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작은 글 하나

빗소리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가득하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어느새 거세져 바닥으로 힘차게 곤두박질쳤다. 머리가 쑤셔왔다. 망할 비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열어보았다. 전공 책에 프린트 몇 장, 그리고 필통이 전부였다. 아아 아침에 일기예보를 봤을 때 그냥 가져올걸.

어려서부터 비 오는 날이 싫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 어깨와 신발이 물에 젖어가는 것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산을 들고 다니기가 귀찮았다. 비에 젖은 우산을 들고 다니다 보면 으레 바지에 묻고 자주 잊어먹었다. 아마 지금까지 잃어버린 우산을 모은다면 우산 가게를 차려도 될 것이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비가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애초에 저녁이면 비가 그칠 줄 알았다. 설마 누가 하루 종일 비가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 결과 하늘은 나를 기만하듯이 비를 내렸다.

어쩌지…… 지금 이 상태로 지하철 역까지 달려간다 해도 가방 안에 책이며 프린트가 물에 젖어 엉망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비가 그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와중

“우산 없어?”

고개를 돌려보니 소라가 내게 왔다. 소라는 한 손에 우산을 쥐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비닐 우산이었다. 둘이서 쓰기에는 조금 작은 사이즈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어디로 가는데?”

“지하철 역으로.”

“그럼 같이 가자.”

길을 걷는다. 고개를 흘끗 돌려보니 소라가 곁에 있었다. 얼떨결에 우산을 같이 쓰게 되었다. 나로서는 상당한 행운이다. 비를 피할 뿐만 아니라 소라와 함께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좋아했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어를 해왔던 것은 아니다. 이따금씩 수업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시간을 같이 보내 친해졌지만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단둘이 거리를 걸어가다니……!

한 방울, 한 방울 비가 내린다. 우산은 원래 좁은 것인데 둘이 쓰다 보니 점점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손이 간당간당 닿을 거리였는데 어느새 어깨가 닿고 숨소리가 들릴 거리가 되었다. 비좁은 우산 속에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리는 이 비에 어깨가 다 젖어가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수록 소라가 느껴졌고 가슴이 뛰었다.

“불편하지?”

희미하게 소라의 어깨가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우산을 소라 쪽으로 기울이다 살짝 머리에 부딪혔다. 소라가 머리를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미안한 마음에 부딪힌 쪽을 봤는데 다행히 아무 문제 없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숨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코끝을 간질거리는 향기에 미소를 지었다. 향수 냄새인지 아니면 비누 냄새인지는 모르겠지만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아냐. 오히려 좋은데.”

소라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좋다는 한 마디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어가 좋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 이후 우리는 말 없이 길을 걸었다. 이따금씩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금방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하철 역 입구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짧았다. 학교에서 역으로 가는 길이 평소의 반절도 안되는 듯싶었다. 항상 족히 삼십분은 걸렸는데 오늘은 십분 만에 온 것 같았다.

“이제 갈게.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고마워.”

아쉬움을 뒤로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소라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소라가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내일……

“응?”

“내일도 비와.”

그 말을 끝으로 소라가 가버렸다. 소라가 가버린 뒤 어깨를 만지니 축축했다. 자세히 보니 어깨뿐만 아니라 바지까지 아예 왼쪽이 다 젖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한참을 젖었던 것 같은데 이제야 느껴졌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소라의 수줍은 얼굴이 떠오르자 머리가 맑아졌다. 내일도 비가 왔으면……

 

다음날 아침. 일기예보를 틀어보니 비가 온다고 한다. 오전에는 흐리지만 오후에는 어제보다 더 많이 비가 올 예정이라고 한다.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신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우산을 보았다. 커다란 우산. 둘이서 쓰고도 남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리고 집을 나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오후,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는 홀로 서있었다. 멍하니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신기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방울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라가 내게 왔다. 어제와 같은 우산을 들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한걸음씩 내게 오는 그 걸음이 나를 들뜨게 해주었다. 마치

“오늘도 우산 없어?”

“응.”

우리는 말 없이 우산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보들보들한 살결이 느껴졌다.

“있잖아.”

“응?”

“나 비 오는 날 싫어했는데 이제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나도. 그러네.”

소라와 눈이 마주쳤다. 티 없이 맑은 눈. 그 눈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 둘은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그 빗방울이 노랫소리마냥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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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프로필사진
두부두부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두부두부 2016. 07/15

달달한 글이네요ㅎㅎ 비오는 날의 풋풋한 추억같아요

헌책의 칭찬 댓글
작가 프로필사진 헌책 2016. 07/15

새로뵙는 분이네요.. 뭔가 풋풋하기도 하고 이쁜 글이에요..잘보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