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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The day-그림자 사냥꾼

나는 창문을 열었다. 오래된 문짝은 단단히 굳어버린 것 같아서, 힘을 주어서 밀어야만 간신히 열렸다. 창문은 활짝 열리지 않았다. 끝까지 열었다면 보였을, 바깥 풍경의 반조차도 되지 않는 면적까지만 밀려나갔다. 나는 그 틈 사이로 푸른 눈을 대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아버지가 우리에게 허용한 자유의 크기였다. 그는 우리를 이곳에 가두어놓고 결코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저택이 줄지어 선 거리, 즉 내 시선의 앞으로 마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검은 안개 같은 마부와 까마귀 떼로 이루어진 것 같은 형상의 마차를 끄는 말들이었다. 바퀴가 굴러갔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말들조차 고요했다. 
 나는 직감했다. 마부는 아버지의 하인이고, 저 마차 안에는 아버지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뛰어갔다. 오래된 서재에는 잡동사니를 포함해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각종 무기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나는 붉은 검을 뽑았다. 익숙한 냉기가 손바닥을 휘감았다. 나는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자 했던가? 그리고 아버지는 어떠했던가?
 아버지는 누구든 살해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죽임당할 수는 없다. 그는 악령을 부리는 흑마법사다. 그의 힘에 대적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공할 힘으로 아버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전쟁터에서, 거리에서, 지하 감옥에서, 뒷골목에서.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억겁의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여왔다. 살인은 그의 일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에 그는 자유로이 쏘다닐 수 있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침묵의 인간들이자 그가 방치한 가축이다. 그는 우리를 멋대로 엮어 한 공간에 몰아넣고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는 그의 핏줄을 공유하고 있지만, 실상 서로조차 믿지 못한다. 우리를 한 데 묶어주는 것이라고는 어둠 속의 촛불처럼 속수무책으로 떨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만이 유일하다.
 나는 어머니에게로, 무력한 짐승과도 같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언가를 말한다거나, 함께 의논을 한다거나 같은 구체적인 의도는 없었다. 그저 막막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갔을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묵묵히 숙인 자세로 앉아있었다. 동생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생은 영원한 침묵 속으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지 않는 또다른 세상 속에 잠겨버린지 오래였다. 영원 같은 잠이었다. 유리 자국 같은 깊은 정적이 우리 사이에 번져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의 세번째 층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을 등 뒤에 늘어트린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는 날카로운 홍소를 터뜨린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다. 내 눈으로 그녀의 형상을 본다. 
 내게 말을 거는 유일한 존재라고는 그녀 뿐이다. 살아있는 자들은 내게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죽은 사람들만이 목소리로 행세한다. 심장이뛰는 자들의 귀에는 닿지 않는 무연한 음성이다. 
"내가 말했지? 내가 말했잖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그 이전부터 아버지의 출현을 예고한 바 있다. 숲 바깥에서도 막강한 포식자의 악취와 기척을 감지하는 사냥개들처럼, 그녀도 생전의 자신을 살해한 자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해칠 수 없다. 복수할 수 있는 힘은 그들에게 없다. 피가 흐르는 자들만이 보복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의 핏줄을 이은 내게 달라붙어, 시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든 언어를 속삭이는 자들은 그들이다. 그들은 내 육체가 시작되는 기억의 첫 단락부터 내 주변을 맴돌아왔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자는 그녀가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실에 안도하기도, 절망하기도 한다. 
 나는 그녀를 향해 눈길을 돌린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나와 대화할 유일한 상대이니까. 그녀가 깔깔댄다. "내가 말했지? 내가 말했잖아. 그가 올 거라고. 머지않아 너희 모두를 처단하기 위해 찾아올 거라고!" 
나는 아버지는 일시적인 현상 같은 것이라고, 비록 그의 출현이 재앙이기는 해도 우리는 처단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붉은 머리의 기사는 금색 망토를 휘날리며 바람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전리품들이 일제히 쩔렁, 짤랑대는 갖가지 소리로 이 웃음에 합류한다.
 "나는 그에게 필요가 없어서 죽임당한거야. 전쟁을 이끄는 일국의 공주의 격에 맞지 않는 최후였지. 우리는 그의 힘을 과소평가했어. 사막의 지배자는 늘 신중해야하지. 나는 날아가지도 꺼지지도 못한 채 늘 그의 핏줄 주변을 배회하며 공허한 말을 읆조리는 망령이 되어버렸어. 내가 말했지? 그가 찾아올 것이라고!"
 그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기로 결정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령들은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살해한 자의 자손에게 들러붙어, 결코 끝나지 않을 자폐적인 어둠의 기억을 선사한다. 동생은 아버지에게서부터도, 희생자들의 처참하고 생생한 언어로부터 차단된 얼음처럼 깨끗한 세상 속에 갇혀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용기도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와 맞서 싸워야 했다. 나는 붉은 검을 살펴보았다. 고대로부터 쌓여온 물건들은, 얼핏 보기에는 잡동사니처럼 보였지만 각자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 때 먼지 속에 잠겨 잠들어 있었다. 그들을 깨운 것은 나였다. 붉은 검. 나는 그렇게 이름 붙였다. 막 흘린 피를 단번에 응고해 보석의 광채를 입힌 듯한, 새빨간 검이었다. 그 검은 아마도 용의 꿈을 꾸고 있을 터였다. 루비같은 붉은 보석으로 뒤덮인 깊은 동굴. 그곳이 숨어 있는, 신조차도 그 손가락을 뻗치지 못할 구름의 산. 나는 검을 만지며 검이 보여주는 기억에 귀기울였다. 난생 처음 마주하는 세상을 탐닉했다. 그것을 배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배움일 것이었다. 끝까지 열리지 않는 창문 바깥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광경들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익숙한 이 세계를 떨치고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거품 같은 꿈들이 인도하는 곳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죽여야 했다. 붉은 검의 눈이 나를 향했다가, 이내 지쳤다는 듯 눈을 감았다. 검은 자르고 베고 썰 데에만 숨을 쉰다. 물건은 제가 만들어진 용도에 따라 쓰여질 때만 살아난다. 나는 위아래로 요동치는 뱃속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온 몸의 장기가 가지 말라고, 허튼 짓하지 말고 익숙하고 안락하고 비참한 세계에서 머무르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검의 날을 만져보았다. 내 살이 종잇조각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 세상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내 공포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피를 몇 번이고 검의 이빨에 가득 적셔지도록 바칠 용의가 있었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소리 높여 그를 환영하는 웃음 소리가 귓청을 때린다. 그가 돌아오면, 그녀 역시 죽은 목숨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하는 걸까?  그녀의 두 손목과 목이 마법의 족쇄에 걸려 연기처럼 사라지는 모습이 눈 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왜 그녀는 그의 출현을 환영하는 걸까? 
  환영이 아니라 애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일찍이 그의 출현을 몇 번이고 예고해 온 터였다. 
 까마귀의 날개와 같은, 거대하고 검은 그림자가 우리의 침실 위에 드리워진다. 매캐한 향기와 수많은 사체들이 내뿜는 악취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말발굽 소리는 멈췄고, 그의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종소리가 진공을 흔든다. 그는 악령을 부리는 흑마법사로, 그가 억겁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왔던 까닭은 오직 이것을 위해서였으니, 나의 유일한 임무는 그에게 맞서는 일이다. 
  내 연푸른 눈, 하늘의 빛깔을 본딴 것 같은 그 눈이 바닥을 향해 흐르다가 이내 천장을 따라 급격히 치솟아 올라갔다. 어머니는 어깨를 움츠리고 무력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든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붉은 입술을 열어 광적인 웃음을 폭발시킨다. 
  "내가 말했지? 그가 온다고, 그가 찾아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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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4

세 시가 되었을 무렵 D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사에게 불려갔다 왔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겉으로만 그런척 하는건지 Y는 D의 머리속이 궁금했다. D는 어젯밤에 지방에 내려가서 늦게 출근했다고 했는데 말도 안되는 핑계였다. 이사도 그 말을 믿지는 않을 터였다. K차장은 D를 아주 못마땅해했다. D때문에 이사가 자신을 더 못살게 군다고 생각했다. 팀 회의를 할 때면 K차장은 팀원들에게 자신이 이사에게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토로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오늘도 야근을 예약해 놓은거나 다름없었다. Y는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신경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P에게 짜증내는 K차장의 목소리와 D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Y는 자신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J가 Y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물을 봐달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Y는 J의 자리로 갔다. 모니터를 보고 Y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J를 한 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J는 벤치마킹한 디자인을 섞어 놓고는 어떻냐는 표정으로 Y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J에게 Y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J는 평소에도 연봉이 높은 포지션에 대해 묻고는 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적은 듯 보였다.

"팀장님께 보여드려 봐."

Y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J는 디자인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여섯 시가 다 되어가자 L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L은 어김없이 자신의 저녁 약속에 대해 떠들어댔다. 오늘 업무가 끝난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 Y와 P는 저녁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차장과 D도 뒤따라 나왔다. 정말이지 눈치마저도 없었다. 네 사람은 시간을 아끼려고 회사 앞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네 사람은 아무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 Y와 P는 가끔씩 눈을 마주쳤는데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J는 퇴근한 뒤였다. F차장은 다이어트 중으로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사는 거래처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인상을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언제 불똥이 튈 지 몰랐다. D는 작업한 파일을 보내줄 수 있냐고 Y에게 물었다. Y는 용량이 커서 전송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D는 다른 사람에게 매번 도움을 얻어 일을 했다. Y도 몇 번 일을 알려주고는 했는데 그 후로 신입인 J보다 더 많이 물어와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D가 남자 직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이사는 출근과 퇴근을 모두 늦게 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았다. 이사의 통화가 끝나자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회사에는 Y의 팀을 비롯해 몇몇 사람만 남아있었다. Y는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Y는 파스가 붙여진 시큰거리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붉은색 지붕의 낡은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서 있고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모래사장을 Y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중해는 Y의 오랜 갈망이었다. 어릴적 지중해 연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후로 그곳은 Y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거리가 펼쳐졌고 그곳을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다. 거머리같은 더위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해도 될 우스꽝스러운 회사 사람들과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을 견뎌야만 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17세기 풍의 오래된 집의 테라스에서 지중해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였다. 사시사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터키 블루색 같은 잔잔한 물결의 지중해,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깨끗한 공기, 눈 인사와 정감어린 미소,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제철 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 느긋한 아침 시간과 저녁 식사 후 산책. 크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죽어있는 감각을 깨우고 하루에 한 번 크게 웃고 죄책감없이 게을러지고 싶었다.

 

Y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하철 안에는 긴 하루의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있었다. Y의 맞은편에는 얼굴이 붉은 중년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앉아 있었고 Y의 옆에는 앳되 보이는 얼굴의 커플이 속닥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Y는 출퇴근 시간에 휴대폰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그래도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혹사시키고 있는 터에 조그만 기계에 내 시간을 전부 쓰고 싶지는 않았다. Y는 눈을 감았다.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없는 상태로 있고 싶었다. 지하철은 익숙한 이름의 정거장을 거치고 또 거치고 거쳐 Y의 동네에 Y를 내려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Y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다시한번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눅눅한 습기가 Y의 얼굴로 덮쳐왔다. 역 주변 상점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진 듯 보이는 남자 몇몇이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Y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Y가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멀뚱히 Y 뒤에 서 있었다. Y는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빠른 속도로 걸었다. 뒤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저기요, 어디가세요?"

Y는 대꾸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역 앞에서 술에 취해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남자는 계속 뒤따라 왔다. 심장이 빨리 뛰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큰 길이 끝나면 집까지 가는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어두웠다. Y는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는 집에 있었다. 룸메이트는 자신이 나갈테니 큰 길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큰 길이 끝나는 지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Y가 그들에게 가까이 걸어가자 뒤따라 오던 남자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룸메이트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Y도 룸메이트에게 뛰어갔다.

"괜찮아? 어디 있어, 그자식!"

"사람들이 있는 거 보고 돌아갔어, 미친놈."

Y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 행동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힘들게 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Y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두려움이 엄습했었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흥분하며 얘기하자 지나가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Y와 룸메이트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룸메이트는 Y의 가방을 대신 들고 Y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 앞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한밤의 산책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개들은 밖으로 나온 것에 신이 났는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그러다 Y와 룸메이트를 발견하고는 컹컹대며 짖었다. 두 사람은 순간 소리를 지르며 냅다 집으로 뛰었다. 주인이 목줄을 끌어당기며 개들을 진정시켰다. Y와 룸메이트는 집 앞에서 숨을 고르다 무심코 검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 보았다. 달은 건물 꼭대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 했다.

"달 봐봐."

야근으로 밤 늦게 들어오면서 달을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지친 몸을 이끌며 똑같은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달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겪었던 불쾌한 기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공기는 여전히 옆에 있었지만 달빛은 그들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었다. 여름밤이었다.

“화장실 고쳐놨어."

룸메이트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Y는 룸메이트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목 뒤로 머리카락이 쩍쩍 달라붙었다. 서울은 20일째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었다. 오늘도 달빛 아래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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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3

점심 시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이사가 출근을 했다. 이사는 사십대 초반의 청순한 외모의 소유자로 나이보다 몇 살은 어려보였다. 그러나 Y는 이사가 의학의 도움을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깨끗한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갑자기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사는 Y 뒷자리에 앉았는데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방귀와 트림을 번갈아 가며 했다. 또 결코 책상을 정리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 일회용 커피컵, 코 푼 휴지가 굴러다녔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 지 누구를 부를 때나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귀가 먹먹하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일을 마음에 들게 하면 대우해줬고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즉시 눈 밖에 났다. 애연가였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향수를 뿌렸는데 오히려 더 역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사는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마다 항상 L을 데리고 다녔는데 L은 이사의 오른팔로서 아부로 살아남는 종족이었다. L의 아부는 독보적이었는데 이사 앞에서 허리를 펴는 날이 없었다. 이사의 말이라면 모두 맞장구쳤고 자신의 생각은 집에 놔두고 온 듯 했다. L은 소위 월급 도둑이었다. 중요한 업무는 요리조리 피하고 간단한 일만 맡아서 하는데도 어찌나 생색을 내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회사 일은 L이 다 하는 줄로 생각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자신이 일을 한다는 티를 팍팍 냈다. 업무가 많아 야근하는 동료들과 달리 L이 근무 시간 이후에 회사에 남아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사를 등에 업은 L에게 F팀장도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L이 회사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은 이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입발린 말을 할 수 있는지 타고난 재능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Y와 P 그리고 J는 도시락을 들고 휴게실로 갔다. J는 입사한지 몇 개월 밖에 안된 이십대 후반의 신입 직원이었는데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 Y는 처음 얼마간은 그의 불평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신입 직원의 고충이라고 이해하며 듣기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그의 불평은 점심 시간 내내 지속되었고 Y와 P는 꼼짝 않고 그 불평을 들어야만 했다. 하나 더 참을 수 없는게 있었는데 그것은 J의 입냄새였다. J는 양치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J가 옆에 앉아 얘기할 때면 Y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날도 J의 불평이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포착한 Y가 P에게 먼저 말을 던졌다.

“우리 점심 먹고 마트나 갈까?"

"좋아, 좋아. 내가 봐놓은게 있거든."

P는 신이나서 사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거리에 관한 정보는 줄줄 꿰고 있었다. P는 어디에서 무엇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지 Y에게 알려주고는 했다. 그 정보는 유용할 때도 있었지만 Y는 P만큼 물건을 많이 사서 쟁여 놓는 경우는 없었기에 이용할 일이 없었다. J는 웬일인지 P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오늘은 J의 불평을 듣지 않고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D대리님 말이에요, 어떻게 된 걸까요?"

J가 못참겠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글쎄, 오후에 출근하겠지."

Y가 짧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이사님한테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출근할 때 역 근처에서 D대리가 돌아다니는 걸 몇 번 봤대요."

J가 계속 말하자 Y와 P는 동시에 몸을 뒤로 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Y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D는 자리를 한참동안 비울 때가 많았다. 언젠가 어떤 직원이 D가 비상구 계단에 앉아 자고 있는 걸 봤다고도 했었다.

"진짜? 대표님 점심 시간 다 되서 출근하시잖아. 그 시간에 거기서 뭘 하는 거지?"

P가 바나나를 Y와 J에게 주며 말했다. 그녀는 항상 넘치게 먹을 것을 갖고 왔기에 사람들에게 잘 나눠줬다. Y는 바나나 껍질을 벗기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P와 J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Y를 바라보았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역 주변을 배회하는 D와 그녀를 목격한 대표님을 상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D에 대해서는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항상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점심 시간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오후 시간은 고되었다. 눈알은 빠질 듯 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귀의 통증이 며칠간 계속되고 있었다. 어지럼증은 사회 생활을 하며 얻은 단짝 친구였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고질적인 직업병이었다. Y는 서랍에서 파스를 꺼내 손목에 붙이고 모니터에 다시 눈을 고정했다. 이사는 K차장을 불러다 한참이나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Y의 귀가 더욱 욱씬거렸다. K차장은 사십대 초반으로 이사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그는 중간 관리자로서의 업무 조율 역할을 잘 하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싫어했으며 이사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같은 팀인 Y와 P에게 풀었고 Y와 P의 업무량은 갈수록 늘어났다. K차창은 이사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 자주 야근을 강요했다. 그러나 야근을 한다고 해서 이사가 K차장을 좋게 볼 일은 만무했다. K차장은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것 같았다.

 

Y는 업무 얘기를 하기 위해 H과장을 찾았다. H과장은 100kg가 넘는 육중한 몸의 소유자였는데 대표와 이사의 눈을 피해 맨 뒤 자신의 자리에서 자주 낮잠을 잤다. 그는 자다가 일어나 당이 떨어진다며 편의점에서 초코 과자들을 잔뜩 사와 순식간에 해치웠고 휴게실에서 몰래 잠을 자기도 했다. 지각을 밥먹듯이 하면서 집에서 회사까지 멀다며 항상 우는 소리를 했고 땀을 비오듯 흘리며 4월에도 덥다고 선풍기를 틀었다. 여름이 돌아오면 헬스장을 다닌다며 입으로만 유난을 떨었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예전 사진을 보여주며 조만간 근육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Y는 H과장을 불렀다. 그는 낮게 코를 골며 세상 편하게 잘도 잠을 잤다. 정말 혼자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Y가 다시 한번 부르자 H과장은 그때서야 가늘게 눈을 떴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Y는 반영되어야 할 사항에 대해서 설명했다. H과장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혔으나 Y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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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2

Y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커피가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이 몇 분이 Y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마에 맺힌 땀이 조금 마르자 Y는 컴퓨터 전원을 켰다. 9시 5분 전이었다. 대표와 이사는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출근을 했다. 동료인 P도 오늘은 늦는 모양이었다.

"Y씨, 커피 마실래?"

맞은편 자리의 F팀장이 Y에게 말을 걸었다.

"전 들어오면서 사왔어요."

Y는 커피를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F팀장은 절대 자신이 커피를 사오는 법이 없었다. 커피를 사러 가는 사람이 보이면 꼭 카드를 주며 자기 커피도 사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카드로 다 계산하라는 얄미운 그 말을 마지막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Y는 몇 번 F팀장의 커피 심부름을 한 후로는 커피를 사서 회사에 들어갔다. F팀장은 삼십대 후반으로 오지랖이 넓었고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착각하는 부류였다. 그녀는 한 번씩 나서서 농담을 할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웃어주자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이 꽤 좋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인사도 받지 않을 만큼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갔다. 또 자기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와서는 자기 입으로 자기 모습이 웃긴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러면 팀원들은 팀장님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는 정해진 답을 말했고 F팀장은 눈을 흘기며 좋아했다. Y는 단 한번도 F팀장에게 옷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F팀장은 Y에게 그 말을 듣고 싶어 Y의 옷차림에 대해 칭찬하고는 했는데 Y는 입가에 미소만 한번 지을 뿐이었다. F팀장이 자신에게 왜 그 말을 하는지 알았지만 Y는 F팀장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Y가 보기에 그 옷은 F팀장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F팀장이 빵을 한가득 사와서 팀원들에게 먹으라며 평소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팀원들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몇 개는 먹고 몇 개는 남겼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F팀장이 남은 빵을 자신의 자리에 가져가더니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둥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다는 둥하며 신경질을 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감사하다는 말을 얼마나 해야 F팀장의 마음에 충족되는 걸까하고 Y는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었다.

F팀장은 결국 나이가 가장 어린 신입 직원에게 카드를 주며 자신의 커피와 신입 직원의 커피를 사오라고 얘기했다. Y는 카드를 받아들고 나가는 신입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료인 P가 9시를 조금 넘겨서 들어왔다. 그녀는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Y는 P가 지각을 자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아침 시간의 대부분을 썼다. P는 점심에 먹을 음식과 간식을 잔뜩 챙겨 회사에 왔는데 먹을 것을 자신의 옆에 두고 흐뭇해했다. P는 퇴근 후에 회사 근처의 마트에 함께 가자고 Y에게 자주 말했는데 Y는 주말에 장을 봤다고 거절하고는 했다. P는 가방에서 간식거리를 꺼내어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러고는 Y에게 점심 시간에 마트에 가자고 말했다.

 

Y는 파일을 열어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Y의 팀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늘 그렇듯이 기획 단계부터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기획자는 새로울 것 없는 기획서를 주면서 디자인은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 마감 시간까지 겨우 맞춰 디자인을 끝내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며 디자인적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수정할 거리들을 잔뜩 던져 주었다. 기획자는 디자인이 방망이를 몇 번 두드리면 뚝딱하고 나오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Y는 매번 반복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기획자의 목소리가 더 컸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현실은 매달 돌아오는 월급날 외에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F팀장이 D를 찾았다. 옆자리에 앉는 D는 아직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8년간 사회 생활을 한 Y도 D와 같은 사람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D는 경력이 Y와 비슷했지만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용어도 잘 몰랐다. 회의 시간에는 멍하니 있거나 노트에 낙서를 하다가 이사에게 한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간단한 일도 며칠을 붙들고 있었고 그마저도 실수가 많아 수시로 이사에게 불려가 설교를 들었다. F팀장은 D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휴대폰 전원은 당연하게도 꺼져 있었다. D는 이렇게 연락이 안 될 때가 종종 있었다. 오후에 가까스로 연락이 되면 그제서야 회사에 나왔다. 동료들이 전원을 왜 꺼놨냐고 물으면 전화 할 거 아니까 꺼놨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멍해 보이는 인상 뒤에 어떻게 그와같은 뻔뻔함이 숨겨져 있는지 볼수록 신기했다. F팀장은 한숨을 쉬며 궁시렁거렸다. F팀장은 궁시렁대기 대회가 있다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일 정도로 누가 듣건 말건 자기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Y는 한 달 정도 F팀장의 뒷담화 대상이 된 적이 있었는데 신입 시절 이후로 회사 생활하며 울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F팀장의 공격은 Y 다음 타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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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4 - 2

596

 

 

 

잡화점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지낼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도 나는 ‘카린’이라는 여성체의 모습일 뿐. 결국 한숨을 쉬고 나중에 되돌아갈 방법을 찾기로 생각했다. 대부분 짧은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폭염이지만, 숲에는 긴바지를 입어야 마음이 놓인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에 가시에 찔리거나 독을 지닌 생물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떤 변수로 작용해 목숨을 빼앗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리베리티아 고원 특유의 바람은 오히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니,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된다. 최적의 기온으로 맞춰진 이곳이 낙원이긴 하지만...

 

“그 덕에 이곳에 몰려오는 수많은 몬스터들과 인간들의 전쟁터가 되었구나.”

 

덕분에 비릿한 냄새가 떠나지 않는 붉은 빛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리베리티아 고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요정과 엘프들이 사는 숲이 나오지만, 어차피 들어갈 일이 없으니 비명을 들었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주변에 시체로 황폐해진 곳을 산림욕 하듯이 들어갈 수 없는 이 찝찝한 기분은 뒤로하고, 세린에게 말을 걸어 내가 궁금한 것부터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너도 내 상태정보라던지 그런 걸 수정하거나 멋대로 작성할 수 있어?”

 

“일부는 가능하지만 일부는 불가능하지.”

 

“내 성별은?”

 

“......”

 

아. 침묵을 하시겠다?

 

“당장 돌려내! 이 로리콘아!”

 

“나는 겨우 로리콘이 아냐.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만약 잡화점의 주인이 키도 작고 귀여운 남자애나 여자애였으면, 보살필 맛이 나는데 어째서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우중충하고 따질게 많은 남자였는지.”

 

“어째서인지 평소의 카린보다 키가 좀 더 작더니만!”

 

그나마 여성체로 변했을 때는 160cm 후반대로 갔다면, 이번엔 아예 150cm초반대로 가버렸다. 이래서 내 프로필을 적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어느 정도고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죄다 ‘불명’으로 적거나 ‘변수가 많음’으로 적어야 하잖아!

 

대체 어느 신체검사원이 좋아하겠냐고!

그보다 ‘겨우’라는 말을 사용한 거냐? 지금?

 

“아무래도 은팔찌를 차야 할 녀석은 너로구나.”

 

“글쎄? 잡화점에 팔이 있던가? 집을 감옥에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고 하시지?”

 

저 얄미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카린의 입지가 더 굳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는 시체부터 조사를 해야 되나?”

 

“시체를 뒤적거린다고? 그런 지저분한 일을 그런 귀여운 모습으로 할 거야?”

 

“생존에 있어서 귀엽고 멋지고가 어디 있어? 그냥 추악하게 사는 거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게 시체든 쓰레기더미든 모두 뒤적거리며 살고 있는 거잖아.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지만, 모든 생명은 구차하게도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의지가 있지. 그거야 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거야.”

 

거대한 손톱에 깊게 파인듯한 갑옷. 그 안에 들어있는 따듯한 내장들이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습격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고, 어처구니 없게도 정말 마왕군에게 쫓겼는지 내 근처만 해도 풀 숲에서 감시하는 듯한 고블린 무리가 감지 되었다.

 

그래도 일단 나를 공격하지 않으니 모른 척.

다만, 마나가 요동치며 주변의 공기를 휘두르고 있을 때. 주변에서 발 소리가 더 들려왔다.

 

“뭐지? 지원군인가?”

 

곧 죽어갈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울려오자마자, 주변에 있던 고블린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그런 곳에 있으면 죽어버릴 테니까.”

 

“아, 알았다. 그런데 너 같은 소녀가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소녀라는 말에 열이 받쳤지만,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멋대로 화내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 당신 같은 기사가 이곳에서 대패한 이유는 뭔가요?”

 

흔적을 쫓다 보면 멋대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여진 것으로 보였다.

 

“대패한 이유야 13대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끄는 군세 때문이지. 벌써 프리트론까지 함락하고 있어. 미약하게나마 부탁을 하지...”

 

“제가 부탁을 받는다고 해도 손쓸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적어도 프리트론에 있는 귀족들만이라도...”

 

“귀족이 아니라 약자를 지키는 게 기사의 사명 아니던가요? 저는 어차피 기사도 아니고 민간인이니 그 말을 들어줄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털썩!

 

묵직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내 시선은 무릎을 꿇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외쳤다.

 

“제발! 부탁이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만, 그 약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것이야 말로 왕과 귀족이 행해야 하는 사명이니까! 그들을 지켜야지만 약자를 이끌고 모두 대피할 수 있다!”

 

대답이 좋았다.

아니, 정말로 이 기사는 자신의 주인만 생각한 줄 알았으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남을 챙길 생각을 할 줄이야.

 

“그렇군요. 적어도 당신은 올바른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그대로 가만히 있으세요.”

 

드디어 공격을 감행하려는 듯한 풀숲의 움직임. 순식간에 뛰어가 기사의 등을 밟고 뾰족한 단검을 든 고블린의 얼굴에 발로 차버렸다. 살살 차면 살아있을 수 있으니, 목뼈가 날아갈 정도로 강하게 차버렸다.

 

물 흐르듯이 허공에 떨어지려는 뼈 단검을 붙잡고, 내 동쪽 방향으로 빠르게 던지자, 풀 숲 한곳에서 찢어지는 짐승의 비명이 울렸다. 한 손에는 검을 만들어 휘두르고, 다른 한 손에는 마나를 모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을 하고야 말았다. 어쩌다 보니 고블린이 더 불쌍해질 정도로 괴멸시켰고, 엉망이 되어버린 숲을 더욱 더 황폐하게 만들어서야, 널려있는 고블린의 시체들은 곱게 죽지 못해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기 다친 데는 없어요?”

 

다친 데는 없는지 물어보고 있지만, 그 기사는 뭐에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숨을 쉬는 걸로 봐선 서서 죽었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으니, 다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서는데...

 

“호, 혹시 용사입니까?”

 

“아뇨. 잡화점 주인입니다. 그보다 이 나라에 용사가 없어요?”

 

“아, 예. 용사는 여신의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만 가능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500년동안 대마법사 엘티노스 일행 말고는 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흠. 내가 알던 용사들은 바퀴벌레보다 더 많은 숫자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직업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비정상적으로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 용사로 취급되는 세계구나.

 

“아니. 너희가 이상한 거잖아. 매번 용사들이 득실거려서 무서울 지경이었다고?”

 

“세린은 조용히 하고 있어.”

 

“네? 무슨 소리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말들을 받아 치느라 머리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음이 호수처럼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러면 마왕은 어디서 볼 수 있죠?”

 

“마, 마왕이라면? 그 13대 타락의 마왕 말입니까?”

 

“네. 맞아요.”

 

그 마왕 아니면 누가 있겠어?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이는 건 내가 아는 레시아가 아니라, 어느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잔혹한 마왕 ‘레프리시아’라고 보면 된다. 어찌되었든 나와 마주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혹은 맨 처음 만나자마자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투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

 

“마왕은 직접 대군을 이끌지 않고 마계에 있는 마왕성에 있지만, 마기가 가득해 여신의 축복을 받지 않는 이상 도달할 수 없다고...”

 

“아. 거기에 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차피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뭣?”

 

“잘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을 하다니요?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다는 소리에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방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마왕을 막아야 한다는 건 맞죠?”

 

마왕을 막는 게 개구리를 만질 수 있는 용기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라면 싸우지 않고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에서야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으니까. 철저한 방해공작을 통해 프리트론 왕국과 반대 방향으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

 

“인간계의 반대 방향이라면 마계밖에 없지만, 이렇게라도 유인을 해야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되지 않고 더 많은 시민들을 살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혼자서 그 마계대군을 막을 수는...”

 

“아니. 유인만 하는 거지 누가 군세를 막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군세를 막을만한 위력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계기라던가 아니면 내가 직접 마왕성을 때려부수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처럼 마왕을 자칭하거나...아니, 이 모습으로 마왕을 자칭하기도 힘들겠구나.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그러면 저는 출발할 테니 고블린 이빨이라도 가져가세요. 팔면 그래도 저녁에 먹을 음식이 호화롭게 될 테니까요.”

 

고블린 이빨은 잡화점에서 취급한 적이 있었는데, 화살촉으로 만들면 위협적인 물건이 되니까. 잡상인에게 팔면 짭짤하게 벌 수 있다. 그나저나, 돈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주제를 벗어난 독백을 하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그럼 마계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줘. 세린.”

 

“마계로 가는 길은 스스로 갈 수 있잖아?”

 

“그럼 본래 성별로 되돌려 주던가!”

 

“그건 싫은데?’

 

대체 세린을 어떻게 아이언 클로를 해야 내가 남자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동안, 마기가 몸을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몸 안쪽에선 신성력과 마기, 마나를 계속해서 합성하기 때문에, 마기에 대한 침식은...

 

“아니! 게이트를 열어줄 거면 열어주던가!!!”

 

조금 걸어갔는데 마계로 간다는 그 자체가 이상하잖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거든? 이것도 네가 가고 싶다는 소망이 이루어낸 기적이야.”

 

“내가? 그런 거야?”

 

“그래. 또 그 마왕을 되찾으려는 거야? 아니면 그 마왕을 죽이러 가는 거야?”

 

그야 뭐. 되찾으러 가는 거긴 한데. 생각을 좀 해보니까 마계에서 난동을 부리고 마왕에게 호감을 얻는 건 바보 같은 일이고, 결국 죽이러 가는 것보단, 어쩌다 보니 싸우러 간다는 표현이 맞다. 이 세계에 있는 레시아가 날 알아본다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0.1정도 가능성이 있다면 괜찮겠지.

 

“뭐가 되었든 회군시키러 가볼...”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주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레시아와 잡화점 생활을 하면서, 매우 얕보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레시아의 정보습득 능력은...”

 

“전군. 정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미 최상위권이잖아...”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배치. 거대한 군세에 포위당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환영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많이 데려오지 않았으면 좋겠...”

 

“타락하라.”

 

마왕 레프리시아의 말 한마디에 내 주변이 모두 빛으로 물들었다. 주인공은 악당들의 대사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어째서 악당들은 말도 듣지 않고 속전속결로 공격하려는 걸까?

 

거대한 폭음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전신에 충격이 몰아쳤다.

 

“아프잖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가 바닥에 기고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탈진감부터 서서히 몸의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흐음? 마왕님? 저 인간 일어났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인간이기엔 매우 변칙적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짐의 마법을 직격으로 맞고도 살아남는 자가 있다니.”

 

“좀...사람이 말을 할 때, 마법을 직격으로 날리지 말던가...”

 

레시아와 시나가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곳에서 마법을 사용하니까, 조금이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대로 마법방패와 몸 안에 에너지를 둘러서 충격에 대비하는 버릇이 빛을 발휘했다.

 

차이점이라면 지금 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마법인 거 같은데, 생각보다 10배는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살아남은 게 의아한 걸까? 굳어있던 마왕의 고개는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소녀여?”

 

“소녀 아냐...원래는 남자라고...”

 

아무래도 나에 대한 정보는 습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보다 내 이름을 묻는다면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대화를 할 여지가 있거나, 다른 하나는...

 

“짐의 마법을 버틴 자의 이름을 알리고, 최후까지 전해주도록 해주기 위함이니라. 어서 대답하거라.”

 

그래 저거. 꼭 사람 죽이려고 하면 피해자의 이름을 듣더라.

아이고...

 

“내 이름은 카...”

 

“잠깐만. 그 입으로 카일이라는 흉한 이름을 대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내가 카린이라고 대답해야겠냐!”

 

“그렇군. 그대의 이름이 카린인가?”

 

“아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세린의 방해공작으로 나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체, 카린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당장 저 마왕에게 살해당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고양이 모습이었을 때는 그나마 고분고분 잘 따라줬는데, 각본가가 사라지고 난 세상의 레프리시아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잔인한 마왕임이 틀림 없다.

 

“마왕답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난 마법 한번으로 뻗어버리지 않아.”

 

아마 두 번 맞으면 뻗어버릴 것 같은데...

어쨌든 설령 패배해도 날 죽이지 못하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얇고 긴 백은의 검을 만들었다. 붉은 달 아래에 휘날리는 검은 그 뒤에 별빛이 따라다니듯 어두운 공간에 잠깐이나마 실선을 번뜩였다.

 

“그대는 용사인가?”

 

처음으로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빛에는 빛을 띄기 시작했다. 자신의 호적수라도 찾은 모양인지 고양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봐도...내 대답은 고정되어있었다.

 

“아니. 잡화점 주인인데...저녁에는 잡화점을 열어야 하니까 그냥 돌아갈까?”

 

이토록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대사가 어디 있을까?

...내가 했으니 여기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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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일이 절 죽이네요.

위험등급이 진돗개 2마리 정도라 글을 제대로 못씁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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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1

Y는 무거운 무엇인가가 자신을 옭아 매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이 찾아왔다. 새벽 3시였다. 일주일 가까이 이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고 새벽에도 보이지 않는 적과 사투를 벌였다. 방 안은 갑갑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휴대폰으로 현재 기온을 확인하니 32도였다. 32도! Y는 지금까지 살면서 새벽 3시에 32도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은 매년 여름 기온이 상승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한 낮 기온이 39.6도를 찍었다. 체감온도는 40도를 넘어섰다.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서울의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거라고 말이다. 몇 년 후에는 열대 기후의 나라에 여행 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Y는 미친 날씨야라고 혼잣말을 내뱉고는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리카락이 말썽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문어 다리처럼 목을 휘감아 숨이 막히는데 한몫을 했다. Y는 늘 여름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가을이 되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기에 충동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머리끈으로 고정하고 부엌으로 갔다.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키자 쩍쩍 갈라진 논밭에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따끔거렸던 목구멍이 촉촉해졌다. Y는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밖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지금 깨어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은 고요하고 말라버린 감수성이 터질만큼 감상에 젖기 좋은 시간이지만 지금은 그저 더위에 지쳐 잠 못 이루는 밤일 뿐이었다. Y는 이쪽 저쪽으로 자세를 바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금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Y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간밤의 더위에 몇 번이나 잠을 설쳐서 바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5분만 더 자고 싶었지만 다리를 들었다 내리며 반동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햇살은 창을 통과하기 전이었다. Y는 침구를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룸메이트가 욕실문을 열고 나오며 변기에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 룸메이트는 1년에 두 번은 연례행사처럼 변기를 막히게 했다. 본인은 화장실 배관이 너무 낡아서라고 주장했지만 Y는 변비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삐져나오는 짜증을 간신히 누르며 저녁까지 해결해 놓으라고 말하고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화장을 하는 도중에도 코 밑으로 땀이 송송 배었다. 선풍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을 나와 바깥 공기를 빨리 마셔야 했다. 그래야 답답함이 조금 해소될 것 같았다.

 

지하철은 그나마 북새통은 아니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노선이 아니어서 출퇴근 전쟁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대신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Y의 옆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섰다. 남자에게서 마른 걸레에서 나는 쉰내가 풍겼다. Y는 가급적이면 숨을 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Y의 폐활량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얼마 못가서 콧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냄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자리를 옮기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과 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Y는 어쩔 수 없이 오래 숨 참고 있기를 몇 번 더 했다. 드디어 환승역에 다다랐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Y도 환승 통로를 빠르게 걸었다. 여기서 4 정거장을 더 가야 회사가 있는 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역에서 회사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Y는 회사 옆 건물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샀다. 몇 개월째 매일 아침에 보는 편의점 직원은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Y가 인사를 해도 그녀가 입을 여는 법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계산을 하며 Y가 말했다. 직원은 역시나 묵묵무답이었다. 거리는 햇볕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 회사 건물에 들어서니 엘리베이터 앞은 이미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을 싣고 쉴새 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다. 차례를 기다려 Y도 사람들에 섞여 엘리베이터에 탔다. 사람들은 모두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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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4 - 1

595

 

시간은 유연하게 변한다.

따라서 공간도 유연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모든 걸 꼬아버렸다.

그런 나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는 걸까?

-혼자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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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순덩어리다.

그야 말로 내 존재 차체는 이미 모순으로 가득 찼...아니, 이렇게 인트로를 시작하려니까, 내 왼팔에 흑염룡이 살고 있는 거 같잖아. 사실 흑염룡은 없고 월식이라는 검은 뱀은 살고 있긴 한데. 아무튼 현재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던 각본가가 사라지고 나서, 나를 죽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상황이 없어졌으니. 착한 마왕인 레시아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루니아 누나라던가. 아무튼 그냥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원래 없는 존재니까. 인간관계부터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되겠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자. 세린.”

 

“응? 뭔데?”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세린은 이전과 다르게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항상 물어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하거나, 뭔가 시비가 목에 걸려서 따가웠는데...

 

“어째서 나는 카린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거냐!!!”

 

날카로운 비명은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애초에 남자이며 이름은 카일이다. 설령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잡화점 내부에서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네가 규칙을 수정해달라면서.”

 

“그래! 맞아! 이 곳을 운영하는 종족을 늘려달라고 했지! 신이든 뭐든 상관없게 말이야!”

 

“하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그러니 너의 본 모습인 남자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규격으로 남아있던 카린이라는 여성형 인간으로 남아있는 거야.”

 

“도대체 너는 왜 내 말부터 무시하는...머리 쓰다듬지 마!”

 

그리고 이 상황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자. 카린 씨. 오늘은 저를 어떤 신비한 세계로 보내주실 건가요?”

 

“리제로트. 이건 타디스가 아니거든? 메두사 폭포로 던져버리기 전에 이제 좀 나가!”

 

“어머머? 이런 가녀린 소녀를 혼자 버려두겠다는 건가요?”

 

“달라붙지 맛!”

 

찹쌀떡처럼 달라붙으려는 리제로트를 겨우겨우 뿌리치고 잡화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먼 은하수가 펼쳐진 공간은 이 시간대가 밤이란 걸 알려주고 있지만, 미래에서 볼 법한 거대한 빌딩이나, 전등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과거. 아니, 내가 본래 되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은 장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정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네.”

 

파이론은 마왕으로부터 멸망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지금은 누가 마왕인지 모르겠지만 레시아라고 해도 똑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면, 제멋대로인 폭군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육포에 대한 집착만 봐도...아니, 이런 걸 육포에 빗대어서 뭐하게?

 

“봐요. 밖은 몬스터들이 불을 키고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라고요. 시체를 처음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음산한 기운이 리제로트를 감싸듯 들어왔다. 그래도 여기는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백장미가 없다. 이거야 말로 이 세상이 좀 좋아지는 이유인가?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쯤.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잡화점에 손님이 찾아...와야 하는데...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도, 손님이 잘 안 온다는 공통점은 어째서일까?”

 

“그거야 내가 막고 있으니까. 이미 이곳은 마왕군의 손아귀에 있잖아. 그런데 인간이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져봐. 어떻게 생각하겠어?”

 

지금 겨우 평화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지만, 약육강식이 살벌한 공간에 잡화점이 나오면, 그 안에서 물품을 구입하기 보단, 약탈과 습격의 빈도가 매우 많이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일리가 있네. 그냥 이대로 매출 없이 평생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오지 않는 손님이나 기다리며, 죄다 사라진 잡화점 멤버들에 대한 그리움도 잊어보자. 아니...잊혀질 리는 없나.

 

“그나저나 아쉽네요. 잡화점 멤버가 있을 당시엔 저와 어울려줄 꽃들이 많았을 텐데.”

 

“널 위해서 잡화점 멤버를 영입한 게 아니거든. 리제로트.”

 

저 사막여우보다 더 괘씸한 생각을 가진 리제로트의 말에 대못을 박았다. 아니, 사막여우는 괘씸하지 않고 귀여운 동물인가? 실제로 여우를 본 기억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심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창문이나 보고 있는 소녀는 이윽고...

 

“밖에 나가고 싶어요.”

 

“안 돼. 밖은 안전하지 않아.”

 

답답함을 못 참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만류해보려고 해도 이제 4일정도 경과했으니, 탐색과 정보를 모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내일 나하고 같이 나가자. 너는 월터가 붙어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사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초보잖아? 그러니...”

 

“아니? 마법에 대한 기초는 이미 마스터 했는데요?”

 

뭐?

 

“잠깐? 뭐? 어떻게?”

 

“놀라는 모습이 귀엽네요?”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떻게 기초를...아! 잡화점은 사라진 게 아니니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들이 남아있구나!”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 그리고 덤으로 어마어마한 물품들까지. 사실 모든 시공간에 레이베리아를 빠짐없이 가둬버리면서, 엘티노스의 잡화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모순투성이인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잡화점은 이 시대에 모순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네. 재미있더라고요. 이 시기의 마법은 전성기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했잖아요? 마법공학이 발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그러면 카린 씨도 마법사의 길을 걸으신 거 맞죠?”

 

“카일이라고 불러.”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카.린.씨? 푸훗!”

 

저 앙증맞은 볼을 잡아서 늘려버릴라!

 

“세린. 규칙을 바꾸자고 했을 때 말 좀 들으라고...”

 

한숨을 곱게 포장해 밖으로 내뱉었다. 산지직송으로 가는 한숨은 공기 중에 사라졌고, 새벽 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조용하게 생각하고 싶은 내 입장에선 리제로트가 빨리 잠들길 바라고 있었다.

 

“넌 안 자냐? 키 안 큰다?”

 

“카린과 같이 잔다면 지금쯤 꿈나라에 갔을 텐데요?”

 

“쉿! 그 이름은 거론해선 안 돼. 볼트모트와 같은 거야.”

 

“카린 씨야 말로 말하면 안 되는 이름을 거론했잖아요?”

 

한숨만 쌓였다.

뭐, 밖을 외출하면 본래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그냥 검은 고양이인 레시아를 쓰다듬으며 새벽을 보내는 게, 하얀 올빼미인 시나를 옆에 두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제는 기억에서 독처럼 남아 퍼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작별인사도 못 건넸구나.

적어도 몇 마디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눈을 감고 조용히 정리를 하자. 내일 아침에 밖에 나가면 기다리는 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 그런데 어디서 재료를 사야 하지?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생각이 먼저인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것이 맞는 표현인가 보네.”

 

눈을 떴다.

시야는 이미 햇빛이 들쳐진 아침.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했는데 설마 아침이 올 줄은 몰랐다. 정기적으로 명상처럼 빠지는 것도 아니고, 눈을 깜빡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내 의지를 받들어 지금 이 순간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기적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 볼...”

 

생각해보니 나는 깨어났어도 리제로트는 아직까지 자고 있는 시간대. 멍하니 앉아있기도 뭐해서 아침을 만들러 나아갔다.

 

“그나마 암흑물질이나 형광물질 같은 건 먹지 않으니 다행인가?”

 

그렇다고 해도 루시피나의 요리는 먹고 싶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건 후회만 남는 일이구나.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세린은 가시가 돋친 말을 여김 없이 뿌렸다. 거칠게 마음을 파고드는 말은 나를 더 강인하게 해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약해진다는 말은 맞지만, 너는 꽤 신난 거 같다? 혹시 잡화점 멤버가 없어지고 나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거야?”

 

“아니. 진정한 파트너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지.”

 

“그러니까 왜 이 안에서 내가 여성체를 지니고 있어야 하냐고! 규칙 바꾸는 걸 수락하기만 해도 나는 남자인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았을 거 아니냐!”

 

“사실 카린이었을 때가 보기 더 좋거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들지도 않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드는 이유가 뭔데? 반신이라서?”

 

“카일이라서?”

 

“넌 진짜 타이타닉이 붕괴될 때 구출되지 마라.”

 

아무래도 자신이 나올 타이밍이라던가, 사실 이전에 레인처럼 세린과 같이 붙어 다니는 모습에 질투가 난 것일지도 모르지만...어쨌든 리제로트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침밥은 완성이 되어갔다. 얼마 없는 재료로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이 끝이지만...

 

“세린.”

 

카린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세린은 내 옆에서 “왜?”라고 대답을 했다.

 

“너도 먹는 거야.”

 

“난 잡화점의 중추인격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먹어. 어차피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주제에...”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앞에 앉는 세린. 거울 속의 내 자신을 보는 듯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수려하면서도 차분한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 날씬한 몸과 고풍스러운 옷의 조화가 주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한 입에 무는 모습은, 예를 갖춘 귀족의 영애와 같다고나 할까?

 

쉽게 풀어서 말하면 고작 토스트 하나 먹는 주제에 매우 고상하...

 

“아침을 먹는 다면 그런 쓸 때 없는 독백은 그만두고 어서 먹기나 하시지? 고풍스러운 카린 양?”

 

“시끄러워.”

 

결국 고풍스러운 태그까지 붙어가며 아침식사는 이어갔다. 여전히 리제로트는 꿈나라에 빠지고 있는 동안, 잡화점 밖에는 함성소리와 칼부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프리트론 왕국은 파이론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파이론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하는 중인지.

 

뭐, 그건 중요하지 않나?

 

“하아암~ 어라? 카린 씨? 밖이 너무 소란스러운데요?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안 되요?”

 

“왜 일어난 거야? 영원히 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키스로 깨우시는 거에요?”

 

월터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왜 죽은 사람이 키스를 하면 깨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확인된 치료법이잖아요.”

 

“정말 숲으로 버려버린다.”

 

더 이상 찾지 못하도록 깊게 봉인해버리겠어. 나의 결의가 마음속으로 다져지는 순간 사람의 비명소리가 찢어지듯 들려왔다.

 

“아아아악!”

 

“밖에 무슨 일이 있나요?”

 

“누군가가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이야. 나야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자세한 상황은...”

 

“지금 도와주는 게 도리잖아요!”

 

도리?

 

“그 도리 하나로 모든 걸 망치고 싶다면 네가 직접 나가서 구해보던가? 자세한 상황을 몰라서 멋대로 끼어들다가 죽어버린 녀석도 많이 봤어. 잡화점 멤버들은 정보능력이 좋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너는 생존에 있어선 아무것도 몰라. 머나먼 미래...아니, 레이베리아가 만들었던 그 공간은 치안과 안전이 확보된 공간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해도! 아냐...아니지. 심지어 그런 공간마저도 도리 하나로 인생이 망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이 세상은 지금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인간을 버릴 수 있는 시공간이다. 심지어 남의 눈에는 짐승만도 못한다고 한들, 자신의 가족에겐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 보이는 모순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런 혼돈의 세계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애초에 너처럼 예쁜 아이를 납치해서 인형으로 만드는 녀석이 도리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 내가 생각했을 땐 차라리 저것들이 너보단 더 나아.”

 

리제로트는 고개를 홱 돌리고 분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이후로 잡화점엔 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제로트도 저지른 죄가 있지만 마음을 고치고 갱생한다고 해서 저지른 업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나저나.

밖에 상황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고 정보수집을 해야 하니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삐쳐있으니 대답은 안 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다녀오도록 하지. 넌 밖으로 나가지 마. 밖은 내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

 

그래도 탈출할 수 있으니 세린에게 문을 굳게 닫아놓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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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리셋

 

이제 몬헌월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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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학원에서 크게 깨졌다. 이번에는 과외를 짜르겠다는 말 까지 나왔다. 그 선생님 앞에만 앉으면 말이 안나온다. 자신감이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 처럼 머리 속이 하얘지고 내가 맞는 답을 하는지 자꾸만 눈치를 본다. 그럼에도 그만두지 못한다. 그 선생님께 배운다고 더 나아지는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건 마지막 자존심인걸까. 치기 어린 마음이라는 건 잘 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스트레스 받는 건 나인 걸 안다. 그렇지만 그 선생님을 놓아 버리면 꼭 지는것만 같다.

나는 욕먹어도 잘 참는다. 내가 공부 안했다는 걸 아니까 굳이 변명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내가 못 견뎌서 나가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금 울었다. 그 선생님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다니려는지 마음이 흔들렸다. 이렇게 힘들어 하면서 잘 가르친다는 쌤한테 배워야 할까? 그게 내 대학에 큰 영향이 있을까? 선생님은 내가 갈 대학이 뻔히 보인다고 했다. 진짜일까?

영화 한편 보고 마음을 좀 가라앉혔다. 내일 학교가면 그냥 피곤한 일이 있었다고 해야지. 친구들한테 학원쌤한테 욕들어먹었다 해야지. 그리고는 수다도 떨고, 야자할때 좀 졸고, 책도 읽어야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것 처럼 책을 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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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망각을 불허합니다

 

 

 

  망각이라는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요즘 종일 찌는 날씨에 눈사람 사진을 보며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여름 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지난 겨울엔 너무너무 추워서 빨리 여름이 되어 해변에 놀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면 한파에 몸을 떨며 내가 경험한 폭염을 잊고 빨리 겨울이 끝나기만 바랄 것이다.

 

 오늘 퇴근길에 선릉역 부근을 걷다가 6411 버스를 보았다. 익숙한 번호인데 뭐였지, 하며 지나치려다가 그게 뭔지 불현듯 떠올라 걸음이 느려졌다. 매일 새벽 강남 지역으로 청소일을 하러 다니는 투명인간들이 타는 버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한 정치인의 연설에 등장했던 그 버스였다. 우는 사람들 앞에 훤히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며 마지막 국화를 올리고 온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면서, 추도식도 영결식도 그렇게 꺼이꺼이 울며 봐놓고서, 다른 일들로 머릿속이 덮여 또 나는 잘 지낸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대단한, 자꾸 무언가를 잊게 하는 능력이 나를 별 탈 없이 잘 살게 해준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두통을 달고 살아도 좋으니 지우지 않고 싶은 일.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가 생전 속했던 정당에 후원금을 내기로 결심했다. 아주아주 적지만, 이번 달부터 다달이 빠져나가면, 출금 문자를 마주하며 그날 본 영정사진과 6411번 버스, 솔베이지의 노래, 그리고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 형을 좋아했어요"라며, 누군가가 울음을 참으며 읽던 편지가 계속해서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후원도 참 이기적으로 하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파랗지만 시원하지는 않은 하늘을 보며 밭은 숨을 뱉는다. 부디 내 기억을 보조해주길. 기억을, 마음을, 정의를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나 말고도 아주 많이 생겨나 더 나은 세상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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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11

594

 

 

 

자신이 존재함에 있어서 꼭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행성에서 자신의 가치와 살아있었다는 발자취를 남기는 걸까? 아니,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가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존재를 자신만의 각본으로 적어 넣어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여 수정하고 돌려놓는다.

 

“그 각본만 빼면 너는 대체 뭐가 되냐는 거야. 레이베리아.”

 

아무런 말도 없던 여신은 그대로 나를 바라본다. 저 표정에서 무슨 정답을 찾아야 할까? 아니, 꼭 정답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정답을 찾아도 사탕을 준 선생님은 없다.

 

“그렇다면 잡화점의 주인. 너는 지금 무엇이 될 수 있지?”

 

“나는 잡화점의 주인이지.”

 

“아니. 너는 신도 될 수 있지. 하지만 굳이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뭐지?”

 

“그야 내 사고방식은 인간이니까. 틀을 깨부수는 건 새로운 경지에나 올라갈 때의 이야기고,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든 여신이든 인간이든 마족이든 모든 생명체에는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뭔 줄 알아?”

 

그건 레이베리아의 각본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너는 진실을 꿰뚫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든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이 살짝 짧았어. 너는 진실을 꿰뚫어버렸기 때문에 그걸 왜곡할 수 있는 거야. 꿰뚫고 비틀기만 해도 상처는 더 커지고 심해지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너의 각본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 당장 자신의 운명이 너의 손에 달렸는데도 말이야.”

 

심지어 레이베리아를 창조한 창조주마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모순된 세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체 파멸을 위해서 모든 걸 망치고 있는 거라고. 물론 그 원인이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나겠지.”

 

어깨를 으슥이며 내 말을 마쳤다. 레이베리아가 진정으로 사용할 줄 아는 힘은 진실을 보고 그걸 바꾸는 것. 하지만 자신을 직접 창조한 창조주에겐 먹히지 않아, 다른 자들을 이용해 봉인하거나 쫓아냈다고 했지만, 내 경우에는 3개의 에너지를 합치기도 전에, 각본에 쓰여지지 않았다.

 

지금 내 생각으로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입은 다시 움직였다.

 

“꽤 그럴 싸한 생각인데. 머나먼 미래를 보고 너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를 누군가가 창조해냈어. 그것도 원래 없어야 하는 인물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수를 만들어내는 그 무언가...세상에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추측을 말해보자면.”

 

그리고 모두의 기대 속에서 한 박자 쉬었다.

뜸을 들이며 주변의 반응을 보고 다시 내뱉었다.

 

“아니. 그리 궁금하지 않으면 듣기 싫다고 하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내 옆에 있던 리제로트가 치켜 뜬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자신을 잊고 레이베리아와 상대를 하기 때문에 지루해진 것은 아닐까?

 

“지금 레이베리아가 저를 이용해서 당신을 죽일 수 있다고 하잖아요! 지금 제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이곳까지 와서 그런 바보 같은 헛소리를 한 땀 한 땀 들으라는 건가요?”

 

“내가 말하는 게 뜨개질인 줄 알아? 하긴, 내가 생각한 추측으로는 구멍이 많을 거 같으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던 게 좋았을 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내 생각으론 너는 각본에 죽을 상이 아냐. 관상이 그리 말해주더라고?”

 

“사람의 얼굴만 보고 어찌 그리 판단해요? 당신 바보에요?”

 

“바보라니! 나처럼 평범한 낙제생이 어디 있다고!”

 

“그게 바보잖아요! 이 바보야!”

 

적을 앞에 두고 만담을 펼치니 기분이 묘하지만...

 

“아무튼, 내 존재의의는 결과적으로 널 막는 거야. 그러기 위해 잡화점의 주인이 된 거고. 원래 이 시간대에 있어야 하는 레이베리아가 없다는 걸 보면, 다른 시간대로 이동해서 진실을 마주하고 있겠구나. 뭐야. 따지고 보면 진실을 마주해도 인정할 수 없어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대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최후인가.

지금 이 공간이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묘비가 되는 셈이잖아?

추측이지만.

 

“굉장하네. 모든 것을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를 했어. 마왕부터 시작해서 드래곤, 검은 달의 여왕, 최강의 여기사 등. 시도 때도 없이 내 주변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제서야 납득이 가기 시작해. 맨 처음에는 그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아리엘의 경우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날 죽이기 위한 계획이었다.

 

“다만, 예상하지도 못한 방해와 변수 때문에 실패를 한 거지. 그게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도 아리송한 일이다. 사실 초창기에 레시아를 잡화점에서 소환할 당시. 나는 세상이 완벽하게 멸망한 줄 알았지만, 이는 과거로부터 내 영향을 받은 레시아가 성장해 마왕이 되었고, 천계와 휴전을 하면서 평화로운 세계를 이어 나아갔다.

 

만일 내가 없었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각본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군. 아니면...이것도 창조주가 계획한 일인가?”

 

다른 곳에서도 이게 모두 창조주의 계획이라면서, 공룡화석 파묻고 자신을 믿는지 시험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아니...이건 다른 이야기잖아.

 

결과적으로...

 

“창조주 또한 네가 그럴 거라 생각하고 날 만들어냈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으로 내가 창조된 건지 잘 모르겠네.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너의 방해만 되는 존재란 거지. 게다가 리제로트에게 어떤 각본을 썼는지 몰라도, 이미 그 각본은 유효기간이 지났잖아? 사실 리제로트의 최후를 각본에 쓴다고 한들, 그 내용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모순은 이미 일어났어. 각본가. 내 존재 자체야 말로 모순이야.”

 

쐐기를 꽂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내 할말만 무작정 하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분위기가 대기를 짓눌렀다.

 

“웃기지마...웃기지마!”

 

날카로운 비명이 모든 공간을 지배했다.

 

“쇼는 아직이야! 각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잡화점 주인이 나를 가로막는 방해꾼이라면!”

 

잠깐만? 그 거대한 에너지덩어리는 또 뭐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도 에너지는 존재했다. 창조주마저 쫓아냈던 레이베리아의 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항상 강인할까?

 

“모든 걸 걸고 존재자체를 소멸시켜주겠어!”

 

“뭐. 그 정도면 확실하게 위험하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요! 이 세계 자체를 지워버릴 것만 같잖아요! 왜 그렇게 태연하세요!”

 

확실히 아직까지 인간적인 상식을 지닌 리제로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면

 

“그러네. 태연하게 있으면 안 되겠네. 지금 여기서 사라진다면 네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이게 시간대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나로 인해 제대로 이어져야 할 미래가 서서히 끊어지고 붕괴한다면...

 

“레이베리아의 무덤이긴 하지만, 내가 직접 죽인다면 미래는 보존되겠군. 그렇지?”

 

나는 엘티노스에게 받은 붉은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거대한 빛의 구체가 조금이라도 땅에 닿으면 모든 걸 소멸할 기세로 타올랐으나, 지금은 그 공간만 사라진 체 무산이 되어버렸다.

 

“그럼 이곳의 레이베리아의 힘을 모두 제거하고 살려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뭐라고요?”

“뭣이?”

 

단순한 질문이잖아. 왜 오물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싸늘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만회를 할까? 애초에 이런 일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왜 그런진 굳이 이유를 묻지 않겠지만, 그런 식으로 날 바라보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 단순한 질문을 이상한 망상력을 사용해서 기묘한 이야기를 써 내리지 말고.”

 

“당신은 정말 변태야...”

 

“뭘 생각했는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난 네가 상상한 그런 사람이 아냐. 이곳에 버리고 가기 전에 눈빛부터 고쳐줘...”

 

사람을 죽일 눈빛이 많지만 정신적으로 참살해버리는 저런 눈빛...

어린애가 얼마나 수라장을 겪었길래 저런 눈빛까지...아니, 나 때문에 수라장을 겪고 있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구나.

 

“불안전 변태는 완전 변태든 그런 단어는 곤충에게 맡겨버리고, 레이베리아. 한 가지 협상을 하도록 하지.”

 

“같은 미래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함인가? 하지만 거절한다.”

 

“글쎄. 아까와도 말했지만 나 자체가 모순이라...그 거절은 거절할게. 아니면 힘으로 막아보던가?”

 

내 말 한마디에 레이베리아는 사라졌다.

그리고.

 

“죽어!”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딱히 뭐라 설명할 것도 없는 거대한 하얀 구체.

 

“그렇게 질 낮은 에너지 덩어리로 죽으라고 해도 쉽게 죽지도 않아. 히드라!”

 

왼팔에 감겨있던 사슬들이 검은 빛을 띠며 서서히 거대해졌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9머리의 괴수. 모든 걸 집어삼키는 자는 세상을 향해 침을 흘린다. 거대한 입이 벌어져 레이베리아가 쏘아 올린 에너지를 먹어 치우고 더 성장했다.

 

“잡화점의 주인...이런 맛없는 걸 먹여놓고 협력을 하라니?”

 

“맛없는 것치곤 너무 상큼하게 먹는데?”

 

농담을 주고 받아도 언제나 흐름을 끊는 건 리제로트의 말 한마디.

 

“장난치지 말고 제발 제대로 싸우실래요!”

 

제대로 싸우면 분량이 안 나오는데...

뭐, 별로 상관 없나?

 

-샤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빛이 내 주변을 버터처럼 잘라냈다. 땅속에 파묻는 것도 모자라, 이 행성의 내핵까지 파묻을 기세로 사라졌고,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용암은 튀어나와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행성의 핏물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왔으나, 오히려 부동자세로 오른손을 펴 입을 열었다.

 

“황혼!<Dusk>”

 

-파앙!

 

하얀 실선이 레이베리아의 몸을 꿰뚫었으나, 잠깐만의 경직이 있을 뿐 곧이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다시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면역이 된 건가?

 

“제길.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에너지인가.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르군...”

 

“그럼 못 먹는 거냐?”

 

“아니. 빛으로 이루어진 건 껄끄러울 뿐. 다만 먹기엔 좀 거부감이 있지. 마치 가지 볶음을 처음 먹는 듯한 그런 기분 말이야.”

 

“어째서 예시가 구체적이냐?  그 미묘한 식감에 대해선 나도 동의를 하지만...”

 

세상을 집어삼키는 녀석이 그 세상의 극히 일부인 채소를 껄끄러워 한단 말이야? 날로 갈수록 이 녀석도 편식이 늘어가는구나?

 

“너의 힘은 창조주와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창조주를 이미 뛰어 넘었다! 그런 나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레이베리아의 눈을 당당히 마주하며 나는 입을 연다.

 

“그래? 마법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확실히 인간이 일으키는 기적은 마법이라고 하지. 그렇다면 그 마법은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기적 중 하나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를 나락으로 몰아넣을 위대한 기적을 보여줄게. 히드라! 내뱉어라!”

 

나의 말에 맞춰 지금까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먹어 치운 에너지들을 거대한 검은 광선으로 내뱉었다. 리제로트와 월터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지만, 그래. 이게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기괴한 싸움방식이긴 하지.

 

“네가 황혼<Dusk>마저 먹히지 않으면 이걸 써야지?”

 

본래 창조의 에너지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의 틀을 넘어설 수 없는 나에겐, 간편한 옷이나 무기를 만드는 제작마법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틀을 벗어나 우주의 이치를 알고, 모든 걸 통달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은 나야 말로 최악의 신이 되리라 생각한다.

 

“극야!<Polar Night>”

 

모든 것을 다시 어둠으로 바꿨다.

말 그대로 더 이상 빛이 없는 장소.

모든 장소 중에서 가장 고독하고 추운 곳이다.

 

“뭐...뭐야? 이건? 방금 전에 걸어왔던 그 터널인가?”

 

“아니. 여긴 좀 달라. 이곳은 내가 추방하고 싶은 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만든 공간. 각본가는 이곳에서 퇴장한다.”

 

리제로트에게 설명하면서 내 손을 슬쩍 보았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일까? 뭐, 그건 둘째치고...

 

“뭐야. 이 공간은? 어째서 또 다른 내가 잠들어 있는 거지? 방금 전에 미래로 갔던 ‘나’마저?”

 

“이번 기적은 월식의 힘을 빌렸어. 솔직히 나 혼자서 이런 바보 같은 공간은 만들지 못하거든. 그리고 솔직히 너만 불러오려고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월식의 힘이 또 다른 차원까지 영향 받은 모양이네.”

 

당황하는 레이베리아와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레이베리아‘들’

 

“네가 가장 미래에서 왔으니까. 너만 깨어있는 거야. 시공간의 규칙을 부수고 돌아다니는 불멸자에겐 가장 잘 어울리는 벌이지.”

 

“흥! 그렇게 따지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아니, 적어도 리제로트만큼은...”

 

오해할 여지가 있으니 아직까지 질질 붙잡고 있던 레이베리아에게 말했다.

 

“아니. 그건 좀 다르지. 첫째로 나는 모순덩어리에 불과해. 그리고 둘째는 리제로트는 아직 잡화점의 의뢰인이야. 의뢰인이 자신의 결과에 만족하면 의뢰는 끝나지만, 의뢰인으로 남아있을 때까진 잡화점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긴 한다고? 그리고 셋째로...잡화점은 나보다 더 강하거든.”

 

-콰앙!

 

“결국 인간을 벗어났구나. 이래서 골치덩어리는 잡화점의 주인일 자격이 없다니까?”

 

흔히 카린의 모습처럼 코발트 블루의 긴 머리를 한 소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잡화점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다급하게 잡화점의 규칙을 바꾼 거 아냐. 내가 잡화점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슬슬 가자. 너 때문에 일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버렸어. 신경 쓰지 않고 되돌아가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새침한 눈으로 보다니. 츤데레같잖아.”

 

“네가 츤데레처럼 생겼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무슨 농담이 그러냐...

내가 어딜 봐서 츤데레라고?

 

“자, 잠깐 기다려!”

 

한 때 여신이였던 존재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언제 다가와서 붙잡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을 좀 하면 지금도 무서운 여신이잖아?

 

“이대로 날 두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모든 시공간에 있는 각본가를 없애다니? 지금 이렇게 돌아가면 너의 평상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고!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잡화점 멤버들을 그저 나 하나 때문에 버릴 셈이야?”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거 같으니 말해주지.”

 

리제로트와 월터를 먼저 잡화점에 데려가라고 세린에게 눈치를 추고, 레이베리아의 눈높이를 마주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네가 조작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그녀들이 날 좋아하도록 만들어서 나는 수많은 죽음을 뛰어넘었지. 모든 것에 대해 모순으로 비틀며 살아갔으니까. 각본은 어디서부터 시작한 건지 몰라도, 어린 레시아가 나를 만났던 것부터. 너의 각본은 오랫동안 진행되었어. 그러니...이제 너의 각본이 없는 진짜 세계를 내 눈으로 볼 예정이야.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쉬도록 해. 그 누구도 너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아냐...절대 안 돼! 지금의 나라면 몰라도! 유랑극단으로 타락한 나라면 몰라도! 적어도! 한 때 위대한 창조주를 따라 정의감으로 무장한 각본가는 풀어줘!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완전하게 엉망이 될 거라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붙잡힌 소매를 거칠게 옆으로 털었다. 힘에 끌려가듯 레이베리아의 몸은 휘청거리며 옆으로 돌아갔고 확실한 거절을 위해 짧게 대답했다.

 

“거절하지.”

 

“안 돼! 돌아와! 제발 이 아이만큼은 데려가 달란 말이야!!!”

 

잠들어있는 레이베리아 중. 한 명을 들고 힘겹게 몸을 끌어보지만, 내가 잡화점에 도달해서 문을 닫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검은 나무로 칠해져 있는 나무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곧 이어 잡화점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이베리아를 극야<Polar Night>로 내던져버린 이후...

 

“주변에 방이 완전히 다 사라졌네.”

 

이변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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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패러독스가 시작 됩...<-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