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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사랑한다는 헛소리

 

 

 

 

  사랑해

 

  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사물에 대한 명칭을 알아가는 아이도, 마음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가는 소년·소녀도, 군데군데 미세먼지보다 더 강력한 잡음이 끼어든 인생을 어떻게든 사랑해보려는 청년도, 안녕하세요? 보다 건강하시죠? 라는 인사가 더 익숙해진, 지긋한 나이의 어른들도 모두 좋아하는 말. 그렇지만 손만 뻗으면 닿아 까먹을 수 있는 귤처럼 여기고 싶지는 않은 그 말.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갑자기 해버린 건지 궁금했고, 그 이유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다 그만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이로 만들어버렸다. 사랑의 말에 이유를 묻는 순간, 진심은 헛소리가 되었다.

 

 

  사랑해

 

  얼마 뒤, 나는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그 말과 또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조우했다. 작년부터 엄마는 간헐적으로 헛소리를 내뱉었다. 처음 그녀의 그런 모습을 알아챈 건 다름 아닌 나였는데,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두 번의 이상 반응인 걸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그 헛소리는 조금씩 느슨하게 엄마라는 존재 안에서 영역을 넓혔고, 시간이 지나며 그녀를 원래의 엄마 반, 낯선 엄마 반이 함께 공존하는 다면적 인간으로 만들었다. 엄마는 예전에 자신이 재미도 보람도 없는 삶을 산 것 같다며 자주 자책했는데, 그래서 나는 그녀가 피안彼岸을 끌어들여 인생에 즐거움의 빛을 드리운 게 아닐까 종종 생각하기도 했다. 여하튼 갑작스런 그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건 엄마의 입을 통해서였다. 저 말을 한 건 낮의 엄마일까 아니면 밤의 엄마일까, 내가 서서 고민하는 중에 그녀는 내 눈을 곧이 바라보며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내가 해야 하는 건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더 이상 아득해지기 전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웃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사랑한다는 말을 머리맡에 두고 떠나보내지 않는 일,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잡아두는 일, 그녀에게 나는 기적을 행할 수 없지만 나에게 그녀는, 엄마라는 사람은 여전히 기적이라는 사실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은 낮의 엄마가 보내는 진심의 신호든 밤의 엄마가 토해낸 헛소리든,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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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1

나디아는 성벽 위에서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붉은 빛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빌구의 성벽은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 크레누는 공사 기한을 맞추기 위해 때때로 야간에도 작업을 진행했다. 인부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크레누는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나디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릴 듯 했다. 나디아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은 너울너울 춤을 췄다.
크레누는 아내를 하늘로 먼저 보내고 망연자실해 있던 5년 전을 떠올렸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길모퉁이에 앉아 울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소녀에게 음식을 사주며 지낼 곳은 있는지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고통을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에 크레누는 나디아를 거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크레누는 나디아가 환한 웃음을 되찾길 바랬다.
한쪽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부 중 한 명이 크레누에게 달려와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트리폴리 요새가 해적에게 습격을 당했답니다. 지금 항구에선 온통 그 얘기로 난리에요!"
크레누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디아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크레누의 등뒤에 와 있었다.
"나디아!"
미처 붙잡기도 전에 나디아는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마르사 해안을 지나 스케베라스산을 올라갔다. 숨이 미칠 듯 찼으나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고 작은 생채기에서 피가 이슬처럼 맺혔다. 나디아는 정신없이 뛰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떨어진 눈물은 모든 것을 적셨다. 고조 섬,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발레트까지도... 아무리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 깊숙한 모래 더미에 파묻혀 버렸다.
나디아는 땅끝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발을 멈췄다. 어둠은 이미 바다를 삼켰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이 그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나디아는 목에 걸린 십자가 펜던트를 손에 잡고 무릎을 꿇었다. 바람은 그 여느 때보다 세차게 나디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디아는 눈을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의 밤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발레트는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어깨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하루 종일 고되게 노를 저었던 사람들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해적들은 대다수가 육지로 나갔고 노예들을 감시할 몇몇만 남아 있었다. 발레트는 고개를 돌려 수염으로 뒤덮인 남자를 보았다. 사내가 자신의 출신을 밝혔을 때 그와 같은 눈을 어디서 보았는지 발레트는 알 수 있었다.
'나디아...'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이 이름 때문일지도 몰랐다. 몰타를 떠난 이후로 발레트는 나디아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디아를 만나고 간간이 비쳤던 그녀의 쓸쓸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녀가 웃으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고 안심이 되었다. 깊은 상처를 털어놓았을 때는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발레트는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만져졌다. 나디아가 오빠의 칼을 발레트에게 줄 때 그녀는 이전과 달라 보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해 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그 칼을.."
초록 눈의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놀라는 사내에게 칼을 건넸다.
"나디아... 당신의 여동생을 알고 있소. 이제 주인을 찾은 거요."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디아...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사내는 칼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디아를 지켜달라 부탁하며 주신 칼이었다. 그는 지난 5년간 나디아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디선가 살아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그는 노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움푹 패인 사내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발레트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사내의 몸을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내는 감았던 눈을 뜨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발레트를 보며 나디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몰타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은 말아요."
사내는 발레트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한번 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어떻게 발레트가 칼을 가지고 있는지도 물었다. 발레트는 그간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남자는 발레트의 말이 끝나자 칼을 도로 건넸다. 발레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남자는 나디아와 닮은 초록 눈으로 발레트를 바라보며 그의 팔을 잡았다.
"나디아가 당신에게 준 거요."
발레트는 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지아니 레오나디요."
"발레트,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두 사람은 족쇄 찬 손과 손을 마주 잡았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밤이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몸을 웅크리며 마른 기침을 해댔다. 발레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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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0

제르바 섬은 바르바로사가 북아프리카에서 첫 번째로 자리잡은 곳이었다. 이곳은 야자수로 주변이 둘러싸여 해적들의 은신처로 삼기 적당했다. 발레트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해적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고 쿵 하는 쇳덩어리 소리가 들렸다. 노는 배안으로 들여졌다. 발레트는 족쇄를 찬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이 쿡쿡 쑤시고 시큰거렸다.
"하다보면 요령이 생길 거요."
'이 생활도 적응이 된다니 끔찍하군.'
허리는 끊어질 듯 했고 목은 갈증으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저녁을 갖다 줄 거요."
옆에 앉은 남자는 발레트의 생각을 읽은 듯 다시 한번 말했다.
"갤리선을 탄지 얼마나 됐소?"
"5년."
남자는 얼굴의 반이 수염으로 덮여 있었고 머리는 마구 자라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슴과 등은 상처로 가득해 온전한 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볼품없이 야위어 있었으나 초록빛의 두 눈은 어떤 기운을 뿜어내는 듯 했다. 발레트는 그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며칠간 머무를테니 쉬어 두시오."
발레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로메가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몇 구의 시체가 바다로 던져질지 모를 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검은 얼굴의 해적은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빵과 물을 주고 올라가 버렸다. 발레트는 숨도 쉬지 않고 물부터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차디찬 감각은 그의 몸속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트리폴리에서 잡힌 사람들이 어디로 간지 아시오?"
발레트는 천천히 빵을 씹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다른 갤리선에 타고 있을 거요, 라골레타로 가기 전에 잠시 들른거니까."
"라골레타? 튀니스로?"
"며칠 후면 튀니스도 트리폴리와 같은 신세가 될 지 모르오."
바르바리 해적들은 오스만으로부터 병력과 화승총을 지원받아 쉽게 북아프리카의 요새를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악랄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바르바로사에게 그 누구도 대항하기는 어려웠다. 튀니스까지 함락된다면 몰타와 남부 지중해가 오스만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발레트는 손을 꽉 움켜 쥐었다. 살아난 세포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족쇄를 끌어 당겼다.
"이럴 때 힘을 비축해 놓아야 해요. 여기서 버티려면.."
남자는 돌덩어리같은 딱딱한 빵을 물에 적셔 입으로 가져갔다.
"버텨서?"
"고향으로 돌아갈 거요. 꼭."
발레트의 질문에 남자는 발레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5년간 갤리선 노예 생활을 한, 덥수룩한 수염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남자의 초록 눈이 한순간 빛나는 것을 발레트는 보았다.
"어디 출신이오?"
"몰타, 고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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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9

릴라당은 벽난로 옆의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 사이에 릴라당의 이마 주름은 더욱 깊게 패였다. 그가 성 요한 기사단장으로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쉴레이만은 대군을 이끌고 로도스를 공격했다. 패기 가득한 젊은 술탄은 해외 원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했고 릴라당은 200년간 기독교계의 보루였던 로도스를 지켜내야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세력의 힘 겨루기에서 성 요한 기사단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는 배와 같았다. 그들은 뜯겨진 나무 조각을 간신히 붙잡고 파도가 이끄는 대로 떠밀려 갔다. 몰타는 그들이 표류끝에 만난 섬이었다. 릴라당은 기사단장이 된 직후부터 기사단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릴라당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짧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망토를 두른 기사 한 명이 벽난로 앞으로 걸어왔다.
"어떻게 되었나?"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부하 기사는 릴라당에게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넸다.
"투르크인은?
"지하에 데려다 놨습니다."
"수고했네."
발티가 얻어낸 정보는 보키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에스파냐는 오스만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보키아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그가 가진 카드를 사용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릴라당은 의자에 다시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무거운 두 눈을 감았다.

 


은촛대 위로 흔들리는 불빛, 온갖 산해진미로 차려진 풍성한 식탁, 붉은 포도주와 호탕한 웃음소리.
보키아 부인은 이 모든 것과 상관이 없는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잘 가꾼 콧수염과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의 보키아는 돈 후안의 끝나지 않는 자기 자랑에도 참을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돈 후안은 마드리드에서 온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는 카를 5세와 대면할 수 있는 지체 높은 귀족이기에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인생에 찾아온 기회를 잡는 것과 같았다. 보키아의 배려 속에 돈 후안은 자신의 모험담을 더 길고 장황하게 얘기하는 만족감을 누렸다.
보키아 부인은 시칠리아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이 결혼으로 인해 보키아는 남부 이탈리아의 상권을 얻을 수 있었고 이제 에스파냐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했다. 하인이 다가와 보키아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해를 구했다. 보키아 부인은 그제서야 남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인, 마그레브에서는..."
돈 후안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보였다. 유럽은 오스만의 다음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의 진짜 속내를 알아내기는 무척 어려웠다. 이스탄불에서 활동하는 유럽 첩자들은 본국으로 많은 정보를 보냈지만 그중에는 거짓 정보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 정보가 판을 쳤기에 믿을 수 있는 정보를 갖는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보키아는 발티를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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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2

585

 

 

 

세상 사람들 중에는 헛것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데, 오늘은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내가 되는 날이다. 몽마의 여왕답게 잠을 자고 있지 않아도 환상으로 나타나, 이곳 저곳 대려다 달라고 하고, 실물을 먹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보면 나 혼자 아이스크림 2개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리라. 애초에 여장을 한 상태에서 아이스크림 2개를 들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하는 여장이 잘 어울리는 변태라고 보겠지.

 

그래, 아이스크림 2개를 드는 건 별로 타격이 없으니, 제발 여장이라도 풀어줬으면 좋겠으나, 레인이 따라다니기까지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더 이곳으로 쏠렸다. 옷에 저주가 묻어서 존재감이 더 올라간 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떠들고 있는 레인은 내가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저번에도 진공청소기로 모든걸 다 정리했죠.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시체도 남기지 않고 다 빨아들인다고요?”

 

“그래? 너는 헌터들이 판치는 곳에서 나타나는 게 좋지 않겠냐? 환영극단인지 뭔지 하는 곳에 들어가면 잘 받아줄 거 같은데?”

 

“저는 넨을 사용하지 않는데요?”

 

가끔씩 이런 농담을 주고 받을 때도 이 세계는 여전히 미쳐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다른 설정과 배경이 섞여버리는 기괴한 현상. 원인이라고 한다면 나와 레인이 각자 소유하고 있는 잡화점이, 하나의 시공간에 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잡화점의 중추인격인 세린과 자주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잡화점 하나가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뿐이고, 무리해서라도 지금 남아있는 방법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도 유랑극단이 미래를 난장판으로 만드는데, 본래 시간대인 300년전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실...안전하다고 생각은 한다.

 

어차피 300년 뒤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어도, 지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미래에는 누군가가 해결해줄 것이라고 판단을 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찾아오면 잡화점이 그때는 3개가 될 테니까, 모든 평행차원과 함께 붕괴될 위험이 있으니, 일부러 찾아오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30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무런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미래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복권이 있다.

 

물론 내 경우에는 300년 뒤의 1등 당첨금액이 얼마인지 알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미리 알아두기만 한다면 기분 좋지 않을까? 이건 너무 사소한 거 같으니...음...적어도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스포일러라고는 하나, 자신이 잘 되는 스포일러를 미리 경험한다면 그게 또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미래에 불행해진다고 한다면 그 불행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삶이란 것은 불안정한 4차원속에서 선택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에, 다른 평행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곳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삶은 매우 유동적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카일 씨는 그렇게 생각하나요?”

 

“멋대로 남의 독백하는 글귀를 읽고 그럴싸한 질문을 던지지 말아줄래? 나는 어째서 독백을 읽히는 거냐? 아니면 내 타임라인에 독백이 올라와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는 거냐?”

 

“아뇨. 리트윗이 되고 있는데요?”

 

“결국 공유를 하고 있다는 거잖아? 아니, 생각만 하고 있는데 왜 그런 것들이 실제로 공유가 되는 거야? 직접 문장을 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말한 기억도 없다.

 

“혹시 태클을 운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페널티가 아닐까요?”

 

“페널티 킥으로 죽어볼래?”

 

이쯤 되면 창조신이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창조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창조신이 창조한 건 아니지. 나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으니까.

 

...지금은 300년 뒤니까 부모님은 하늘에 계신 게 맞다. 물론 3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살아계시겠지만.

 

“카일 씨는 운명론자에요?”

 

“운명은 개척이 가능하다.”

 

“책에 쓰여진 그대로네요?”

 

“그거 내가 일기에 썼던 내용이냐?”

 

기이하게도 내가 필수로 적어 넣어야 할 내용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일기나 자서전 같은 건 자신이 겪어온 과거와 그로 인한 성공과 실패, 자아성찰에 대한 내용들이 기술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들어서 적는 게 아니고!

 

“가급적이면 나에 대한 스포일러는 자제해줄래? 매번 일기나 그런 걸 채워 넣을 때마다 신경 쓰게 만들잖아?”

 

“어라? 카일 씨. 일기도 쓰세요?”

 

“나는 본래 일기를 쓰는 게 습관이야. 하루가 어떻게 마무리 되는 가를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괴상한 경험들을 하나하나 기록해서, 최후에는 그 기록에 따라 아이언 클로를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지.”

 

“음. 일기를 쓰는 건 좋지만, 목적이 매우 불순하네요.”

 

“불순하다는 건 또 무슨 의미야?”

 

레인은 한숨을 내뱉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불순하다는 건 딴 속셈이 있어 참되지 못하다라는 뜻이에요.”

 

“어디 사전 검색해서 이야기 하지 말라고, 내가 말한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 아이언 클로를 날리기 위한 일기장도 필요에 의해 쓸 수 있다고!”

 

모든 것엔 목적이 있지만, 꼭 그에 맞는 목적을 설정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운동하는 목적은 건강보다는 배가 더 고프면 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무언가 하는 행위에는 여러 목적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니 나는 불순하지 않아.

오히려 순수하다고 봐야 한다.

 

내가 마음을 다 잡았을 무렵, 레인은 내 쪽에서 한 발자국 벌어졌다. 고작 한 발자국 멀어진 거 같지만 분위기 상, 마음의 거리는 우주 저 끝까지 나아가고 있겠지. 어쩌면 우주를 넘어 다른 평행차원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추진력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목적은 사소한 거라도 다 가능해. 예를 들어 네가 개미를 관찰하고 인간의 집단은 개미보다 더 못하다. 라는 일기를 써도 일기의 기능을 제대로 한다고.”

 

“나중에 미래를 예지하는 일기를 쓰시는 건가요?”

 

“그 일기는 파손되면 죽는 거잖아.”

 

미래를 예지하는 일기라...

있으면 그리 쓸모는 없다고 본다.

 

그건 이미 정해진 운명으로 도달하게 만드니까.

 

“정해진 운명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 인생은 언제나 순탄하게 가지 않으니까. 미래가 참하면 그게 살맛이 나겠냐?”

 

“그렇군요. 그러면 카일 씨의 일기를 다 태울까요?”

 

“알아서 해라. 태우던지 불쏘시개로 쓰던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태워버리라고 하고 싶은데, 차기 잡화점의 주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태우라고 했는데 레인이 거절한다고 해도, 뭐라 말할 이유도 뭐도 안 된다.

 

“자기~ 저 옷 사주면 안 되?”

 

“저 옷을 내가 왜 사줘? 그 전에 너는 환각에서나 튀어나오는 귀신 같은 존재잖아. 아니면 꿈의 미로에서 나와서 직접 현실로 튀어 나오던가?”

 

릴리스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내 말에 반박했다.

 

“아니. 저건 자기가 입을 건데?”

 

“안 입는다고!”

 

지금 여장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오늘의 신상품이라고 나온 저 옷을 입으라고? 차라리 나더러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오라고 해라.

 

“저주를 풀러 왔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이렇게 거절하면 자기는 한 곳만 방황하다가 오늘 하루를 다 날리는 것이 아닐까?”

 

“이 녀석...조만간 잡화점에 찾아오기만 해봐라...”

 

“어머? 그렇게 나를 보고 싶어하는 거야? 기뻐라~”

 

저 표정.

구겨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이언 클로가 현실세계와 꿈의 경계를 부수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뻗었지만 아무런 형체가 없이 허공만 스칠 뿐.

 

“하아.”

 

한숨이 밖으로 나와 하늘로 날아갔다. 누군가는 괴롭힘을 받고 누군가는 괴롭힌다. 이건 무슨 음과 양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 세상의 이치는 아주 간단하게 기준이라는 것이 정해진 모양이다.

 

그 기준은 전부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필요한 걸까? 언제나 세상은 중심적...

 

“자기? 그런 독백은 재미가 없어서 뒤로 가기를 누르는 사람이 분명 존재할 텐데?”

 

“시끄러워! 개나 소나 독백을 다 훔쳐보고!”

 

“나는 개나 소는 아닌데? 혹시 그런 게 좋다면 노력은...”

 

“이상한 쪽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하도 훔쳐보는 바람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독백은 멋대로 볼 수 있다는 상황이 너무 불공평하다. 당연히 훈련을 한다면 사람의 심리상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어도, 자세하게 독백을 한다는 자체는 너무하지 않나?

 

“설마 이런 독백 하나하나 읽는 것도 설정이 오염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어차피 이게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시공간에 관련된 것도 복잡해 죽겠는데 평행차원까지 생각하니까 머리가 터지려고 하네.”

 

“그래서 저 옷은?”

 

“안 입어!”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릴리스에게 소리를 친 뒤에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세상이 무너져도 정신상태가 아다만티움보다 더 뛰어난 잡화점 멤버들의 장난은 가위바위보부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가위바위보를 하면 거의 무조건 이기는 마왕이 있는가 하면, 나타날 때마다 세계가 날아가는 여왕이 있고, 대체 이게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르는 여기사를 필두로, 내가 싫어하는 것만큼은 계속해서 건들이기 시작한다.

 

시나의 경우는 그나마 얌전하기 때문인데 대략 소금이 있다면 시나의 경우에는 물에 약간 희석시킨 정도가 된다.

 

그래도 짠 건 마찬가지...

이후 릴리스와 아리엘, 루비아까지 늘어나면서 24시간 쉴 틈도 없이 날 괴롭히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악마가 오면 질색하면서 도망갈 것이고, 어쩌면 아다만티움이 그들의 정신력과 음흉함에 비하면 나트륨까지 내려갈 수 있으리라.

 

“나트륨은 물에 닿으면 폭발...”

 

“그만 읽어!!!”

 

레인에게도 한차례 소리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어쩌겠어요? 그게 카일 씨의 운명인데?”

 

“내 운명이 남들에게 태클 거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독백이나 흘리는 괴상한 운명이냐? 차라리 기묘한 운명을 타고나서 파문이라도 사용하는 게 속이 더 편하겠다!”

 

파문의 호흡은 건강에 좋다고도 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상대함으로써 카일 씨도 심심하지 않잖아요.”

 

“심심하지는 않지. 분노가 치솟고 있으니까.”

 

입고 있는 옷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여행은 그리 순탄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하루를 쓸 때 없는 잡담으로 날리는 중이니까.

 

“어라? 카일 씨.”

 

“또 왜?”

 

“앞을 보세요.”

 

내가 걷고 있는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쪽이 앞이 아닌가? 그러나 더 멀리 바라본 시야에서는 소녀와 키가 큰 남자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여전히 인기가 많구만...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옆에서 레인의 행동을 차마 막지 못하고 눈으로 쫓을 수 밖에 없었는데...레인이 꺼낸 샤프의 끝부분이 정확하게 리제로트를 겨누며 딸칵하고 눌렀다.

 

-피이잉!

 

바람을 가르고 지나가는 샤프심이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간 것도 무서웠지만, 집사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리제로트를 가리고 양팔로 막아내기까지 했다.

 

“야! 너!”

 

나는 레인에게 따지려고 소리를 쳤지만 금세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숨만 쉬면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보내는데, 이런 대형사고를 내 근처에서 쳤으니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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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글을 올린 이유는

일이 새벽에 끝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항상 새벽에 끝나ㅇ...[털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