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작은 글 하나

우아하게

오늘도 그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한다. 차를 마실 때면 새끼 손가락을 들고 걸음걸이를 할 때면 천천히 한걸음씩 조심조심 걸으며 밥을 먹을 때면 천천히 먹는다. 마음 같아서는 내 맘대로 커피를 숭늉 마시듯이 마시고 싶고, 와인보다는 소주를 시키며, 감자탕의 뼈를 붙잡고 밥을 먹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을 거다.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잘 빼어난 얼굴에 점잖게 입은 정장이 그로 하여금 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나를 보았다. 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힐이며 원피스며 나름 힘을 주고 왔기에 꿀리지 않았다.

“오늘도 즐거웠어요. 다음에 봐요.”

“네. 다음에 봐요.”

멀리 걸어가는 남자가 사라지자 마자 집안으로 들어가 힐을 벗고 옷을 던졌다. 도대체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이런걸 입고 신고 다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불편해 죽는 줄 알았다.

꼬르륵. 긴장이 풀리자 가장 나를 먼저 반긴 것은 허기였다. 허 참. 고거 밥 좀 적게 먹었다고 벌써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츄리닝으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대충 묶고 라면을 끓였다.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먹고는 콜라 캔을 까 입에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한모금, 두모금 마실수록 점점 더 살아나는 느낌이다. 꺼억. 트림을 내뱉고는 만족스럽게 배를 만졌다. 이게 바로 살아있는 느낌이지!

“정말 그 남자가 보면 놀라 까무러칠거야.”

언니가 방에서 나와 나를 쳐다보았다. 언니도 나와 마찬가지로 츄리닝 차림에 아무렇게나 다니고 있었다.

“질투 나면 질투 난다고 해.”

“야. 그게 아니라 너 언제까지 저러고 다닐 거야?”

언니가 내게 다가와 내 방을 가리켰다. 오늘 입은 옷들이 허물처럼 놔 뒹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교양 떤다고 하루 종일 들고 다니던 시집이 떨어져 있었다. 민망하게도 하얀 시집은 여전히 새하얗다.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간다면 그 사람이 날 별로라고 생각할텐데.”

분명 그러리라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점잖은 사람이 나 같이 털털하고 자유로운 사람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 연기라도 해서 그의 마음에 들고 싶다.

“아서라. 네가 교양 있는 척한다고 없던 교양이 생기니? 그리고 애초에 그런 식으로 그 사람한테 호감을 산다고 해서 나중에 들키지 않을 거 같아?”

“아 됐어. 끝까지 속이면 되지. 그리고 뭐 교양 있는 척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동생아. 너는 와인보다 막걸리가 어울리고 차 보다는 스무디가 몸에 받는 여자야. 그런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야지.”

“됐어. 됐어. 나 이제 씻고 잘거니까 언니도 자.”

냄비를 대충 설거지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널부러져 있던 옷들을 쫙 펴놓고 개서 옷걸이에 건 후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언니는 맞는 말을 했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애초에 그렇게 교양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교양과는 담을 쌓은 지 오래였다. 옛날부터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되지도 않는 교양을 떠는 순간에는 엄마와 함께 혀를 차곤 했다. 그런 내가 교양이라니 참 웃긴 일이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언니한테는 당당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잘 모르겠다. 언제까지 그를 속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사실 그 동안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고 이제는 한계이지 않은가 싶다.

 

한계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눈 앞에 보이는 식기들을 보았다. 나이프며 포크며 여러가지로 놓여있었다. 뭐가 뭐에 쓰이는 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좋은 음식점을 예약했다 길래 같이 왔건만 이건 뭐 음식이 입에 맞는 것보다 먹는 것조차 문제였다.

“안드세요? 식어요.”

“아, 예. 먹을게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하 하고 웃었지만 속은 타 들어갔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식기들을 잘만 사용하고 있었다.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갑자기 비참해졌다.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아까 보니 전혀 안 드시던데. 혹시 입에 안맞으셨나요?”

결국 음식 대부분을 먹지 못했다. 그나마 아는 숟가락으로 스프나 깨작깨작 먹었을 뿐이다. 정말이지 피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이 눈 앞에 있는데도 먹지 못하다니……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계이다. 더 이상 그를 속일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하는 내 자신이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전 그쪽이 생각하는 것만큼 교양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그 동안 그냥 교양 있는 척하고 있었던 거에요.”

가방에서 시집을 꺼냈다. 아직도 새하얀 시집이었다.

“사실 이것도 그냥 가지고만 다니는 거에요. 이런 거 안읽어요. 저런 가게도 처음이고. 미안해요.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털털한 제 모습 보면 싫어하실까봐 그랬어요.”

남자의 눈이 똥그랗게 되었다. 역시 사실대로 말하니 나를 싫어하게 된 모양이다. 아아. 정말 멋진 남자인데 이렇게 되다니. 참으로 유감이다.

“아, 그러면 우리 다음에 순대국밥집 갈래요?”

“네?”

“사실 저도 저런데 잘 안다니거든요. 그 동안 있어 보이려고 그랬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편하게 갈걸 그랬어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쑥스러운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요. 우리 다음에는 거기로 가요.”

나도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가슴이 뛰었다. 천천히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참으로 매력적인 남자다. 점점 더 이 남자에게 빠져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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