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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 폰을 찾다

꿈을 보여준 누군가에게 그 꿈에 대한 감상문을 보냅니다.

 아직 이른 새벽인데 매미 한 마리가 처량하게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니 사실 그건 핑계일 뿐이고 슬픈 꿈을 꿔 울컥하여 잠에서 깨어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지금은 그리운, 연인이 될 뻔하였지만 과거의 내가 결단력이 없어 친구로 그냥 남아버린, 지나간 사랑을 만나 밥도 먹었다.

 

 꿈속에서 나는 무심코 폰에 저장된 사진을 봤다. 나 혼자 찍은 사진 밖에 없었다. 외로웠다.

 

그 때 알림음과 함께 누군가가 찍어준 내 어릴적 사진들이 전송되어 왔다. 어릴때 동생과 노는 사진, 내가 아기 일 때 진한 화장에 한복을 입은 뚱뚱한 여자에게 안겨있는 사진. 군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진. 나의 어릴 적부터의 인생을 계속해서 옆에서 몰래 찍은 것 같은 스냅사진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어릴 적 시절은 아직 폰이 없던 시절이다, 오직 필름 카메라로만 추억을 남길 수 있던 시절인데 그 사진들이 누군가의 폰으로 찍혀 현재의 나의 폰으로 전송 되고 있었다.

 

 나는 이 귀중한 사진들을 모두 놓칠 수 없어 하나하나 나의 앨범목록으로 저장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어머니가 아직 젊은 얼굴을 한 사진이 도착했다. 대략 지금으로부터 20년 아니, 30년 정도는 젊어보였다. 윤기 있는 얼굴에 부기도 없고 피부도 축 늘어지지도 않은 젊은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사진은 증명사진처럼 혼자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계셨다. 나는 울컥하였다.

 

부끄럽게도 나의 휴대폰에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어릴 적 학생 때는 여름방학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바다나 산, 절 같은 곳을 찾아 아버지의 낡은 티코를 타고 여행을 많이 갔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그 무거운 필름카메라를 챙겨가 우리 가족을 찍어 추억으로 남겼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면 사진관에서 사진을 뽑아 가족끼리 돌려가며 보는게 연례 행사였다.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은 여행은커녕 가족 간 대화도 많지 않다. 여행도 가지 않고 최근에 함께 찍은 사진도 없다.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 그동안 사진하나 찍지 않았다. 먼 미래에 지금을 회상할 사진하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내가 가족들을 어색하게 생각했을 때부터였을 텐데. 그 시점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울컥했다. 눈물이 났다. 꿈속에서

전송되어 오는 사진을 내 폰에 저장하며 나는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폰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핸드폰 사진목록에는 없다. 예전 지역 축제를 취재할 일이 있어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어머니와 간적이 있는데 그때 지역의 축제 모습을 찍은 동영상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잠깐 지나간 적이 있다. 내 폰에 가족이 등장한 것은 그게 다이다.

 

과거에 비해 우리 가족관계에서 수분이 사라진 것은 가족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나의 성격변화 때문이겠지.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느끼는 어색함을 못 참고 혼자 벗어나려는 나 때문이겠지. 나는 이 새벽에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함을 느꼈다.

누가 이 새벽에 그 꿈을 나에게 보여줬을까. 누가 꿈속에서 내 인생의 과정을 찍은 사진과 젊은 어머니의 사진을 내 폰에 전송했을까.

 

 언제부터인가 매미가 울음을 그쳤다. 장마전선이 내려가면 이제 찌는 한 여름이 시작될 것이다. 그 한 여름이 시작되기 전 너무나도 일찍 나온 매미가, 너무 이른 새벽에 나무를 오른 매미가, 나의 꿈을 깨운 매미가, 생명을 다해버렸는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른 새벽 짝을 찾기 위해 울어재꼈건만 그 매미는 이 새벽에 짝을 찾지 못하고 힘을 다해 버렸는가보다. 땅속에서 태고의 시간을 기다려 비로소 땅속에서 올라와 나무를 타고 노래한 매미의 짝을 찾는 노력은, 짝을 찾지 못하였어도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저 울음소리에 나 또한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과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으니.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고 소설을 쓰고, 시나리오를 쓰고 마땅한 돈벌이 없이 골방에서 꿈틀대는 나의 작은 몸짓이 세상을 변하게 하지는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생각할 건덕지라도 던져 주지 않겠는가. 게을러서 또는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땅속에서 올라와 울어보지도 못하고 땅속에 영원히 묻힌 채 죽음을 맞이할게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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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에게 찾아온 습작들

이야기 63-9

592

 

 

 

싸움보단 말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의미한 폭력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하게도 나는 평화주의자이기에 평화롭게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평화 최고. 혼돈은 멀리하고 평화를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평화고 뭐고 없구나.”

 

쓰러져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단검을 집어 넣었다.

 

“카일 씨...왜 그렇게 강해요? 591에서 592로 넘어갔다고 느닷없이 제가 져있잖아요?”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가 남는 그런 기묘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지금은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보다 일기에도 네가 지게 되어있는 거야? 아니면 지금 내가 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일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 일기의 가이드라인을 생각해보면 탈선의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우주로 날아가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과거로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래도 레인은 원망을 하거나 한숨을 짓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레인의 성격상 오히려 일이 엉망으로 되었을 때 수습하는 걸 더 좋아하는 기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쓴 일기도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네. 그래도 지금은 내가 결정한 것에 따라가야지. 그보다 아이리스는 다 완치가 되었다면서?”

 

“카렌 씨는요?”

 

카렌? 아...

그렇지. 어째서 카렌은 활동하지 않는 이유라고 하면...사춘기라고 해야 하나? 자립심이 너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선 보이지 않은 게 흠이다. 돌아갈 장소가 또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어차피 내 복제품과 비슷하기도 하고,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일단 복수에 대한 건 진심이든 아니든 접어둬. 지금 이렇게 해도 별 다른 이득은 없어.”

 

“이익중심으로 움직이는 건가요?”

 

“아니. 평화중심이지.”

 

내 마음속의 1순위는 언제나 평화다. 그런데 현실은 평화가 왜...

자괴감이 든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라니...

 

“이미 미래는 뒤틀리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리제로트가 죽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을 때, 오히려 리제로트가 안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있으니까 죽거나 심하면 침을 흘리겠지.”

 

“최소와 최대가 바뀌었지 않았나요?”

 

이 말버릇 레시아에게 전염된 건가. 빨리 고쳐야겠다. 리베리티아 고원의 특유한 바람은 300년이 지나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곳은 개발도중 청정구역이라고 지정한 모양이다. 사실 청정구역인지 다른 마법적인 요인으로 손을 대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쾌하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뒤로한 채, 뒤에서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리제로트에게 돌아갔다.

 

“너는 아까 내가 위험했을 때 도와주지도 않더라?”

 

“해결사가 해야 하는 일을 의뢰인이 꼭 도와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도 협조나 도움은 줘야 할 거 아냐. 방금 전에 레인이 던졌던 마법공학 유탄을 다른 시공간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이 일대가 지금 다 사라졌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은 기억도 없고,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라 초능력자라서요.”

 

초능력자라고 해도 마나는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의 길을 좀 가란 말이다.

 

“뭐 어떻게든 위기는 넘겼으니 상관 없겠지.”

 

리제로트는 차를 놓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푸른색의 컬러렌즈로 자신의 초능력을 봉인하지만, 어느 사이에 짙은 보라 빛의 눈으로 돌아와있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저를 과거로 데려다 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보라 빛의 눈은 혹시라도 정신오염이 먹힐 거 같아서?”

 

“칫.”

 

인간성이 어디로 간 거냐 넌...

 

“여전히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괴하네. 뭐, 그래도 너의 초능력은 강력한 최면술일 뿐이니까. 결국 망각의 샘물을 먹이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너의 인형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나는 이미 인외의 존재로 되어가는 중이라서, 명계에서 퍼 올리는 망각의 샘물이 아닌 이상 잘 듣지도 않을 걸?”

 

한 때, 내가 만약에 신이 된다면. 이 지상을 평화롭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쨌든 슬슬 이곳도 정리할 거니까 어서 돌아가기나 해. 라 캄베리의 영애는 자신의 일정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되는 거야?”

 

“어차피 오늘 일정은 없는 걸요. 오늘 하루 디즈니에서 나오는 쥐나 보면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싶기도 하고요. 거추장스러운 남자 둘이서 이리저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제가 보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서 문제네요.”

 

“거기서 선정적이란 단어가 왜 나와?”

 

그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잘도 봐온 주제에.

 

“아이고...삭신이야...이럴 줄 알았으면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거 멸망의 지름길이니까 가져오지 말아줄래?”

 

레인의 섬뜩한 소리가 내 귀에 흘러가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서 위험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마법공학 수류탄을 레인이 직접 던지는 바람에, 지도가 완전히 바뀔 뻔했지만, 지금은 우주 어딘가 터지면서 안전한 처리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생각을 해보면 모든 위험한 것들은 우주 밖으로 내던지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블랙홀에 내던지는 방법도 생각해봐야겠다.

물론 블랙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그러면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운명을 바꾼다는 건 모든 걸 바꾼다는 의미야.”

 

나는 주변이 황폐해진 리베리티아 고원으로부터 손을 뻗어 힘을 집중했다.

 

“모든 걸 바꾼다는 건 재창세와 같지. 그걸 원하는 건 레이베리아도 그렇겠지만, 사실상 이 힘은 창조주와 거의 같다고 봐도 괜찮아. 레이베리아는 창조주의 근원 중 일부인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뿐이고,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재창세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거지. 내 모든 힘을 뽑아서 빌려 쓰기 위함이기도 해.”

 

“그러면 당신이 신이 된다면?”

 

“아니. 나는 결국 반신이 한계야. 기껏해야 최대로 할 수 있는 게 엉망인 걸 고치거나, 이 세상에 있는 물품을 보고 이해해야 겨우 제작할 수 있는 정도지. 그 이외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로 나누는 귀찮은 작업까지 해야 하고.”

 

서서히 자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리베리티아 고원을 바라보며, 리제로트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유용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을 손쉽게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그거야 아직 내가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인간이었다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인간의 이해 범위 밖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를 하겠어?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지금 이렇게 수복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솔직히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길을 어느 정도 걸어봤다면 가능한 마법이다. 이런 광범위한 공간을 모두 되돌리기 위해선 거대한 마나가 필요하긴 해도, 마나만 받쳐준다면 이런 일은 마법사라면 가능하단 소리지.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영역에 발자국을 살짝 가져다 댔는데, 안 보이는 벽에 의해 선만 아주 살짝 밟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만일 내가 신이 되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그만두고 지루할 만큼 평화를 가지고 사는 건데.

 

“아냐. 아무것도. 그러니까 결국 너의 의뢰를 해결하려면 모든 걸 다 바꿔야 해.”

 

“모든 걸 다 바꾼다면?”

 

“너의 과거로 가야지.”

 

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와 상반된 리제로트의 얼굴은 마치 썩은 달걀을 본 눈빛이었다. 아니 썩은 달걀을 봐도 지금 저 표정보단 더 좋겠지.

 

“당신 정말 변태네요.”

 

“변태라니. 내가 곤충도 아니고 탈피하지 않는다고?”

 

“하아...저는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닐 텐데요!”

 

헉! 화났어! 무서워!

월터도 주먹을 들었어! 날 때리려고 하다니! 무서워!

 

“그런데? 각본가의 각본을 찢자는 건요?”

 

“아. 그거? 너무 위험해서. 나란 사람은 또 온순하고 평화적이잖아?”

 

“온순과 평화란 단어는 당신에게 절대로 안 어울려요. 그리고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죠? 그보다 제 과거로 가서 뭘 캐낼 생각이에요?”

 

“과거로 가서 지금의 ‘너’를 지울 거야.”

 

어마어마한 시간차를 뚫고 겨우 “네?”라고 대답한 리제로트의 말. 절망이 담겨있는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 서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어떤 사람에게 “지금 당장 당신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 겁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다고 “오! 예!”라고 대답하겠는가?

 

자신의 모든 삶을 부정하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월터가 스스로 움직였다.

 

-슈아악!

 

어마어마한 발차기가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마법방패<Magic Shield>를 전개해 막아내고 있는 동안, 날카로운 외침이 내 귀를 쑤셨다.

 

“어째서요! 당신은 제 편이 아닌가요!”

 

“당연히 너의 편이지. 너는 운명을 거부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월터의 거대한 주먹이 마법방패를 뒤흔들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의 말도, 지금 모든 걸 버리면 우리가 보호해주겠다는 간접적인 메시지였어. 하지만 너는 거부를 했지. 내가 말했잖아? 너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눈에 띄는 거라고, 결국 레이베리아에게 찍힌 거고 각본에 쓰여진 거야.”

 

그리고...그 각본의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각본이든 내 일기장마저 무시하고 다른 선택지를 골랐어. 그 뜻은 결국 이 시간대는 원래 없는 시간대나 마찬가지야!”

 

월터의 공격이 멈췄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리제로트는 자신의 존재가 허황된 가짜라는 사실에, 그만 무릎을 꿇고 넋을 놓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은 내 가설에 불과하지만, 너를 데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개판이 벌어졌길래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어. 유랑극단이 시간을 숨기고 공간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겨우겨우 해결했다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일기장마저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거든. 그리고...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슬슬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엘티노스는 자서전인 마냥 일기 같은 걸 잡화점에 남기고 있어도.

나는 단 한번도 내 일기장을 잡화점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남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내 전용 아공간에만 일기장을 넣고 다닌다고?”

 

그래. 처음부터 레인이 읽은 일기장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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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계주는 급커브를 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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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다샴

※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샴 

1. 악마들의 총괄 책임자, 악령들의 제왕.

2. 날씨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 질병과 재난을 몰아내었다고 함. 고대에서 숭배받았음.

                                                 

소년은 동전 한 닢으로 강을 건넜고 얕은 냇가에서 제 발로 걸어와 마을에 당도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빨래하고 물긷던 여자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 그를 흘끔거렸다. 

 한 사람이 여자들의 틈에서부터 잽싸게 빠져나가 반쯤 허물어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작은 여자 하나가 나왔다. 두 손으로는 넓적한 그릇을 받쳐든 채로, 다샴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다. 옷가지를 널어 말리던 아낙 하나가 물가에서 빨래하던 여자를 향해 황급히 눈짓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가지고 오던 소녀의 뒷통수를 갈겼다. 여자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빼앗고 소녀를 꾸짖었다. 아낙들은 사뭇 일상적인 광경을 대하듯 모른 척 빨래에만 몰두했다. 다샴 같은 탁발승이 마을에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생존에 지친 여자들은 그악스러웠고 경계심이 강했다. 낯선 승려에게 보시할 여력이 없었다. 다샴은 직감적으로 다른 마을로 자리를 옮겨야 함을 알았다. 모래 바람 날리는 마을은 다들 비슷비슷했으나 그 안의 양상과 처지는 제각기 달랐다. 긴 걸음을 했건만, 이번에도 수확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다샴은 집 몇 채를 돌며 구걸하다가 종교를 신봉하는 노인 두어 명으로부터 음식 약간을 얻었고 그들이 내어준 헛간에서 잠이 들었다. 헛간은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에 나 있었다. 

 이리의 울부짖음 같은 핏빛 메아리가 공기를 찢었다. 

 다샴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이질적이고 기묘한 느낌이 신경을 흔들었다. 목덜미까지 소름이 쭉 끼쳤다. 낯선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분명히 아니었다. 

다샴은 헛간 문을 열려 했지만 빗장은 바깥에서 잠겨져 있어 허사였다. 낯선 소년이 밤을 틈타 도둑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노인들의 까닭 없는 경계심 탓이었다. 졸지에 갇힌 꼴이 된 다샴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오래된 경첩이 내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적을 매단 달빛 아래 기묘하게 번득이는 남자들의 흰 동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놀라지 말게. 

 

무리의 수장인 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내색하지 않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물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특정한 대가를 바라고 찾아왔음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임을 알았다. 

 수장은 직접적인 대답을 꺼렸다. 따라오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다샴을 향해 눈짓했는데, 노인의 주위에 기립한 남자들의 눈과 자세는 일체의 거절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다샴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순수한 의도에서 노인을 따라갔을 것이었다. 다샴은 횃불을 든 남자들의 선두에 선 수장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불빛이 마을의 끝편,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었고, 곧이어 바닥에 깔린 참혹한 광경을 비추었다. 돼지와 소, 닭과 같은 갖은 가축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숲 속에는 악령들이 살고 있네. 이 악령들의 왕은 사악한 요정인데, 그는 악령들을 마을에 풀어놓지 않는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산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네. 그게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일이로군. 

 

곧이어 남자들이 주둥이 부분을 단단히 묶은 포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능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다샴은 답변을 요구하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남자들에게 물었다.

 

잘 데리고 왔느냐? 착오는 없었고?

 

예, 어르신. 원하신다면 보여드릴까요?

 

노인은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어린 계집애면 충분해. 지금쯤이면 잠에 곯아떨어졌겠느니....

 

남자들이 포대를 이끌고 숲 가까이로 갔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포대 안에 갇힌 제물이 꿈틀거리고, 주위의 것을 발로 마구 차고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호소하고 애원하며 한바탕 난동을 피운 것이었다. 남자들이 포대 위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짓밟았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귓속을 파고들었다. 

 

...꼭 저렇게 해야겠습니까? 제가 숲 속으로 들어가 악령들의 왕과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무고한 사람은 풀어주시지요. 

 

다샴이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서 굳이 이 밤중에 저를 깨워 이곳으로 함께 온 것은 제게 이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어제 이 마을에 와 이곳 분들의 후의를 얻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일은 승려가 아닌 다른 누가 하겠습니까?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나 나한테나 안된 일이지만, 오늘의 제물은 꼭 바쳐야 하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한테 한 번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자네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거야. 오늘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악령을 부리는 그 요정이 진노하고 말게야. 저기 붉은 달이 뜬 게 보이나? 오늘이 바로 그날일세. 자네는 재수 없는 시기에 우리 마을에 온 셈이야. 

 

가축으로 제물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요정은 사람을 선호한다네. 그것도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또 우리가 어디 가축을 주어버릴 형편인가. 그게 전부 우리의 소중한 재산일세. 저게 모두 낭비라는 말이야. 

 

다샴의 눈 아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제가 저 사람 대신 제물로 가지요.

 

난데없는 파격에 노인은 당황했다. 안될 것은 없었지만...

 

난 요정을 쫓아낼 경이나 읊어주기 바랐지 자네한테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아. 자네는 나이 어리나 승려이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악령을 쫓는 신통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애먼 목숨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 아닙니까? 내일 같은 시각까지 차분히 기다려 보시지요. 제가 그리 하겠습니다. 

 

어르신, 하는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둘 사이의 대화를 끊었다. 

 

붉은 달이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악령들이 찾아올 시간이 지났어요. 조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물을 던져넣을까요? 

 

노인은 다샴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짙고 검은 눈은 일체의 빛을 반사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 것처럼 반들거렸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요정이 마음을 바꿨군. 같은 시간에 이 장소에서 보겠네. 

 

 다샴은 짧게 눈을 붙였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헛간에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옮길 것을 권유 받았다. 사람들의 태도와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다샴은 그들에게서 희망과 기대감을 보았고, 번들거리는 욕망 또한 읽었다. 횃불을 든 남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노인의 눈이 그러했다. 

 그가 지내던 헛간의 아래 틈은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너비가 있어서 캄캄한 와중에도 흘러가는 물결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이 일을 끝낸 빨래터, 다샴이 건너온 냇물은 거대한 강과 이어져 있었다. 다샴은 한가히 앉아 있을 때나 그들을 위해 부적을 쓰고 처방을 한 후에면 그 강을 생각하곤 했다. 

 그는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물살이 칼로 자른 듯 깨끗이 끊어졌다. 

 다샴이 노인의 집에서 함께 밥상을 받을 때, 작은 여자 아이는 부엌 안에서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샴이 혼자 남자 소녀는 쭈뼛대며 그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다샴의 옷자락을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고 그는 순순히 따라왔다. 소녀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들릴락말락했다. 소녀가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자 다샴은 그가 전날 밤의 희생물로 지목되었던 아이였음을 알았다. 

 

스님, 저는 오늘이 두렵고 내일이 두렵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나 현실을 자각하면 안도감이 들어야 마땅할 터인데, 실제를 인지하자마자 꿈 속과는 다른 종류의 또다른 지옥이 밀려옵니다. 꿈에서도 괴롭고 현실에서도 괴롭습니다.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손을 비틀며 흐느꼈다. 아이의 피부에는 온통 검보라색과 누런색의 멍이 피어 있었다. 

 

제 친척들은 제가 제물로 선별되었을 때도 군말 없이 저를 넘기신 분들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저는 결국 오갈 데 없이 친척에게 몸 하나를 의탁하는 어린 여자아이일 뿐입니다. 그 분들에게 저는 쓸모가 없어요. 저를 팔아버리거나 내쫓으려는 생각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스님, 기억하시나요? 스님이 오신 날 저는 음식을 들고 스님께 가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스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인심 사나운 이곳 사람들도 후한 대우를 베풀어주실 겁니다. 그때는 제가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스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제가 스님의 사당을 차려 대대로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아이를 축복하고, 그가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다샴에게 조개껍질이며 소라기둥을 받은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정신없이 손 안에 쥔 것을 매만지고 들여다보던 아이가 물었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연유로 방랑하는 중이 되셨나요?

 

다샴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것은 소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제 어미는 간음하여 그 죄질이 더럽다고 하여 사람들이 쫓아냈습니다. 어미가 통정하여 낳은 아이인 저를, 사람들은 경멸하지요. 이와 같은 사건이 10년 전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 이곳에 붙어있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더욱 무자비해서, 간음한 남자는 추방하고 여자는 죽여 숲 속 깊은 곳에 묻은 후, 그 둘 사이의 갓난아기는 들개가 뜯어먹도록 외진 곳에 버려두었다고 합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노파 한 명이 아기의 이름을 손수 지어 옷 아래에 바느질로 새겼는데 다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기가 살아남았다면 스님과 같은 나이일 테지요. 

 

소녀는 그렇게 말했고,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밤이 찾아왔다. 달은 전날의 그것처럼 붉었다. 소름을 동반한 이상한 파동이 다샴의 몸 안팤을 뒤흔들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전날과 다름없이 횃불을 들고 선 남자들은 제 발로 걸어오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 않는 그를 두고 걱정했다. 

 

어이.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다샴은 고개를 돌렸다.

 

마셔. 저기 있는 귀신 새끼들 족쳐버려야 될 거 아냐.

 

다샴은 남자가 건넨 병을 들어 마셨다. 걸죽하고 독한 술이었다. 다샴이 쿨럭대자 남자는 병을 치워버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지독하게 아팠다. 

 

 자. 그만하면 되었네.

 

뒷짐을 진 노인이 고개만 돌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앞에서 까마득하게 솟은 숲은, 그야말로 넓고 깊숙한 미궁이었다. 까만 유리알 같은 노인의 눈이 위로 휘어지며 웃었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게. 

 

횃불의 무리가 일렁이는 어둠을 뒤로 한 다샴은 그보다 한층 깊고 습한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울창한 잎이 우거진 저 위쪽은 새카매서 하늘과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렸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작은 동물이 풀숲을 헤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자 짐승의 기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곳은 오롯한 생명이 있되 동적인 생물은 없는, 얼어붙은 시간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나무와 풀 뿐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이 멈췄다. 정적이 온 몸을 휘감았다. 몸의 내부와 외부를 뒤흔들던 파동이 더욱 거세어졌고, 미약하게 시작되던 두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놀았다. 피가 달아오르고, 사그라들고, 달아오르며 올라오다가 중간에서 차게 식으며 목덜미까지 죽 뻗었다. 

 

- 다샴...다샴....

 

유령들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았다.

다샴은 정신을 잃지 않으며 애썼다. 빠져나가려는 것을 최대한 붙잡으며, 악령들의 숲 사이를 한발 한발 걸어나갔다. 그의 목적은 그들이 아니었다. 

 암흑 속에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숲은 계곡으로 이어진 통로였고, 사당은 계곡이 시작되는 탁 트인 저편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순수한 정념의 결정체가 다샴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잠식했다. 분노, 억울함, 황망함, 슬픔, 혼란스러움. 어떤 감정은 오롯히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악령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의 혼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그것 또한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애꿎은 골칫거리를 더 늘린 셈이었다. 다샴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극한 슬픔이 몰려와 그는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홀려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최악의 경우, 악령들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조종해 숲 밖을 나오게 한 다음 사람들을 해치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정념만이 공명되었지, 그의 정신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치 숭배하는 것처럼 사당을 올려다보았다. 요정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을 해치는 악한 요정에게 어떻게 사당이 존재하는 걸까? 나지막한 집은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아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있었고,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푸른 이끼가 집을 뒤덮었다. 흰 물살이 쏟아져내려 귓청을 적셨다. 붉은 균열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눈이 까마득하게 흐려졌다. 

 그가 깨어난 곳은 모래 바람 부는 사막이었다. 여타의 사람들이라면 즉시 홀리고 말았겠지만, 그 곳은 요정이 만들어낸 환상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붉은 균열이 사막 전체를 번개처럼 내리치며 시선을 혼란케 했다. 다샴은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골랐다. 요정은 그에게 최후의 심판을 선고했으며 최종적 전투를 선언했다. 무엇이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검은 회오리 바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몰아쳐왔다. 부르짖고 우짖는 영혼들로 가득했다. 땅으로 꺼지지도,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지도 못한 뭇 짐승과 인간의 영혼들이었다. 비늘이 달린 검은 새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처럼 울어댔다. 그 세계의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노인은 사내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이동했다. 불타오르는 횃불의 무리는 달과 그 빛을 겨루기라도 하듯 한 자리에서 고요했다. 

 

공간이 깨졌고, 시간이 얼어붙었다. 외계적인 고요함이 함께했다. 거대한 침묵이 그의 미세한 입자를 빨아들였다. 어떤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함을 잊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오리 바람은 잦아들고, 약해졌다. 나비의 날갯짓 만큼이나 미약하게 줄어들었다.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영혼들은 생기 있는 먹잇감을 찾아, 그들을 받아들여줄 그릇을 찾아 거진 빠져나갔다. 

 육체는 구부려진 활이었다.

푸른 이끼로 휩싸인 사당에 절로 균열이 생기더니, 천천히 갈라지다가 맥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집은 흙 부스러기로 돌아갔다.

 숲 바깥의 그들은 붉은 달이 어둠에 먹히고 자취를 감추어버린 과정을 맨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달은 본래의 흰 빛으로 돌아왔다. 경이와 두려움과 경탄에 찬 웅성거림이 일었다. 

 횃불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지만, 숲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에는 더 이상 악령이 출몰하지 않았다. 악령들을 부리는 요정이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숲의 중심부까지 다가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가 숲을 통해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방랑자와 여행객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숲의 중심부 너머 탁 트인 곳에는 흰 계곡이 있다고, 그리고 그 앞에는 허물어져 쓰러진 작은 사당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어린 탁발승은 정말로 자기 일을 잘 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억을 잊었다. 기억만이 진실이 된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죽고 썩었다. 기록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는 열 여섯이 되자 마을을 몰래 빠져나왔다. 숲 속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 사당이 쓰러지고 잎사귀가 우거진 검푸른 곳에는 언젠가 작은 묘석이 세워질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맹세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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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8

591

 

 

새벽에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자장가를 불렀을 때, 레시아와 시나의 정신이 앞들과 뒷동산으로 출타하는 동안, 운명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생명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데. 그걸 자연의 섭리라고 보고 운명이라고 한다. 죽음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네크로멘서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는데 시체로 되살아나버린 경우에는, 그것 또한 그 시체의 운명인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운명 또한 무질서한 무언가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운명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면 운명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의뢰는...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저 앞에 당돌하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소녀.

리제로트에게 받은 의뢰에 대해 정확한 내용으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너를 보자고 한 이유야 의뢰 때문이지.”

 

“그래요? 해결할 수 있나요?”

 

그리고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켜서 틈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짧은 시간.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아니.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대신...”

 

정확한 내용을 수정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뭐라고요?”

 

어처구니 없어서 한숨이 입 밖으로 출타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지만,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빠르게 치고 나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의뢰는 사실상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거든. 그저 이야기 책에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게 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나의 말에 리제로트는 째려보며 대답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죽어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도 맞지?”

 

“당신은 지금 살아있잖아요.”

 

“아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태 새벽부터 고찰한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기로 하자.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는 이유야, 원래 나는 이 평행차원에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야.”

 

는 거짓말이고 사실 그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잡화점의 대마력이 방어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시공간은 본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지, 하지만 과거에도 각본가의 책에 적혀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존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본래 없었던 거야. 그거 있잖아. 죽음의 기사 4명 중에 하나가 왠 이상한 차원에 떨어져서 영문도 모르고 악마와 싸우는 그런 이야기. 아마 내가 케이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지.”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난 이 차원의 사람이 아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려고 절 이곳에 불러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한 거에요?!”

 

“당연하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만 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소망 하나는 들어줄게. 그리고 나는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소망 하나가 분명.

리제로트가 원하는 의뢰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뭐든지요?”

 

“아. 그렇다고 높은 수위의 기묘한 소원은 안 받아줘. 노블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19세 마크가 없다고?”

 

리제로트가 원하는 소망 하나를 들춰내는 것도 정말 어렵구나. 소녀의 마음이라는 건 이런 건가? 내가 잡화점 멤버의 장난으로 소녀가 되어본 적은 있긴 하지만, 음...지금은 무슨 심상인지 까먹었네.

 

“그럼...”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내적갈등에도 입을 연다는 그 자체가 결정했다는 소리니까...

 

“전 죽기 싫어요. 그러니...살려주세요.”

 

과연.

운명에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건가.

 

“방법이야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아.”

 

저런 소망을 듣고 절대로 공짜로 해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살아나는 거니까 최대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잃는 거라면?”

 

“우선 루니아 누나의 말처럼 그 힘을 버려야겠지.”

 

“제 초능력이요?”

 

“아. 물리적으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순하게 봉인하는 절차니까. 위급한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만 잠깐 발동하도록 만들 거야.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발현된 초능력을 마법적으로 봉인한다는 그 자체는 개념이 달라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힘은 근본적으로 마나를 뛰어넘은 자원이다. 그러니 봉인마법과 이미지만 어떻게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죠? 힘이 있어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잠깐 생각을 하고 나는 한숨을 지었다.

 

“애초에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게 아냐. 오히려 힘이 있든 없든 운명은 존재하지. 아니, 난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니까 종착지라고 표현을 하자. 어쨌든 그 끝에 다다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힘이 없어서도 있지만,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 힘이 있든 없든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삼손도 대머리로 죽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넌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힘이라는 그건 어떤 것도 상징할 수 있지. 라 캄베리의 영애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유랑극단의 간부이기도 하고, 너의 초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내 정신방어마저도 흔들어버릴 정도야. 게다가 아이리스를 건드려서 레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했고, 레이베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살려주다가 놓친 이후로, 나와 이렇게 몰래 만나면서 레이베리아에게도 죽을 위기에 놓여졌다. 결국 각본가는 너의 죽음에 대한 각본을 썼을 테고, 너는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지. 맞잖아?”

 

“마, 맞아요.”

 

“각본가의 각본은 또 언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각본을 적기 전에 내용을 본 거 같으니까. 지금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이네.”

 

내가 레이베리아라면 배신자에게 어떤 각본을 써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나라면 깃털로 간지럼을 태워서 죽였을 거 같은데...

 

“당신. 저질이군요.”

 

“아니. 남의 독백을 읽고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사생활침해라는 거 몰라? 나는 뭐 상상의 자유도 없나? 자유도도 없는 GTO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O가 아니라 A겠죠...아무튼 절 볼 때마다 그런 상상만 했어요? 변태.”

 

“그런 상상만이라니. 이 상상은 지금 처음 하는 거고, 앞으로는 안 할 상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형벌 중에 간지럼은 예로부터 내려온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 중 하나란 말이다. 염소가 네 발을 지속적으로 핥아본 적 없잖아?”

 

“당신도 없잖아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궤변을 늘어뜨려도 그 사이에 포인트만 집어서 공격을 하다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철한 아이였다.

 

“뭐 아무튼. 자세히 어떤 죽음을 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쓰여졌겠지. 아니면 지금 쓰고 있거나, 아니면 슬럼프가 와서 마감이 다가와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거나. 그러다가 담당자가 찾아와서 으름장을...아니, 이건 너무 갔구나.”

 

“하아...이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미래가 걸렸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 바보에게 실례군.”

 

“바보에게 실례인가요...”

 

지쳤는지 태클도 밍밍하게 들어오는군. 즐거운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자. 어쨌든 바보에게 미안한 내 입은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어쨌든, 그런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예를 들어 죽는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거나...”

 

“그거 영원히 죽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진실을 덧씌우는 거지.”

 

“그런 능력은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말했잖아.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예를 들자면...그래,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거나.”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는 방법을 상상이라도 했겠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막강해서 그럴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여신 중에서 가장 강력해진 레이베리아의 힘이 깃든 각본을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일 터.

 

“그러니. 각본을 찢고 자유가 되면, 불안정한 운명 속에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불가능해요. 다른 방법은 있나요?”

 

여전히 부정하는 리제로트. 그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있지. 당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야.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리제로트는 날 악인 취급하고 있을까? 심각하게 경계를 하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조심스레 작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안한 것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뭐죠?”

 

“가장 높은 건 당연히...”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각본을 찢고 불태우는 일 밖에 없지.”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했는지 리제로트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리제로트의 동요는 찻잔 하나를 깨먹고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거 레이베리아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나지막하게 웃은 나는 지금쯤 리제로트의 옆머리로 슬쩍 손을 뻗었다.

 

“다, 당신 바보에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점점 가까이 오는 거에요! 설마 소녀의 첫 키스라도 뺏을 작정으로...!

 

-파바박!

 

손에 따끔한 통증이 도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등에 박혀있는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꽂혀있는 상황.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너의 첫 키스를 가져가는 거냐? 지금 당장 살기를 품고 암살하려는 녀석부터 막아야지.

 

“내 한숨이 너의 말 때문에 가출해버렸잖아. 책임져.”

 

“채, 책임을 지라뇨!”

 

“어라? 카일 씨?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암살하려던 녀석이 태연하게 내가 뭘 하는지부터 묻는 거냐? 그리고, 지금 리제로트를 죽이지는 마라.”

 

내 말에 어깨를 으슥이던 레인은 감정이 알 수 없는 가면으로 들이댔다. 그보다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지금 덥지도 않나?

 

“리제로트를 죽이지 말라는 그 말은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가요?”

 

“이용가치가 아니라 의뢰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의 의뢰를 받고 정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있냐?”

 

“없죠.”

 

“그거 자랑 아니거든?”

 

가늠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뭐, 한번 잘 막아보세요? 어차피 피도 흘리지 않는 걸로 봐선, 카일 씨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모양인데 말이죠?”

 

“뭐. 인정은 하지. 그래도...신은 아니잖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은 있어도, 신의 영역에 돌입하는 인간은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레인과 어쩔 수 없이 한판 벌여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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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이라니!

내가 동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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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7

생리아의 성벽은 망치 소리로 가득했다. 인부들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손에서 손으로 돌을 날랐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함께 성벽 지도를 보며 공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아니는 인부들과 성벽 틈새를 메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아니의 초록 눈은 여전히 빛났고 삶을 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그는 순간을 받아들였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해나갔다.
시간은 강물이 흐르듯이 흘렀고 몰타의 공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새로운 날이 찾아왔고 움츠린 것이 피어났다. 대지는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모든 것은 지나갔고 또 시작되었다. 보키아는 성과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시칠리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발티는 갤리선으로 보내져 동생과 해후했다.
잠시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자 나디아가 성벽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아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동생을 마중나갔다. 사람들은 나디아를 반기며 하나 둘씩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발레트도 그녀를 발견하고 성벽 지도를 접었다. 모두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갓 구운 빵과 치즈 한 덩이에 미소는 저절로 번졌고 마음은 풍족해졌다. 발레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내리쬐는 강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태양 아래에서 먹는 점심은 너무나 달콤했다.
성벽 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나디아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목 뒤로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나디아는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이 넓었고 갤리선 한 대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은빛의 바다는 잠자는 아기의 얼굴처럼 평온했다.
발레트와 나디아의 시선이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한곳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눈길은 스케베라스산에 오래 머물렀다. 산은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고 몰타를 든든히 지켜주고도 있었다. 몰타로 들어오는 배를 환영했고 떠나는 배를 배웅해 주기도 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품었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스케베라스는 몰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나디아는 집을 나서 좁은 골목을 걷고 걸어 광장에 다다랐다. 성 바울 성당은 빛을 받아 눈부신 색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서서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그녀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멈춰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보고 순간 놀란 듯 했지만 곧 미소를 되찾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나디아 앞에 선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해를 등진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나디아는 자신 앞에 나타난 안드레아를 보자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광장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새소리와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 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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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6

보키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얼굴 표정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둘러보며 몇 마디 말을 했으나 얼핏 스치는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발레트가 방에 들어서자 보키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릴라당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트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보키아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금새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키아경, 누군지 알아 보시겠습니까?"
릴라당이 발티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키아는 비토를 보았으나 비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이틀 전, 오스만 정찰병과 함께 있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릴라당이 보키아를 보며 말을 맺었다. 보키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보키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번, 비토 발티가 살람 메메드가 아니라고 증언하셨지요. 몰타의 안전이 걸린 중대한 일임에도 경은 첩자를 감싸 수사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릴라당이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20년 동안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또다시 연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보키아는 안쓰럽다는 듯 발티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키아는 인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포장했지만 그는 철저히 이해득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보키아의 뻔한 답변에 릴라당과 발레트는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발레트는 방을 나갔고 보키아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방에 들어온 발레트를 보자마자 보키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인!"
보키아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말을 계속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부인,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라당이 정중한 태도로 의자를 권했다. 창백한 얼굴의 보키아 부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베일은 쓰고 있지 않았으나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부인, 부군과 비토 발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알고 계신 전부를요."
발레트가 부인에게 말을 하자 보키아는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키아 부인은 발레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월 전이에요. 평소와 같이 성당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섰지요. 뜰에서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새벽에 누군가 싶었는데 남편과 비토였어요."
보키아 부인이 여기까지 말을 하자 보키아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네가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첩자임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절대로 밝혀내지 못 해...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남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발티는 그 후로 남편의 곁에 있지 않았어요. 집안일도 맡지 않았죠. 헌 옷을 입고 다녔고 남편에게 한 번씩 무언가를 보고했어요. 돈 후안경이 집에 초대되었을 때도 저녁 식사 중 남편에게 따로 보고를 했어요."
"에스파냐의 돈 후안경 말입니까?"
발레트가 물었다.
"네,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발티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고 다른 방으로 돈 후안경을 데리고 갔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눈밑은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어색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발레트는 큰 결심을 한 보키아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보키아 부인은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보키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키아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보키아 부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릴라당의 방을 나갔다.
"비토 발티를 아끼는 마음에 그의 정체를 묵인하였다는 경의 말은 믿기가 어렵군요."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키아의 뒤에 섰다.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 후안은 그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를 5세의 측근이지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가 붙잡은 오스만 정찰병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병력과 함선 규모를 발티에게 전했다고 하더군요. 돈 후안경이 그 정보를 알고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발티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키아는 더 이상은 못 듣겠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스파냐를 비롯한 각국에서는 오스만의 동태를 항시 살피고 있습니다. 경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발티를 이용하여 오스만의 정보를 얻고자 했어요. 그 정보라면 에스파냐로 진출할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발티는 당신의 사익을 위해 이중첩자 노릇을 했던 겁니다."
발레트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보키아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비토 발티가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척 했었던 감정이 결여된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동생을 살려야 했어요... 동생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이 쏟아졌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발티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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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쥐들의 도시

 

또 하나가 죽었다. 죽음은 차례차례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서서히 죽었고, 다른 이는 급히 숨이 넘어갔다. 죽음은 변칙적이어서 그들은 괴로웠다.
 쥐. 쥐 떼가 몰려와 곳곳에 파고들었다. 구석에, 틈바귀에, 저장소에, 우물에. 쥐들은 차츰 대담해져 치즈를 실은 수레나 과일 좌판에도 출몰했다. 사람의 눈에 띄이면서도 태연했다. 쥐들은, 차선책으로 풀어놓은 고양이를 물어죽였다. 새끼들은 쥐에게 몸피에서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쥐들은 늘어났고 죽음도 넘쳐났으나 시장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사병들로 하여금 성문을 삼엄히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저택의 문을 꽁꽁 잠근 뒤 엄격히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에 한해 접근을 허락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종말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종말론자들은 곧 죽어 연설은 끊어졌지만, 다음 날이면 새로운 미친 자가 나와 같은 내용을 외쳤기에 끝나지 않을 노래 같았다. 시장은 그들마저 죽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듯 잠잠했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안위 뿐이었다. 
 도시는 고립되었다. 
오랜만에 저택을 찾아온 이는 왕의 특사도 구걸하러 온 거렁뱅이도 아니었다. 그가 걸어가자 덩치 큰 잿빛 쥐들이 꼬리를 흔들며 재빨리 흩어졌다. 가축과 사람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들은 파먹힌 과일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는 그대로 걸어가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보초병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는 병사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병사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시장은 무엇이든지 불신했다. 불신이 그의 큰 자산이었다. 그는 무수한 사람을 배신하고 속여 재산과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타인 또한 믿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대상은 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갑작스레 등장한 이상한 청년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청년은 그가 본 인간들 중 단언컨대 새로운 유형이었다. 
"뭐야, 어떤 새끼가 저거 들여보냈어?"
시장은 대충 가운만 걸친 채 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그렇게 호통을 쳤는데 정작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년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시장에게는 그 태도마저도 거슬렸다. 
"야, 저거 빨리 안 끌어내고 뭐해? 내 집에 웬 천한 광대 새끼를 들여보내다니 니들 제정신이야?"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장을 막은 것은 순간적으로 눈앞을 휙, 스쳐간 커튼 같은 검붉은 형상이었다. 시장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유리잔이 손에서 맥없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숴졌다. 고용인들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받치고 입가에 액체를 흘러넣었다. 
"그동안 피로와 압박감이 심하셔서..."
한명이 조심스레 그렇게 말했고 시장은 흐려진 눈으로도 투명한 잔 너머에 비친 청년의 형상을 보았다. 언뜻 본 그것은 산불처럼 밝게 타오르며 일렁이는 샛노란 불길이었다. 잔이 입가에서 떨어지자, 청년은 이전과 다름없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시장님께서 보신 것은 헛것이 아닙니다."
검녹색 눈의 청년이 말했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붉은 장막을 보셨지요. 그는 쥐들의 제왕입니다. 쥐떼를 몰고 다니며 질병을 퍼뜨리는 악의 징조입니다."
"이런, 씨..."
시장은 이마를 쓸며 난색을 표했다.
"그게 지금 내 집에 들어온거야? 자네도 무슨 대책이 있으니까 날 보겠다고 한거 아냐.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줄테니 일단 날 살려주게. 난 여기 시장이야. 자네가 요구하는 건 전부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찾아왔으니까요."
청년은 거무스름한 얼굴을 숙여 그렇게 말하고는, 접견실에 저택의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그가 펼친 것은 마법도, 의술도 아니었다. 음악이었다. 
 시장의 태도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는 시장의 권위에 걸맞는 의복을 갖추고는 즉시 성대한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했다. 
"내가 자네를 잘 몰라 실례를 했네. 도시를 질병으로 부터 구완해야 할 의무감과 부담감은 나날이 나를 짓밟고 갉아먹었다네. 그러나 이제 자네가 왔으니 나도 시민들도 한 시름 덜었네. 수많은 목숨이 자네 한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모쪼록 최선을 다해주시게."
시장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 사람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눈으로는 줄곧 청년을 훑어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청년은 시장의 마음을 적잖이 풀어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쥐들을 밖으로 몰아냈으니 그들의 제왕은 힘을 잃고 쥐 떼를 좇아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시장님의 저택은 당장에는 역병으로부터 무사할 것이나 바깥의 도시는 그렇지 못하지요. 제게 나흘의 기한을 주시면 도시 곳곳에 웅크린 병의 씨앗을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시장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청년이 쥐들을 모두 퇴치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양의 돈을 요구했을 때도 기분좋게 승낙했다. 
 쥐들의 왕국에 구원자가 납시었다. 골목에서 광장까지, 그가 도시를 누비며 펼친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하잘것없는 피리 소리였을 뿐인데, 쥐들은 그 소리에 홀린 듯이 하릴없이 이끌려가다가 강가에 몸을 던졌다고, 그 광경을 목격한 이는 그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단번에 찾아온 평화에 기뻤고 일견 얼떨떨했다. 그러나 쥐를 퇴치하는 대가로 시장이 그 이방인에게 천 냥이나 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시청 앞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깨끗해진 광장에는 말쑥한 차림새의 시의원들과 시장이 엄숙히 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소!"
한 남자가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전염병 때문에 가축도 식량도 전부 동이 나버렸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판에 시장 당신은 우리의 목숨을 놓고 수상쩍은 떠돌이 외국인 하나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렸단 말이오? 우리가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비쩍 꼴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놓아 시장의 탄핵을 외쳤으나 시장은 이를 타개할 간단한 대책을 세워놓았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검은 피부와 외지의 억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떠맡겨진 약속의 짐을 내던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일단 가장 쉬운 대책이 제안되자 그들은 만장일치의 동의를 보였는데 사뭇 오랜만의 일이었다. 시장은 조소 어린 거만한 자세로 청년에게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는데 쥐들이 사라진 거리는 깨끗이 닦여 윤기가 흘렀고 건물은 위용이 넘쳤다. 꾀죄죄한 아이들이 쥐처럼 빠르게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수레를 끌던 노인은 바퀴가 죽어 널부러진 돼지의 시체에 걸렸는데도 제자리에서 멈춰선 채 나아가지 않는 수레를 밀고 밀기만 했다. 
"좋은 경험으로 여기도록 해. 이 또한 신이 정하신 운명이니,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똑똑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겠네. 그 꼬라지로 와서 천 냥을 요구하다니, 그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 아니던가. 주제 파악을 하도록. 이만."
 시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고 경비병은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청년은 시장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시장은 커튼을 내려 청년의 시야를 막았다. 마치 배신을 기다려왔다는 듯, 숲의 가장 깊은 구역을 닮은 눈 속에 환한 불빛이 켜졌다. 모멸 당한 청년은 등을 돌리며 모자를 깊숙히 눌러 그 빛을 삼켰다. 도시의 씨는 모조리 말라 버릴 것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어리고 약하고 무방비한 존재들은 쥐들이 그러했듯 정체불명의 음악에 이끌려 물가로 하나하나 춤추듯이 행진하다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질 것이었다. 
 사람들은 허둥지둥대다가, 전말을 알아차리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하늘을 저주하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이제는 사라진 이방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분노는 시장에게 향했다. 갓난아기를 제외한 아이란 아이는 모두 사라졌다. 골목의 거지에서부터 시장의 자식들까지 하룻밤만에 연기처럼 홀연히 증발했다. 시장은 자신도 같은 피해자일 뿐이고 시민들 모두가 이미 동의한 사안이 아니냐며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분노로 눈먼 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시장은 쥐의 비가 쏟아지는 꿈에 시달렸다. 쥐들이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며 지붕과 바닥과 기둥에 부딪혔다. 쥐들은 금화를 갉아먹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건물을 갉아먹고, 치즈와 사과를 갉아먹고, 사람을 갉아먹었다. 열 살 난 아들은 그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슬프게 뜬 채 시장을 바라보았다. 쥐들이 들불처럼 번져 아이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의도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저주가 아니었어. 그 놈이 찾아왔던 게 저주였던거야. 쥐들의 출몰은 그 놈의 출현을 위한 전조에 불과했어!
시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창 너머 떠오른 달은 너무도 깨끗하게 보였다. 잿빛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날의 조용한 도시 속 사람들은 슬픔에 지쳐 미적거렸다. 시장은 이불을 제치고 숨겨왔던 상자를 꺼내 열었다. 칼날은 새것처럼 순정하게 빛났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죽거나, 청년이 죽거나 , 그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계획이었다. 오늘 밤에 끝낼 생각이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는 침묵을 원했지만 넌 그보다 더한 것을 빼앗아갔다. 쥐들은 사라졌지만 도시는 생기를 잃었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네가 인간이든, 요정이든, 오늘 밤에 결판을 내야겠다. 그 이상한 음악으로 날 쥐새끼들처럼 만들어보라구.'
 시장은 청년이 찾아온 날 보았던 붉은 장막 같은 형체를 기억했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청년이 쥐의 왕이니 역병이니 했던 그것을 떠올리자, 무섭기는커녕 기묘한 쾌감을 동반한 저항 욕구가 솟았다. 가까이에 두면서도 결코 소중함을 몰랐던 보석이 휘발해버렸다. 그것이 사라진 이상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시장은 칼을 품 속에 감추고 검은 밤 사이를 내달렸다. 아무도 모르는 구멍을 빠져나왔을 때, 때모를 소나기가 내렸고 천둥이 으르렁댔다. 피부를 때리는 빗발의 소음 틈으로 찍찍대는 쥐 소리가 들렸다. 쥐들의 제왕은 창궐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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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5

발레트는 모래색 돌로 차곡차곡 올려진 건물 벽을 손끝으로 만지며 걷고 있었다. 처음 몰타에 발을 내딛던 날이 떠올랐다. 지중해 한가운데 솟은 작은 도시는 로도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벽에 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타로 들어왔고 자신도 그들과 같이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이 벽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발레트는 모래색의 돌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뜻밖의 목소리에 시간은 현재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영롱한 초록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본래보다 밝게 보였다. 나디아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로 발레트에게 걸어왔다.
"나디아!"
발레트는 벽에 올렸던 손을 내려 허리춤에 찬 칼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아침 일찍 어딜 가는 거에요?"
"성당에요."
나디아는 눈을 크게 뜨며 발레트를 보았다. 그녀는 발레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도 성당에 가는 길이에요."
발레트는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어 나디아에게 길을 내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갖고 있었다. 골목은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고 소리는 리듬이 되었다. 리듬에 따라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이따금씩 마추치는 시선은 미소를 불러왔다. 모퉁이를 돌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빛에 의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건하고도 평화로웠다. 발레트는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광장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아름다웠다.
"아침의 광장은 늘 황홀해요."
나디아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성당으로 향하는 똑같은 길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순간이 특별했다. 발레트도 나디아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저 편으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웠다.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주위에 감탄하며 성 바울 성당으로 이끌려갔다.


성당 앞에는 며칠 전과 같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발레트는 마차를 힐끗 보고는 나디아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성당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군가와 얘기 중이던 피오르 신부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부 옆에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로 올린 여인이 있었다.
"오, 나디아."
피오르 신부는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베일을 쓴 여인은 발레트와 나디아를 보자 얼른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감추더니 신부에게 인사한 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방금 지나간 여인은 보키아경의 부인이 아닙니까?"
발레트의 물음에 신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발레트는 빠른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만!"
여인의 등 뒤로 발레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을 쓴 여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보키아경에 관해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보키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여인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발레트도 걸음을 늦췄다.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