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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쥐들의 도시

 

또 하나가 죽었다. 죽음은 차례차례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서서히 죽었고, 다른 이는 급히 숨이 넘어갔다. 죽음은 변칙적이어서 그들은 괴로웠다.
 쥐. 쥐 떼가 몰려와 곳곳에 파고들었다. 구석에, 틈바귀에, 저장소에, 우물에. 쥐들은 차츰 대담해져 치즈를 실은 수레나 과일 좌판에도 출몰했다. 사람의 눈에 띄이면서도 태연했다. 쥐들은, 차선책으로 풀어놓은 고양이를 물어죽였다. 새끼들은 쥐에게 몸피에서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쥐들은 늘어났고 죽음도 넘쳐났으나 시장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사병들로 하여금 성문을 삼엄히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저택의 문을 꽁꽁 잠근 뒤 엄격히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에 한해 접근을 허락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종말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종말론자들은 곧 죽어 연설은 끊어졌지만, 다음 날이면 새로운 미친 자가 나와 같은 내용을 외쳤기에 끝나지 않을 노래 같았다. 시장은 그들마저 죽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듯 잠잠했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안위 뿐이었다. 
 도시는 고립되었다. 
오랜만에 저택을 찾아온 이는 왕의 특사도 구걸하러 온 거렁뱅이도 아니었다. 그가 걸어가자 덩치 큰 잿빛 쥐들이 꼬리를 흔들며 재빨리 흩어졌다. 가축과 사람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들은 파먹힌 과일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는 그대로 걸어가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보초병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는 병사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병사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시장은 무엇이든지 불신했다. 불신이 그의 큰 자산이었다. 그는 무수한 사람을 배신하고 속여 재산과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타인 또한 믿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대상은 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갑작스레 등장한 이상한 청년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청년은 그가 본 인간들 중 단언컨대 새로운 유형이었다. 
"뭐야, 어떤 새끼가 저거 들여보냈어?"
시장은 대충 가운만 걸친 채 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그렇게 호통을 쳤는데 정작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년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시장에게는 그 태도마저도 거슬렸다. 
"야, 저거 빨리 안 끌어내고 뭐해? 내 집에 웬 천한 광대 새끼를 들여보내다니 니들 제정신이야?"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장을 막은 것은 순간적으로 눈앞을 휙, 스쳐간 커튼 같은 검붉은 형상이었다. 시장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유리잔이 손에서 맥없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숴졌다. 고용인들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받치고 입가에 액체를 흘러넣었다. 
"그동안 피로와 압박감이 심하셔서..."
한명이 조심스레 그렇게 말했고 시장은 흐려진 눈으로도 투명한 잔 너머에 비친 청년의 형상을 보았다. 언뜻 본 그것은 산불처럼 밝게 타오르며 일렁이는 샛노란 불길이었다. 잔이 입가에서 떨어지자, 청년은 이전과 다름없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시장님께서 보신 것은 헛것이 아닙니다."
검녹색 눈의 청년이 말했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붉은 장막을 보셨지요. 그는 쥐들의 제왕입니다. 쥐떼를 몰고 다니며 질병을 퍼뜨리는 악의 징조입니다."
"이런, 씨..."
시장은 이마를 쓸며 난색을 표했다.
"그게 지금 내 집에 들어온거야? 자네도 무슨 대책이 있으니까 날 보겠다고 한거 아냐.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줄테니 일단 날 살려주게. 난 여기 시장이야. 자네가 요구하는 건 전부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찾아왔으니까요."
청년은 거무스름한 얼굴을 숙여 그렇게 말하고는, 접견실에 저택의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그가 펼친 것은 마법도, 의술도 아니었다. 음악이었다. 
 시장의 태도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는 시장의 권위에 걸맞는 의복을 갖추고는 즉시 성대한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했다. 
"내가 자네를 잘 몰라 실례를 했네. 도시를 질병으로 부터 구완해야 할 의무감과 부담감은 나날이 나를 짓밟고 갉아먹었다네. 그러나 이제 자네가 왔으니 나도 시민들도 한 시름 덜었네. 수많은 목숨이 자네 한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모쪼록 최선을 다해주시게."
시장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 사람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눈으로는 줄곧 청년을 훑어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청년은 시장의 마음을 적잖이 풀어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쥐들을 밖으로 몰아냈으니 그들의 제왕은 힘을 잃고 쥐 떼를 좇아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시장님의 저택은 당장에는 역병으로부터 무사할 것이나 바깥의 도시는 그렇지 못하지요. 제게 나흘의 기한을 주시면 도시 곳곳에 웅크린 병의 씨앗을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시장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청년이 쥐들을 모두 퇴치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양의 돈을 요구했을 때도 기분좋게 승낙했다. 
 쥐들의 왕국에 구원자가 납시었다. 골목에서 광장까지, 그가 도시를 누비며 펼친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하잘것없는 피리 소리였을 뿐인데, 쥐들은 그 소리에 홀린 듯이 하릴없이 이끌려가다가 강가에 몸을 던졌다고, 그 광경을 목격한 이는 그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단번에 찾아온 평화에 기뻤고 일견 얼떨떨했다. 그러나 쥐를 퇴치하는 대가로 시장이 그 이방인에게 천 냥이나 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시청 앞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깨끗해진 광장에는 말쑥한 차림새의 시의원들과 시장이 엄숙히 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소!"
한 남자가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전염병 때문에 가축도 식량도 전부 동이 나버렸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판에 시장 당신은 우리의 목숨을 놓고 수상쩍은 떠돌이 외국인 하나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렸단 말이오? 우리가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비쩍 꼴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놓아 시장의 탄핵을 외쳤으나 시장은 이를 타개할 간단한 대책을 세워놓았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검은 피부와 외지의 억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떠맡겨진 약속의 짐을 내던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일단 가장 쉬운 대책이 제안되자 그들은 만장일치의 동의를 보였는데 사뭇 오랜만의 일이었다. 시장은 조소 어린 거만한 자세로 청년에게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는데 쥐들이 사라진 거리는 깨끗이 닦여 윤기가 흘렀고 건물은 위용이 넘쳤다. 꾀죄죄한 아이들이 쥐처럼 빠르게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수레를 끌던 노인은 바퀴가 죽어 널부러진 돼지의 시체에 걸렸는데도 제자리에서 멈춰선 채 나아가지 않는 수레를 밀고 밀기만 했다. 
"좋은 경험으로 여기도록 해. 이 또한 신이 정하신 운명이니,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똑똑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겠네. 그 꼬라지로 와서 천 냥을 요구하다니, 그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 아니던가. 주제 파악을 하도록. 이만."
 시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고 경비병은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청년은 시장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시장은 커튼을 내려 청년의 시야를 막았다. 마치 배신을 기다려왔다는 듯, 숲의 가장 깊은 구역을 닮은 눈 속에 환한 불빛이 켜졌다. 모멸 당한 청년은 등을 돌리며 모자를 깊숙히 눌러 그 빛을 삼켰다. 도시의 씨는 모조리 말라 버릴 것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어리고 약하고 무방비한 존재들은 쥐들이 그러했듯 정체불명의 음악에 이끌려 물가로 하나하나 춤추듯이 행진하다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질 것이었다. 
 사람들은 허둥지둥대다가, 전말을 알아차리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하늘을 저주하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이제는 사라진 이방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분노는 시장에게 향했다. 갓난아기를 제외한 아이란 아이는 모두 사라졌다. 골목의 거지에서부터 시장의 자식들까지 하룻밤만에 연기처럼 홀연히 증발했다. 시장은 자신도 같은 피해자일 뿐이고 시민들 모두가 이미 동의한 사안이 아니냐며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분노로 눈먼 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시장은 쥐의 비가 쏟아지는 꿈에 시달렸다. 쥐들이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며 지붕과 바닥과 기둥에 부딪혔다. 쥐들은 금화를 갉아먹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건물을 갉아먹고, 치즈와 사과를 갉아먹고, 사람을 갉아먹었다. 열 살 난 아들은 그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슬프게 뜬 채 시장을 바라보았다. 쥐들이 들불처럼 번져 아이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의도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저주가 아니었어. 그 놈이 찾아왔던 게 저주였던거야. 쥐들의 출몰은 그 놈의 출현을 위한 전조에 불과했어!
시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창 너머 떠오른 달은 너무도 깨끗하게 보였다. 잿빛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날의 조용한 도시 속 사람들은 슬픔에 지쳐 미적거렸다. 시장은 이불을 제치고 숨겨왔던 상자를 꺼내 열었다. 칼날은 새것처럼 순정하게 빛났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죽거나, 청년이 죽거나 , 그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계획이었다. 오늘 밤에 끝낼 생각이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는 침묵을 원했지만 넌 그보다 더한 것을 빼앗아갔다. 쥐들은 사라졌지만 도시는 생기를 잃었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네가 인간이든, 요정이든, 오늘 밤에 결판을 내야겠다. 그 이상한 음악으로 날 쥐새끼들처럼 만들어보라구.'
 시장은 청년이 찾아온 날 보았던 붉은 장막 같은 형체를 기억했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청년이 쥐의 왕이니 역병이니 했던 그것을 떠올리자, 무섭기는커녕 기묘한 쾌감을 동반한 저항 욕구가 솟았다. 가까이에 두면서도 결코 소중함을 몰랐던 보석이 휘발해버렸다. 그것이 사라진 이상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시장은 칼을 품 속에 감추고 검은 밤 사이를 내달렸다. 아무도 모르는 구멍을 빠져나왔을 때, 때모를 소나기가 내렸고 천둥이 으르렁댔다. 피부를 때리는 빗발의 소음 틈으로 찍찍대는 쥐 소리가 들렸다. 쥐들의 제왕은 창궐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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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5

발레트는 모래색 돌로 차곡차곡 올려진 건물 벽을 손끝으로 만지며 걷고 있었다. 처음 몰타에 발을 내딛던 날이 떠올랐다. 지중해 한가운데 솟은 작은 도시는 로도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벽에 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타로 들어왔고 자신도 그들과 같이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이 벽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발레트는 모래색의 돌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뜻밖의 목소리에 시간은 현재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영롱한 초록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본래보다 밝게 보였다. 나디아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로 발레트에게 걸어왔다.
"나디아!"
발레트는 벽에 올렸던 손을 내려 허리춤에 찬 칼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아침 일찍 어딜 가는 거에요?"
"성당에요."
나디아는 눈을 크게 뜨며 발레트를 보았다. 그녀는 발레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도 성당에 가는 길이에요."
발레트는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어 나디아에게 길을 내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갖고 있었다. 골목은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고 소리는 리듬이 되었다. 리듬에 따라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이따금씩 마추치는 시선은 미소를 불러왔다. 모퉁이를 돌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빛에 의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건하고도 평화로웠다. 발레트는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광장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아름다웠다.
"아침의 광장은 늘 황홀해요."
나디아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성당으로 향하는 똑같은 길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순간이 특별했다. 발레트도 나디아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저 편으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웠다.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주위에 감탄하며 성 바울 성당으로 이끌려갔다.


성당 앞에는 며칠 전과 같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발레트는 마차를 힐끗 보고는 나디아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성당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군가와 얘기 중이던 피오르 신부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부 옆에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로 올린 여인이 있었다.
"오, 나디아."
피오르 신부는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베일을 쓴 여인은 발레트와 나디아를 보자 얼른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감추더니 신부에게 인사한 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방금 지나간 여인은 보키아경의 부인이 아닙니까?"
발레트의 물음에 신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발레트는 빠른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만!"
여인의 등 뒤로 발레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을 쓴 여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보키아경에 관해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보키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여인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발레트도 걸음을 늦췄다.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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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7

590

 

 

 

그나마 다행이라면 평생 여장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 결국 불행해지는 건 잡화점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나의 거주지라는 것은 또 다른 태클의 시작이었으니까.

 

“주인은 짐의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가? 흐응...짐에 대한 애정이 식었구나.”

 

“남에게 저주를 씌운 것이 어떻게 애정의 표현으로 될 수 있는지 서술해보시죠. 5점을 드릴 테니까.”

 

“1번이니라.”

 

“객관식 아니라고!”

 

애정이 식었네 뭐하네 하는 주제에, 결국 검은 고양이 상태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레시아. 13대 마왕이고 타락의 마왕이면서, 결과적으로 내 사역마였으나 지금은 결혼을 했으니까 부부관계인데. 솔직히 어떤 부부가 남의 옷에 저주를 퍼붓냐고?

 

아마. 나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레시아의 입장에서는 나는 좋은 마나 창고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좋은 장난감 하나라고 취급하겠지.

 

“그렇군. 주인은 그 옷이 귀엽지 않아서 해주를 한 것이로군.”

 

“아니. 남자가 여장을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이미 글러먹었다니까요.”

 

“뭐 아서라. 짐이 조만간 더 귀여운 옷으로 주인에게 선물할 테니 말이다.”

 

“아 글쎄! 여장 때문에 벗어 던진 거라니까요!”

 

이렇게 소리를 쳐도 레시아는 레시아 나름대로만 생각을 하는 중이다. 어깨 위에 올라온 하얀 올빼미는...

 

“마스터에게 입혀야 할 옷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여장이 아닙니다.”

 

“그래도 시나 밖에...”

 

“저처럼 하얀 날개를 단 천사복장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왜 그런 걸로 싸우는 건지 이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태세전환이 우디르를 넘어 드랙스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제발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아줄래?”

 

잡화점 안에 돌아가도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 그래도 밖에서 골치 썩는 것 보단, 여유를 가지고 조그마한 트러블에 대응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잡화점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과 정신의 피로를 달래보려고 했으나, 어린 아이처럼 달라붙는 레시아와 시나에 의해 편하게 쉰다는 단어가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나중에 지구로 모여서 롤링발칸이라도...아니, 너무 갔으니 그만하자.

 

“뭐.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있게만 해준다면 여장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인기가 은근히 좋다. 아니, 좋아도 너무 좋다. 어째서 연관되는 사람들마다 주인을 원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일을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건 사람의 호불호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와 위치가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일이다. 잡화점의 주인은 기괴하게도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긴 하는데, 잡화점이라면 보통 진귀한 물건이나 대규모의 잡화물품을 의뢰 받는 건 줄 알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해결사나 잡일을 처리하는 1회용 노동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그래도, 의뢰의 보상이 어째서인지 백장미의 매출을 못 따라가고 있는 아이러니함마저 의구심이 들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하기 위해 나를 지목하는 사람과 몬스터가 많이 있었다.

 

과거에 실베스 씨가 기괴한 청혼을 위해 도와달라는 말부터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할 거니까. 리제로트의 의뢰만 처리하고 돌아가죠.”

 

“그리고 그녀도 잡화점에 들어오는 겁니까? 마스터?”

 

“아니. 리제로트까지 과거로 데려갈 이유는 없지. 그런데, 지금 당장 레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서에서 풀려난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초능력자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지만, 레인의 경우에는 감춰주고 숨겨주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다른 곳에서 아리엘이 터벅터벅하고 걸어왔다.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진 키가 크지 않은 상태. 아니...오히려...

 

“왜 키가 작은 거냐?”

 

“무슨 소리에요? 제 키는 원래부터 작았다고요? 아담한 사이즈를 좋아한다는 카일 씨의 성향에 맞춘 건 아니라고요?”

 

“듣기만 해도 오해 수치가 100정도 쌓일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그리고 미묘하게 츤데레 캐릭터를 따라 하려고 들지도 말고. 너의 캐릭터는 애초에 뭔지 나조차 이해가 안 되니까.”

 

“전에는 마신을 한번 했었죠.”

 

“그런 거 말고!”

 

자주 못 봐서 그런 건지 몰라도, 사람이 성장을 한다면 키가 크고 있다는 걸 느껴야 하는데, 아리엘의 경우에는 키가 작은 건지 아니면 저게 성장한 건지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보다 마왕님. 여신님. 제 자리가 없잖아요!”

 

“그보다 신랑. 내 자리는?”

 

루시피나는 요리하다 말고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내가 교제를 한다고 했을 때 정상적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늘씬한 미녀. 레드 드래곤의 일족임과 동시에 첫 혼인 대상자다.

 

어른스러운 면이라기보단 다정다감한 누나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평상시의 모습이고, 루시피나가 화를 낸다면 그것보다 더 살벌한 상황은 없다. 그나저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말이 들어야만 했을까? 아니, 그보다...

 

“모두가 그렇게 몰려오면 제 입장이 어떻겠어요?”

 

“행복하지 않는가?”

 

“행복이기 이전에 힘들다고요!”

 

모든 남자들이 그런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미녀나 미소녀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달라붙는 상황이 현실로 찾아온다면, 사실상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소리다. 최소 0.3초 동안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는데, 과연 저 사람들이 다 달라붙으면 나는 숨이라도 쉴 수 있는가?

 

생존부터 걱정하는 내 입장에선 행복하기 이전에 살아 돌아갈 수 있느냐가 더 걱정이다.

 

“그래도 짐의 취급을 공기로 하는 것보다 좋지 않는가? 아니면 뭔가? 짐이 귀여운 여자아이가 되어 공기취급으로 되는 걸 원하는 것인가? 역시 주인은 은팔찌를 차야 하는 인물이로다.”

 

“아뇨. 언제 공기취급을 했는데요? 제가 레시아를 공기취급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마스터. 저희들의 출현이 어째서 잘 일어나지 않는지 설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그 기괴한 여장만 시키지 않았더라면, 나의 행적은 잡화점 내부로부터 시작했겠지!”

 

일어날 때 개운하게 일어나면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평화로운 나날을 기리고 있다만, 요즘 들어 자고 있는데 계속해서 결계가 깨져나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부부인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초죽음 상태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늘도 눈을 떠보니 여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라는 상황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야.”

 

“맞습니다. 마스터.”

 

“아니라고!”

 

하긴 이미 여긴 평범이라는 말이 치고 들어갈 수 없는 건가? 내 인생에 평범이라는 단어와는 더 이상 견우와 직녀마냥 만날 수 없는 건가? 아니, 만날 수는 있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에 불과하나?

 

혹은 내가 평범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진실을 가지고 있거나, 나는 평범할 수 있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말장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결국 평범이라는 단어와 사이 좋게 지낼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한숨을 접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주인에게 밀착하려는 자들이 많은가!”

 

“어째서긴요. 레시아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선 정리가 필요하겠다!”

 

뭔가 또 난장판이 될 징조가 보인다. 안 그래도 리제로트의 의뢰를 빨리 해결하고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레시아가 저러면 의뢰는 과연 언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뭐 어쩌시려고요. 1주일마다 달라붙을 수 있는 사람들을 지정할 겁니까?”

 

“아니. 짐이 주인에게 달라붙어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짐이 주인의 곁에 없을 때는 그 누구도 달라붙지 못하도록 하겠노라!”

 

너무 당당한 나머지 이 고양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못 알아 들을 지경이다.

 

“말도 안 됩니다. 냥캣. 그런 억지를 부리기 전에 냥캣의 인성을 다시 되돌아보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짐은 본래 마왕이니라!”

 

고양이와 올빼미가 또 한바탕 싸우고 있는 동안, 방 안에서 짜증나는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지 않는가! 모처럼 첩이 자고 있는데...어라? 카일이여! 언제 온 것이냐?”

 

성인이라고 보기엔 한참 힘든 외형이지만, 연한 초콜릿 피부를 가진 소녀는 사실상 어마어마한 신급의 카테고리로 들어간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을 무렵.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흔들의자가 더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무게가 늘어났으니...

 

“아아.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첩은 언제나 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빛 잠옷이라는 게 그리 귀엽지는 않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팍에 파묻었다.

 

“자, 잠깐만! 허무의 공작! 짐이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뛰어들다니!”

 

“어라? 아까 마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왕님께서 붙어계실 때는 그 누구도 상관없다고.”

 

“아직 개정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만간 세린에게 찾아가 내 개인적인 방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보다, 잡화점의 규칙에 개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잡화점 규칙에 나에게 달라붙는 규칙을 적는다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건 없지만, 애초에 주인은 나라서 내가 직접 개정하지 않는 이상, 그런 바보 같은 규칙은 늘어나지 않는다.

 

잠깐? 규칙이라?

 

“맞아! 규칙! 규칙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었어!”

 

“마스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뜬금없는 나의 외침에 시나가 당황한 듯 묻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규칙을 바꿀 수 있으니 솔직히 내가 인간이든 아니든, 마지막 항목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에 인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저 어떤 사람이라는 말을 제대로 바꾸기만 하면, 내가 인간을 초월하든 말든, 잡화점의 주인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하길래,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했는데, 그냥 잡화점의 규칙을 잠깐이나마 바꾸면 되는 거였어.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네. 이제 리제로트의 의뢰만 어떻게 해결하면 과거로 그냥 돌아가자고. 미래에 더 있는 건 위험하니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마스터.”

 

“응?”

 

“마리아와 얼마나 붙을 생각이십니까?”

 

사, 살기!?

 

작은 올빼미에게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이전에!”

 

나는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안 그러면 레시아와 작정하고 또 다시 마법을 날릴 테니까.

 

“지금 나가서 할 일이 있어요.”

 

“안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랑을 증명해보거라!”

 

“뭘 증명해요!”

 

“그렇다면 사랑의 저주를...”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잖아!”

 

결과적으로 다시 저주받은 여장을 당하기 전에, 모두를 설득하는데 애쓰고 모두가 진정할 때쯤 시간은 흘러 새벽에 이르렀다. 언제나 규칙에 따라 잡화점 운영을 하고 있는 나는, 레시아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리제로트라는 자는 전에 주인을 납치한 자가 아니더냐? 그런데 이번엔 목숨을 구해줬으니 도와달라는 건가?”

 

“뭐. 그런 거라기보단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엘 샤다이를 말하는 건가?”

 

“괜찮아. 문제없어. 라는 대사를 하기 싫으니까 이상한 요소를 가져오지 마시죠.”

 

검은 고양이에서 가지런히 앉아있는 여성으로 변한 레시아. 지금 상태에서 정신방어가 약한 사람이 본다면 죽거나 심한 경우 침을 흘린다고 하는, 변칙적인 패시브를 지니고 있었으나, 잡화점 멤버에는 정신방어능력이 모두 뛰어났으니 발작을 일으킬 일은 없었다.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스윽 하고 쓸어 내리며 팔짱을 끼고 있는 마왕. 그러면서도 위압감이나 카리스마는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칠흑의 드레스로 무장된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

 

“그래도 그런 장비는 괜찮은가? 에서 그런 말장난은 괜찮은가?로 변환하면 써먹을 수 있지 않는가?”

 

는데...진지하게 생각한 것이 겨우 그거라는 생각에 내 자신이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런 생각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뇨. 못써먹어요.”

 

“써먹을 수 있노라!”

 

어디까지 우기는 거냐.

 

“리제로트가 뭔가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유랑극단이건 레인에게 암살당하던 둘 중 하나는 못 막을 거 같네요. 잡화점 안이 가장 안전하지만...”

 

“유랑극단의 신분이 있으니 이쪽에서 보호하는 것은 무리로군.”

 

분명 또 “주인은 어린아이가 그렇게도 좋은가!”라고 말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기대한대로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서 레시아가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 상황에선 유랑극단과 선전포고를 한 이상. 리제로트를 통해 이곳의 위치가 들킬 수 있어요. 기껏 가짜 좌표를 깔아놔도 포위망이 좁아지는 판국에, 트로이목마처럼 들어오는 날엔 끔찍한 경험을 하겠죠.”

 

“맞다. 그 뼈다귀 샌...”

 

“제발 부탁인데 그 이상 다른 요소를 가져오면 아이언 클로부터 날릴 겁니다. 그러니 그만하시죠.”

 

진지한 이야기에 ‘골’판지 같은 개그가 나오면 진심으로 때릴 테다.

진정한 양성평등주의자는 여자에게도 드롭킥을 선사할 수 있는 신사이지 않는가?

맞을 짓을 하려고 매를 벌면 사랑의 매로 다독거리면 된다. 물론 그 사랑의 매가 아이언 클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마스터.”

 

눈빛보다 더 새하얀 소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시나? 자고 있는 중 아니었어?”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 깼습니다.”

 

분명 잠이 많긴 하지만, 새벽에 이야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깨어날 줄은 몰랐다. 언제나 내 몸 속에서 동화를 한 체 휴식을 취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경우는 전혀 없을 텐데.

 

“흥! 그대로 영원히 자고 있지 그런가? 비둘기.”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 입니다. 냥캣.”

 

“어쨌든간! 지금은 주인과 짐의 사랑의 밀담을 하고 있지 않는가! 방해가 되니 저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자기나 하거라!”

 

“제가 눈을 감는 장소는 언제나 마스터의 품입니다. 이렇게 꼬옥하고 안으면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정신차려보니 언제부턴가 나에게 안겨서 하품을 하는 시나.

 

“잠깐! 언제부터 나에게 안겨 있는 거야?”

 

“주인!”

 

“아니! 잠깐만! 이상해! 킹 크림존이 있는 거 같아요! 지금 시나가 저에게 안기는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만 남았잖아요!”

 

진노하는 레시아를 진정시키려면 얼마 동안의 노력이 필요할까? 한줄기의 희망은 있는 걸까? 음...이때는...

 

“레시아도 오시던가요...”

 

-꼬옥

 

“비어있는 반은 짐의 자리니 넘보지 말거라.”

 

“냥캣이야 말로 제 영토를 침범하지 마시죠.”

 

이제서야 저 둘을 어느 정도 다루는 요령이 생기는 듯했다.

 

“정해진 운명을 부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운명을 부수고 다른 미래를 새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요.”

 

레시아와 시나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마왕과 여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갈등되는 고민 속에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듯한 모습과는 달리, 신비로운 운명론에 대한 무거운 분위기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주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의 질문은 하나로 뭉쳐졌다.

 

“모르죠. 저야.”

 

내가 어찌 알겠나?

 

“어쩌다가 운명이 부셔진 것마저 운명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운명이란 건 생각하지도 않아요. 원인과 결과와 나비효과가 겹쳐진 게 운명이라고 해도, 솔직히 그게 운명인지 아닌지는 알게 뭡니까? 막말로 제가 다른 세계에서는 레시아와 대적관계가 되었을 때도 레시아가 지던 이기던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된다. 주인을 이겨서 짐에게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대화의 취지는 운명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라는 거고! 어째서 저를 복종시키는 건데요!”

 

딴 이야기로 빠져나가는 게 마왕의 일인가?

 

“그때는 제가 마스터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을 테니, 냥캣은 소멸이나 당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뭐...다른 세계에서도 레시아와 시나는 싸우는구나.

애초에 존재 할 일이 없는 세계일 터인데...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주인의 품이 짐의 방이다! 여기서 자겠다!”

“마스터가 계신 곳이 제 휴식처이니 이 상태로 잠을 청하겠습니다.”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는데 자장가부터 불러주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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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축구 때문에 일찍 퇴근하고 써내렸다가 지금 올립니다.

꽤 늦었는데...원인은 당연히 일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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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4

발티는 항구 일꾼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글을 빠르게 읽은 후 순식간에 종이를 입안으로 넣어 삼켜버렸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뜰을 가로질러 나갔다.
도시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인적이 없는 컴컴한 길에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어느 골목에 들어가 막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누군가 그의 등을 건드리자 발티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았다. 몰타인처럼 변복을 한 투르크 정찰병이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뜻을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연락은 내쪽에서 하기로 했잖소."
발티는 목소리를 낮추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정찰병은 다시 한번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대답했다.
"중요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어 만나자고 했소. 급한 일이오."
검은 눈의 남자가 심각하게 말하자 발티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정찰병은 숨을 밖으로 길게 내보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이 생기..."
정찰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티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팔이 꺾였다. 발티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며 당황해 했으나 이내 상황이 파악된 듯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발티는 변복을 한 검은 눈의 사내를 쳐다보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순히 기사들을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갔다.

 

 

릴라당과 발레트는 서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정적을 깨고 로메가스가 들어와 릴라당에게 보고를 했다.
"단장님,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게."
릴라당이 대답하자마자 기사 두 명이 발티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발티는 손이 앞으로 묶인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발레트는 발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토 발티, 아니 살람 메메드. 넌 몰타 첩자로 체포되었다."
릴라당이 입을 열었다. 발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난 현장에서 잡혔소."
발티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을 숨긴 텅 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비토 발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군."
발레트는 발티 앞에 섰다. 발티는 발레트를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너의 신분을 보키아는 왜 숨겨준 거지?"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끝난 것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끝을 알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후련했다. 발티는 자신 앞에 놓여질 것을 이제 당당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발레트는 릴라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릴라당은 내보내라는 눈짓을 했고 로메가스는 발티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예상대로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릴라당은 의자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입니다. 보키아가 연관된 것은 끝까지 말하지 않을 겁니다."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키아는 발티가 첩자임을 알고서도 감춰 주었고 사욕을 위해 그를 이용했어. 이 일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보키아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가 꼼짝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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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정의

정의 JUSTICE

: 올바르고 공정한 도리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 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中 이방원의 말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것은 아마도 ‘답’이 아니라 ‘입장’일 것이다. 모든 생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때문에, 스스로가 선한지 악한지를 가늠해보는 일, 그리하여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은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의견을 가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선과 악의 두 가지 선택지 중 자연스레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다면, 다른 답안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다른 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을 접한 적이 있다. 3년 전 드라마 안에서 만난 그는, 다름 아닌 이방원이다.

 

 2015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제목 그대로 육룡(六龍)에 관한 이야기다다. 육룡이라는 단어는 세종(조선의 4대 임금)이 가사를 지은 <용비어천가>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는데, ‘해동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본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을 의미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삼봉 정도전이이라는 실제 인물들과 함께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섞어 역사와 판타지를 함께 버무려 놓았다.

 

 그 중 이방원은 선과 악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거머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통해 선과 악 그 어떤 쪽에도 답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 자신만의 신념을 따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을 믿고 따르는 일을 곧 ‘정의’라고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이방원의 첫 좌절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아버지 이성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올곧은 사람이라 믿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정치를 위해 한 발 물러서며 악(극중 이인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어린 방원은 상처를 받고 실망한다. 이에 아버지와 함께 함주로 돌아가는 대신 개경에 남아 성균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꿈 많은 방원이 성균관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는 어그러진 일들이 너무도 많이 존재했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벌을 받지 않았다. 대신 선한 자들이 수치를 겪어야 했고, 그 수치스러움을 참지 못해 죽음에 몰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단발성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거의 생활처럼 여겨지는 것 같았다. 어린 방원은 블랙홀처럼 크나큰 혼돈 속에 빨려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존경했던 스승(극중 홍인방)마저도 변절하고 말았다. 권력자(극중 길태미)와 사돈을 맺으며 그 또한 권력자로 올라선 것인데, 방원은 그런 스승의 모습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환멸을 느꼈다. 비뚤어진 일은 곧 방원에게도 찾아오고야 만다. 몇몇 힘 있는 유생들(극중 길태미의 아들 길유 外)이 명나라에서 <맹자>를 금지했다는 까닭으로 <맹자>를 공부하는 유생들을 심하게 괴롭히고 있었고, 그 괴롭힘의 손길이 자연스레 방원에게까지 뻗어온 것이다. 이방원 역시 다른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합니다. 그는 사내가 부끄러움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내 다른 동료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했다 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품고 삶을 연명한다는 것 역시 괴롭기 짝이 없는 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 또한 간파하고 있었다.

 

 결국 이방원이 택한 것은, 자신에게 수치를 떠안긴 일당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는 일이었다. 그 처단은 가장 극단적인 벌, 죽음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악은 절대로 가기 싫은 길. 선은 악 앞에서도 그저 그 모든 것들을 품어내고 감내하는 길. 이 두 가지 갈래는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올바른 해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정의’를 택한다. 정의는 악을 용납하지 않으며 무조건 참아내지도 않는다. 대신 악을 방벌한다. 쉽게 말해 악을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방원은 권력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마는 인간에게는 선이 최선의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악을 떳떳하게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신념과 정의라고, 그는 믿었다. 누군가의 악은 품어준다 하여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직 처절하게 심판받을 때 비로소 종적을 감추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신념에 기초한 정의관은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과 판단력이 곧은 방향으로 서지 않으면 자칫 위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을 믿고 결심을 행동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강단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요즘 우리 세대를 일컬어 ‘결정 장애 세대’라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가질 시간도 없이, 그저 쏟아져 내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 목소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 폭력과 광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인물들이 언젠가부터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현 시대에 없는 정의와 스스로에게 부족한 결단력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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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인스턴트 맨

 

 

 

  퇴근 후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키를 집어드는 것. 군더더기 없는 몸짓과 함께 그대로 자신과 어딘가 묘하게 닮은 차에 올라타 미끄덩, 30분을 달려 그가 도착한 목적지는 편의점이었다. 익숙하다는 듯 레토르트 식품을 넣어둔 곳으로 직행, 몇 개 남지 않은 도시락 중 가장 가성비가 좋은 걸 골라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지만 아직은 삼십 대, 대기업 근무, 본인 명의 20평형대 아파트 보유, 큰 키, 서글서글한 외모, B** n시리즈의 자차 소유, 호탕한 성격. 다른 사람들 말에는 그냥 웃어넘기거나 혹은 변변치 않은 핑계를 대곤 했으나, 그는 사실 자신이 왜 여태껏 혼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직장 동료나 같은 나이의 인간들과는 달리 꽤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감성적이니까, 그러니 감수성이 넘쳐흐르는 나는 따라서 여자들에게도 꽤 괜찮은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텐데. 솔직히 말해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면, 그는 여자를 만난 경험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일정 수준의 시간에 도달하면 이별이 찾아왔다. 분명히 좋아하는데, 어쩌면 사랑하는 것도 같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나게 되는 그였다. 도통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애도 결혼도 너무 큰 과제처럼 느껴졌다.

 

 2025년 6월 어느 날, 그는 TV에서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지난 해 체결된 ‘보어링협약 Boring Convention’에 따라 내달부터 사랑이 전면 금지된다는 것. 보어링협약의 정식 명칭은 ‘인류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서 조절에 관한 협약’이며, 2024년 6월 18일 미국 오리건 주의 Boring이라는 도시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보어링협약이라 부른다 했다. 협약에 참여한 168개국 국민들에게 7월 1일부터 내장형 칩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삽입 즉시 효과가 발동될 거란다. 그는 한 국가나 국제사회가 중대 사항에 대해 무언가 결정을 내릴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지내온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규율과 질서를 군말 없이 잘 지키는 편에 속했고, 그래서 ‘법 없이도 잘 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런 그가 이번 보도를 접하고는, 처음으로 큰 혼란을 느꼈다. 사랑이 금지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류를 거부한다는 건 그에게 더더욱 상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도 다음 날 저녁부터 그의 퇴근 시간이 당초보다 1시간가량 늦어지기 시작했다. 거리가 촛불을 든 인파로 넘실댔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집에 들어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포털사이트에 접속해도 온라인 사이트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저들의 자취가 줄을 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어링협약에 반발하는 것 같았다. 그는 광화문을 지나며 마주친 ‘인간실격’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인간다움이라는 게 뭘까. 사실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생각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므로.

 

 7월 1일, 등기로 배달된 내장형 마이크로 칩을 삽입했다. 우리 집 강아지랑 똑같네, 칩을 넣으며 껄껄 웃는 부장님의 옆모습이 왠지 불량식품을 삼킨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꽤 설렜다. 언제나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시대정신을 따르지 못하면 도태된다. 나는 이번에도 도태되지 않을 것이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가 오가는 길 위에는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 시위가 언제 끝날까, 길이 너무 막히는데. 내년에 완공된다는 새 도로를 타고 속도를 올리는 상상을 해본다. 기분이 나아진다. 칩을 장착한 뒤 그는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아마도 몸속에서 좋음의 정서가 과잉 반응하는 걸 예방하는 대신 다양한 대상을 애호할 수 있도록 분배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확실히 사랑이 없는 세계는 더 안락한 듯 보였다. 심장을 뒤틀리게 할 만큼 큰 감정소비가 사라지니, 연인이 되는 일부터 시작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개별 사건들이 속속 타결되니 생활 자체가 간략해졌다. 인생을 복잡하게 하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 걷어지니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건조하면서도 평화로운 시간이 지속되었다. 그는 인스턴트 음식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것이 인류의 건강을 크게 해칠 거라며 호언장담했던 전문가들의 근심 어린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새 자기 삶의 영역에서 인스턴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져있음을 눈치챘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그는 퇴근 후 1시간을 달려 새로운 연인에게 향한다. 이번에는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이제 “너무 아픈 사랑은 하지 말자”며 연애에 억지로 한계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아마 곧 자신과 많이 닮은 그녀와 결혼해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매끈한 검정색 자동차가 촛불을 뒤로 하고 도로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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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Echoes in the box

폐허에는 유령들이 맴돌았다. 무너진 건물의 구석진 방에도 유령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갑작스레 벗어난 혼들이었다. 땅으로 푹 꺼지던가, 하늘로 휘발되듯이 날아가버리던가 했어야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기에 같은 자리를 공허하게 돌았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죽지 못한 말들이었다. 살해당하지 못한 언어들의 망령이었다. 그들이 지껄이는 말은 거대한 원통형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안에는 푹신푹신하고 꿈틀거리는 붉은 주름들이 가득한 점막이 자리했다. 망령들은 그 위에 떠다니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의식은 죽었지만 언어는 살해당하지 못했다.
세계는 가끔 흔들렸다. 망령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자리를 맴돌며 같은 말만 뇌까렸다. 그들은 진동 만을 느꼈으나 의식 너머로 그것은 맥없이 흘러갔다. 하늘에는 흰 구멍이 열렸다 닫혔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그 정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하늘 너머, 세상의 밖까지 흘려갔다. 때로는 선명히 울려퍼지기도 했다. 어떤 망령은 그 이변을 깨닫고 몸부림쳤다.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고, 커졌다. 점막이 꿈틀댔다. 유령들의 메아리는 거세졌다.
 그들이 입을 모아 고함치기 전까지,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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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지진계

 

 

 

  어른들의 "나이 들어도 마음은 언제나 같아" 라는 말을, 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겉모습이 변하는 만큼 안에 있는 것들도 조금씩 바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 편견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 있었다. 몇 년 전, 독립잡지를 취급하는 홍대의 작은 서점을 구경하다가, 그 안에서 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거진을 읽느라 한참 동안 서 계신 노년의 한 신사분을 보았다. 마치 오래된 그리고 단단한 고무나무처럼 우뚝 선 그 신사가 왠지 신기했던 나는 덩달아 곁에 선 채로 책장을 군데군데 찔러보던 중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분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 자주 오냐고, 나는 가끔 온다고. 당시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독립잡지를 발간해보자는 목표를 두고 있었던지라 서울에 있는 독립서점들을 종종 순회하는 편이었다. 내 사정에 대해 말씀드리자 눈을 반짝이던 그 신사는, 그런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곳에 모이는 것 같다며, 사실은 자신도 기회가 된다면 이런 잡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무얼 만들고 싶은 거냐고 되묻는 나에게, 본인은 평생 동안 좋아하는 가수들의 LP를 모았으며 그 옛날 노래들이 죽고 난 뒤에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감탄했다. 그의 음악적 소양이 얼만큼 깊은지를 확인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취향이 변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 취향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것임을 밝히는, 노신사의 스스로에 대한 애정에 존경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스스럼 없이 말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취향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한없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얼마 전, 21년 전부터 좋아해온 가수의 라이브 공연에 다녀온 나는 2003년 전 발매됐던 앨범의 타이틀곡이 2018년에 다시 들어도 내 마음을 뒤흔든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학창시절 은색 CD 플레이어와 함께 마치 분신처럼 들고 다니며 닳도록 들었던 그 앨범은, 언제나 같은 반 남자애들이 야자시간에 빌려달라고 성화였기에 내 자랑거리였다. 내 어깨를 수직상승하게 했던 명작. 음원 재생목록에 한 곡 반복을 걸어놓고, 나는 어린 나와 지금의 내 모습을 동시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 그 노신사를 떠올렸다.  만약 그를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겠다고 다짐했다. 서로가 좋아해온 노래를 바꿔 듣자는 인사.

 

  안녕하세요. 그 노래들이 당신 마음의 지진계에 얼마만큼의 진동을 기록하는지, 그 떨림은 어디로부터 시작돼 어디로 전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당신의 노래가, 당신의 취향이, 당신의 마음이… 아니, 당신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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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3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바쁜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성 바울 대성당으로 향했다. 앳된 얼굴의 수사는 앞장서서 긴 복도 끝에 있는 피오르 신부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신부는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들 오시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예의를 갖추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오르 신부는 앉으라 권하며 발레트와 로메가스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기사단이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발레트는 피오르 신부의 얼굴을 바로보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몰타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가 몰타 내부에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발레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자는 사익을 위해서 옳지 않은 일을 묵과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하여 신부님을 찾아 왔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몰타를 위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혹시 이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신지요?"
발레트는 조심스레 신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피오르 신부는 만났을 때와 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은 주님의 성전입니다. 그런 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이것에 관해 알고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부님!"
발레트는 간곡한 말투로 피오르 신부에게 청했다.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지 내게 하는 것이 아니오. 미안하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없소."
피오르 신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발레트는 신부에게서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신부에게 인사를 한 후 뒤를 돌아 나가려했다. 그때 피오르 신부의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오."

 


발레트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고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상한 자. 신부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발레트는 신부의 말을 곱씹었다. 신부는 뒤돌아 나가려는 발레트에게 이 말을 했다. 그의 머리 속에 신부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신부가 무엇을 알려주려던 것은 아닐까?'
그는 복잡한 생각을 쫓고 싶었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발레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기사단 숙소를 나섰다.
성당 앞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성당 정문이 열리자 발레트는 반사적으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피오르 신부가 나타났고 그 뒤로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정문 앞에서 짧은 얘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베일을 쓴 여인은 계단을 내려가 대기하던 마차에 올랐다.
'이른 시간에 성당을 찾은 귀족 여인이라.'
마차는 광장을 돌아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임디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보키아의 성채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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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2

파도는 끊임없이 해안과 숨바꼭질을 했다. 나디아는 맨발로 파도와 장난을 치며 까르르거렸다. 지아니는 모래 위에 앉아 천진난만한 동생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꿈꾸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지아니에게 하루하루는 기적과 같았다. 지난 5년은 이미 파도에 실려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다. 과거는 그들의 일부분이 되었고 두 사람은 현재에 있었다.
나디아는 밝은 얼굴로 뛰어와 그대로 모래 위에 팔을 뻗고 누웠다. 다른 이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녀의 눈은 세상을 향해 있었고 그녀의 웃음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디아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코로 가득 들어온 상쾌한 공기는 몸 구석구석을 쓸고 내려갔다.
"누워서 하늘을 봐, 오빠!"
나디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아니는 아이 같은 나디아의 행동에 소리내어 웃다가 동생을 따라 모래 위에 누워 보았다. 파란 하늘에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폭신한 구름 위에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아니는 나디아처럼 눈을 감아 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팔과 다리는 전보다 강해졌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지아니는 일어나 앞을 항해 달렸다. 그리고 은빛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파도를 넘어 계속 나아갔다. 한참이나 전력을 다해 헤엄치던 그는 편안히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지아니는 지금 이 순간 자유로웠고 삶에 온전히 취해 있었다.

 

 

크레누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새어 나왔다. 식욕을 돋구는 양고기 냄새는 집안 전체에 풍겼고 로메가스는 탁월한 식성을 자랑하며 음식을 비워내고 있었다. 크레누는 로메가스에게 음식을 더 권했고 발레트는 자신의 고기를 덜어 로메가스의 접시에 놓았다. 무사히 돌아온 발레트와 로메가스, 지아니를 위해 마련된 저녁 식사 자리였다. 나디아의 웃는 얼굴을 보며 크레누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무사히 돌아와주어 고맙소."
크레누는 포도주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자식 같은 네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발레트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 나디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디아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빌구 공사를 잘 마무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생리아도 공사가 시작되었지요?"
크레누는 발레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리아는 빌구보다 더 일찍 끝낼 수 있을거요."
"지아니도 현장에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좀 더 쉬어야 하는건 아닌지."
발레트가 지아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말했다. 지아니는 몸이 회복되자 크레누의 일을 돕고 있었다.
"나디아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지아니는 옆에 앉은 나디아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발레트는 나란히 앉은 지아니와 나디아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짙은 갈색머리와 초록빛의 눈동자, 두 사람은 누가봐도 남매라고 생각할 만큼 닮은 모습이었다. 문득 만남이라는 강력한 연결에 발레트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순간 발레트는 자신이 왜 몰타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스만투르크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하겠다는 것도, 신께 한 맹세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도,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미소, 서로를 향해 짓는 웃음을 위해서였다.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몰타에 있는 것이었다. 발레트는 식탁에 둘러 앉은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눈속에 가득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로메가스가 무언가를 말하자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포도주는 향기로웠고 웃음소리는 노래가 되었다.
나디아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며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나누는 시간. 나디아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함께 하는 시간, 나디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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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나 I

: 남이 아닌 자기 자신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 김애란, <영원한 화자> 中

 

 

 

 

"나는 요즘 나를 공부하는 중이야."

 

자매처럼 지내는 언니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나는 언니의 그 말이 새삼 반가웠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궁금해 하는 시간이 일상의 4할 정도는 차지하는 사람, 그게 나니까. 꼭 동지가 생긴 기분이었다.

 

아무리 수많은 관심사가 내 마음 언저리를 빙빙 돌며 구미를 당긴다 해도, 결국 내가 가장 오래도록 놓지 않고 줄을 당기며 살 최애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별별 복잡한 일들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도, 내가 내놓는 문장은 "그래서 나는 ~라고 생각해"로 끝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동료들과 함께 이태원으로 다녀온 워크샵에서 애니어그램이라는 걸 한 적이 있다. 제법 진지하게, 우리는 전문가를 초빙해 테스트를 하고, 시간을 들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향을 분석했다. 그런 걸로 사람을 규정짓는 건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날 들은 것 중 크게 공감이 가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내 마음이 건강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감정이 각각 어떤 식으로 조합되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자아가 강하고 스스로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늘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의 '특별함'에 대해 떠올리며 사는 내가, 한없이 건강할 땐 모든 존재가 다 특별하다며 전 우주적 박애주의자로 거듭나지만, 심신이 어두울 땐 그 특별함의 스포트라이트를 오로지 나에게만 한정시키고 빛 바깥에 둔 타인을 한심하게 바라보기도 한다는 사실. 그걸 들키고 나서 한참 뺨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내, 비밀이 새어나가고 나니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좁은 마음이 될 때마다 '내가 지금 건강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런 감정에 휩싸인 나를 혐오하지 않고도 그 시기를 잘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 나의 그늘을 도려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으니까.

 

하여,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으니까.

 

며칠 전 김애란 단편 <영원한 화자>를 읽었다.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그 글이, 꼭 나 같아서 속으로 웃었다. 오늘도 주어에 밑줄을 긋는 나에게 명하노니, 부디 건강하자. 전부 사랑해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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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6

589

 

 

 

시공간이동을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 나 이외에 하나 더 있긴 했다. 아니, 내 경우에는 원하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휘말린 거고, 이전에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것은 티아의 도움으로 간 것. 하지만 지금의 켈모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로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놀러 온 이유는 아닐 것이고, 지금의 나에게 볼일이 있어서 다가 온 거 같은데...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나와 같은 사람. 그리고 나 같지 않은 사람‘들’”

 

“꼭 거기에 강조할 필요가 있나? 그보다 내가 알고 있는 켈모리아와는 다른 나이인 거 같은데?”

 

켈모리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강조했다. 그보다 저 모습은 몇 살이지?

 

“숙녀의 나이를 물을 셈이야? 아무리 귀엽다고 한들 여자의 비밀을 쉽게 알려고 해선 안 되지. 안 그래?”

 

도대체 왜 이런 녀석과 그 저주받을 보드게임을 한 거야? 그 전에, 내가 만났던 켈모리아와는 나이가 좀 달라 보인 이유라고 한다면...

 

“확실히 나이는 그쪽이 만난 것보다 더 어리긴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거야말로 자네가 쓸 때 없이 미래에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차원이 합쳐지려는 영향 때문이야.”

 

“그럼 너는 평행세계에서 온 켈모리아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방금 전에 봤던 이비도 평행세계의 이비. 모두 다른 선택지를 하여 이곳까지 온 존재들이야.”

 

다른 선택지?

 

“그럼 너는 평행세계에서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켈모리아는 화사한 웃음이 태양빛에 반사되었다. 보통 저런 웃음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사심이 가득한 분위기가 켈모리아 몸 주변에서 오러처럼 퍼지고 있으니...

 

“뭐. 그렇지. 내가 있는 세계에서는 카일이란 남자는 없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거든.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까 자네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들기 시작하는데, 그게 그 옷의 저주인가? 아니면 자네가 귀여운 건가.”

 

“옷의 저주야. 100% 옷의 저주네. 저주에 오염되기 전에 지금 당장 이 옷에 있는 저주를 풀어주면 맨 정신으로 돌아오겠지. 나도 다른 사람들이 저주로부터 오염되는 걸 피하기 위함인데, 역시 나는 의로운 일에 움직이는 남자야. 그렇지 않아?”

 

남자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부디 내 성 정체성이 남자라는 것이야 말로, 평행세계에서 온 켈모리아가 제대로 인식해주길 바람이었다. 남자가 여장을 하는데 그 여장이 더 잘 어울려서 여자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는가? 특정 조건이 붙어서 꼭 여장을 해야 메리트가 있다면 모를까...지금 내 모습은 저주받을 백장미의 양산만 가속화하는 경우가 되니.

 

“해주를 한다면 그 마법진 위에 올라와. 릴리스에게는 이미 들어놨으니 자네가 오기 전까지 준비하고 있었거든.”

 

“내가 오기 전까지?”

 

“나는 마법에 있어선 모든 걸 통달한 마법사. 제 2의 엘티노스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그건 네 자칭이잖아.”

 

“그래도 엘티노스 이외에 마법에 대해 모든 걸 꿰뚫은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애초에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일보 직전이고...시공간술사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래도 자네는...아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미루도록 하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이 없다고?”

 

“내가 있는 세계의 아리엘은 너무 어리광을 부려서...3시간동안 나를 한번이라도 만나지 못하면, 나를 찾겠다고 카멜롯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대니까.”

 

어리광을 부리는 아리엘이라. 얼마나 심하길래 카멜롯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거지?

 

“그 아이. 그쪽 세계에서는 어때?”

 

“이쪽에는 장래에 어둠이 드리울만한 은근 사디스트 종류로 진화 중이다.”

 

“그런가? 자네도 고생이 많겠군. 뭐 나야 귀여운 아이들이 주변에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만.”

 

귀여운 아이들이 주변에 있으면 오히려 힘들지 않을까? 마음 고생이 많이 심할 거 같은데. 결국 마법진 안에 들어온 나는 켈모리아의 박수 소리와 함께 모든 옷이 날아가기 시작...

 

“야! 잠깐만! 모든 옷이 싹 다 날아간다는 말은 없었잖아!”

 

모든 옷이 날아가버려서 급하게 한쪽 팔로 가리고, 다른 팔은 거대한 천을 만들어 감쌌다. 이럴 때야말로 편리한 창조에너지라고 말하고 싶으나...아직까지 동요한 마음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여장을 하기 싫어서 해주 한다고 들었다만? 그렇게 강력한 저주가 담긴 옷을 하나하나 해주를 하고 벗는 건 시간낭비라고? 그러니 한꺼번에 태워버려서 날려버리는 게...”

 

“나는 수지침이 없는 줄 아냐!”

 

“수치심이겠지. 그리고 자네의 몸을 관찰해야 할 만한 일이 생겼다네.”

 

“관찰?”

 

어느 사이에 내 등 뒤로 공간이동을 한 켈모리아. 그리고는 이리저리 옮기면서 나를 바라보는데...

 

“환생이야?”

 

“내가 틈만 나면 트럭에 치여서 죽는 줄 알아? 환생하는 대부분이 사고로 죽어서 환생한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환생이 아니라 무한 루프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른 거야. 그런데 그건 왜?”

 

“증상을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 자네가 지닌 신격화는 결국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리니, 그걸 또 조사해 봐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비록 이런 허름한 구두점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자네가 인간을 벗어나는 일은...그게 ‘운명’이라고 보면 되겠지.”

 

“운명? 결국 나는 신이 된다는 거야?”

 

“맞아. 잡화점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야.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도록. 지금 잡화점의 주인은 자네니까.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정말 희망찬 설교로군.”

 

평행세계에서 잠깐 넘어온 켈모리아는 그나마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내가 카멜롯에 방문했던 켈모리아는 아직까지 충동적으로 해결하려는 어린애 같은 성격 덕분에, 결국 일이 비틀어져서 적대를 하고 말았고, 결국 황혼<Dusk>로 인해 마법의 근본을 날려버렸다.

 

과거를 잠깐 떠올리던 머리를 뿌리치고 이제 내가 궁금해 하는 걸 물어보자.

 

“그런데 그 평행세계의 카일이 없다는 건. 내가 죽었다는 의미야?”

 

자신의 안경을 치켜세운 켈모리아는 눈웃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어느 평행세계를 다 뒤져봤지만...없었어. 아마, 이곳만 유일하게 네가 살아남은 세계겠지.”

 

“이곳이 유일하게 내가 살아남은 세계라...”

 

다른 평행차원의 카일들은 뭘 한 거냐! 가위바위보에서 지기라도 한 건가?

 

“대부분 카일이 아니라 ‘카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체들이니까.”

 

“왠지 그거 내가 돌연변이 같잖아. 그 이전에 이곳에서 수많은 남성체 카일이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둬! 잠깐만, 따지고 보면 유일하게 내가 남성체로 현재 진행중인 카일인가? 머리가 느닷없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잖아! 다 너 때문이야!”

 

카일이라는 남자가 없다는 말은 아마 잘못된 사실이고, 다른 평행세계에는 카린이라는 여성체가 많다는 의미겠지. 그게 무슨 시스터즈도 아니고? 레벨 올리는 강화재료로 쓰이는 것도 아니잖아.

 

“그 중에 60%정도는 엘티노스와 결혼에 성공했지.”

 

“듣자 듣자 하니 쇼킹한 사실만 계속 내뱉는데, 그런 암울한 평행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켈모리아는 입을 가려서 웃었다.

요염한 웃음에 느끼는 감정은 짜증이었지만...

 

“아무튼 해주는 끝났고 갈아입을 옷은 다 갈아입은 거 같은데?”

 

“아니.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옷이 자동으로 입혀주는 줄 알아? 네가 여태껏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내가 옷을 입지 못하는 거 아냐?”

 

“부끄러워?”

 

“시끄러워!”

 

옆에 릴리스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어서 더 거부감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난장판이지?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긴 하지만, 주변에 마법방패<Magic Shield>를 방벽처럼 쌓았다. 언제나 기초에서 응용하는 내 사고방식은 벽을 만들면 편할 텐데, 굳이 저렇게 다중으로 소환해서 쓸 때 없이 낭비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투시할 수 있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제발 너는 고개 좀 돌려!”

 

켈모리아에게 소리치며 빨리빨리 입었다. 릴리스는...뭐. 그래...어차피 갈 때로 간 사이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어차피 사라지라고 해도 환영마법이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녀석이니까.

 

-스윽. 스으윽.

 

“호오~”

 

“너 진짜 엿보는 거면 아이언 클로가 튀어나오는 거니 조심해라.”

 

“자네는 이런 아름다운 미녀에게 폭력을 휘두를 셈인가? 야만적이지 않는가?”

 

“너는 지금 남자의 여린 몸을 탐닉하면서 음흉하게 웃고 있을 거냐? 오히려 네가 죄를 더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괜찮다. 자네는 남자이지 않는가? 여장을 했을 때가 더 부끄러워야 하는 것 아닌가?”

 

남자라고 해서 수치심이 없는 게 아니라고! 부끄러운 거에 뭐가 더 부끄럽고 아니고가 어디 있는가? 한결 같이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머리 맞는 거와 배 맞는 게 어느 쪽이 더 아프냐고 물어보면, 오히려 ‘맞으면 다 아프다.’라는 대답이 정상적으로 나와야지.

 

“조만간 너는 성범죄로 끌려가게 될 거야.”

 

“자네야 말로 조심하는 게 좋지. 자네의 주변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건 잡화점 멤버 일부가 멋대로 변신하는 거고! 실제로 내 취향은 어린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은팔찌가 내 손목에 걸리기 전에 너도 잡혀갈 거다!”

 

이른바 “저 사람도 나쁜 사람이에요!”라는 물귀신 작전으로 말이지.

 

“농담은 이쯤 하면 되나.”

 

켈모리아의 한 마디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위기를 밥상 뒤집듯이 바꿔버리는 켈모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평행세계가 사라지던 말던 나는 상관이 없지만, 모든 평행세계가 사라지고 나면 끝이 날까?”

 

켈모리아의 질문이 날아와 내 머리를 때렸다. 모든 것의 끝이 있다면 또 다시 모든 것의 시작이 있을까? 한 때,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내 의견을 듣고 싶은 거냐?”

 

“물론.”

 

“정답은 나도 모른다야.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지금 당장 엘티노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겠고...시나도 어느 순간 자신이 존재하여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니까. 시나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하겠지.

 

“그렇다면 자네가 알게 될지도 몰라. 창조주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 결국 모든 것이 사라져도 자네가 재창세를 할 테니까. 세상을 창조하면서 시공간의 개념이 생기면, 그에 따른 평행세계는 또 다시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갈 거야.”

 

“모든 세계가 끝장이 난다고 해도 너는 태평하군?”

 

“당연하지. 어차피 이대로 살다 끝날 것이 아닐 텐데.”

 

“마치 내가 이 일을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내가 해결 할 일은 리제로트의 의뢰다.

 

“그 아이가 말했잖아. 자신의 운명을 바꿔달라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까?”

 

정해진 운명을 먼저 알아야 회피를 하던 말던 하지.

 

“왠지 모르게 리제로트의 운명을 알아내려면 심하게 고생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만?”

 

“그래도 의뢰를 받았으니 굴러야 하겠지?”

 

제길.

어째서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그냥 태어난 의미가 굴러다니는 돌보다 더 심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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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은 쉬고 싶은데...

일이 바쁘니 또 못 쉬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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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산책

Is edit, sed quid is edit?

        Salvete! 잘 지내셨었나요? 오랜만에 돌아온 라틴어 산책입니다.  

 

        오늘 배울 것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지난번 시간에 저희가 무엇을 다뤘었는지 기억나시죠? 간단하게 요약하면, 처음엔 인칭대명사를 소개했고, 3단 동사와 sum 동사를 소개했었죠. 또한, 주어-동사 일치를 지적해드리며, 왜 라틴어에선 주어를 생략해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무리가 없는지 또한 설명해드렸죠.  

 

        또한, 라틴어는 명사 별로 성별이 있기 때문에, 그 성별에 맞는 인칭대명사를 써야 한다고 언급했었습니다. 예컨대 강아지는 실제 그 개(canis)가 수컷이든 암컷이든 상관없이 남성 명사이며, ‘그 개’는 3인칭 남성 대명사인 is를 써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양이(feles)는 여성 명사니 ea로, 사과(malum)은 중성 명사니 id로 받아줄 수 있다고 소개해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어의 do not/does not에 해당하는 non의 용법 또한 알려드렸습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많은 걸 한 단원에 다뤘던 것 같네요.  

 

        이번 시간에는 3단 동사 말고 어떤 동사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 동사들은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어떤 형태로 바뀌는지, 마지막으로 목적어를 수반한 문장을 만드는 법을 배워볼 겁니다. 

 

        자, 그럼 다시 동사로 돌아가 보죠. 이 글을 읽고 계신 몇몇 분들 긴장하신 모습이 역력하군요. 아니 3단 동사가 있다는 건 1단, 2단도 있다는 거 아니야? 도대체 동사가 몇 종류나 되고 걔네들도 주어에 따라 변할 테니… 도대체 얼마나 외울게 많은 거야? 너무 겁내실 필요는 없어요. (적어도 현재형의) 동사들은 형태 변환이 제법 비슷하거든요. 그러니, 금방 외우실 수 있을 거예요. (정작 저는 아직도 헷갈리지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라틴어에는 총 다섯 종류의 동사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저는 편의상 이 동사들을 1단, 2단,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제가 라틴어를 한국어로 못 배워서 제 임의로 번역한 것임을 기억해주세요. 이 다섯 종류의 이름은 1단, 2단, 3단, 3단 io형, 4단입니다. (간혹 어떤 교재는 3단 동사와 3단 io형을 하나로 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하나하나 예제를 들어가며 살펴볼까요?  

 

        첫 번째로 1단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랑하다라는 뜻의 amo가 이 형태에 속하죠. 그러고 보니 지난 시간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의미의 'Cogito, ergo sum'에서도 cogito가 1단 동사라고도 소개해드렸군요. 각 주어에 따른 변환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2단 동사. 이 동사들은 대개 -eo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만나서 반가워’를 했을 때 배운 Te noscere gaudeo에서 ‘기쁘게 하다’에 해당하는 gaudeo가 2단 동사입니다. 소유하다, 갖다는 뜻의 habeo도 역시 2단 동사입니다. 2단 동사의 변호 나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3단 동사는 지난번 시간에 배웠으니 넘어가고, 3단 io형태를 볼까요? 대표적인 3단 io형으로는 ‘보다’라는 의미의 aspicio, ‘잡다’라는 의미의 capio도 역시 3단 io형에 해당합니다. 왜 이 동사들이 3단 io형이라 불리는지, 옆에 3단 동사인 curro와 비교해드릴게요. 

 

 

        마지막으로 4단 동사입니다. 2단 동사가 -eo로 끝났다면 4단 동사는 -io로 끝납니다. 아니, 그러면 3단 io형과 같은 형태 아닌가요? 네,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하겠습니다. 굳이 이 동사들을 4단 동사라고 따로 분류하는 이유는 3단 io형 동사들과 다른 변환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반은 맞다’고 한 이유는 지금 저희가 다루고 있는 현재형 동사에 한해서는 4단 동사의 변환과 3단 io형의 변환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로서 듣다의 audio와 목말라하다의 sitio는 4단 동사에 속합니다. 이들의 변환을 살펴볼까요? (주의: 목말라하다의 sitio는 형용사가 아니라 ‘목마름을 느끼다’라는 동사예요!)

 

 

        지금까지 배운 동사들의 변환들을 표로서 작성하면 다음과 같아요. 

 

 

 

        자 동사도 배웠으니, 이번엔 목적어를 배워봅시다. canis, feles, equus, malum 따위의 명사들을 소개해드렸는데 사실 지금 소개한 명사들은 모두 주격에 해당합니다. 혹시 지난 시간에, 왜 만나서 반가워(Te noscere gaudeo) 직역하자면, ‘당신을 아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에서 왜 당신을 의미하는 인칭대명사인 tu가 아니라 te로 쓰였는지 간단하게 언급했었죠? 바로 여기서 ‘당신’은 주어가 아니라 (직접)목적어로 쓰였기 때문에 te로 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격, 목적격 말고도, 라틴어에는 모든 명사마다 6개의 격이 있으며, 각각 주격(Nominative), 소유격(Genitive), 여격(Dative-간접목적어), 목적격(Accusative-직접목적어), 탈격(Ablative-보어), 호격(Vocative)이며, 이들을 편의상 N, G, D, Ac, Ab, V로 표기하곤 합니다. 여기서 호격(V)과 주격(N)은 아주 약간의 예제를 제외하곤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어떤 교재에서는 호격을 제외하고 다섯 개의 격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또한 장소격이라는 어격도 존재하나, 장소격을 보유한 명사들은 한정적이므로, 하나의 독립된 격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명사 별로 다섯 개에 해당하는 격들을 언제 일일이 다 외우고 있느냐. 단어들이 각 격 별로 어근을 공유하고 어미만 바뀌므로 (조금 많지만) 규칙이 있습니다. 동사처럼 명사도 ‘단’이 있고, 앞서 언급했듯 성별이 있습니다. 이 단과 성별에 따라 격규칙이 대개 일치합니다. 그러니 너무 겁먹으실 필요 없어요. 명사의 단과 성별에 따른 격변화는 앞으로 천천히 각 격 별로 하나하나씩 다뤄보기로 하죠.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을 봅시다. 사랑하다가 amo라고 1단 동사의 변환을 소개할 때 설명했었죠? 나는 주어, 즉 ego를 사용합니다. (물론 동사 amo에서 그 주체가 ‘나’ 임을 내포하니, 생략해줄 수 있고요.) 그리고 여기서 ‘너’는 사랑하는 주체, 즉 주어가 아닌 사랑받는 대상, 즉 목적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tu가 아니라 te로 쓰여야겠지요. 그래서 이 문장을 라틴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go) te amo.

 

        자세히 살펴보면 라틴어가 얼마나 흥미로운 언어인지 알 수 있어요. 아마 한국어를 하는 분들 대부분 영어를 배울 때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거예요. “영어는 한국어랑 어순이 반대야. 동사가 목적어보다 먼저 나오거든. 나는 너를 사랑하다가 아니라 나는 사랑한다 너를 이라고 번역해야 옳아. 그리고 대개 서양 언어들이 그렇지.” 그런데 놀랍게도 서양 언어의 할아버지 격에 속하는 라틴어는 한국어랑 정확히 일치하는 문장 형태를 갖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순으로 문장이 구성되죠. 

 

        자 목적어를 포함한 라틴어 문장을 만들 때 주의해야 할 점 하나! ‘나는 요아네스입니다.’ 그리고 ‘그는 학생입니다.’같이 입니다 즉 sum 동사가 두 명사가 같다는 의미로서 쓰인 경우. 즉, 나 = 요아네스, 그 = 학생의 경우는 뒤 따라오는 요아네스, 학생도 N. 즉 주격으로서 사용됩니다. Veritas lux mea est에서도, 진리 = 나의 빛 이므로 빛(lux)이 Ac. 형이 아닌 N. 형을 갖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lux의 Ac. 형은 lucem입니다.) 

 

        잠시만요, 이름에도 형태가 있나요? 요아네스도 목적격이 있어요? 네, 있습니다. 라틴어에서는 모든 이름들조차 여섯 가지의 형태를 갖습니다. 첫 번째 산책에서 브루투스 너도냐?가 Et tu, Brutus 가 아니라 Et tu, Brute라고 설명한 이유가, 바로 Brutus가 호칭(V. 격)으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었죠? 다른 명사들과 마찬가지로 라틴어 이름들도 여섯 가지의 격을 갖습니다. 이들은 기회가 되면 천천히 살펴보기로 하죠. 

 

        저희가 지금까지 배운 명사로는 개(canis), 고양이(feles), 말(equus), 사과(malum), 이름(nomen)이 있습니다. 이들의 Ac. 형은 다음과 같으며, 이들을 기반으로 다음의 문장들을 한번 만들어볼까요? 

 

 

 

그는 강아지들이 있다. 

 

Is canem habet. (이스 카넴 하벳)

 

그녀는 고양이가 있다. 

 

Ea feles habet. (에아 펠레스 하벳)

 

나는 사과를 먹는다. 


Malum edo. (말룸 에도.)

 

너는 말을 먹지 않는다. 

 

Equum non edis. (에쿰 논 에디스)

 

나는 이름이 있다. 그것은 요아네스다. (이름은 중성 명사입니다.) 

 

Nomen habeo. Id Ioaness est. (노멘 하베오. 이드 요아네스 에스트.)

 

강아지가 있다. 그것은 이름이 없다. (강아지가 남성 명사입니다.) 

 

Canis est. Is nomen non habet. (카니스 에스트. 이스 노멘 논 하벳.)

단어의 숲 

 

     영어 단어 중 ame-/ami-가 들어간 단어 중 친근하고 사랑스러운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amiable, amicable, amenity, amity 등이 있고, 스페인어로 친구인 amigo는 라틴어로 친구인 amicus에서 왔으며 역시 이 단어는 사랑하다 amo를 어근으로 삼습니다. 

 

        영어단어 have가 habeo에서 왔다는 것은 눈치 빠른 분들은 바로 아실 겁니다. 심지어 습관을 의미하는 habit도 여기서 왔어요. ex-가 밖으로/~로부터 따위의 접두사이니 (역시 라틴어 ex에서 기원합니다.) exhibit은 자신이 갖고 있는 걸 밖으로 보내는, 즉 ‘표현하다’라는 의미가 되는군요. 이외에도 영어단어에 habit 혹은 hibit을 포함한 단어들이 많은데(exhibit, inhabit, prohibit) 대게 habeo를 어근으로 삼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왜 듣는 것과 관련된 많은 영어단어들에 audio가 포함되어있는지 두말하면 잔소리겠죠?  

 

        자 이렇게 오늘은 다양한 동사들의 변형과 목적격의 용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명사들의 목적격 변환에 대해서 조금 다뤄보도록 할게요. 모두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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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사람

순서

이어폰을 달고 밤거리를 걸었다. 주황색 가로등을 따라 터벅터벅. 어렴풋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가 뒤죽박죽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러다 지독히 외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세상 속에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찰나의 순간 같지만 어쩌면 그냥 분리된 느낌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때는 과거나 미래, 혹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내 안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의 볼륨을 키우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훌쩍 큰 음악 소리가 조금 놀라게 하고 익숙해지고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까, 그런 고민이 드는 밤이다. 중요한 건 말의 내용보다 순서가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순서라는 건 생각보다 정말 중요한 것이다. 어머니가와 아버지 중 누가 먼저 죽는지, 어머니가 죽고 철이 드는지, 철이 들고 나서 어머니가 죽는지, 이런 사소한 순서의 차이가 누군가의 인생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가난하고 얼굴도 못났다. 그저 ‘그 사람 착하지’ 정도의 얘기 밖에 듣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연애 후 결혼했다. 도통 어울리지 않는 둘이 어떤 구애의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네 번째 손가락에 사이즈도 맞지 않는 싸구려 금반지를 밀어 넣은 순간 미래는 불 보듯 뻔 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장 모르는 게 자신인 것처럼 두 사람의 미래를 가장 모르는 것도 당사자들이었다.

 

건장한 남자애를 둘이나 낳은 후 어머니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애초에 어머니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랑받는 여자로 자란 그녀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적절한 입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건달과 바람을 피운 어머니는 곧이어 또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었고, 화를 참지 못한 건달의 손에 죽었다. 정말 우연히 재떨이가 두개골의 가장 약하고 위험한 곳에 향했다.

 

두 집안은 그녀의 이기적인 유희를 모른척하기로 했다. 남달리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으로 포장한 건 그냥 자기들이 편하고 싶어서였다. 집안에서 정해준 자리에 어머니를 묻었다. 건장한 청년들이 관짝을 내려놓고 흙을 덮고 빙글빙글 돌면서 발로 밟았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흙을 촘촘하게 다지는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죽은게 그녀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와 형, 나, 세 남자는 동시에 버림받았다. 빈자리는 컷지만 세 남자는 나름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한 여자의 부재를 메우고 또 다른 삶을 만들어 가야만 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이유는... 귀속에 가득찬 이어폰의 감촉이나 주황색 가로등 불빛, 혹은 발바닥을 짓누르는 아스팔트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고 슬픈 음악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일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지만 어렵게 생각하면 한두가지 이유로 도저히 풀이할 수 없다.

 

머릿 속에 두 여자가 떠오른다. 하나는 어머니, 하나는 어린 시절의 사진이 없고, 행복한 추억을 더듬기도 어려워하는 사람. 그러니까 평생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제멋대로 죽어버린 여자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견뎌온 여자가 내 안에 동시에 자리 잡았다. 나는 둘 사이의 괴리를 가늠하며 아주 느린 속도로 한걸음씩 걸어간다.

 

가끔 그 사람이 과거의 불행을 잠시 잊고 행복할 때마다 나도 조금씩 숨이 트이는 걸 느낀다. 희한하게도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불완전한 원망도 사그라든다. 하지만 확실치 않다. 어머니를 용서하고 이해함으로써 그녀와 만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를 만나서 어머니를 받아들이게 된 된 걸까. 어쩌면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일지도.

 

오랜 시간, 불행한 과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불행하단 생각을 했다. 어쩌면 순서가 바뀐 거 같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현재가 한다. 지금 행복하면 과거도 만족스럽고 지금 불행하면 아무리 좋았던 과거라도 결국 저주하고 만다. 내 옆의 사람도 과거가 불행했다 단정했지만 지금, 그리고 앞으로 행복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면 아직 이른 결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