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쓰는 단편선

시간을 믿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불빛 하나 없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오직 그곳에는 어둠만이 가득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왜 이럴까? 텅 비어있는 천장 사이로 슬며시 너가 보이기 시작했다. 또 시작인걸까? 흐릿해지는 기억 사이로 점점 기어 나왔다. 안개 속을 헤쳐 나오듯이 점점 그 모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모습이 또 다시 이렇게 나를 찾아온다.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 모서리를 붙잡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살짝 기울였다. 역시 너무 오래 누워있었나 보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살며시 머리를 움켜쥐고는 일어나 한걸음씩 걸어갔다.

방문을 잡는데 갑자기 손에 힘이 풀렸다. 밥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걸까? 식욕이 없었건만 몸은 아니었나보다. 순간적으로 온 세상이 멀게 느껴졌다. 귓가로 삐이이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든 감각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한순간이었지만 나는 어둠 속에 갇혔다. 아니 어둠이 아니었다. 또 다시 기억 속으로 들어갔었다. 마치 컴퓨터 전원이 꺼지듯이 내 심장 박동도 한 순간 멈췄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었다.

거실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커다란 냉장고 안에 음식은 없었다. 그저 술과 주스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흔한 계란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술병과 주스를 잡고 문을 닫았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음식보다 술이었다. 각혈을 하고 허기에 굶주려도 차라리 술을 마시는 편이 좋았다. 음식이 내 배를 배부르게 만들어준다면 술은 내 허기진 영혼을 배부르게 만들어주었다. 의사는 더 이상 술을 마실 경우 세상과 안녕을 할 수 있다며 엄중하게 경고를 했었다. 하지만 이 술이 나를 죽이지만 또 나를 살리는 것이 이 술이었다.

술은 보드카였다. 언제부터 이 술을 마셨을까? 한 일년정도 된 것 같았다. 남들은 그런 술 왜 마시냐고 하지만 보드카는 사실 생각보다 좋은 술이었다. 취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금세 모든걸 잊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술에 약한 나는 보드카를 그대로 마실 수는 없었다. 주스와 섞어 마셔야 했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으나 그래도 나는 보드카를 좋아한다.

양주잔을 꺼내와 보드카를 따랐다. 그리고는 그 위에 주스를 마저 따르고 섞었다. 휘휘 젓가락으로 젖고는 싱크대에 젓가락을 던졌다. 팅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잔을 가볍게 한번 들어보았다. 살짝 술 냄새가 올라오는 것이 괜찮아보였다. 술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한 주스 사이로 알코올이 흘러 들엉왔다. 살짝 비린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주스를 조금 더 넣어야했나보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마셨다. 어찌됐건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알코올이 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우선이었다.

술을 홀짝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에도 어둠은 짙게 내리깔고 있었다. 그 위로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았지만 방안을 밝혀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불을 켜볼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차라리 어두운 편이 나았다. 텅빈 집안에 혼자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면 또 다시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양주잔에 술을 다시 따르고 그 위에 주스를 쏟아냈다. 섞어야 했지만 더 이상 내 알바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주스를 부어버리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결국 달라진 것이 없네.”

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이 집에 혼자 있게 된 것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한해가 흘러갔지만 나는 그대로였다. 세상만물이 움직여도 나는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순수했던 것이다.

‘미안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내 일생 딱 두가지를 믿었다. 회의적인 나도 믿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너와 시간이었다. 나에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너의 말이라면 모든 걸 믿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너의 말도 믿었다. 너가 말한 시간도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거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내 믿음은 배신으로 돌아왓다.

베란다의 창문을 열자 따뜻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나보다. 또 다시 계절은 바뀌어가고 있었다. 다시끔 사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너가 말한대로 괜찮아지지 않는 걸까?

난간에 술잔을 올려놓고 턱을 괸다. 창문 밖 도시의 풍경은 검게 칠해져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모습은 유난히 쓸쓸해보였다. 그런 어둠 속에서 다시 너의 모습이 보인다. 지긋이 너를 본다.

너는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 속 너는 그대로였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 해맑은 미소, 슬픈 눈동자, 미안하다는 말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적어도 내게 너는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우리가 지내온 시간만큼 시간이 간다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라는 장막 안에는 허무만이 가득하였다.

‘누구나 다 한번씩 겪는 거야. 괜찮아.’

친구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누구나 다 한번씩 겪는 일이다. 이별이라는 것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게 너와 나의 이야기인줄은 몰랐다. 정말 바보 같고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우리가 한때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너라면 내 곁에 평생 있을 줄 알았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감정의 동물이다. 결국은 감정을 따르는 법이다. 아무리 이성이 앞선다고 주장해도 감정이 이를 무시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성이 매달리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소리쳐도 감정은 내게 다가온다. 매번 다가와 내 귀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떠나버린다.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숨 쉬며 죽지도 않고 나를 흔들어 놓는다.

술을 마신다. 술술. 술은 잘 넘어간다. 모든 것이 이리 쉽게 넘어간다면 어떨까? 이 감정들도 다 집어 삼킬 수 있다면 괜찮아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감정은 기생충이다. 아무리 집어삼켜도 소화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나를 먹이로 삼고 그 몸집을 불려나가겠지. 지난 일년동안 그래왔듯이 내 심장을 갉아 먹고 너에 대한 기억을 자극하고 너를 갈구하겠지.

천천히 난간 위에 올라갔다. 발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아찔했다. 새까만 어둠이 내게 다가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보았다. 발가락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했다. 이대로 바람에 몸을 맡긴다면 이 답답한 속도 뻥 뚤릴까?

그 순간 술잔이 베란다 안쪽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술잔이 깨져버렸다. 멍하니 고개를 숙여 술잔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다면 어떨까? 내 세계도 술잔처럼 깨진다면 이 고통도 괜찮아질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끝이 난다. 모든 것이 편해진다. 당장이라도 그 끝을 볼 수 있었다. 그저 한걸음 나아가면 되는 일이다.

그 순간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내 세계가 끝난다는 것. 그것은 너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너의 얼굴도, 너의 목소리도,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 사람은 이토록 어리석은 존재인걸까? 고작 한걸음이었다. 딱 한걸음이면 편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 한걸음을 나아가지 못했다.

난간에서 내려와 방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젓가락이 뒹굴고 베란다에는 깨진 술잔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포개고 숨을 죽였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간다고 한다. 오늘을 숨 쉬고 내일을 생각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과거의 망령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유령이었고 내일을 부정하는 괴물이었다. 나는 명백히 과거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제를 생각하고 그저께를 추억하고 있었다. 내 시간은 갈수록 뒤로 가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나는 널 생각했다. 너와 처음 만난 날부터 마지막 그 순간까지 우리의 역사를 다시 새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내게 남겨진 것은 없었다. 그저 또 다시 무너질 뿐이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끅끅. 알 수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소리는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가 심장에 못질을 하기 시작한다. 아프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뜨거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니 조금씩 의식이 멀어졌다. 또 다시 이렇게 하루가 가는 구나.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뜨면 내일이 올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와도 나는 어제를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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