보았다.

“뭐가?”

“여자 친구 생겼다면서 그러면 이제 포기하는 거야?”

포기……. 그 말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입을 다물고 B를 쳐다보았다.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다시 눈알을 굴렸다. 그러자 B가 말을 이어갔다.

“이제 지치지 않니?”

“......”

“오년이야. 오년. 벌써 오년이나 됐어.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게 있니? 그 동안 친구 이상으로 된 적이 있어? 아니 그전에 걔는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은 있어?”

말이란 참 잔인한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말이 가시가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염통처럼 내 가슴을 꿰뚫었다. 나도 알고 있다. B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하지만

“나도 알아. 아는데 어떻게 하라고? 아는데 포기가 안 된다고.”

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점점 몸이 뜨거워졌다. 눈가가 시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조금씩 앞이 흐려졌다. 볼 위로 물방울이 타고 흘러내려갔다.

“알면 이쯤에서 그만둬. 더 해봐야 상처 받는 건 너야.”

“그만둬?”

“그래. 여태까지 했으면 너도 용케 잘 해온 거야. 이쯤에서 너도 딴 사람 찾아봐.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어디 세상 남자가 걔 혼자니? 그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A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떠올렸다. 역겨웠다.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웃는 내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그런 건 내가 아니었다. 내 모습이 아니었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구토가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면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데? 뭐가 되는데?”

“마음?”

B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내 마음. 그렇게 A를 떠나보내면 내 마음은 뭐가 되는 걸까? 이토록 애끓는 마음은 대체 무어가 되는 걸까?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무덤 마냥 내 마음 속 깊숙이 남아있는 걸까?

“마음도 마음이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사람이랑 하는 거야. 너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고. 사람간의 관계란 말이야. 너가 아무리 좋아한들 걔가 널 좋아하지 않으면 고통만 받을 거라고.”

“나도 알아. 나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안다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B가 하는 말은 모두 맞았다. 무어 하나 틀린 것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A를 떠올렸다. A 때문에 이렇게 힘들면서도 또 다시 A를 떠올렸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사랑이란 이토록 괴로운 것일까? 적어도 다른 사람은 안 그런 것 같다. 아까 봤던 연인들은 모두가 행복해보였다. 미소가 끊이지 않고 얼굴에 행복이라고 써 놓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걸까?

B는 더 이상 내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우리 둘은 술을 마셨다. 잔에 술이 떨어지면 다시 따랐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입을 향해 소주를 부었다.

한참을 그렇게 술을 마시다보니 허벅지가 흔들렸다. 웅웅. 진동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핸드폰을 켜자 사진이 보였다. A가 보낸 사진이었다. 여자 친구와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우웁.”

순간 구토가 올라왔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잡고 토해냈다. 술을 토해내고 아까 먹은 점심을 토해냈다. 그런데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토하면 토할수록 더 복잡해졌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뒤엉켜갔다.

“바보 같기는.”

B가 그런 내게 와 등을 두드렸다. 커흑. 이상한 소리를 나왔다. 입으로 침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화장실의 커다란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이 보였다. 비참하게 변기나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바보 같았다.

“그러게. 완전 바보 같네.”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양 볼에 뜨거운 것이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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