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쓰는 단편선

늦은 후회

늦은 후회.

“나 오늘 A한테 고백할거야.”

밥을 먹는 도중 B가 문득 얘기했다. 순간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딸그락 소리가 들리자 B가 손을 내밀어 숟가락을 들고는 내가 건넸다. 나는 그저 B를 쳐다보았다. 내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닐까? B의 얼굴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니지?”

“응. 아니야. 오늘 A한테 고백할거야.”

역시나 잘 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랬구나. 하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야?”

“나중에 딴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딴 말?”

“나중에 A를 좋아하네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B는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A와 나는 엄연한 친구 사이였다. 비록 성별은 달라도 서로를 위하는 친구였다. 연인이 바람났을 때 위로해 준 것도 A였다. 그 정도로 우리는 절친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A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글쎄다. 난 먼저 일어날게 오늘 수업이 있어서.”

B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홀로 남겨진 나는 B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B가 A에게 고백한다. 그렇다면 우리 셋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두 사람이 사귀겐 된다. 눈을 감고 A와 B를 상상해보았다. 손을 잡는 두 사람을, 어깨를 나란히 하는 두 사람을, 더 나아가 키스를 하는 두 사람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그러자 이상했다. 명백하게 이상했다.

“왜 이러는 거지?”

그러자 가슴 한 구석이 씁쓸해졌다. 이상했다. 분명 A와 나는 명백한 친구 사이였다. 그간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사이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죄어오는 걸까? 단지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거렸다.

 

“있잖아. 오늘 B가 무슨 말 안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A에게 물어보았다. 어째서 이런 걸 물어보는 걸까? 솔직히 나랑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A에게 연인이 생기면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친구에게 좋은 연인이 생기면 마땅히 축하해줘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엄연히 A와 B 둘 사이의 문제였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알고 싶은 걸까?

“아니? 딱히 별 말은 안했는데. 아 맞다. 무슨 할말이 있다고는 했어. 저녁에 만나자고 했거든.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그래서 갈거야?”

A는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왜 이런걸 물어보는지 이해되지 않겠지. 나조차 이해되지 않으니까.

“응. 왜 가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왜?”

신호등 앞서 서서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모르게 가지 말라고 말할 뻔 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겨우 삼켰다. 그리고는 A를 쳐다보았다. B와 사귀게 되면 둘이 같이 다닐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쓸쓸하게 느껴졌다.

“오늘 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그려. 조심히 가라.”

신호등이 켜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A와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돌아 A를 쳐다보았다. A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졌다. 이렇게 멀어지는 걸까? A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멍하니 지켜보았다.

 

늦은 밤. 침대에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보드카와 주스를 꺼냈다.

컵에 보드카를 따르고 그 위에 주스를 보드카의 2배정도 섞었다. 그리고는 젓가락으로 잔을 휘휘 저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A가 알려주었다. 예전에 내 애인이 바람 났을 때 A가 내게 알려준 술이었다.

젓가락을 빼고는 싱크대에 던졌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셔보았다. 처음에는 주스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달달한 주스의 맛이 끝나자 독한 보드카가 올라왔다. 마치 과일 소주를 마시는 것 같았다. 앞은 달콤하면서도 뒤는 쓴맛이 느껴졌다.

A는 지금쯤 무어를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때뿐만 아니라 힘들 때는 항상 A가 곁에 있어줬다. 이렇게 술을 말아 마시는 날에는 항상 A가 곁에 있어줬다. 술도 못 마시면서 독한 술을 같이 마시곤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A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내 곁에 있었을까? 그리고 난 어째서 그렇게까지 A의 곁에 있었을까?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까만 어둠이 거리를 채웠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남녀가 보였다. 손을 마주 잡고 가는 그 모습이 눈에 밟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이라면 B가 A에게 고백을 했을까? 그렇다면 A는 무슨 대답을 할까? 두 사람이 사귀게 되는 걸까?

술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자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눈이 따가웠고 술이 독하게 느껴졌다. A는 늘 이런 느낌으로 나와 같이 술을 마신 건가? 술잔을 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눈물이 한방울 뚝 떨어졌다. 그러자 한번 시작된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A의 모습들이 지나갔다. 나를 바라보는 A, 내 곁에 있는 A, 내 얘기를 들어주는 A. 그토록 내가 A 곁에 있었던 이유. 그건 단지 우정뿐만은 아니었다. 아니. 우정이 아니었다.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A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A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뚜르르

제발 늦지 않았기를. 그렇게 기도했다. 차가운 신호음이 끝나자 A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만 입으로 새어 나왔다.

“뭐야? 무슨 일 있어?”

A가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고 겨우겨우 A에게 말을 이어갔다.

“좋아해. 널 좋아해.”

단 한마디였다. 그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흐느끼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A는 그저 그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뒤늦게 A가 입을 열었다.

“오늘 B가 고백하더라. 근데 거절했어. 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는 항상 내게 웃던 그 목소리로 얘기했다.

“지금 집으로 가도 될까?”

작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하늘 달이 훤하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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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연우 2017. 02/23

겨우, 마음을 전했네요. 앞으로의 두사람은 어떤 인연을 그리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