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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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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대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건 언제나 감정에 휘말려서 그르치기 마련. 영혼이 있기에 그런 부작용이 있지만, 감정에 휘말려도 좋은 점은 있긴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를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발언하는 리제로트. 그릇이 비어있을 때야 말로 무엇이든지 채울 수 있다고는 하지만, 리제로트가 하는 건 그릇을 비워놔도 그 안에 있는 공기조차 비우기 위해 노력하는 바보였다. 그 안에 채워져 있는 공기만큼은 절대로 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이 아닐까?

 

인간의 영혼이 공기 같은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로 오해하지는 말자.

 

“뭐. 알겠어요.”

 

눈싸움에서 진 리제로트는 고개를 획 돌리며 월터와 같이 등을 돌렸다.

 

“그래도 의뢰는 의뢰죠? 선금은 얼마로 해드리는 게 좋을까요?”

 

“선금?”

 

“네. 느닷없이 “아. 저는 의뢰 못해요.”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족쇄를 좀 채워놓을 생각이랍니다.”

 

“선금이라...”

 

솔직히 선금을 받고 일해본 적이 오랜만이라, 지금 이 일에 대뇌는 목숨을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뇌의 경우에는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한쪽 다리를 못 떨게 만들었고, 중뇌의 경우에는 제어하지 못하는 왼쪽 다리가 스스로 떠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아니. 독백의 표현 방법이 왜 이래?

엉망이잖아.

 

“선금으로 얼마를 받을지 모르시나요?”

 

“솔직히 나는 돈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는 타입이 아니거든.”

 

“위선자네요.”

 

“위선자고 나발이고 내가 사건에 휘말려서 억지로 해결하는 바람에 돈이고 뭐고 못 버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의뢰를 받으면 그에 맞는 의뢰비를 받아야 하지만, 몬스터들은 화폐가 아니라 물물교환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물품들을 나에게 줬다. 이빨부터 뜯는 녀석도 있고, 왠 이상한 돌덩이를 메테오로 날려버리는 녀석들. 실제로 죽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실제로 기록에 쓰여져 있지 않았던 일중에는 해결해줘서 고맙다며, 영원한 죽음을 선물해주려는 기괴한 녀석도 있었다.

 

“그런 에피소드는 없는데요오?”

 

“그냥 어물쩍하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째서 제 생각을 읽고 없다는 진실까지 말하는 겁니까?”

 

맞다. 그런 적 없다.

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은혜를 입은 은인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물로 줄 생각을 할까?

 

“아무튼 빨리 백장미 찍게 이리오세요오.”

 

“뭘 더 찍을 게 있다고!”

 

“삑삑!”

 

......

 

어디선가 익숙한 새소리. 옆을 바라보니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웨이터 얼굴에 하얀 뱁새얼굴을 한 생명체를 보고야 말았다.

 

“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삑삑!”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언밸런스한 그 모습. 여기서 알바를 하고 있는 건지 종업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이곳 카페의 주인은 백곰이었나? 아무리 백곰이라도 저런 기괴한 생명체는...

 

“삑삑!”

 

“그만해! 그리고 그 앞치마는 또 뭐냐! 나더러 입으라고? 웃기지마! 네 놈 정상이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꿈쩍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 저런 녀석이 신수라고 할 수 있지?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촬영할까요오?”

 

“안 해요!”

 

사람의 눈이 많이 띄는 장소에서 이런 옷을 입고 일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혹은 자살방지를 위해서 “너 자살하기 전에 분홍색 앞치마에 여장을 하고 고양이 귀를 달아서 아르바이트를 뛰어라.”라고 말하면, 그 순간 자살하는 사람은 어이가 없어서 자살을 그만두게 되고, 밝고 활기찬 미래만이 반겨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진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 대신 저 위에 있는 말을 꺼내진 말자.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본인부터 살해당할지도 모르니까.

 

“저는 이 옷의 저주를 빨리 풀어야 하기 때문에, 백장미고 뭐고 찍을 마음도 없어요.”

 

“카일이 많이 아픈가봐요오...”

 

“진짜로 절 환자 취급하지 말아달라니까요?”

 

이 정도면 날 정신병으로 몰고 갈 생각인가?

 

“저는 갈길 갈 겁니다.”

 

기괴한 뱁새 이비를 지나치고 앞으로 나아갈 무렵. 저 멀리서 앉아있는 릴리스가 다가왔다. 결국 환영에 불과하지만 너무 사실적이라 착각을 일으키는 기괴한 환영마법. 강인한 정신방어능력이 아니면 분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내 정신방어능력은 남들이 다 알아줄 정도로 강력하나 보다.

 

아무래도 이 정신방어능력의 존재의의는 내가 맨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인가?

 

“여전히 떠들썩해서 좋네.”

 

“떠들썩해서 좋은 이유는 없다. 그런데 릴리스 이비가 왜 저기서 알바를 하는 거야? 아리엘은 알고 있어?”

 

“아니. 나도 처음 알았는데. 나중에 아리엘에게 알려줘야겠당~”

 

“당은 또 뭐야?”

 

“포도당~”

 

“하지마!”

 

이 개그 하나로 더운 낮이 영하 10도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팔짱을 끼는 감촉마저 사실인 것 같지만, 결국 환영인 릴리스는 실제로 내 옆에 없는 존재다.

 

“꿈의 미로에서 지켜보니 재미있나?”

 

“재미있지. 정말 재미있어. 꿀잼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쓰이는 걸까나?”

 

제기랄...

빨간 티셔츠만 입는 곰돌이가 사용할 법한 단어는 또 뭐냐? 이곳에 와서 이상한 것들만 배운다니까?

 

“그런데 한가지. 리제로트에게 당한 건 많은데, 의뢰인으로 받아준 자기의 생각을 듣고 싶어. 혹시 또 하나의 컬렉션 추가야? 고독하고 외로운 아이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평생 각인될 황홀한 경험을...”

 

“일단 멈춰. 그리고 입 닫아. 2분간 입 닫고 있으면 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네가 잡화점으로 찾아왔을 때 아이언 클로를 출격해야 하는지 생각을 좀 해야 되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꿈의 미로로 찾아가서 난동부릴 테니 각오해둬.”

 

그래도 말은 잘 듣는지 정말 2분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2분이 지났을 때.

 

“이 로리콘!”

 

“정말 죽어볼래!”

 

어째서 나는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걸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던 릴리스에게 화낼 기력도 없다. 결과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나는 모든걸 내팽개치고 잡화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나마 돌아갈 장소라는 곳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했지만, 힘들고 지칠 때는 그냥 쉬고 싶은 장소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건 마찬가지겠지.

 

“사람은 영혼이 없는 상태가 순수하다라...”

 

리제로트의 말을 내 입에서 곱씹었다. 영혼이 있기에 타락을 하기도 하고, 신앙으로 깨끗해진다고 하지만, 사실상 성향이 바뀐다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정확하다.

 

“자기는 그 소녀가 했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거야?”

 

“어느 정도라면 어디까지인지 설명해줄래?”

 

“대략 15%정도?”

 

15%라.

 

대체 얼마나 동의를 해야 15%라는 수치가 나오는 걸까?

 

“사람은 영혼의 유무에 따라 순수함이 달라지는 게 아냐. 순수하다는 기준도 멋대로 만든 거지. 다이아몬드를 가공해서 그 완성품이 순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고, 원석 그대로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순수하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어. 영혼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순수함을 따지는 건 넌센스야.”

 

말 같지도 않는 걸 그대로 지워버리고, 릴리스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거리를 맴돌았다. 드디어 도착한 장소는 평범한 구두점. 아니, 300년 뒤의 발전된 세계에 비하면 대략 60년정도 뒤떨어진 건물이었다.

 

“이런 곳에서 누가 사는 거지? 혹시 저 건물도 풍선 달고 날아다니는 거 아냐?”

 

“지금 잡화점은 300년이나 낡았다고, 상대적으로 보면 저 건물이 최신식인데?”

 

릴리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뭐가 기쁜지 먼저 앞서나가는 릴리스를 뒤따라가며, 문 앞까지 도달하자 신사다운 노크를 2번 정도 했다.

 

“그 다음은 눈사람 만들러 갈 거냐고 물어보는 거지?”

 

“그거 리듬에 맞춰서 5번 두드린 다음 하는 거거든?”

 

릴리스는 작년 겨울에 눈사람을 만들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혔나? 아니면 또 다른 기괴한 문화가 오염되어 무의식적으로 입밖에 퍼트리는 상황인가? 릴리스는 옆머리를 귓가 뒤로 쓸어 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 장소는 이전에 아리엘과 같이 왔던 장소 중 하나야.”

 

“그래?”

 

“이곳에서 Yee.T 보드게임도 했지.”

 

“그건 듣고 싶지 않아.”

 

그 보드게임은 언제부터 이 세계를 침공하기 시작한 걸까? 만약 멋대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보드게임부터 제거하는 걸 시작으로 타임라인을 정리할 것이다. 과거로 가는 장치를 가진 미치광이가 자신의 흑역사를 제거하는 것처럼.

 

그 뭐냐...슈트는 절대로 초록색으로 하지 말아달라는 그 사람.

 

“그 사람은 마블에서 일하고 있잖아?”

 

“왜 내 독백을 읽고 마블에서 일한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냐. X교수님이 네 머리 속에 직접 텔레파시라도 걸어온 거냐.”

 

“아무튼 난 녹색 슈트가 싫어서 안 한다고 했어.”

 

“완전히 다른 곳에서 부르고 있잖아!”

 

녹색반지는 고향이 따로 있다고.

울트라 맨처럼 따로 고향이 존재한단 말이다.

 

그보다 벨리알은 잘 살아 있으려나?

 

“악당 생각이나 하는 건 좀 아닌데.”

 

“그래도 울트라 맨 악당 중에서 가장 멋졌다고.”

 

만일 악당이 된다면 차라리 그런 악당이 되어 우주적으로 놀아보고 싶긴 했다만, 나의 또 다른 이면은 그렇게 되면 매우 귀찮아지기에, 그저 안전한 장소에서 가만히 놀고 있는 게 좋겠지. 선악의 개념이 매우 불투명한 이런 순간엔, 내가 좋은 일로 움직여도 남들이 보기엔 악당이 될 수 있다.

 

“잡화점에서 악당 노릇이나 하면 무슨 일부터 할 거야?”

 

반 농담 삼아 릴리스가 물어봤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니 또 다시 반문을 하는 나.

 

“악당 노릇? 그건 왜?”

 

“자기가 악당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볼만할 거 같아서.”

 

악당이라고 한들...

 

“난 3류악당이 될 마음은 없다. 그러니까 이제 좀 들어가자고.”

 

노크를 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문고리를 붙잡고 들어갔는데, 문이 열리면서 낮임에도 불구하고 빛은 이제서야 그 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장소.

 

“이번엔 어떤 손님인지 기대되는데? 저주를 잔뜩 가지고 오다니. 마왕이라도 잘못 건들인 건가?”

 

어떤 마왕을 건드려야 여장을 당한 상태로 평생을 사는 저주를 받는 거지?

 

“뭐. 어떤 이야기든 심각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이리로 들어오게.”

 

울려 퍼지는 여성의 목소리.

그보다 이 가게는 구두점 아니었던가?

 

“구두점에서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누구길래?”

 

“그거야 당연히.”

 

밝은 빛이 계속해서 자리를 채운다.

 

“덤디덤...”

 

“여기서 나올 대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샌즈에게 해주를 요청하겠다.”

 

“그거 참 ‘골’때리는 해주가 되겠구나.”

 

이 녀석 너무 잘 알잖아.

뭐 하는 녀석이야?

 

“꼭 표정이 내가 뭘 하는 인간인지 궁금해 하는 거로군.”

 

“아닌데.”

 

일단 거짓말이라도 하자.

 

“뭐. 거짓말이라도 부정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네.”

 

대체 어떻게 알고 저렇게 말하는 거냐고.

 

“그래도 그 모습으로 나만의 고양이가 되어준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과거 때부터 겪어온 게 많으니까 좀 그렇지?”

 

“좀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이 그렇지. 그보다. 과거에서 이곳까지 날아온 걸 어떻게 안 거지? 릴리스와 아리엘이 한번 찾아와서 그런가?”

 

방안이 비추고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온 정신에는 충격이 돌아 뇌가 정지할 뻔했는데...

 

“오랜만이야. 잡화점의 주인.”

 

“켈모리아...”

 

켈모리아 마그누스.

생각을 해보니 그녀도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었던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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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냥 일찍 자러 간다고 퇴근했습니다.

앞으로 11시간은 자겠군요.

 

그래도 피곤하다면 이 몸은 답이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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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1

아주르... 아주르...
푸른 바다, 쏟아지는 햇빛,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바람, 흩날리는 짙은 머리카락과 너울거리는 치맛자락, 누군가 고개를 돌린다. 얼핏 보이는 옆모습, 초록빛으로 감싸인 눈동자.
안드레아는 눈을 떴다.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은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다. 그는 세수하듯이 얼굴을 쓸고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집 밖으로 나선 그는 항구로 방향을 정했다. 아니, 발걸음이 목적지를 정했는지 모른다. 안드레아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골목을 홀로 걸었다.
거리에 나오자 앞사람의 얼굴이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집집마다 문과 창문이 굳게 걸어 닫혀 있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람들의 말소리. 그는 항구 근처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에는 선원 몇몇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리보다는 그를 반기는 듯 했으나 여기서도 그가 기대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코가 빨간 주인장이 눈빛으로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럼이라는 짤막한 안드레아의 대답에 빨간코의 주인장은 큼지막한 손으로 잔에 가득히 술을 채웠다. 안드레아는 입에 잔을 갖다 대었다. 빈속에 술을 털어넣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선원들은 거친 입담을 서로 자랑하고 있었고 주인장은 그들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속이 쓰라렸지만 남은 술을 비웠다. 그리고 술값을 탁자에 올려두고 주점을 나와버렸다. 항구의 주점도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면서 하늘을 맴돌았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 제노바에서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에서도. 안드레아는 흐릿한 눈으로 해무로 뒤덮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저편을 보기 위해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해무에 갇힌 바다였다. 해무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고 싶었다. 풍족한 바다를 느끼고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깊게 드리워진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안드레아의 머리 위에서 소리내어 울던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위에 사뿐히 앉았다. 갈매기는 보란 듯이 해무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이어서 다른 갈매기들도 주저 없이 해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좀 전에 마신 럼이 이제야 작용하는 것 같았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해무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발레트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선형으로 생긴 계단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고 어둠으로 가득했다. 발레트는 숨을 짧게 내뱉으며 걸음을 떼었다. 한 손에 횃불을 들었지만 어둠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발레트는 횃불을 들어 철창 안을 비춰 보았다. 컴컴한 굴 속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발레트는 철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검은 눈동자의 사내는 발레트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일어났다.
발레트는 릴라당의 방문을 짧게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창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릴라당은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발레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검은 눈동자의 사내를 앞으로 이끌었다. 릴라당은 그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날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릴라당은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결심한 듯 대답했다.
"기독교로 개종하겠습니다."
"배교를 하겠다는 건가?"
릴라당은 사내의 의중을 읽기 위해 다시 한번 물었다.
"제 어머니는 그리스인입니다. 저도 반은 기독교도입니다."
"넌 투르크 정찰병이야. 무엇을 보고 널 믿어야 하지? 모국과 종교를 배반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텐데."
발레트가 날카롭게 사내를 몰아세웠다. 남자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몰타 첩자를 잡는데 협조하겠습니다."
"그건 우리선에서 할 수 있네."
"조금 있으면 본국에서 다른 정찰병을 보낼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자는 더욱 몸을 사릴테고 기사단에게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뿐입니다."
투르크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를 둔 이 정찰병은 릴라당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발레트는 투르크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한 태도였다.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게."
릴라당은 발레트에게 방에 남으라고 말했다. 사내는 발레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른 기사에게 이끌려 방을 나갔다.
"어떻게 생각하나?"
릴라당이 발레트에게 물었다.
"도망칠 구실로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네."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만약 투르크인을 통해 발티를 잡는다 하더라도 그가 보키아에 대해 털어놓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네. 발티는 보키아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걸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보키아가 발티를 이용해 에스파냐에 환심을 사려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사단이 추측한 정황이었다. 그동안 기사단은 발티를 감시해왔고 그는 투르크 정찰병과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보키아는 돈 후안 경을 몰타로 초대하여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었다. 보키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발티의 신원을 숨겨준 것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보키아가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보키아는 온갖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였다. 그보다 더 정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라면?'
말이 모이는 곳. 그곳은 오래전부터 아주 가까운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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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구두

구두 Shoes

: 주로 가죽을 재료로 해 만든 서양식 신

 

 

구두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다. 밑창 아래에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저며들어 있고, 이 구두 안에는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대지의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 불가능한 대지의 거부가 떨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을 확보하기 위한 불평 없는 근심,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 세상에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조바심,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전율이다.

                                                                                                          -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中

 

 

 

 

작년 이맘때 쯤, 인터넷에서 한 남자의 구두가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의 구두. 색이 제법 바래 있기도 하고 군데군데 접힌 부분도 있는지라 '참 열심히 신었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안쪽에 언뜻 보인 로고가 청각장애인들이 만든 수제화 브랜드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한바탕 파도가 다녀갔다.

 

그 남자의 구두를 보며 사람들이 열광한 까닭은 그것을 그저 단순히 가죽과 끈, 밑창으로 구성된 '신을 것'으로만 보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그 남자의 흔적을 되짚어가며 이 사람이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의 구두를 통해 우리는 그가 삶 곳곳에 남긴 흔적들을 확인한다. 구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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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산책

Ego sum, tu es, id est.

        안녕하세요, 오늘 시간에는 간단한 동사들로, 문장을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문장을 만들어보는 첫 시간이고 하니, 가능하면 가장 간단한 구조를 가진 문장을 만들어볼까 해요. 첫 번째로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sum동사, 그다음에는 다양한 동사들을 가지고 보여드릴게요.

 

        문장을 만들기에 앞서 인칭대명사부터 다뤄야겠군요. 마치 영어에서 1인칭이면 I 혹은 We, 2인칭이면 단수든 복수든 상관없이 You, 마지막으로 3인칭이면 He, She, It, They 등을 사용합니다. 라틴어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인칭 나 = ego,          우리 = nos

2인칭 너 = tu,            너희들 = vos

3인칭 남성 = is,         복수형 = ii

3인칭 여성 = ea,        복수형 = id

3인칭 중성 = id,         복수형 = ea

 

        여기서 네 가지 주의할 점을 소개해드릴게요.

 

        첫째, 인칭 대명사는 사람을 서술하곤 합니다만, 사람만을 서술하진 않아요. 앞으로 천천히 소개하겠지만, 라틴어의 모든 명사는 남성/여성/중성 중 하나로 구분되며, 그 성별에 맞게 인칭대명사를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 feles는 실제 고양이의 성별과 무관하게 여성 명사입니다. 그래서 앞서 고양이를 언급했다면, 그 이후로는 '그것'은 id가 아니라 ea로 표현해주어야 합니다. 고양이 말고도 모든 동물, 사물을 it으로 표기하는 영어와 너무 다르죠?

 

        둘째, 만약 남자들과 여자들이 섞여있는 경우 '그들'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는 ii인가요 eae인가요, ea인가요? 그 경우는 ii로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남성명사와 여성명사가 공존하는 경우에도 ii로 사용합니다.

 

        셋째, 여기서 '그것들'도, '그녀'도 둘 다 ea라는 점을 눈치채셨을 거예요. 그러면 번역할 때, 이 인칭대명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헷갈리지 않냐고요?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이 없는 이유가 이번 포스팅 후반부에 곧 나올 겁니다. 명심해두세요.

 

        마지막으로 복습을 열심히 하신 분들이라면, ‘잠시만요! 지난주에 만나서 반가워라는 표현을 배울 때, Te noscere gaudeo 였고, 거기서 te가 당신을 의미한다 했었잖아요, 왜 이번에는 tu라고 하시죠?’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실 겁니다. 그 이유는 '너를 만나서 반가워'에서의 '너'는 주어가 아닌 (직접) 목적어로서의 당신이었기 때문이에요. 반면 vos noscere gaudeo가 여전히 vos인 이유는, 당신들을 의미하는 vos는 주격과 (직접) 목적격이 일치하기 때문이에요. 각각의 인칭대명사들은 주격과 목적격뿐만 아니라 4개의 격이 더 있으며, 이는 인칭대명사뿐만 아니라, 라틴어 모든 명사도 공유하는 성질입니다. 이는 매우 방대한 분량이니 앞으로 차근 차근히 소개해드릴게요. 

 

        그럼 이들을 주어로 삼아, 이번에 ‘뛴다’라는 동사를 접붙여 볼까요? 뛴다는 라틴어로 curro입니다. r발음, 기억하시죠? 개가 으르렁 거리듯 소리내야 한다는 점 유의해주시며, 다음을 읽어봅시다.

 

Ego curro. (에고 코로)

 

        발음유의) curro에서 cu-에 해당하는 발음은 우와 오 사이의 발음입니다. 쿠로가 아니에요. 저는 이 발음을 오라고 표기하겠습니다만, 가능하면 아래의 링크 §7에서 u의 정확한 발음을 들어보시길 추천해드려요.

http://dauthier.com/latin/easy-latin-method-introduction/

 

        이는 ‘나는 뛴다’ 입니다. 그럼 너는 뛴다는 Tu curro일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라틴어는 특이하게도 동사들이 자기가 묘사하는 주어의 인칭에 맞춰 형태가 바뀌는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앞서 소개한 인칭대명사들이 각각 뛰는 것을 라틴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go curro. (에고 코로)

Tu curris. (투 코리스)

Is/Ea/Id currit. (이스/에아/이드 코릿)

Nos currimus. (노스 코리무스)

Vos curritis. (워스 코리티스)

Ii/Eae/Ea currunt. (이이/에아이/에아 코룬트)

 

        나열한 대로, curro는 주어가 누구냐, 단수냐 복수냐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여섯 개의 형태로 나뉘게 돼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단/복수의 여부를 설명해주고 있어서 동사만 봐도 그 주어를 가늠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라틴어 문장들은, 주어가 생략된 경우가 많습니다. 

 

Curro = 나 혼자 뛴다. 

Curris = 너 혼자 뛴다. 

Currit = 누군가가 혼자 뛰고 있다. 

Currimus = 우리들이 뛴다.

Curritis = 너네들이 뛴다.

Currunt = 누군가들이 뛴다. 

 

        지금 소개한 curro는 현재형이기도 한데, 라틴어에서는 영어처럼 현재 진행 현재 따위의 구분이 없습니다. 나는 뛰고 있는 중이다 와 나는 뛴다 둘 다 curro로서 표현이 가능해요. 자 그럼 이번엔 curro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인칭에 따라 변화하는지 살펴볼까요? 

 

1인칭 단수 curr - o

2인칭 단수 curr - is

3인칭 단수 curr - it

1인칭 복수 curr - imus

2인칭 복수 curr - itus

3인칭 복수 curr - unt

 

        즉 기본 형태의 동사에서 -o를 제외한 부분, 즉 curr가 어근의 역할을 하며 인칭과 단복수의 여하에 따라 -o, -is, -it, -imus, -itus, -unt등 형태가 바뀝니다. 이는 curro뿐만 아니라 라틴어의 다섯 가지 동사 패턴 중, 세 번째 패턴에 해당합니다. 앞으로 표기상 이를 3단 동사라고 부를 것입니다. 

 

        아이고 맙소사, 지금 이 여섯 개 외우기도 벅찬데, 동사 패턴이 네 개나 더 있어? 하지만 너무 겁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형태는 다섯 개나 되지만, 공통점이 많이 겹쳐서 외우시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예요. 일례로 이 다섯 개의 모든 동사들의 1인칭 단수는 모두 -o로 끝납니다. 라틴어 문장도 한국어처럼 대개 동사가 가장 뒤에 오므로, 만약 가장 마지막 단어가 -o로 끝난다면, ‘아 주어는 자신이고, 이건 동사겠구나’하고 눈치채실 수 있어요. 

 

        또 간략하게 첨언하자면, 라틴어에서는 동사를 부정하는 건 정말 간단해요. 동사 바로 앞에 non을 붙이면 영어로는 do not/does not이 됩니다. 나는 뜁니다가 curro였으니, 나는 뛰지 않아요 혹은 나는 뛰고 있지 않아요는 non curro가 됩니다. 참 쉽죠? 

 

        이번에는 다른 3단 동사들을 드려볼 테니, 이 규칙에 맞게 다음의 문장들을 한번 번역해볼까요? 

 

edo (에도) 먹다 

bibo (비보) 마시다 

lego (레고) 읽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레고와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volvo (월워) 구르다 (차 상표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었군요!) 

나는 먹는다. 너는 먹는다. 우리는 먹는다.

 

Edo, Edis. Edimus. (에도, 에디스, 에디무스.)

 

너네들은 마신다. 그는 마신다. 그녀는 마신다. 

 

Bibitus. Is bibit. Ea bibit.  (비비투스, 이스 비빗. 에아 비빗.)

 

그 남자들은 읽지 않는다. 그 여자들은 읽지 않는다. 

 

Ii non legunt. Eae non legunt. (이이 논 레군트 에아이 논 레군트.)

 

그것은 구른다. 그것들은 구른다. 그녀는 구른다. 

 

Id volvit, Ea volvunt, Ea volvit. (이드 월윗, 에아 월운트, 에아 월윗.)

        앞서 소개했던, ea가 그녀도 되고 그것들도 된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었었죠? 아마 마지막 문제를 풀어보시면서 그 의문이 해결되셨을 겁니다. 동사가 단수냐 복수냐에 따라서 형태가 바뀌기 때문에 둘 다 같이 ea더라도,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라틴어의 sum 동사를 살펴볼게요.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인칭 단수 sum (숨)

2인칭 단수 es (에스) 

3인칭 단수 est (에스트)

1인칭 복수 sumus (수무스)

2인칭 복수 estis (에스티스)

3인칭 복수 sunt (순트)

 

        왜 ‘나는 학생입니다’가 'discipulus sum'이고 주어가 빠져 있음에도 '나'라는 의미를 함의할까 궁금하셨던 분들, 이제 감이 잡히시나요? 바로 sum이 단순히 ~이다 같은 동사의 의미 뿐만 아니라 주어가 누군지 또한 내포하므로, 굳이 '나'라는 주어를 다시 명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Nomen mihi est Iōannēss'에서 왜 be동사는 sum이 아니라 est일까 또한 알 수 있으시죠? 바로 est가 묘사하는 주어는 nomen mihi, 즉 나를 위한 이름이고 이는 3인칭이며 단수이기 때문에 est가 되는 것입니다. 

 

        주어 동사 일치는 독자 혹은 청자로 하여금 간단한 문장에서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줍니다. 예컨대 제가 만약 ‘discipulus es’라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화자가 es를 사용했으니 '당신'이 주어인 것이고, 그 ‘당신’은 학생일 것이며, discipula가 아니라 discipulus라 했으니, 그 상대방은 남자구나!’ 까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배우긴 어렵지만 생각보다 효율적인 언어예요. 

 

        이제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인 'Cogito, ergo sum'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왜 이 짧은 세 단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긴 의미를 담는지 살펴볼까요? 먼저 cogito는 생각하다는 동사이며 -o로 끝나는 것을 봐서, 1인칭 단수, 즉 내가 주어겠죠. ergo는 그러므로 라는 접속 부사입니다. sum은 앞서 말했듯 be 동사, 즉 있다, 그리고 역시 주어는 '나'가 됩니다. 여기서는 좀 더 괜찮은 해석으론 존재하다가 되겠죠. 

 

데카르트의 명언인 Cogito, ergo sum이 처음 기록된 책, 철학 원리.
사실 이 명제는 프랑스어로 방법서론에서 먼저 소개되었으나, 라틴어 구절이 더 유명해졌다.

 

        마지막으로 몇 개의 단어를 더 소개하여드릴 테니, 문장을 만들어 볼까요?

 

강아지 = canis, 복수는 canes (남성명사)

고양이 = feles, 복수도 feles (여성명사)

말 = equus, 복수는 equi (남성명사/또 다른 차 상표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군요!)

사과 = malum, 복수도 malum (중성명사)

(남자/남녀 혼합) 학생들 = discipuli, 여자 학생들 = discipulae 

 

사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르지 않습니다. 

 

Malum est. Id non volvit. (말룸 에스트. 이드 논 월윗.)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는 뛰지 않습니다. 

 

(Ego) feles sum. Non curro. ((에고) 펠레스 숨. 논 코로.)

 

 

그 남자들은 학생입니다. 그 여자들은 학생입니다. 그들이 읽습니다. 

 

Ii discipuli sunt. Eae discipulae sunt. Ii legunt.

(이이 디스키풀리 순트. 에아이 디스키풀라이 순트. 이이 레군트.)

 

 

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뜁니다. 

 

Equi sunt. Ii currunt. (에퀴 순트. 이이 코룬트.)

 

단어의 숲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에고(ego)와 이드(id)라는 개념 둘 다 라틴어의 인칭대명사 나와 그것에서 온 말입니다. 특히나 에고는 자아라는 뜻 넘어서, 자부심, 자긍심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죠. 

흐름을 의미하는 current, 커리큘럼 curriculum도 어디서 왔나 했는지 이제 보이시죠? 바로 curro에서 온 말입니다. 먹을 수 있는 이란 뜻의 edible 도 라틴어 edo에서 기인했고요, 술 따위를 마시다, 혹은 정보를 습득하다의 imbibe, 습기를 빨아들이는 이란 뜻의 bibulous도, 음료 beverage도 모두 bibo를 어원으로 둡니다. lego는 읽다 말고도 무언가를 뽑아내다 따위의 의미도 갖는데, 그래서 elect는 선출하다, legible은 (글자 따위가) 읽을 수 있는 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강아지, 고양이, 말 등의 라틴어 단어들은, 영어에서 개의, 고양이의, 말의 와 같은 형용사가 됩니다. canis에서 canine이, feles에서 feline, equus에선 equine 이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미국 수능에 해당하는 SAT에 단골로 나오는 고급 어휘들입니다. 이와 비슷한 라틴어 동물에서 기원한 형용사들은 다음번에 또 기회가 되면 소개해드릴게요. 

 

        네, 오늘은 이렇게 간단한 라틴어 문장 만드는 법과, sum 동사와 3단 동사의 변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목적어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고, 목적어가 포함된 간단한 문장들을 만드는 법을 볼 거예요. 그럼 모두들 그때까지 Va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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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산책

Salvete! Vos noscere gaudeo!

Salvēte! Vos noscere gaudeo!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의 첫 번째 라틴어 산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산책이고 하니, 간단한 인사와 자기소개에 필요한 문장들을 배워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살펴볼 거예요. 마지막으로는 오늘 배운 단어들을 어원으로 삼는 영어 단어들 또한 소개해드릴게요.

 

오늘의 표현

 

어느 나라 말을 배워도, 처음 배워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인사하고 자기소개겠죠? 물론 이 인사를 알아듣고 화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먼저 인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Salve! 

 

만약 인사를 받는 상대방이 여럿인 경우에는 뒤에 -te만 붙이면 됩니다.
 

Salvete!

 

인사를 한 다음에는 자기 이름을 소개해야겠죠?

 

Ioannes vocor.

 

Ioannes는 제 이름 John의 라틴어로 바꾼 것이고요, 여기서 vocor는 ~라고 불리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나는 요아네스라고 불려"이고, 조금 더 정중하고 올바른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Nomen mihi est Ioannes.

 

Nomen은 이름, mihi는 for me, 나를 위한 이란 뜻입니다. est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며, 마지막으로 이름이 붙습니다. 번역하면, "나를 위한 이름은 요아네스 야"라는 아주 이상한 문장이 되지만, 실제로 라틴어에서는 이게 더 자주 쓰이는 표현이라고 하네요.

 

이번에는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법을 배워볼까요? 저는 학생입니다 를 한 번 배워볼게요.

 

Discipulus sum. 혹은 Discipula sum. 

 

만약 남성분이 시라면 discipulus, 여성분이 시라면 discipula라고 하면 돼요. 둘 다 각각 학생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sum은 여기서 be 동사에 해당하고요. 왜 앞에서 be 동사는 est였는데 지금은 sum이었냐고요? 그건 다음 시간에 자세히 소개해드릴게요.

 

인사도 하고 자기 이름도 말했으면, 이제 "만나서 반가워"하고 이야기해야겠죠? 그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Te noscere gaudeo!

 

반면 상대가 여럿인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Vos noscere gaudeo!

 

뜻은 Te/Vos은 당신 혹은 당신들을, noscere는 알게 되다, 알게 되는 것. 마지막으로 gaudeo는 나를 기쁘게 하다. 당신을 알게 되어서 나는 기쁘다. 그러므로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번에는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보는 법을 배워볼까요?

 

Quod nomen tibi est?

 

nomen은 내 이름을 소개할 때, 이름이라고 얘기했었죠? Quod는 which 혹은 who 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mihi가 나를 위한 이었던 것처럼, tibi는 for you, 너를 위한 이란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est는 be동사에 해당하죠. 즉, "너를 위한 이름은 무엇이야?"가 바로 네 이름은 뭐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역시 한국어로 번역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이 표현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해요.

 

마지막으로 작별할 때의 인사는 무엇일까요?

 

Vale!

 

Salvē와 마찬가지로, 여럿에게 건네는 작별에는 -te만 붙이면 됩니다.

 

Valete!

 

마지막으로 그러면 오늘 배운 표현들을 다 복습해볼까요?

 

Salve!/Salvete!                             안녕하세요(단수/복수)

Ioannes vocor.                             요아네스라고 합니다.

Nomen mihi est Ioannes.            제 이름은 요아네스입니다.

Discipulus/Discipula sum.          저는 학생입니다.(남/녀)

Quod nomen tibi est?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Te/Vos noscere gaudeo!              만나서 반갑습니다.

Vale!/Valete!                                다음에 봐요(단수/복수)

 

그럼 이 표현들을 어떻게 발음할까요? 일단 그러기에 앞서 라틴어 문자에는 무엇이 있나 알아야겠죠? 다음과 같습니다.

 

Aa      Bb      Cc      Dd      Ee      Ff      Gg      Hh      Ii      Kk      Ll      Mm

Nn      Oo      Pp      Qq      Rr      Ss      Tt      Vu      Xx      Yy      Zz

 

보시다시피 지금 알파벳의 J와 U, W를 제외한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실 J는 훨씬 이후에 만들어진 글자였거든요. V를 자세히 보면 그 소문자로 u가 적혀있는데, 오타가 아니에요. 당시에는 V가 U와 W의 역할을 같이해서, 둘의 구분이 없었거든요.

 

티투스의 개선문. 가장 윗 두 줄은 주로 SPQR로 줄여 쓰이는데, 이는 로마 공화정을 상징한다.
보다시피 V가 많은데, 이를 U로 읽어야 정확히 발음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글자는 지금 영어 글자와 발음이 같은데, 몇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Cc의 경우는 영어단어 cat, candle, coke 등 ㅋ로 발음합니다. Cinema의 c처럼 ㅆ로 발음해주는 일은 없어요.

Gg 또한 영어단어 gift, goal, gain 등 ㄱ로 발음합니다. Giraffe나 Germany의 g처럼 ㅈ로 발음하진 않아요.

Ii의 경우는 뒤에 모음이 따라오면 y처럼,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i로 발음합니다.

Rr 같은 경우는 마치 개가 으르렁하듯 혀를 떨어주어야 하는데, 이게 익숙해지는 데는 조금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으르르 으르르 하면서 연습해보세요.

Ss도 영어의 sandle, sun등 ㅅ으로 발음합니다. rose 처럼 ㅈ로 발음하는 일은 없습니다.

Tt도 time, tune의 ㅌ으로 발음하지, ratio, vacation 처럼 ㅅ로 발음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Vu의 경우 뒤에 자음이 오느냐 모음이 오느냐에 따라 w처럼 읽기도 하고 u처럼 읽기도 합니다. 조금 더 정확한 발음을 들어보고 싶으신 분들은 다음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지난번에 말씀해드렸듯, 작대기가 딸린 모음과 일반 모음을 이 포스팅에서는 구분치 않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하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wtgvwJljto&t=102s

 

오늘의 표현들을 발음으로 써보면 다음과 같아요.

 

Salve!/Salvete!                             살웨/살웨테

Ioannes vocor.                             요아네스 워코르.

Nomen mihi est Ioannes.            노멘 미히 에스트 요아네스.

Discipulus/Discipula sum.          디스키풀루스/디스키풀라 숨.

Quod nomen tibi est?                   퀃 노멘 티비 에스트?

Te/Vos noscere gaudeo!              테/워스 노스케레 가우데오.

Vale!/Valete!                                왈레/왈레테

 

단어의 숲

 

마지막으로 영어 단어들 중 오늘 배운 어휘를 뿌리로 삼는 단어들을 몇 개 소개해볼게요.

 

Salve 가 인사말인걸 보면 , salv- 로 시작하는 많은 영어 단어들이 평안, 안녕 등의 의미를 담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대표적으로 salvation (구원), salve (연고), salvage(인양)등이 있죠.

 

불리다 vocor의 경우도 부르다 voco에서 파생된 말인데, 역시 이에서 기원한 영어 단어들이 많죠. vocabulary(어휘), convocate(소집하다), vocation 같은 말은 부름 받음, 즉 천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이름인 nomen 은 화학을 하는 분들이라면 분자식의 이름을 정하는 방법으로 Nomenclature라는 단어를 보셨을 거예요. 작명법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noun(명사)도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해요.

 

Discipulus/Discipula는 딱 보면 disciple(제자/사도)와 discipline(규율/훈육)의 어원이 어디서 근거했는지 알 수 있죠?

 

알게 되다 noscere. 이걸 보면 영어 단어들 중 알다, 깨우치다의 의미를 담은 많은 단어들이 no-라는 어근을 공유하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란 걸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notion(생각), notice(알아차리다), ignorant(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notorious 같은 경우도 원래 의미는 '잘 알려진'인데, 지금은 나쁜 의미로 잘 알려진, 즉 악명 높은 이란 의미를 갖게 되었죠.

 

마지막으로 작별인사인 vale는 vale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는데 이는 강하다는 뜻입니다. 마치 작별이 건강해야 돼 하는 느낌 같죠? 여기서도 참 많은 단어가 파생됩니다. value(가치)라는 단어도, 더불어 evaluation(평가)도 이와 뿌리가 같으며, equivalent는 같은(equal)과 강한이 합쳐져 동등한 이라는 의미를, ambivalent는 양쪽/둘(ambi-)과 가치가 합쳐져, 양면가치의 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자 오늘의 라틴어 산책 즐거우셨나요? 다음엔 왜 be동사가 어쩔 땐 est이고, 어쩔 땐 sum 인지. 왜 학생은 남성이냐 여성이냐 따라 다른지. 라틴어의 복잡한 문법 체계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소개해드릴게요. 그럼 모두 다음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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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캔버스에 여백, 2018.

 

 

 

  회화에 있어 여백이란 배경을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캔버스 위 작은 설국雪國을 입맛대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는 반대로 여백이 아닌 부분에 시선을 더 오래 두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실은 퇴근길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읽은 이 글 때문에 갑자기 든 생각이면서, 기어이 ‘상상력을 숨겨두고 살 만큼 마음이 메마른 사람은 되기 싫다’는 거창한 핑계를 내세우며 취미 미술반에 등록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있던 날, 비장한 표정으로 건물 앞에 다다른 나는 화실 문턱을 넘자마자 그만 머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여고생의 마음이 되고 말았다. 12년 만에 처음 잡아본 4B연필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희멀건 손가락과 흰 도화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나는 이왕 철딱서니 없이 시작한 일, 첫 날엔 공쳐도 괜찮다며 철없는 자기위안에 빠져들기로 결정했다. 능청을 떨며 자분자분 주변을 살피니 화실의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제목을 붙이자면 『Hello Strangers』, 91×65.2cm, 캔버스에 유채, 2018. 정도가 어떨까.

 

  한 타임 당 예닐곱 명에 불과한 소규모 클래스였지만, 강사 1명이 2시간 동안 우리 모두의 그림을 꼼꼼히 돌봐주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인이 된 후의 첫 그림에 대한 살뜰한 보살핌을 바랐던 내게 선생님의 깃털처럼 가벼운 눈빛은 그다지 만족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감동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4B연필에 뭐 사연이라도 있어요? 계속 노려보네. 낯설지만, 그보다 더 냉랭한 수업시간의 분위기를 단번에 풀어줄 만큼 다정한 목소리. 나는 그날 화실에서 진이를 처음 만났다.

 

  수업이 끝난 건 오후 4시가 갓 넘어 이른 시각이었지만 목을 축이기엔 커피보다 맥주가 나을 것 같아 근처 호프로 이동했다. 나보다 석 달 먼저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진이는 아버지를 그리는 게 목표라 했다. 가족애가 남다른가보다 싶어 나도 보조를 맞추려 우리 집 식구들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자 그는 술이 들어가서 말이 술술 나오냐며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뺨이 봉숭아처럼 물든 뒤에는 술잔에 술을 따르듯 자기 이야기를 술술 흘렸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올려다본 아버지는 그냥 큰 사람이었어. 물론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경향이 있지만 내 아버지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그래보였지. 왜 그런 형용사 있잖아. ‘크다, 넓다, 단단하다’ 같은 말… 왜 사람이 나이 들면 잔뜩 쪼그라들고, 그래서 불쌍해 보이고, 연민을 자극하는 모든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어서 꼭 콩떡처럼 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아직도 아버지는 그냥 대문자야. 저 혼자 우뚝 선 알파벳 대문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

 

  하지만 자기의 주관을 갖고 붓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는 긴 면이 고작 41센티 정도 되는 화폭 안에도 그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심지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꼬마병정만큼 줄여서 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병정만치 자그마하게 아버지를 그리면 그 옆엔 무얼 둘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단다. 파란 하늘도, 깨끗한 물도, 보기 좋은 꽃도, 건강해 보이는 강아지도, 아내도 아들도 전부 그의 곁엔 놓고 싶지 않다고.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밖으로 나와 발을 내딛은 길 위에서 혀도 다리도 꼬여버린 진이는 비탈길을 비틀길이라 우겨대기 시작했다. 물기 가득한 그의 혀에서 툭 튀어나오는 오타誤打가 마치 내 심장 중앙에 콩 콩 점을 찍는 것처럼 느껴져서, 들키지 않으려 쿵 쿵 큰 보폭으로 앞서나갔다. 나는 진이가 좋았지만 당장 그걸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가 깨닫는 때가 온다면, 서로가 감춰둔 빈 화폭 위에 점 하나 찍어도 웃어넘길 수 있을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틀비틀 비틀길을 걷던 진이는 딱 한 잔만 더 하자며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만 살 거냐고 묻는 내게 속 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소주잔을 앞에 두고 영 횡설수설하던 그는,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고 단단하기만 한 병정 곁에 꼭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면 하얀 눈밭을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진짜 눈을 줘야지. 스키장 같은 데서 퍼다가 부어버리는 건 안 돼. 그건 진짜 눈이 아니니까. 가짜 눈엔 붓질도 안 될걸. 내 여백을 그런 식으로 망칠 순 없지.

 

  그리고 그 위엔 옛날의 공기를, 그 공기 안의 기억과 기분과 마음 따위를 떠다니게 할 거라고.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들이라 물감으로 덧칠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라고. 그래서 그걸 그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비틀길을 넘어 화실에 다닐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언젠가 화실에서 만날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날이 너에겐 축일祝日이겠구나. 하얀 눈밭 위엔 네 숨, 엄마 숨, 날숨 그런 걸 올려둘 테니. 그럼 그 날 비로소 가족이 완성될 테니. 진이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연거푸 세 번이나 원 샷으로 소주를 들이켰다. 절대로 아버지를 따뜻하게 그릴 수 없는 사람. 하지만 그의 곁에 둔 여백을 세상 가장 오랫동안 지켜볼 사람. 나는 진이가 그릴 눈밭의 기온이 영하권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흰 여백에 쌓인 진짜 눈이 녹아버리면 다시 흰 물감으로 눈을 퍼와 노병老兵의 여백을 지켜줄 신병新兵의 모습을 상상했다. 짐짓 하품을 하며 빈 잔 위로 흘린 두어 방울의 눈물과 이게 바로 참이슬이라는 농담을 흘리는 진이의 한 마디를, 나는 그냥 흐르도록 두었다.

 

  어떤 남자에게 여백이란 희미해진 과거의 원망들을 캔버스 위에 까무룩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이슬에 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게 아니라면, 실은 그 흰 벌판을 단 한 번도 가까이에서 마주하지 못한 아버지의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등바등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하얀 욕심 같은 것. 그의 여백이 완성되는 날, 나는 이런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여백』, 333×218cm, 캔버스에 수채, 2018.

 

 

 

 

                                                                  작년 겨울, 그림을 그리던 친구를 보며 썼던 <그 남자의 여백>이라는 글에

                                                                                                                조금 살을 붙여 다시 써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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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산책

Cur Linguam Latinam?

        간혹 영어로 적힌 글들을 읽다 보면, 같은 알파벳이지만 생소한 단어들이 눈에 띕니다.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의 Carpe Diem. 현상 유지를 의미하는 Status Quo. 생물학적으로 사람을 의미하는 Homo Sapiens. 모 대학교의 로고에 조그마하게 박힌 Veritas Lux Mea도 있군요.

 

        교과서를 살펴보면 이런 생소한 말들이 더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를 의미하는 e.g. 는 exempli gratia의 줄임말이며, "다시 말하면"을 의미하는 i.e. 는 id est의 약자입니다. "잘 알아두어라"를 의미하는 n.b. 도 "기타 등등"을 의미하는 etc. 도 모두 nota bene와 et cetera의 줄임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어떤 언어이며, 어쩌다 영어에 이렇게 깊게 뿌리 박혀 있어 가뜩이나 어려운 영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요?

 

콜로세움에서 발견된 라틴어 비석. 지금 널리 사용되는 알파벳은
사실 영어 문자 체계가 아니라 라틴어 문자 체계, 즉 로마자다.

   

        이 언어의 정체는 바로 라틴어. 이제는 역사의 발자취로 사라진 고대 로마의 모국어입니다. 안타깝게도 라틴어를 공식적인 국어로 삼는 국가는 이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나마 바티칸 시국에서는 중요한 가톨릭 의례에서 여전히 라틴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만, 다른 나라의 일상어처럼 자주 사용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금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젠 사용하는 나라도 없는 언어를 왜 배워야 하나요?

 

        어리석게도 저는 이 질문에 대해 굉장히 설득력이 떨어지는 답을 붙잡고, 덜컥 라틴어 공부를 시작해버렸습니다. 예전에 Sogno di volare라는 곡을 접하고 가사가 너무 멋있게 느껴져서 이 언어를 배워야겠다는 열망이 막연하게 생겨났습니다. 마침 그 가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글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접하고, '르네상스 시대라면 라틴어겠지, 다빈치도 라틴어를 했었다잖아'라는 매우 빈약하고 어설픈 역사관으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곡이 이탈리아어였음을 알게 된 것은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고 3일이 지났을 무렵. 하지만 라틴어 교재도 구매한 뒤라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라면 로마의 직계 후손과 같은 존재니까 언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라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가슴 속에 품은 채로요.

 

        물론 저처럼 충동적으로 언어를 시작하시는 분들은 적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 같은 바보가 세상에 여럿이 있으면 큰 일 날거에요.)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언제 꽃을 틔울지 모르는 나무를 키우는 것 같아 오랜 시간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인풋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아웃풋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특히나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처럼 큰 시장을 가진 언어도 아닌, 사어가 되어버린 라틴어는 노력 대비 결과가 영 시원치 않아 보입니다.

 

        사실 누구나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스피킹을 더듬는 분들이라면, 조금 더 유창하게 영어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스피킹에 문제가 없으신 이들은, 이젠 작문도 독해도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이. 어느 정도 영어에 자신감이 붙더라도, 더 잘하고 싶다는 욕구는 계속해서 피어납니다. 왠지 지금 자신의 수준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는 것 같고, 그 경지로 온 몸을 부딪쳐보고 싶은 마음은 아마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친구부터, 미국에서 평생을 지낸 사람들까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밟고 계시다면, 언젠가 부딪쳐야 할 관문은 라틴어라고 저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원어민 수준으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외국인 친구들이 몇 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중 대부분은 자신의 실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탄합니다. "한국어를 더 잘하고 싶어. 신문이나 뉴스,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면 저는 조언합니다. 저는 그러면 한국어를 넘어서 한자를 공부해야 할 때라고. 영어, 더 나아가서 서구 언어에 라틴어의 위치가 그렇습니다. 정말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언젠가는 라틴어를 배워야한다는 것이, 라틴어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의 답변입니다.

 

        언어를 논하는데 문화를 배제할 수 없겠지요. 특히나 문화교류가 활발한 국가들일수록, 언어도 서로를 닮아갑니다. 중국과 오랜 시간 영향을 주고받은 한국과 일본도, 한자는 더 이상 필수 불가분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한자가 불편하다, 외울 것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문화라는 것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오늘부터 이전 문화로부터 독립이야! 이제 한자는 폐지하고 순우리말만 쓸 거야!"라고 할 수 없듯, 문화는 연속체이며 언어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라틴어 역시 이제는 2000여 년의 시간 동안 변화를 축적해 각기 다른 언어로 변모했지만,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등 다양한 서구 언어들이 여전히 눈에 띄게 공통점이 많은 이유는, 결국 이 언어를 쓰는 국가들이 로마 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라틴어를 알아두면 유럽의 다양한 언어들을 배우는데 용이합니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단말마, "Et tu, Brute?"
여기서 Brutus가 아니라 Brute인 이유는 문장 안에서 호칭으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라틴어를 배워야 되는 이유는, 라틴어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구하고 찬란했던 역사를 품었던 로마제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었고,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손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동로마, 이른바 비잔티움은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비잔티움 몰락 당시에는 라틴어를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대 라틴어는, 서로마제국의 몰락 이후에 평민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로망스어로 분화되었으나, 여전히 가톨릭 문화에는 라틴어의 입지가 굳건했었습니다. 중세시대가 끝나고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면서, 인문학과 인본주의로 회귀하는 문화가 전 유럽에 퍼졌습니다. 이 때 라틴어는 다시 한번 크게 각광을 받았으며, 그렇게 명맥을 이어 내려오며 발전된 라틴어는 이제는 수학, 과학, 신학, 법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전반에 걸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미적분을 소개하는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역시 라틴어로 적혔으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기원이 되는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 원리(Principle of Philosophy)또한 마찬가집니다. 생물 분류법을 창시한 칼 폰 린네는 라틴어를 사용해 분류했고, 지금까지도 생물 분류법에 사용되는 역, 계, 문, 강, 목, 과, 속, 종은 대개 라틴어를 기반으로 두고 있습니다. 해부학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명칭들도 라틴어에서 기반했고, 법조계에서도 라틴어로 된 표현들은 여전히 즐비합니다. 이렇게 라틴어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 문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라틴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로 충분했나요? 그래 라틴어가 참 흥미가 가는 언어야, 근데 영 배울 자신은 안나. 굳이 배워야 할까?라는 의문이 드시나요? 부담 갖지 마세요. 저 역시 이제 겨우 라틴어를 배우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배우면서,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복습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저는 지금까지 배운 걸 포스팅으로 정리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선 제 복습을 보시면서 공부하시고, 저는 여러분들께 더 정확한 설명을 드리고자 복습하는, 그런 선순환이 이루어질 것이라 작은 기대를 가져봅니다.

 

        이만하면 개관으로 충분할 것 같군요.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으로 여러분에게 건네는 라틴어로의 초대장을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상의 한계다."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5.6번 명제

 

p.s. 앞으로 포스팅에서 라틴어 단어/문장은 Latin 글씨체로 표기합니다.

p.s.2 라틴어에선 모음 글자 위에 작은 막대기를 달아 (e.g. ā, ē, ī, ō, ū)로 종종 액센트 표기를 합니다. 이에 대한 일관된 자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액센트 표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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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6

허기가 진 인부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나디아는 한 명 한 명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날이었다. 스케베라스산이 펼쳐진 빌구의 성벽에서 인부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막바지 작업에 열중했고 나디아는 빵과 포도주를 챙겨 왔다. 지중해는 늘 그렇듯이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했고 하늘에는 다양한 모양의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햇빛은 수면을 간지럽혔고 물결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인부들은 포도주를 들이켰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양젖으로 만든 치즈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그들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함선이다! 성 요한 기사단의 함선이 돌아왔다!"
인부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디아는 포도주 따르기를 멈추고 성벽 앞으로 걸어갔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 성 안나호의 붉은 십자가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머리속은 오로지 마르삼세트 항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디아는 포도주 항아리를 내려놓고 성벽 아래로 뛰었다. 해안을 따라 달리며 그녀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그녀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나디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항구로 들어섰다. 십자가가 새겨진 기사단 망토를 본 순간 나디아는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다리가 세차게 떨렸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었다. 마중을 나온 기사단원들과 부둥켜 안으며 기뻐하는 발레트를 보자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나디아는 가슴을 움켜잡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지아니는 천천히 땅을 밟았다. 그토록 꿈꿔온 순간이었는데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몰타의 색, 공기, 소리... 그리웠던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지난 5년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그는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발레트, 수고했네.."
"단장님.."
릴라당은 발레트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아꼈다. 주름진 릴라당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발레트는 스케베라스산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처음 몰타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 몰타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
"나디아!"
익숙한 그 이름에 발레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아니는 벌써 저만치 앞서 뛰어가고 있었다. 부두가 시작하는 곳에서 나디아는 몰타를 떠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발레트는 나디아의 얼굴을 보자 세상을 다 담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기사단원들은 발레트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마르삼세트 항은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처음의 설레임과 마지막의 서글픔은 항구에 늘 존재했다. 그러나 기다림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끝내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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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5

며칠 동안 맹렬히 퍼부은 공격으로 튀니스의 길목인 라골레타 항구의 요새는 무너졌고 에스파냐 동맹군은 육지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승리의 기세는 에스파냐로 기울어졌다. 항구는 이제 에스파냐 동맹군의 함대가 장악하게 되었다. 바르바로사는 질겁하며 튀니스 성벽으로 도망쳐 버렸다. 튀니스는 호수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녹색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호수 뒤편에는 길다란 성벽이 펼쳐져 있었다. 에스파냐 동맹군 앞에는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포격은 멈췄다. 해적의 발길이 끊긴 것으로 보아 라골레타는 에스파냐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긴장감을 동반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지상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내미는 뱀처럼 그들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덜컹'
덜그럭거리는 쇳소리에 발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물체가 철창 앞에서 조심스레 자물쇠를 열고 있었다. 모두 떨리는 마음으로 의문투성이 침입자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발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족쇄 찬 손을 꽉 쥐었다. 검은 실루엣이 몸을 굽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망토에 달린 모자를 내렸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어서 여기를 나갑시다."
남자는 빠르게 사람들의 족쇄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작은 쇳덩어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발레트는 손을 움켜 쥐었다 다시 폈다.
"자, 어서 나가야 해요."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발레트는 나가려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왜 우리를 풀어주는 거요?"
남자는 망토의 모자를 올려쓰며 말했다.
"나도 당신과 같은 기독교도요."
남자는 배교자였다. 에스파냐 함대가 라골레타를 공격하자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편을 바꾼 것이었다. 바르바로사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노예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적들은 이미 요새 안으로 숨어 버렸고 배교한 남자는 지하 감옥에 있는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줄 수 있었다. 성벽 밖에는 에스파냐 동맹군이 자리하고 있고 해적들은 성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면 성 안에는 힘없는 주민들 뿐이었다. 발레트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병기창이 어디에 있소?"
해적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필요했다. 포로된 기독교도 숫자가 많으니 무기만 있다면 승산은 있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이쪽이요."
로메가스와 지아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심호흡을 한 후 벽에 붙어 살금살금 걸어갔다. 달빛은 일렬로 뛰어가는 그림자들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 서 있던 해적이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발레트는 손을 들어 뒷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거리 곳곳에 무장한 기독교 노예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이 빛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튀니스 성벽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에스파냐 동맹군은 성벽 위에 높이 들린 등불을 보았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동맹군은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르바로사는 어젯밤, 튀니스를 버리고 알제로 도망쳤다. 성 안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랍 주민들만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 족쇄 찬 노예 신분이었던 많은 기독교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에 취해 있었다. 발레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한바퀴 둘러 보았다. 로메가스는 손을 높이 들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고 지아니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발레트는 손을 펼쳐 보았다. 손목에는 족쇄 찬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멀리서 붉은 십자가 망토를 두른 성 요한 기사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로메가스가 뛰쳐나갔다. 발레트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군대에 이질이 돌아 알제로 도망친 바르바로사를 끝까지 추격하지 못한 카를 5세는 해적을 피해 도망친 하산을 튀니스의 허수아비 지도자로 복귀시키고 에스파냐 수비대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에스파냐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라골레타 항은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함선으로 가득 찼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북아프리카의 메마른 바람을 맞으며 항구를 거닐었다. 저 멀리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보였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바람을 반기며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이, 이게 누구야? 딴 사람이 되었는걸?"
깨끗해진 턱을 만지며 멋쩍어하는 지아니를 위아래로 훑으며 로메가스가 말했다. 옷을 갖추어 입고 머리와 수염을 자른 지아니는 다른 사람같아 보였다. 발레트는 환하게 웃으며 지아니에게 다가갔다.
"푹 쉬면서 영양을 섭취하면 몸은 원상태로 돌아올 거요."
발레트는 지아니의 건강이 염려되었으나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지아니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도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이 들떠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몰타가 바로 앞이에요."
지아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도 바다로 눈을 돌렸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푸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에 몰타가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어요. 그전에 우리끼리 회포를 푸는게 어때요?"
로메가스는 발레트와 지아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로메가스의 얼굴을 본 발레트와 지아니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로메가스도 뒤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구가 떠나갈 정도로 한참을 웃어댔다. 한바탕 웃고 나니 발레트는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세 사람은 십대 소년들처럼 떠들면서 항구의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해군 복장을 한 남자가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트도 그를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으로 새겨진 십자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안드레아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나디아를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성 안나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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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사진

 

사진 Photo

: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것

 

 

제주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보려고 노력해보다가 지금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내 카메라가 고가가 아니기도 했지만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가져도 절경을 사진 속으로 제대로 옮겨오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주도에 내려와서 금방 깨달았다.

                                                                                              - 요조,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中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다만 하루하루, 갈 수 있는 곳에 가서 그 안에 있는 작고 평범한 것들을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때때로 사진을 찍는다. 풍경을 앞에 두고는 인증샷보다 풀, 꽃, 흙, 물 그대로를 담는다. 그렇게 찍힌 사진 속에 내 얼굴은 없지만, 기록 장치에 저장되기 전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가장 먼저 사진을 확인한 게 나니까. 그 정도로 충분하다. 잘 찍힌 사진을 확인하며 그 때 그 순간, 그 장소,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애정을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전부를 옮겨올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 사진은 기억을 소환하는 가장 좋은 매개체가 되어주기에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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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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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을 살고 있던 나는 과연 정상을 위해 도약하는가? 아니면 절벽에서 추락하는가?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걸 꿋꿋하게 보여주겠다고 절벽에서 밀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기분이 수 십 차례나 맴돌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마주할 때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멋대로 사고하는 바가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내 멋대로라도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루니아 누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카일~ 아~”

 

“제가 먹을 수 있다니까요.”

 

“소녀는 언니가 받아주는 걸 먹어야 한답니다아!”

 

“남자거든요!”

 

정말로 중요한 듯하면서도 불필요한 포지션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통 4사분면으로 모든 기준을 나누는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사람의 기준은,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이익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합이 잘 맞아서 행복해야 한다. 반대로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불필요한 사람이라면, 손해만 있고 같이 있으면 매우 불편한 것. 그것들이 각각 1사분면과 3사분면에 속해있다고 했을 때. 루니아 누나의 경우는 확실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받아먹고 있는 케이크가 내 입 안에서 뭉개지는 동안,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빠져나가 여장을 풀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기로 하자.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이가 좋네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비꼬는 말투겠지만, 앞에 루니아 누나와 루비아가 있는 한, 리제로트는 매우 부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홍조를 띠면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세상 하나 없어져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평행세계 모두가 사라지니까, 지금 내 개인적인 감정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참기로 하자.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지금은 케이크를 받아먹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고분고분하게 받아먹는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루니아 누나가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지 않으면, 커다란 사건 하나를 더 만드는 셈이 되니까, 얌전히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사실상 케이크는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또 다른 난장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얌전하게...

 

“자. 아~ 하세요. 안 하면 또 다시 구속을 하고 질질 끌고 갈 겁니다.”

 

“루비아. 케이크를 준다면 준다는 건 고맙지만, 너도 좀 먹는 게 어때?”

 

“저는 이미 충분히 먹고 있습니다.”

 

아니, 절대로 충분히 먹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켜놓고 나에게만 다 먹이고 있잖아. 초콜릿 케이크도 한 조각만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접시만 5개가 쌓였다.

 

그리고...

 

“그 공허한 눈으로 먹고 있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거든! 너 여태까지 케이크조각 하나도 먹지 않고, 나에게만 퍼 먹이고 있잖아!”

 

“퍼 먹이다라는 표현은 너무 남성적이니, 여성스러운 단어로 떠 먹여준다는 표현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말하는 것에 대해 남성적과 여성스러움이 뭐가 중요해!”

 

“그렇게 제가 먹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차라리 저에게도 떠먹여주시죠?”

 

“접시까지 다 넣어줄 테니 입 벌리고 있...크앗!”

 

살기를 감지한 것일까? 루니아 누나는 포크 뒷부분으로 내 이마를 때렸다. 다만, 내 주관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때렸다는 게 아니라, 강타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겠지. 뇌를 흔드는 충격이 아직까지 머리에서 뛰어 놀고 있는 동안, 매우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리제로트와 다른 손님들.

 

이게 뭐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상황인가?

 

“그래서 리제로트 양은? 우리 카일의 뭐죠오?”

 

“은인이에요. 적어도 제가 레이베리아로부터 살려줬죠. 그 이후에는 뜨거운 밤을 보낸...”

 

“그 어느 누구도 살려준 은인과 뜨거운 밤을 보내지 않아. 알아들어?”

 

“절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

 

“헛소리 말고! 제대로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소리지르는 것도 목에 한계가 있는데, 조만간 득음을 할 지경이다. 한숨이 기가 막히게 튀어나가는 동안 리제로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은인에게 암살하려고 시도하잖아요?”

 

“네가 아이리스를 인형으로 만든 게 시작지점이잖아.”

 

“그때는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귀여우면 모두 인형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한숨이 한 가득 나오게 되는 답변을 들었지만, 리제로트는 잡화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인형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감도 살짝 맺히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일을 하기 전에 리제로트가 오히려 굴복하게 되지 않을까?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내가 걱정을 따로 안 해도 될 정도라니.

아니지. 내가 걱정을 끼치는 입장이었네.

 

“인형으로 만드는 게 무슨 재미가 있나요오?”

 

“그야 제 말에 복종하잖아요.”

 

잡화점에 돌아가기 전까지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을 것 같은 루니아 누나가, 리제로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굴러오는 질문을 보기 좋게 받아 친 리제로트의 대답에, “흐응~ 그렇군요오.”라고 입을 열었다.

 

“말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잘 알고 있는지요오?”

 

“말에 복종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제 명령에...”

 

“아뇨오. 당신은 타인의 진심을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이에요오.”

 

얼어붙기 시작했다.

루니아 누나의 분위기는 항상 극과 극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럴 때마다 항상 무서워 죽겠다. 천진난만하고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바보 같은 일을 벌여도, 루니아 누나의 본 모습을 보통 사람이 견딜 일은 없으니까.

 

리제로트가 쥐고 있던 컵이 살짝 떨기 시작했다.

 

“사람의 진심이 왜 필요한 거죠?”

 

“당신의 그 나락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함이죠오.”

 

나락 같은 삶이란 소리에 또 다시 리제로트는 흠칫하고 놀란다. 옆에 있던 월터가 그에 동요했는지, 얼어붙는 살기가 우리 주위를 몰아치기 시작했고, “월터. 가만히 있어.”라며 리제로트의 당돌한 한마디가 분위기를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조만간 싸움이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글레이프니르를 꺼낸 루비아 씨가, 다시 상황을 보고 서서히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보다 그거 주머니에서 꺼내는 거였어?

 

그 밧줄이 그렇게 작은 주머니에 다 들어가던가?

 

“루비에몽이라고 불러주시죠.”

 

“남의 생각을 읽고 거기에 맞게 태클 걸어달라고 자신을 꾸미지 말라고!”

 

저럴 때마다 내 정신이 대나무 헬리콥터를 타고 저 멀리 날아간다. 그러나 내가 루비아와 대화를 주고 받아도, 루니아 누나와 리제로트는 서로 공방전을 하느라 바쁜데, 자세한 이야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달그락!

 

“웃기지 마세요! 당신이야 말로 저에 대해 뭘 안다는 거에요!”

 

“저는 카일의 누나이기 이전에 기사단장이랍니다아. 많은 사람들을 봐오면서 이끌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요오. 당신도 근본적으로 착한 아이이긴 하지마안, 우리와 함께 걸어가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을 버려야 해요오. 바로 저 뒤에 있는 집사 인형도 같이 말이죠오.”

 

태연하게 자신의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 그걸 부정하는 리제로트 사이에는 불길한 기운이 맴돌기만 했다.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조금 더 조용하게 이야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일하는 종업원에게 한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그걸 줄이면 갑분싸가 됩니...”

 

“제발 내 생각 읽고 멋대로 입 열지 말아줄래!”

 

루비아는 내 생각 하나하나 전부 다 읽는 게 가능한 건가? 호문쿨루스의 특수능력이 언제부터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게 되었을까? 티르야 말로 최고의 연금술사다운 제작솜씨다.

 

“이건 티르와 관계 없습니다.”

 

“제발 같은 태클 3번 걸기 전에 자중할 수는 없는 거냐?”

 

“없습니다.”

 

“자중하라고!”

 

속도가 빠른 공방전은 이곳도 마찬가지. 각기 다른 토론대회나 만담대회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이쯤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게다가 나는 중대한 사명이 있으니, 이런 한가로운 곳에서 케이크나 강제로 받아먹으며 앉아있을 위인이 못 된다. 애초에 여장 당한 상태인데, 그 옷까지 저주받아서 벗지를 못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저주를 풀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단 말이지.

 

“저는 슬슬 자리에 일어나도 될까요?”

 

“안돼요오. 카일은 누나와 백장미를 촬영해야 한다고요오.”

 

대체 왜 백장미를 찍자고 하는 거냐.

 

“백장미를 찍기 전에 전 이 옷의 저주부터 풀고 싶다고요. 일단 저주를 풀어야...”

 

“다른 여성의류도 입기 때문이죠오?”

 

“아니라고!”

 

도대체 어떤 남자가 다른 여장을 하기 위해 저주를 푼다는 건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루니아 누나의 사고방식은 정상범주에서 벗어나있다. 결국 비정상중의 비정상은 루니아 누나인...

 

-파악!

 

“켁!”

 

뭔가가 빠르게 날아와 내 머리를 힘껏 때렸다. 가만히 보니까 별이 5개정도 떠있는 걸 보면, 어디 돌침대가 생각나는데...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는 언제까지나 정상이랍니다아. 오히려 카일이 비정상이 아닐까요오? 자신의 귀여움을 멀리 퍼트릴 생각을 하지 않고, 숨기시려고 하시다니이...혹시! 즐길 사람만 즐기라는 뜻의 배려인가요오?”

 

“호수 같은 배려 좋아하시네! 어떻게 자매끼리 남의 생각을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에 능통한 것부터가 비정상이거든요!”

 

애초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비정상이라는 소문이 들리긴 했는데, 루니아 누나 또한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 모두 주변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보면, 거기를 멀리하고 집을 가까이 하는 편이 좋다.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가까이 해도 좋답니다아~”

 

“내 생각 좀 그만 읽어!!!”

 

본래 독백은 남들에게 읽히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그전에 리제로트에게 무슨 의도로 그런 말 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싸우자는 의도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싸워도 득이 없는 건 저 소녀도 잘 알고 있답니다아. 다만, 저는 카일에 대해 1%라도 위험을 없애기 위해 그리 말한 것이지요오.”

 

나를 생각해서 말했다는 말은 진심이겠지.

이전에 리제로트는 나를 납치했던 전과가 있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위험이 되지 않도록 인형들을 포기하라는 것. 아마 인형을 만드는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거니까, 자신의 초능력을 포기하라는 셈이 된다.

 

내가 알던 인형사 사브누아는 영혼을 집어넣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리제로트는 인간의 영혼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영혼이 없을 때야 말로 가장 순수해! 그러니 귀여운 아이들을 순수한 채로 남아야 한다고!”

 

영혼이 없는 게 순수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릇자체가 보기 좋다는 건가?

 

“그건 꽤 기발한 헛소리네.”

 

저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자동반사마냥 튀어나갔다.

 

“영혼이 없는 상태가 가장 순수하다고? 그래서 내 딸을 그렇게 만들었냐!”

 

그저 본능적으로 외친 소리. 다른 시간대일지 몰라도 카렌을 지키지 못했던 무기력한 자신. 그리고 엉망이 된 카렌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분노가 리제로트에게 단번에 몰아쳤다. 오늘의 일을 과거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 분노에 반응한 마나들이 주변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넌 정말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의뢰를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있지만, 말 한마디를 듣고 내가 정말 무르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잘못하지 않았다는 듯한 그런 소리를 한번만 더 하면...

 

내 분노를 마주한 리제로트에게 성큼 다가가선 나지막하게.

그리고 최대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내 모든 걸 걸고 너 하나만큼은 꼭 죽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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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 회사는 쉬는 날이 없을까요?

요즘은 그나마 페이스 조절을 하는 거 같았는데,

일정이 당겨진 거 비해, 다른 업체에서 아직까지 일할 준비가 안 되었다니...

 

조만간 백수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