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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8

591

 

 

새벽에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자장가를 불렀을 때, 레시아와 시나의 정신이 앞들과 뒷동산으로 출타하는 동안, 운명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생명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데. 그걸 자연의 섭리라고 보고 운명이라고 한다. 죽음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네크로멘서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는데 시체로 되살아나버린 경우에는, 그것 또한 그 시체의 운명인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운명 또한 무질서한 무언가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운명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면 운명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의뢰는...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저 앞에 당돌하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소녀.

리제로트에게 받은 의뢰에 대해 정확한 내용으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너를 보자고 한 이유야 의뢰 때문이지.”

 

“그래요? 해결할 수 있나요?”

 

그리고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켜서 틈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짧은 시간.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아니.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대신...”

 

정확한 내용을 수정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뭐라고요?”

 

어처구니 없어서 한숨이 입 밖으로 출타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지만,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빠르게 치고 나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의뢰는 사실상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거든. 그저 이야기 책에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게 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나의 말에 리제로트는 째려보며 대답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죽어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도 맞지?”

 

“당신은 지금 살아있잖아요.”

 

“아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태 새벽부터 고찰한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기로 하자.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는 이유야, 원래 나는 이 평행차원에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야.”

 

는 거짓말이고 사실 그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잡화점의 대마력이 방어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시공간은 본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지, 하지만 과거에도 각본가의 책에 적혀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존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본래 없었던 거야. 그거 있잖아. 죽음의 기사 4명 중에 하나가 왠 이상한 차원에 떨어져서 영문도 모르고 악마와 싸우는 그런 이야기. 아마 내가 케이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지.”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난 이 차원의 사람이 아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려고 절 이곳에 불러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한 거에요?!”

 

“당연하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만 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소망 하나는 들어줄게. 그리고 나는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소망 하나가 분명.

리제로트가 원하는 의뢰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뭐든지요?”

 

“아. 그렇다고 높은 수위의 기묘한 소원은 안 받아줘. 노블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19세 마크가 없다고?”

 

리제로트가 원하는 소망 하나를 들춰내는 것도 정말 어렵구나. 소녀의 마음이라는 건 이런 건가? 내가 잡화점 멤버의 장난으로 소녀가 되어본 적은 있긴 하지만, 음...지금은 무슨 심상인지 까먹었네.

 

“그럼...”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내적갈등에도 입을 연다는 그 자체가 결정했다는 소리니까...

 

“전 죽기 싫어요. 그러니...살려주세요.”

 

과연.

운명에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건가.

 

“방법이야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아.”

 

저런 소망을 듣고 절대로 공짜로 해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살아나는 거니까 최대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잃는 거라면?”

 

“우선 루니아 누나의 말처럼 그 힘을 버려야겠지.”

 

“제 초능력이요?”

 

“아. 물리적으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순하게 봉인하는 절차니까. 위급한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만 잠깐 발동하도록 만들 거야.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발현된 초능력을 마법적으로 봉인한다는 그 자체는 개념이 달라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힘은 근본적으로 마나를 뛰어넘은 자원이다. 그러니 봉인마법과 이미지만 어떻게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죠? 힘이 있어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잠깐 생각을 하고 나는 한숨을 지었다.

 

“애초에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게 아냐. 오히려 힘이 있든 없든 운명은 존재하지. 아니, 난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니까 종착지라고 표현을 하자. 어쨌든 그 끝에 다다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힘이 없어서도 있지만,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 힘이 있든 없든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삼손도 대머리로 죽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넌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힘이라는 그건 어떤 것도 상징할 수 있지. 라 캄베리의 영애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유랑극단의 간부이기도 하고, 너의 초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내 정신방어마저도 흔들어버릴 정도야. 게다가 아이리스를 건드려서 레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했고, 레이베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살려주다가 놓친 이후로, 나와 이렇게 몰래 만나면서 레이베리아에게도 죽을 위기에 놓여졌다. 결국 각본가는 너의 죽음에 대한 각본을 썼을 테고, 너는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지. 맞잖아?”

 

“마, 맞아요.”

 

“각본가의 각본은 또 언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각본을 적기 전에 내용을 본 거 같으니까. 지금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이네.”

 

내가 레이베리아라면 배신자에게 어떤 각본을 써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나라면 깃털로 간지럼을 태워서 죽였을 거 같은데...

 

“당신. 저질이군요.”

 

“아니. 남의 독백을 읽고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사생활침해라는 거 몰라? 나는 뭐 상상의 자유도 없나? 자유도도 없는 GTO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O가 아니라 A겠죠...아무튼 절 볼 때마다 그런 상상만 했어요? 변태.”

 

“그런 상상만이라니. 이 상상은 지금 처음 하는 거고, 앞으로는 안 할 상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형벌 중에 간지럼은 예로부터 내려온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 중 하나란 말이다. 염소가 네 발을 지속적으로 핥아본 적 없잖아?”

 

“당신도 없잖아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궤변을 늘어뜨려도 그 사이에 포인트만 집어서 공격을 하다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철한 아이였다.

 

“뭐 아무튼. 자세히 어떤 죽음을 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쓰여졌겠지. 아니면 지금 쓰고 있거나, 아니면 슬럼프가 와서 마감이 다가와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거나. 그러다가 담당자가 찾아와서 으름장을...아니, 이건 너무 갔구나.”

 

“하아...이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미래가 걸렸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 바보에게 실례군.”

 

“바보에게 실례인가요...”

 

지쳤는지 태클도 밍밍하게 들어오는군. 즐거운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자. 어쨌든 바보에게 미안한 내 입은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어쨌든, 그런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예를 들어 죽는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거나...”

 

“그거 영원히 죽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진실을 덧씌우는 거지.”

 

“그런 능력은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말했잖아.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예를 들자면...그래,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거나.”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는 방법을 상상이라도 했겠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막강해서 그럴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여신 중에서 가장 강력해진 레이베리아의 힘이 깃든 각본을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일 터.

 

“그러니. 각본을 찢고 자유가 되면, 불안정한 운명 속에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불가능해요. 다른 방법은 있나요?”

 

여전히 부정하는 리제로트. 그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있지. 당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야.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리제로트는 날 악인 취급하고 있을까? 심각하게 경계를 하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조심스레 작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안한 것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뭐죠?”

 

“가장 높은 건 당연히...”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각본을 찢고 불태우는 일 밖에 없지.”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했는지 리제로트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리제로트의 동요는 찻잔 하나를 깨먹고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거 레이베리아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나지막하게 웃은 나는 지금쯤 리제로트의 옆머리로 슬쩍 손을 뻗었다.

 

“다, 당신 바보에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점점 가까이 오는 거에요! 설마 소녀의 첫 키스라도 뺏을 작정으로...!

 

-파바박!

 

손에 따끔한 통증이 도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등에 박혀있는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꽂혀있는 상황.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너의 첫 키스를 가져가는 거냐? 지금 당장 살기를 품고 암살하려는 녀석부터 막아야지.

 

“내 한숨이 너의 말 때문에 가출해버렸잖아. 책임져.”

 

“채, 책임을 지라뇨!”

 

“어라? 카일 씨?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암살하려던 녀석이 태연하게 내가 뭘 하는지부터 묻는 거냐? 그리고, 지금 리제로트를 죽이지는 마라.”

 

내 말에 어깨를 으슥이던 레인은 감정이 알 수 없는 가면으로 들이댔다. 그보다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지금 덥지도 않나?

 

“리제로트를 죽이지 말라는 그 말은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가요?”

 

“이용가치가 아니라 의뢰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의 의뢰를 받고 정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있냐?”

 

“없죠.”

 

“그거 자랑 아니거든?”

 

가늠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뭐, 한번 잘 막아보세요? 어차피 피도 흘리지 않는 걸로 봐선, 카일 씨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모양인데 말이죠?”

 

“뭐. 인정은 하지. 그래도...신은 아니잖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은 있어도, 신의 영역에 돌입하는 인간은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레인과 어쩔 수 없이 한판 벌여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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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이라니!

내가 동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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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7

생리아의 성벽은 망치 소리로 가득했다. 인부들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손에서 손으로 돌을 날랐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함께 성벽 지도를 보며 공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아니는 인부들과 성벽 틈새를 메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아니의 초록 눈은 여전히 빛났고 삶을 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그는 순간을 받아들였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해나갔다.
시간은 강물이 흐르듯이 흘렀고 몰타의 공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새로운 날이 찾아왔고 움츠린 것이 피어났다. 대지는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모든 것은 지나갔고 또 시작되었다. 보키아는 성과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시칠리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발티는 갤리선으로 보내져 동생과 해후했다.
잠시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자 나디아가 성벽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아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동생을 마중나갔다. 사람들은 나디아를 반기며 하나 둘씩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발레트도 그녀를 발견하고 성벽 지도를 접었다. 모두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갓 구운 빵과 치즈 한 덩이에 미소는 저절로 번졌고 마음은 풍족해졌다. 발레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내리쬐는 강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태양 아래에서 먹는 점심은 너무나 달콤했다.
성벽 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나디아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목 뒤로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나디아는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이 넓었고 갤리선 한 대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은빛의 바다는 잠자는 아기의 얼굴처럼 평온했다.
발레트와 나디아의 시선이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한곳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눈길은 스케베라스산에 오래 머물렀다. 산은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고 몰타를 든든히 지켜주고도 있었다. 몰타로 들어오는 배를 환영했고 떠나는 배를 배웅해 주기도 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품었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스케베라스는 몰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나디아는 집을 나서 좁은 골목을 걷고 걸어 광장에 다다랐다. 성 바울 성당은 빛을 받아 눈부신 색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서서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그녀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멈춰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보고 순간 놀란 듯 했지만 곧 미소를 되찾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나디아 앞에 선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해를 등진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나디아는 자신 앞에 나타난 안드레아를 보자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광장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새소리와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 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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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6

보키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얼굴 표정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둘러보며 몇 마디 말을 했으나 얼핏 스치는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발레트가 방에 들어서자 보키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릴라당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트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보키아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금새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키아경, 누군지 알아 보시겠습니까?"
릴라당이 발티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키아는 비토를 보았으나 비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이틀 전, 오스만 정찰병과 함께 있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릴라당이 보키아를 보며 말을 맺었다. 보키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보키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번, 비토 발티가 살람 메메드가 아니라고 증언하셨지요. 몰타의 안전이 걸린 중대한 일임에도 경은 첩자를 감싸 수사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릴라당이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20년 동안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또다시 연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보키아는 안쓰럽다는 듯 발티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키아는 인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포장했지만 그는 철저히 이해득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보키아의 뻔한 답변에 릴라당과 발레트는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발레트는 방을 나갔고 보키아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방에 들어온 발레트를 보자마자 보키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인!"
보키아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말을 계속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부인,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라당이 정중한 태도로 의자를 권했다. 창백한 얼굴의 보키아 부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베일은 쓰고 있지 않았으나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부인, 부군과 비토 발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알고 계신 전부를요."
발레트가 부인에게 말을 하자 보키아는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키아 부인은 발레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월 전이에요. 평소와 같이 성당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섰지요. 뜰에서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새벽에 누군가 싶었는데 남편과 비토였어요."
보키아 부인이 여기까지 말을 하자 보키아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네가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첩자임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절대로 밝혀내지 못 해...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남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발티는 그 후로 남편의 곁에 있지 않았어요. 집안일도 맡지 않았죠. 헌 옷을 입고 다녔고 남편에게 한 번씩 무언가를 보고했어요. 돈 후안경이 집에 초대되었을 때도 저녁 식사 중 남편에게 따로 보고를 했어요."
"에스파냐의 돈 후안경 말입니까?"
발레트가 물었다.
"네,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발티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고 다른 방으로 돈 후안경을 데리고 갔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눈밑은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어색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발레트는 큰 결심을 한 보키아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보키아 부인은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보키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키아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보키아 부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릴라당의 방을 나갔다.
"비토 발티를 아끼는 마음에 그의 정체를 묵인하였다는 경의 말은 믿기가 어렵군요."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키아의 뒤에 섰다.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 후안은 그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를 5세의 측근이지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가 붙잡은 오스만 정찰병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병력과 함선 규모를 발티에게 전했다고 하더군요. 돈 후안경이 그 정보를 알고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발티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키아는 더 이상은 못 듣겠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스파냐를 비롯한 각국에서는 오스만의 동태를 항시 살피고 있습니다. 경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발티를 이용하여 오스만의 정보를 얻고자 했어요. 그 정보라면 에스파냐로 진출할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발티는 당신의 사익을 위해 이중첩자 노릇을 했던 겁니다."
발레트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보키아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비토 발티가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척 했었던 감정이 결여된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동생을 살려야 했어요... 동생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이 쏟아졌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발티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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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쥐들의 도시

 

또 하나가 죽었다. 죽음은 차례차례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서서히 죽었고, 다른 이는 급히 숨이 넘어갔다. 죽음은 변칙적이어서 그들은 괴로웠다.
 쥐. 쥐 떼가 몰려와 곳곳에 파고들었다. 구석에, 틈바귀에, 저장소에, 우물에. 쥐들은 차츰 대담해져 치즈를 실은 수레나 과일 좌판에도 출몰했다. 사람의 눈에 띄이면서도 태연했다. 쥐들은, 차선책으로 풀어놓은 고양이를 물어죽였다. 새끼들은 쥐에게 몸피에서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쥐들은 늘어났고 죽음도 넘쳐났으나 시장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사병들로 하여금 성문을 삼엄히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저택의 문을 꽁꽁 잠근 뒤 엄격히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에 한해 접근을 허락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종말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종말론자들은 곧 죽어 연설은 끊어졌지만, 다음 날이면 새로운 미친 자가 나와 같은 내용을 외쳤기에 끝나지 않을 노래 같았다. 시장은 그들마저 죽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듯 잠잠했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안위 뿐이었다. 
 도시는 고립되었다. 
오랜만에 저택을 찾아온 이는 왕의 특사도 구걸하러 온 거렁뱅이도 아니었다. 그가 걸어가자 덩치 큰 잿빛 쥐들이 꼬리를 흔들며 재빨리 흩어졌다. 가축과 사람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들은 파먹힌 과일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는 그대로 걸어가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보초병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는 병사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병사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시장은 무엇이든지 불신했다. 불신이 그의 큰 자산이었다. 그는 무수한 사람을 배신하고 속여 재산과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타인 또한 믿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대상은 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갑작스레 등장한 이상한 청년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청년은 그가 본 인간들 중 단언컨대 새로운 유형이었다. 
"뭐야, 어떤 새끼가 저거 들여보냈어?"
시장은 대충 가운만 걸친 채 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그렇게 호통을 쳤는데 정작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년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시장에게는 그 태도마저도 거슬렸다. 
"야, 저거 빨리 안 끌어내고 뭐해? 내 집에 웬 천한 광대 새끼를 들여보내다니 니들 제정신이야?"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장을 막은 것은 순간적으로 눈앞을 휙, 스쳐간 커튼 같은 검붉은 형상이었다. 시장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유리잔이 손에서 맥없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숴졌다. 고용인들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받치고 입가에 액체를 흘러넣었다. 
"그동안 피로와 압박감이 심하셔서..."
한명이 조심스레 그렇게 말했고 시장은 흐려진 눈으로도 투명한 잔 너머에 비친 청년의 형상을 보았다. 언뜻 본 그것은 산불처럼 밝게 타오르며 일렁이는 샛노란 불길이었다. 잔이 입가에서 떨어지자, 청년은 이전과 다름없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시장님께서 보신 것은 헛것이 아닙니다."
검녹색 눈의 청년이 말했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붉은 장막을 보셨지요. 그는 쥐들의 제왕입니다. 쥐떼를 몰고 다니며 질병을 퍼뜨리는 악의 징조입니다."
"이런, 씨..."
시장은 이마를 쓸며 난색을 표했다.
"그게 지금 내 집에 들어온거야? 자네도 무슨 대책이 있으니까 날 보겠다고 한거 아냐.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줄테니 일단 날 살려주게. 난 여기 시장이야. 자네가 요구하는 건 전부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찾아왔으니까요."
청년은 거무스름한 얼굴을 숙여 그렇게 말하고는, 접견실에 저택의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그가 펼친 것은 마법도, 의술도 아니었다. 음악이었다. 
 시장의 태도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는 시장의 권위에 걸맞는 의복을 갖추고는 즉시 성대한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했다. 
"내가 자네를 잘 몰라 실례를 했네. 도시를 질병으로 부터 구완해야 할 의무감과 부담감은 나날이 나를 짓밟고 갉아먹었다네. 그러나 이제 자네가 왔으니 나도 시민들도 한 시름 덜었네. 수많은 목숨이 자네 한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모쪼록 최선을 다해주시게."
시장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 사람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눈으로는 줄곧 청년을 훑어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청년은 시장의 마음을 적잖이 풀어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쥐들을 밖으로 몰아냈으니 그들의 제왕은 힘을 잃고 쥐 떼를 좇아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시장님의 저택은 당장에는 역병으로부터 무사할 것이나 바깥의 도시는 그렇지 못하지요. 제게 나흘의 기한을 주시면 도시 곳곳에 웅크린 병의 씨앗을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시장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청년이 쥐들을 모두 퇴치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양의 돈을 요구했을 때도 기분좋게 승낙했다. 
 쥐들의 왕국에 구원자가 납시었다. 골목에서 광장까지, 그가 도시를 누비며 펼친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하잘것없는 피리 소리였을 뿐인데, 쥐들은 그 소리에 홀린 듯이 하릴없이 이끌려가다가 강가에 몸을 던졌다고, 그 광경을 목격한 이는 그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단번에 찾아온 평화에 기뻤고 일견 얼떨떨했다. 그러나 쥐를 퇴치하는 대가로 시장이 그 이방인에게 천 냥이나 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시청 앞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깨끗해진 광장에는 말쑥한 차림새의 시의원들과 시장이 엄숙히 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소!"
한 남자가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전염병 때문에 가축도 식량도 전부 동이 나버렸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판에 시장 당신은 우리의 목숨을 놓고 수상쩍은 떠돌이 외국인 하나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렸단 말이오? 우리가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비쩍 꼴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놓아 시장의 탄핵을 외쳤으나 시장은 이를 타개할 간단한 대책을 세워놓았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검은 피부와 외지의 억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떠맡겨진 약속의 짐을 내던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일단 가장 쉬운 대책이 제안되자 그들은 만장일치의 동의를 보였는데 사뭇 오랜만의 일이었다. 시장은 조소 어린 거만한 자세로 청년에게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는데 쥐들이 사라진 거리는 깨끗이 닦여 윤기가 흘렀고 건물은 위용이 넘쳤다. 꾀죄죄한 아이들이 쥐처럼 빠르게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수레를 끌던 노인은 바퀴가 죽어 널부러진 돼지의 시체에 걸렸는데도 제자리에서 멈춰선 채 나아가지 않는 수레를 밀고 밀기만 했다. 
"좋은 경험으로 여기도록 해. 이 또한 신이 정하신 운명이니,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똑똑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겠네. 그 꼬라지로 와서 천 냥을 요구하다니, 그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 아니던가. 주제 파악을 하도록. 이만."
 시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고 경비병은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청년은 시장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시장은 커튼을 내려 청년의 시야를 막았다. 마치 배신을 기다려왔다는 듯, 숲의 가장 깊은 구역을 닮은 눈 속에 환한 불빛이 켜졌다. 모멸 당한 청년은 등을 돌리며 모자를 깊숙히 눌러 그 빛을 삼켰다. 도시의 씨는 모조리 말라 버릴 것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어리고 약하고 무방비한 존재들은 쥐들이 그러했듯 정체불명의 음악에 이끌려 물가로 하나하나 춤추듯이 행진하다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질 것이었다. 
 사람들은 허둥지둥대다가, 전말을 알아차리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하늘을 저주하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이제는 사라진 이방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분노는 시장에게 향했다. 갓난아기를 제외한 아이란 아이는 모두 사라졌다. 골목의 거지에서부터 시장의 자식들까지 하룻밤만에 연기처럼 홀연히 증발했다. 시장은 자신도 같은 피해자일 뿐이고 시민들 모두가 이미 동의한 사안이 아니냐며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분노로 눈먼 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시장은 쥐의 비가 쏟아지는 꿈에 시달렸다. 쥐들이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며 지붕과 바닥과 기둥에 부딪혔다. 쥐들은 금화를 갉아먹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건물을 갉아먹고, 치즈와 사과를 갉아먹고, 사람을 갉아먹었다. 열 살 난 아들은 그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슬프게 뜬 채 시장을 바라보았다. 쥐들이 들불처럼 번져 아이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의도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저주가 아니었어. 그 놈이 찾아왔던 게 저주였던거야. 쥐들의 출몰은 그 놈의 출현을 위한 전조에 불과했어!
시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창 너머 떠오른 달은 너무도 깨끗하게 보였다. 잿빛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날의 조용한 도시 속 사람들은 슬픔에 지쳐 미적거렸다. 시장은 이불을 제치고 숨겨왔던 상자를 꺼내 열었다. 칼날은 새것처럼 순정하게 빛났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죽거나, 청년이 죽거나 , 그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계획이었다. 오늘 밤에 끝낼 생각이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는 침묵을 원했지만 넌 그보다 더한 것을 빼앗아갔다. 쥐들은 사라졌지만 도시는 생기를 잃었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네가 인간이든, 요정이든, 오늘 밤에 결판을 내야겠다. 그 이상한 음악으로 날 쥐새끼들처럼 만들어보라구.'
 시장은 청년이 찾아온 날 보았던 붉은 장막 같은 형체를 기억했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청년이 쥐의 왕이니 역병이니 했던 그것을 떠올리자, 무섭기는커녕 기묘한 쾌감을 동반한 저항 욕구가 솟았다. 가까이에 두면서도 결코 소중함을 몰랐던 보석이 휘발해버렸다. 그것이 사라진 이상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시장은 칼을 품 속에 감추고 검은 밤 사이를 내달렸다. 아무도 모르는 구멍을 빠져나왔을 때, 때모를 소나기가 내렸고 천둥이 으르렁댔다. 피부를 때리는 빗발의 소음 틈으로 찍찍대는 쥐 소리가 들렸다. 쥐들의 제왕은 창궐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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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5

발레트는 모래색 돌로 차곡차곡 올려진 건물 벽을 손끝으로 만지며 걷고 있었다. 처음 몰타에 발을 내딛던 날이 떠올랐다. 지중해 한가운데 솟은 작은 도시는 로도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벽에 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타로 들어왔고 자신도 그들과 같이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이 벽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발레트는 모래색의 돌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뜻밖의 목소리에 시간은 현재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영롱한 초록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본래보다 밝게 보였다. 나디아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로 발레트에게 걸어왔다.
"나디아!"
발레트는 벽에 올렸던 손을 내려 허리춤에 찬 칼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아침 일찍 어딜 가는 거에요?"
"성당에요."
나디아는 눈을 크게 뜨며 발레트를 보았다. 그녀는 발레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도 성당에 가는 길이에요."
발레트는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어 나디아에게 길을 내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갖고 있었다. 골목은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고 소리는 리듬이 되었다. 리듬에 따라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이따금씩 마추치는 시선은 미소를 불러왔다. 모퉁이를 돌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빛에 의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건하고도 평화로웠다. 발레트는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광장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아름다웠다.
"아침의 광장은 늘 황홀해요."
나디아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성당으로 향하는 똑같은 길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순간이 특별했다. 발레트도 나디아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저 편으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웠다.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주위에 감탄하며 성 바울 성당으로 이끌려갔다.


성당 앞에는 며칠 전과 같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발레트는 마차를 힐끗 보고는 나디아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성당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군가와 얘기 중이던 피오르 신부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부 옆에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로 올린 여인이 있었다.
"오, 나디아."
피오르 신부는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베일을 쓴 여인은 발레트와 나디아를 보자 얼른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감추더니 신부에게 인사한 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방금 지나간 여인은 보키아경의 부인이 아닙니까?"
발레트의 물음에 신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발레트는 빠른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만!"
여인의 등 뒤로 발레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을 쓴 여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보키아경에 관해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보키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여인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발레트도 걸음을 늦췄다.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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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7

590

 

 

 

그나마 다행이라면 평생 여장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 결국 불행해지는 건 잡화점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나의 거주지라는 것은 또 다른 태클의 시작이었으니까.

 

“주인은 짐의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가? 흐응...짐에 대한 애정이 식었구나.”

 

“남에게 저주를 씌운 것이 어떻게 애정의 표현으로 될 수 있는지 서술해보시죠. 5점을 드릴 테니까.”

 

“1번이니라.”

 

“객관식 아니라고!”

 

애정이 식었네 뭐하네 하는 주제에, 결국 검은 고양이 상태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레시아. 13대 마왕이고 타락의 마왕이면서, 결과적으로 내 사역마였으나 지금은 결혼을 했으니까 부부관계인데. 솔직히 어떤 부부가 남의 옷에 저주를 퍼붓냐고?

 

아마. 나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레시아의 입장에서는 나는 좋은 마나 창고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좋은 장난감 하나라고 취급하겠지.

 

“그렇군. 주인은 그 옷이 귀엽지 않아서 해주를 한 것이로군.”

 

“아니. 남자가 여장을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이미 글러먹었다니까요.”

 

“뭐 아서라. 짐이 조만간 더 귀여운 옷으로 주인에게 선물할 테니 말이다.”

 

“아 글쎄! 여장 때문에 벗어 던진 거라니까요!”

 

이렇게 소리를 쳐도 레시아는 레시아 나름대로만 생각을 하는 중이다. 어깨 위에 올라온 하얀 올빼미는...

 

“마스터에게 입혀야 할 옷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여장이 아닙니다.”

 

“그래도 시나 밖에...”

 

“저처럼 하얀 날개를 단 천사복장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왜 그런 걸로 싸우는 건지 이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태세전환이 우디르를 넘어 드랙스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제발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아줄래?”

 

잡화점 안에 돌아가도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 그래도 밖에서 골치 썩는 것 보단, 여유를 가지고 조그마한 트러블에 대응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잡화점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과 정신의 피로를 달래보려고 했으나, 어린 아이처럼 달라붙는 레시아와 시나에 의해 편하게 쉰다는 단어가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나중에 지구로 모여서 롤링발칸이라도...아니, 너무 갔으니 그만하자.

 

“뭐.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있게만 해준다면 여장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인기가 은근히 좋다. 아니, 좋아도 너무 좋다. 어째서 연관되는 사람들마다 주인을 원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일을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건 사람의 호불호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와 위치가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일이다. 잡화점의 주인은 기괴하게도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긴 하는데, 잡화점이라면 보통 진귀한 물건이나 대규모의 잡화물품을 의뢰 받는 건 줄 알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해결사나 잡일을 처리하는 1회용 노동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그래도, 의뢰의 보상이 어째서인지 백장미의 매출을 못 따라가고 있는 아이러니함마저 의구심이 들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하기 위해 나를 지목하는 사람과 몬스터가 많이 있었다.

 

과거에 실베스 씨가 기괴한 청혼을 위해 도와달라는 말부터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할 거니까. 리제로트의 의뢰만 처리하고 돌아가죠.”

 

“그리고 그녀도 잡화점에 들어오는 겁니까? 마스터?”

 

“아니. 리제로트까지 과거로 데려갈 이유는 없지. 그런데, 지금 당장 레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서에서 풀려난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초능력자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지만, 레인의 경우에는 감춰주고 숨겨주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다른 곳에서 아리엘이 터벅터벅하고 걸어왔다.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진 키가 크지 않은 상태. 아니...오히려...

 

“왜 키가 작은 거냐?”

 

“무슨 소리에요? 제 키는 원래부터 작았다고요? 아담한 사이즈를 좋아한다는 카일 씨의 성향에 맞춘 건 아니라고요?”

 

“듣기만 해도 오해 수치가 100정도 쌓일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그리고 미묘하게 츤데레 캐릭터를 따라 하려고 들지도 말고. 너의 캐릭터는 애초에 뭔지 나조차 이해가 안 되니까.”

 

“전에는 마신을 한번 했었죠.”

 

“그런 거 말고!”

 

자주 못 봐서 그런 건지 몰라도, 사람이 성장을 한다면 키가 크고 있다는 걸 느껴야 하는데, 아리엘의 경우에는 키가 작은 건지 아니면 저게 성장한 건지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보다 마왕님. 여신님. 제 자리가 없잖아요!”

 

“그보다 신랑. 내 자리는?”

 

루시피나는 요리하다 말고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내가 교제를 한다고 했을 때 정상적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늘씬한 미녀. 레드 드래곤의 일족임과 동시에 첫 혼인 대상자다.

 

어른스러운 면이라기보단 다정다감한 누나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평상시의 모습이고, 루시피나가 화를 낸다면 그것보다 더 살벌한 상황은 없다. 그나저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말이 들어야만 했을까? 아니, 그보다...

 

“모두가 그렇게 몰려오면 제 입장이 어떻겠어요?”

 

“행복하지 않는가?”

 

“행복이기 이전에 힘들다고요!”

 

모든 남자들이 그런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미녀나 미소녀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달라붙는 상황이 현실로 찾아온다면, 사실상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소리다. 최소 0.3초 동안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는데, 과연 저 사람들이 다 달라붙으면 나는 숨이라도 쉴 수 있는가?

 

생존부터 걱정하는 내 입장에선 행복하기 이전에 살아 돌아갈 수 있느냐가 더 걱정이다.

 

“그래도 짐의 취급을 공기로 하는 것보다 좋지 않는가? 아니면 뭔가? 짐이 귀여운 여자아이가 되어 공기취급으로 되는 걸 원하는 것인가? 역시 주인은 은팔찌를 차야 하는 인물이로다.”

 

“아뇨. 언제 공기취급을 했는데요? 제가 레시아를 공기취급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마스터. 저희들의 출현이 어째서 잘 일어나지 않는지 설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그 기괴한 여장만 시키지 않았더라면, 나의 행적은 잡화점 내부로부터 시작했겠지!”

 

일어날 때 개운하게 일어나면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평화로운 나날을 기리고 있다만, 요즘 들어 자고 있는데 계속해서 결계가 깨져나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부부인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초죽음 상태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늘도 눈을 떠보니 여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라는 상황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야.”

 

“맞습니다. 마스터.”

 

“아니라고!”

 

하긴 이미 여긴 평범이라는 말이 치고 들어갈 수 없는 건가? 내 인생에 평범이라는 단어와는 더 이상 견우와 직녀마냥 만날 수 없는 건가? 아니, 만날 수는 있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에 불과하나?

 

혹은 내가 평범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진실을 가지고 있거나, 나는 평범할 수 있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말장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결국 평범이라는 단어와 사이 좋게 지낼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한숨을 접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주인에게 밀착하려는 자들이 많은가!”

 

“어째서긴요. 레시아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선 정리가 필요하겠다!”

 

뭔가 또 난장판이 될 징조가 보인다. 안 그래도 리제로트의 의뢰를 빨리 해결하고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레시아가 저러면 의뢰는 과연 언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뭐 어쩌시려고요. 1주일마다 달라붙을 수 있는 사람들을 지정할 겁니까?”

 

“아니. 짐이 주인에게 달라붙어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짐이 주인의 곁에 없을 때는 그 누구도 달라붙지 못하도록 하겠노라!”

 

너무 당당한 나머지 이 고양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못 알아 들을 지경이다.

 

“말도 안 됩니다. 냥캣. 그런 억지를 부리기 전에 냥캣의 인성을 다시 되돌아보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짐은 본래 마왕이니라!”

 

고양이와 올빼미가 또 한바탕 싸우고 있는 동안, 방 안에서 짜증나는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지 않는가! 모처럼 첩이 자고 있는데...어라? 카일이여! 언제 온 것이냐?”

 

성인이라고 보기엔 한참 힘든 외형이지만, 연한 초콜릿 피부를 가진 소녀는 사실상 어마어마한 신급의 카테고리로 들어간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을 무렵.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흔들의자가 더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무게가 늘어났으니...

 

“아아.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첩은 언제나 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빛 잠옷이라는 게 그리 귀엽지는 않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팍에 파묻었다.

 

“자, 잠깐만! 허무의 공작! 짐이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뛰어들다니!”

 

“어라? 아까 마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왕님께서 붙어계실 때는 그 누구도 상관없다고.”

 

“아직 개정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만간 세린에게 찾아가 내 개인적인 방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보다, 잡화점의 규칙에 개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잡화점 규칙에 나에게 달라붙는 규칙을 적는다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건 없지만, 애초에 주인은 나라서 내가 직접 개정하지 않는 이상, 그런 바보 같은 규칙은 늘어나지 않는다.

 

잠깐? 규칙이라?

 

“맞아! 규칙! 규칙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었어!”

 

“마스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뜬금없는 나의 외침에 시나가 당황한 듯 묻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규칙을 바꿀 수 있으니 솔직히 내가 인간이든 아니든, 마지막 항목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에 인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저 어떤 사람이라는 말을 제대로 바꾸기만 하면, 내가 인간을 초월하든 말든, 잡화점의 주인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하길래,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했는데, 그냥 잡화점의 규칙을 잠깐이나마 바꾸면 되는 거였어.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네. 이제 리제로트의 의뢰만 어떻게 해결하면 과거로 그냥 돌아가자고. 미래에 더 있는 건 위험하니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마스터.”

 

“응?”

 

“마리아와 얼마나 붙을 생각이십니까?”

 

사, 살기!?

 

작은 올빼미에게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이전에!”

 

나는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안 그러면 레시아와 작정하고 또 다시 마법을 날릴 테니까.

 

“지금 나가서 할 일이 있어요.”

 

“안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랑을 증명해보거라!”

 

“뭘 증명해요!”

 

“그렇다면 사랑의 저주를...”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잖아!”

 

결과적으로 다시 저주받은 여장을 당하기 전에, 모두를 설득하는데 애쓰고 모두가 진정할 때쯤 시간은 흘러 새벽에 이르렀다. 언제나 규칙에 따라 잡화점 운영을 하고 있는 나는, 레시아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리제로트라는 자는 전에 주인을 납치한 자가 아니더냐? 그런데 이번엔 목숨을 구해줬으니 도와달라는 건가?”

 

“뭐. 그런 거라기보단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엘 샤다이를 말하는 건가?”

 

“괜찮아. 문제없어. 라는 대사를 하기 싫으니까 이상한 요소를 가져오지 마시죠.”

 

검은 고양이에서 가지런히 앉아있는 여성으로 변한 레시아. 지금 상태에서 정신방어가 약한 사람이 본다면 죽거나 심한 경우 침을 흘린다고 하는, 변칙적인 패시브를 지니고 있었으나, 잡화점 멤버에는 정신방어능력이 모두 뛰어났으니 발작을 일으킬 일은 없었다.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스윽 하고 쓸어 내리며 팔짱을 끼고 있는 마왕. 그러면서도 위압감이나 카리스마는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칠흑의 드레스로 무장된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

 

“그래도 그런 장비는 괜찮은가? 에서 그런 말장난은 괜찮은가?로 변환하면 써먹을 수 있지 않는가?”

 

는데...진지하게 생각한 것이 겨우 그거라는 생각에 내 자신이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런 생각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뇨. 못써먹어요.”

 

“써먹을 수 있노라!”

 

어디까지 우기는 거냐.

 

“리제로트가 뭔가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유랑극단이건 레인에게 암살당하던 둘 중 하나는 못 막을 거 같네요. 잡화점 안이 가장 안전하지만...”

 

“유랑극단의 신분이 있으니 이쪽에서 보호하는 것은 무리로군.”

 

분명 또 “주인은 어린아이가 그렇게도 좋은가!”라고 말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기대한대로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서 레시아가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 상황에선 유랑극단과 선전포고를 한 이상. 리제로트를 통해 이곳의 위치가 들킬 수 있어요. 기껏 가짜 좌표를 깔아놔도 포위망이 좁아지는 판국에, 트로이목마처럼 들어오는 날엔 끔찍한 경험을 하겠죠.”

 

“맞다. 그 뼈다귀 샌...”

 

“제발 부탁인데 그 이상 다른 요소를 가져오면 아이언 클로부터 날릴 겁니다. 그러니 그만하시죠.”

 

진지한 이야기에 ‘골’판지 같은 개그가 나오면 진심으로 때릴 테다.

진정한 양성평등주의자는 여자에게도 드롭킥을 선사할 수 있는 신사이지 않는가?

맞을 짓을 하려고 매를 벌면 사랑의 매로 다독거리면 된다. 물론 그 사랑의 매가 아이언 클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마스터.”

 

눈빛보다 더 새하얀 소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시나? 자고 있는 중 아니었어?”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 깼습니다.”

 

분명 잠이 많긴 하지만, 새벽에 이야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깨어날 줄은 몰랐다. 언제나 내 몸 속에서 동화를 한 체 휴식을 취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경우는 전혀 없을 텐데.

 

“흥! 그대로 영원히 자고 있지 그런가? 비둘기.”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 입니다. 냥캣.”

 

“어쨌든간! 지금은 주인과 짐의 사랑의 밀담을 하고 있지 않는가! 방해가 되니 저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자기나 하거라!”

 

“제가 눈을 감는 장소는 언제나 마스터의 품입니다. 이렇게 꼬옥하고 안으면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정신차려보니 언제부턴가 나에게 안겨서 하품을 하는 시나.

 

“잠깐! 언제부터 나에게 안겨 있는 거야?”

 

“주인!”

 

“아니! 잠깐만! 이상해! 킹 크림존이 있는 거 같아요! 지금 시나가 저에게 안기는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만 남았잖아요!”

 

진노하는 레시아를 진정시키려면 얼마 동안의 노력이 필요할까? 한줄기의 희망은 있는 걸까? 음...이때는...

 

“레시아도 오시던가요...”

 

-꼬옥

 

“비어있는 반은 짐의 자리니 넘보지 말거라.”

 

“냥캣이야 말로 제 영토를 침범하지 마시죠.”

 

이제서야 저 둘을 어느 정도 다루는 요령이 생기는 듯했다.

 

“정해진 운명을 부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운명을 부수고 다른 미래를 새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요.”

 

레시아와 시나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마왕과 여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갈등되는 고민 속에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듯한 모습과는 달리, 신비로운 운명론에 대한 무거운 분위기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주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의 질문은 하나로 뭉쳐졌다.

 

“모르죠. 저야.”

 

내가 어찌 알겠나?

 

“어쩌다가 운명이 부셔진 것마저 운명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운명이란 건 생각하지도 않아요. 원인과 결과와 나비효과가 겹쳐진 게 운명이라고 해도, 솔직히 그게 운명인지 아닌지는 알게 뭡니까? 막말로 제가 다른 세계에서는 레시아와 대적관계가 되었을 때도 레시아가 지던 이기던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된다. 주인을 이겨서 짐에게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대화의 취지는 운명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라는 거고! 어째서 저를 복종시키는 건데요!”

 

딴 이야기로 빠져나가는 게 마왕의 일인가?

 

“그때는 제가 마스터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을 테니, 냥캣은 소멸이나 당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뭐...다른 세계에서도 레시아와 시나는 싸우는구나.

애초에 존재 할 일이 없는 세계일 터인데...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주인의 품이 짐의 방이다! 여기서 자겠다!”

“마스터가 계신 곳이 제 휴식처이니 이 상태로 잠을 청하겠습니다.”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는데 자장가부터 불러주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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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축구 때문에 일찍 퇴근하고 써내렸다가 지금 올립니다.

꽤 늦었는데...원인은 당연히 일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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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4

발티는 항구 일꾼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글을 빠르게 읽은 후 순식간에 종이를 입안으로 넣어 삼켜버렸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뜰을 가로질러 나갔다.
도시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인적이 없는 컴컴한 길에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어느 골목에 들어가 막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누군가 그의 등을 건드리자 발티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았다. 몰타인처럼 변복을 한 투르크 정찰병이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뜻을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연락은 내쪽에서 하기로 했잖소."
발티는 목소리를 낮추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정찰병은 다시 한번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대답했다.
"중요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어 만나자고 했소. 급한 일이오."
검은 눈의 남자가 심각하게 말하자 발티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정찰병은 숨을 밖으로 길게 내보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이 생기..."
정찰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티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팔이 꺾였다. 발티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며 당황해 했으나 이내 상황이 파악된 듯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발티는 변복을 한 검은 눈의 사내를 쳐다보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순히 기사들을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갔다.

 

 

릴라당과 발레트는 서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정적을 깨고 로메가스가 들어와 릴라당에게 보고를 했다.
"단장님,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게."
릴라당이 대답하자마자 기사 두 명이 발티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발티는 손이 앞으로 묶인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발레트는 발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토 발티, 아니 살람 메메드. 넌 몰타 첩자로 체포되었다."
릴라당이 입을 열었다. 발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난 현장에서 잡혔소."
발티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을 숨긴 텅 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비토 발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군."
발레트는 발티 앞에 섰다. 발티는 발레트를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너의 신분을 보키아는 왜 숨겨준 거지?"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끝난 것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끝을 알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후련했다. 발티는 자신 앞에 놓여질 것을 이제 당당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발레트는 릴라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릴라당은 내보내라는 눈짓을 했고 로메가스는 발티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예상대로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릴라당은 의자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입니다. 보키아가 연관된 것은 끝까지 말하지 않을 겁니다."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키아는 발티가 첩자임을 알고서도 감춰 주었고 사욕을 위해 그를 이용했어. 이 일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보키아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가 꼼짝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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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정의

정의 JUSTICE

: 올바르고 공정한 도리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 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中 이방원의 말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것은 아마도 ‘답’이 아니라 ‘입장’일 것이다. 모든 생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때문에, 스스로가 선한지 악한지를 가늠해보는 일, 그리하여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은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의견을 가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선과 악의 두 가지 선택지 중 자연스레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다면, 다른 답안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다른 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을 접한 적이 있다. 3년 전 드라마 안에서 만난 그는, 다름 아닌 이방원이다.

 

 2015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제목 그대로 육룡(六龍)에 관한 이야기다다. 육룡이라는 단어는 세종(조선의 4대 임금)이 가사를 지은 <용비어천가>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는데, ‘해동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본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을 의미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삼봉 정도전이이라는 실제 인물들과 함께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섞어 역사와 판타지를 함께 버무려 놓았다.

 

 그 중 이방원은 선과 악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거머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통해 선과 악 그 어떤 쪽에도 답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 자신만의 신념을 따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을 믿고 따르는 일을 곧 ‘정의’라고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이방원의 첫 좌절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아버지 이성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올곧은 사람이라 믿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정치를 위해 한 발 물러서며 악(극중 이인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어린 방원은 상처를 받고 실망한다. 이에 아버지와 함께 함주로 돌아가는 대신 개경에 남아 성균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꿈 많은 방원이 성균관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는 어그러진 일들이 너무도 많이 존재했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벌을 받지 않았다. 대신 선한 자들이 수치를 겪어야 했고, 그 수치스러움을 참지 못해 죽음에 몰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단발성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거의 생활처럼 여겨지는 것 같았다. 어린 방원은 블랙홀처럼 크나큰 혼돈 속에 빨려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존경했던 스승(극중 홍인방)마저도 변절하고 말았다. 권력자(극중 길태미)와 사돈을 맺으며 그 또한 권력자로 올라선 것인데, 방원은 그런 스승의 모습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환멸을 느꼈다. 비뚤어진 일은 곧 방원에게도 찾아오고야 만다. 몇몇 힘 있는 유생들(극중 길태미의 아들 길유 外)이 명나라에서 <맹자>를 금지했다는 까닭으로 <맹자>를 공부하는 유생들을 심하게 괴롭히고 있었고, 그 괴롭힘의 손길이 자연스레 방원에게까지 뻗어온 것이다. 이방원 역시 다른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합니다. 그는 사내가 부끄러움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내 다른 동료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했다 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품고 삶을 연명한다는 것 역시 괴롭기 짝이 없는 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 또한 간파하고 있었다.

 

 결국 이방원이 택한 것은, 자신에게 수치를 떠안긴 일당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는 일이었다. 그 처단은 가장 극단적인 벌, 죽음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악은 절대로 가기 싫은 길. 선은 악 앞에서도 그저 그 모든 것들을 품어내고 감내하는 길. 이 두 가지 갈래는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올바른 해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정의’를 택한다. 정의는 악을 용납하지 않으며 무조건 참아내지도 않는다. 대신 악을 방벌한다. 쉽게 말해 악을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방원은 권력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마는 인간에게는 선이 최선의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악을 떳떳하게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신념과 정의라고, 그는 믿었다. 누군가의 악은 품어준다 하여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직 처절하게 심판받을 때 비로소 종적을 감추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신념에 기초한 정의관은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과 판단력이 곧은 방향으로 서지 않으면 자칫 위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을 믿고 결심을 행동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강단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요즘 우리 세대를 일컬어 ‘결정 장애 세대’라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가질 시간도 없이, 그저 쏟아져 내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 목소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 폭력과 광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인물들이 언젠가부터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현 시대에 없는 정의와 스스로에게 부족한 결단력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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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인스턴트 맨

 

 

 

  퇴근 후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키를 집어드는 것. 군더더기 없는 몸짓과 함께 그대로 자신과 어딘가 묘하게 닮은 차에 올라타 미끄덩, 30분을 달려 그가 도착한 목적지는 편의점이었다. 익숙하다는 듯 레토르트 식품을 넣어둔 곳으로 직행, 몇 개 남지 않은 도시락 중 가장 가성비가 좋은 걸 골라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지만 아직은 삼십 대, 대기업 근무, 본인 명의 20평형대 아파트 보유, 큰 키, 서글서글한 외모, B** n시리즈의 자차 소유, 호탕한 성격. 다른 사람들 말에는 그냥 웃어넘기거나 혹은 변변치 않은 핑계를 대곤 했으나, 그는 사실 자신이 왜 여태껏 혼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직장 동료나 같은 나이의 인간들과는 달리 꽤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감성적이니까, 그러니 감수성이 넘쳐흐르는 나는 따라서 여자들에게도 꽤 괜찮은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텐데. 솔직히 말해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면, 그는 여자를 만난 경험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일정 수준의 시간에 도달하면 이별이 찾아왔다. 분명히 좋아하는데, 어쩌면 사랑하는 것도 같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나게 되는 그였다. 도통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애도 결혼도 너무 큰 과제처럼 느껴졌다.

 

 2025년 6월 어느 날, 그는 TV에서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지난 해 체결된 ‘보어링협약 Boring Convention’에 따라 내달부터 사랑이 전면 금지된다는 것. 보어링협약의 정식 명칭은 ‘인류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서 조절에 관한 협약’이며, 2024년 6월 18일 미국 오리건 주의 Boring이라는 도시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보어링협약이라 부른다 했다. 협약에 참여한 168개국 국민들에게 7월 1일부터 내장형 칩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삽입 즉시 효과가 발동될 거란다. 그는 한 국가나 국제사회가 중대 사항에 대해 무언가 결정을 내릴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지내온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규율과 질서를 군말 없이 잘 지키는 편에 속했고, 그래서 ‘법 없이도 잘 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런 그가 이번 보도를 접하고는, 처음으로 큰 혼란을 느꼈다. 사랑이 금지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류를 거부한다는 건 그에게 더더욱 상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도 다음 날 저녁부터 그의 퇴근 시간이 당초보다 1시간가량 늦어지기 시작했다. 거리가 촛불을 든 인파로 넘실댔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집에 들어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포털사이트에 접속해도 온라인 사이트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저들의 자취가 줄을 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어링협약에 반발하는 것 같았다. 그는 광화문을 지나며 마주친 ‘인간실격’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인간다움이라는 게 뭘까. 사실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생각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므로.

 

 7월 1일, 등기로 배달된 내장형 마이크로 칩을 삽입했다. 우리 집 강아지랑 똑같네, 칩을 넣으며 껄껄 웃는 부장님의 옆모습이 왠지 불량식품을 삼킨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꽤 설렜다. 언제나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시대정신을 따르지 못하면 도태된다. 나는 이번에도 도태되지 않을 것이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가 오가는 길 위에는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 시위가 언제 끝날까, 길이 너무 막히는데. 내년에 완공된다는 새 도로를 타고 속도를 올리는 상상을 해본다. 기분이 나아진다. 칩을 장착한 뒤 그는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아마도 몸속에서 좋음의 정서가 과잉 반응하는 걸 예방하는 대신 다양한 대상을 애호할 수 있도록 분배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확실히 사랑이 없는 세계는 더 안락한 듯 보였다. 심장을 뒤틀리게 할 만큼 큰 감정소비가 사라지니, 연인이 되는 일부터 시작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개별 사건들이 속속 타결되니 생활 자체가 간략해졌다. 인생을 복잡하게 하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 걷어지니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건조하면서도 평화로운 시간이 지속되었다. 그는 인스턴트 음식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것이 인류의 건강을 크게 해칠 거라며 호언장담했던 전문가들의 근심 어린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새 자기 삶의 영역에서 인스턴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져있음을 눈치챘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그는 퇴근 후 1시간을 달려 새로운 연인에게 향한다. 이번에는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이제 “너무 아픈 사랑은 하지 말자”며 연애에 억지로 한계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아마 곧 자신과 많이 닮은 그녀와 결혼해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매끈한 검정색 자동차가 촛불을 뒤로 하고 도로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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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Echoes in the box

폐허에는 유령들이 맴돌았다. 무너진 건물의 구석진 방에도 유령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갑작스레 벗어난 혼들이었다. 땅으로 푹 꺼지던가, 하늘로 휘발되듯이 날아가버리던가 했어야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기에 같은 자리를 공허하게 돌았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죽지 못한 말들이었다. 살해당하지 못한 언어들의 망령이었다. 그들이 지껄이는 말은 거대한 원통형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안에는 푹신푹신하고 꿈틀거리는 붉은 주름들이 가득한 점막이 자리했다. 망령들은 그 위에 떠다니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의식은 죽었지만 언어는 살해당하지 못했다.
세계는 가끔 흔들렸다. 망령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자리를 맴돌며 같은 말만 뇌까렸다. 그들은 진동 만을 느꼈으나 의식 너머로 그것은 맥없이 흘러갔다. 하늘에는 흰 구멍이 열렸다 닫혔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그 정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하늘 너머, 세상의 밖까지 흘려갔다. 때로는 선명히 울려퍼지기도 했다. 어떤 망령은 그 이변을 깨닫고 몸부림쳤다.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고, 커졌다. 점막이 꿈틀댔다. 유령들의 메아리는 거세졌다.
 그들이 입을 모아 고함치기 전까지,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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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지진계

 

 

 

  어른들의 "나이 들어도 마음은 언제나 같아" 라는 말을, 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겉모습이 변하는 만큼 안에 있는 것들도 조금씩 바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 편견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 있었다. 몇 년 전, 독립잡지를 취급하는 홍대의 작은 서점을 구경하다가, 그 안에서 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거진을 읽느라 한참 동안 서 계신 노년의 한 신사분을 보았다. 마치 오래된 그리고 단단한 고무나무처럼 우뚝 선 그 신사가 왠지 신기했던 나는 덩달아 곁에 선 채로 책장을 군데군데 찔러보던 중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분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 자주 오냐고, 나는 가끔 온다고. 당시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독립잡지를 발간해보자는 목표를 두고 있었던지라 서울에 있는 독립서점들을 종종 순회하는 편이었다. 내 사정에 대해 말씀드리자 눈을 반짝이던 그 신사는, 그런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곳에 모이는 것 같다며, 사실은 자신도 기회가 된다면 이런 잡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무얼 만들고 싶은 거냐고 되묻는 나에게, 본인은 평생 동안 좋아하는 가수들의 LP를 모았으며 그 옛날 노래들이 죽고 난 뒤에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감탄했다. 그의 음악적 소양이 얼만큼 깊은지를 확인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취향이 변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 취향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것임을 밝히는, 노신사의 스스로에 대한 애정에 존경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스스럼 없이 말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취향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한없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얼마 전, 21년 전부터 좋아해온 가수의 라이브 공연에 다녀온 나는 2003년 전 발매됐던 앨범의 타이틀곡이 2018년에 다시 들어도 내 마음을 뒤흔든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학창시절 은색 CD 플레이어와 함께 마치 분신처럼 들고 다니며 닳도록 들었던 그 앨범은, 언제나 같은 반 남자애들이 야자시간에 빌려달라고 성화였기에 내 자랑거리였다. 내 어깨를 수직상승하게 했던 명작. 음원 재생목록에 한 곡 반복을 걸어놓고, 나는 어린 나와 지금의 내 모습을 동시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 그 노신사를 떠올렸다.  만약 그를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겠다고 다짐했다. 서로가 좋아해온 노래를 바꿔 듣자는 인사.

 

  안녕하세요. 그 노래들이 당신 마음의 지진계에 얼마만큼의 진동을 기록하는지, 그 떨림은 어디로부터 시작돼 어디로 전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당신의 노래가, 당신의 취향이, 당신의 마음이… 아니, 당신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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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3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바쁜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성 바울 대성당으로 향했다. 앳된 얼굴의 수사는 앞장서서 긴 복도 끝에 있는 피오르 신부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신부는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들 오시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예의를 갖추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오르 신부는 앉으라 권하며 발레트와 로메가스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기사단이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발레트는 피오르 신부의 얼굴을 바로보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몰타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가 몰타 내부에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발레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자는 사익을 위해서 옳지 않은 일을 묵과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하여 신부님을 찾아 왔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몰타를 위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혹시 이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신지요?"
발레트는 조심스레 신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피오르 신부는 만났을 때와 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은 주님의 성전입니다. 그런 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이것에 관해 알고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부님!"
발레트는 간곡한 말투로 피오르 신부에게 청했다.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지 내게 하는 것이 아니오. 미안하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없소."
피오르 신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발레트는 신부에게서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신부에게 인사를 한 후 뒤를 돌아 나가려했다. 그때 피오르 신부의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오."

 


발레트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고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상한 자. 신부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발레트는 신부의 말을 곱씹었다. 신부는 뒤돌아 나가려는 발레트에게 이 말을 했다. 그의 머리 속에 신부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신부가 무엇을 알려주려던 것은 아닐까?'
그는 복잡한 생각을 쫓고 싶었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발레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기사단 숙소를 나섰다.
성당 앞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성당 정문이 열리자 발레트는 반사적으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피오르 신부가 나타났고 그 뒤로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정문 앞에서 짧은 얘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베일을 쓴 여인은 계단을 내려가 대기하던 마차에 올랐다.
'이른 시간에 성당을 찾은 귀족 여인이라.'
마차는 광장을 돌아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임디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보키아의 성채로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