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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학원에서 크게 깨졌다. 이번에는 과외를 짜르겠다는 말 까지 나왔다. 그 선생님 앞에만 앉으면 말이 안나온다. 자신감이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 처럼 머리 속이 하얘지고 내가 맞는 답을 하는지 자꾸만 눈치를 본다. 그럼에도 그만두지 못한다. 그 선생님께 배운다고 더 나아지는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건 마지막 자존심인걸까. 치기 어린 마음이라는 건 잘 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스트레스 받는 건 나인 걸 안다. 그렇지만 그 선생님을 놓아 버리면 꼭 지는것만 같다.

나는 욕먹어도 잘 참는다. 내가 공부 안했다는 걸 아니까 굳이 변명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내가 못 견뎌서 나가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금 울었다. 그 선생님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내가 다니려는지 마음이 흔들렸다. 이렇게 힘들어 하면서 잘 가르친다는 쌤한테 배워야 할까? 그게 내 대학에 큰 영향이 있을까? 선생님은 내가 갈 대학이 뻔히 보인다고 했다. 진짜일까?

영화 한편 보고 마음을 좀 가라앉혔다. 내일 학교가면 그냥 피곤한 일이 있었다고 해야지. 친구들한테 학원쌤한테 욕들어먹었다 해야지. 그리고는 수다도 떨고, 야자할때 좀 졸고, 책도 읽어야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것 처럼 책을 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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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망각을 불허합니다

 

 

 

  망각이라는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요즘 종일 찌는 날씨에 눈사람 사진을 보며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여름 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지난 겨울엔 너무너무 추워서 빨리 여름이 되어 해변에 놀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면 한파에 몸을 떨며 내가 경험한 폭염을 잊고 빨리 겨울이 끝나기만 바랄 것이다.

 

 오늘 퇴근길에 선릉역 부근을 걷다가 6411 버스를 보았다. 익숙한 번호인데 뭐였지, 하며 지나치려다가 그게 뭔지 불현듯 떠올라 걸음이 느려졌다. 매일 새벽 강남 지역으로 청소일을 하러 다니는 투명인간들이 타는 버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한 정치인의 연설에 등장했던 그 버스였다. 우는 사람들 앞에 훤히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며 마지막 국화를 올리고 온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면서, 추도식도 영결식도 그렇게 꺼이꺼이 울며 봐놓고서, 다른 일들로 머릿속이 덮여 또 나는 잘 지낸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대단한, 자꾸 무언가를 잊게 하는 능력이 나를 별 탈 없이 잘 살게 해준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두통을 달고 살아도 좋으니 지우지 않고 싶은 일.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가 생전 속했던 정당에 후원금을 내기로 결심했다. 아주아주 적지만, 이번 달부터 다달이 빠져나가면, 출금 문자를 마주하며 그날 본 영정사진과 6411번 버스, 솔베이지의 노래, 그리고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 형을 좋아했어요"라며, 누군가가 울음을 참으며 읽던 편지가 계속해서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후원도 참 이기적으로 하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파랗지만 시원하지는 않은 하늘을 보며 밭은 숨을 뱉는다. 부디 내 기억을 보조해주길. 기억을, 마음을, 정의를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나 말고도 아주 많이 생겨나 더 나은 세상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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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11

594

 

 

 

자신이 존재함에 있어서 꼭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행성에서 자신의 가치와 살아있었다는 발자취를 남기는 걸까? 아니,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가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존재를 자신만의 각본으로 적어 넣어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여 수정하고 돌려놓는다.

 

“그 각본만 빼면 너는 대체 뭐가 되냐는 거야. 레이베리아.”

 

아무런 말도 없던 여신은 그대로 나를 바라본다. 저 표정에서 무슨 정답을 찾아야 할까? 아니, 꼭 정답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정답을 찾아도 사탕을 준 선생님은 없다.

 

“그렇다면 잡화점의 주인. 너는 지금 무엇이 될 수 있지?”

 

“나는 잡화점의 주인이지.”

 

“아니. 너는 신도 될 수 있지. 하지만 굳이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뭐지?”

 

“그야 내 사고방식은 인간이니까. 틀을 깨부수는 건 새로운 경지에나 올라갈 때의 이야기고,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든 여신이든 인간이든 마족이든 모든 생명체에는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뭔 줄 알아?”

 

그건 레이베리아의 각본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너는 진실을 꿰뚫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든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이 살짝 짧았어. 너는 진실을 꿰뚫어버렸기 때문에 그걸 왜곡할 수 있는 거야. 꿰뚫고 비틀기만 해도 상처는 더 커지고 심해지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너의 각본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 당장 자신의 운명이 너의 손에 달렸는데도 말이야.”

 

심지어 레이베리아를 창조한 창조주마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모순된 세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체 파멸을 위해서 모든 걸 망치고 있는 거라고. 물론 그 원인이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나겠지.”

 

어깨를 으슥이며 내 말을 마쳤다. 레이베리아가 진정으로 사용할 줄 아는 힘은 진실을 보고 그걸 바꾸는 것. 하지만 자신을 직접 창조한 창조주에겐 먹히지 않아, 다른 자들을 이용해 봉인하거나 쫓아냈다고 했지만, 내 경우에는 3개의 에너지를 합치기도 전에, 각본에 쓰여지지 않았다.

 

지금 내 생각으로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입은 다시 움직였다.

 

“꽤 그럴 싸한 생각인데. 머나먼 미래를 보고 너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를 누군가가 창조해냈어. 그것도 원래 없어야 하는 인물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수를 만들어내는 그 무언가...세상에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추측을 말해보자면.”

 

그리고 모두의 기대 속에서 한 박자 쉬었다.

뜸을 들이며 주변의 반응을 보고 다시 내뱉었다.

 

“아니. 그리 궁금하지 않으면 듣기 싫다고 하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내 옆에 있던 리제로트가 치켜 뜬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자신을 잊고 레이베리아와 상대를 하기 때문에 지루해진 것은 아닐까?

 

“지금 레이베리아가 저를 이용해서 당신을 죽일 수 있다고 하잖아요! 지금 제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이곳까지 와서 그런 바보 같은 헛소리를 한 땀 한 땀 들으라는 건가요?”

 

“내가 말하는 게 뜨개질인 줄 알아? 하긴, 내가 생각한 추측으로는 구멍이 많을 거 같으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던 게 좋았을 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내 생각으론 너는 각본에 죽을 상이 아냐. 관상이 그리 말해주더라고?”

 

“사람의 얼굴만 보고 어찌 그리 판단해요? 당신 바보에요?”

 

“바보라니! 나처럼 평범한 낙제생이 어디 있다고!”

 

“그게 바보잖아요! 이 바보야!”

 

적을 앞에 두고 만담을 펼치니 기분이 묘하지만...

 

“아무튼, 내 존재의의는 결과적으로 널 막는 거야. 그러기 위해 잡화점의 주인이 된 거고. 원래 이 시간대에 있어야 하는 레이베리아가 없다는 걸 보면, 다른 시간대로 이동해서 진실을 마주하고 있겠구나. 뭐야. 따지고 보면 진실을 마주해도 인정할 수 없어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대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최후인가.

지금 이 공간이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묘비가 되는 셈이잖아?

추측이지만.

 

“굉장하네. 모든 것을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를 했어. 마왕부터 시작해서 드래곤, 검은 달의 여왕, 최강의 여기사 등. 시도 때도 없이 내 주변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제서야 납득이 가기 시작해. 맨 처음에는 그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아리엘의 경우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날 죽이기 위한 계획이었다.

 

“다만, 예상하지도 못한 방해와 변수 때문에 실패를 한 거지. 그게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도 아리송한 일이다. 사실 초창기에 레시아를 잡화점에서 소환할 당시. 나는 세상이 완벽하게 멸망한 줄 알았지만, 이는 과거로부터 내 영향을 받은 레시아가 성장해 마왕이 되었고, 천계와 휴전을 하면서 평화로운 세계를 이어 나아갔다.

 

만일 내가 없었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각본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군. 아니면...이것도 창조주가 계획한 일인가?”

 

다른 곳에서도 이게 모두 창조주의 계획이라면서, 공룡화석 파묻고 자신을 믿는지 시험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아니...이건 다른 이야기잖아.

 

결과적으로...

 

“창조주 또한 네가 그럴 거라 생각하고 날 만들어냈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으로 내가 창조된 건지 잘 모르겠네.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너의 방해만 되는 존재란 거지. 게다가 리제로트에게 어떤 각본을 썼는지 몰라도, 이미 그 각본은 유효기간이 지났잖아? 사실 리제로트의 최후를 각본에 쓴다고 한들, 그 내용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모순은 이미 일어났어. 각본가. 내 존재 자체야 말로 모순이야.”

 

쐐기를 꽂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내 할말만 무작정 하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분위기가 대기를 짓눌렀다.

 

“웃기지마...웃기지마!”

 

날카로운 비명이 모든 공간을 지배했다.

 

“쇼는 아직이야! 각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잡화점 주인이 나를 가로막는 방해꾼이라면!”

 

잠깐만? 그 거대한 에너지덩어리는 또 뭐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도 에너지는 존재했다. 창조주마저 쫓아냈던 레이베리아의 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항상 강인할까?

 

“모든 걸 걸고 존재자체를 소멸시켜주겠어!”

 

“뭐. 그 정도면 확실하게 위험하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요! 이 세계 자체를 지워버릴 것만 같잖아요! 왜 그렇게 태연하세요!”

 

확실히 아직까지 인간적인 상식을 지닌 리제로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면

 

“그러네. 태연하게 있으면 안 되겠네. 지금 여기서 사라진다면 네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이게 시간대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나로 인해 제대로 이어져야 할 미래가 서서히 끊어지고 붕괴한다면...

 

“레이베리아의 무덤이긴 하지만, 내가 직접 죽인다면 미래는 보존되겠군. 그렇지?”

 

나는 엘티노스에게 받은 붉은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거대한 빛의 구체가 조금이라도 땅에 닿으면 모든 걸 소멸할 기세로 타올랐으나, 지금은 그 공간만 사라진 체 무산이 되어버렸다.

 

“그럼 이곳의 레이베리아의 힘을 모두 제거하고 살려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뭐라고요?”

“뭣이?”

 

단순한 질문이잖아. 왜 오물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싸늘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만회를 할까? 애초에 이런 일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왜 그런진 굳이 이유를 묻지 않겠지만, 그런 식으로 날 바라보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 단순한 질문을 이상한 망상력을 사용해서 기묘한 이야기를 써 내리지 말고.”

 

“당신은 정말 변태야...”

 

“뭘 생각했는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난 네가 상상한 그런 사람이 아냐. 이곳에 버리고 가기 전에 눈빛부터 고쳐줘...”

 

사람을 죽일 눈빛이 많지만 정신적으로 참살해버리는 저런 눈빛...

어린애가 얼마나 수라장을 겪었길래 저런 눈빛까지...아니, 나 때문에 수라장을 겪고 있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구나.

 

“불안전 변태는 완전 변태든 그런 단어는 곤충에게 맡겨버리고, 레이베리아. 한 가지 협상을 하도록 하지.”

 

“같은 미래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함인가? 하지만 거절한다.”

 

“글쎄. 아까와도 말했지만 나 자체가 모순이라...그 거절은 거절할게. 아니면 힘으로 막아보던가?”

 

내 말 한마디에 레이베리아는 사라졌다.

그리고.

 

“죽어!”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딱히 뭐라 설명할 것도 없는 거대한 하얀 구체.

 

“그렇게 질 낮은 에너지 덩어리로 죽으라고 해도 쉽게 죽지도 않아. 히드라!”

 

왼팔에 감겨있던 사슬들이 검은 빛을 띠며 서서히 거대해졌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9머리의 괴수. 모든 걸 집어삼키는 자는 세상을 향해 침을 흘린다. 거대한 입이 벌어져 레이베리아가 쏘아 올린 에너지를 먹어 치우고 더 성장했다.

 

“잡화점의 주인...이런 맛없는 걸 먹여놓고 협력을 하라니?”

 

“맛없는 것치곤 너무 상큼하게 먹는데?”

 

농담을 주고 받아도 언제나 흐름을 끊는 건 리제로트의 말 한마디.

 

“장난치지 말고 제발 제대로 싸우실래요!”

 

제대로 싸우면 분량이 안 나오는데...

뭐, 별로 상관 없나?

 

-샤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빛이 내 주변을 버터처럼 잘라냈다. 땅속에 파묻는 것도 모자라, 이 행성의 내핵까지 파묻을 기세로 사라졌고,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용암은 튀어나와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행성의 핏물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왔으나, 오히려 부동자세로 오른손을 펴 입을 열었다.

 

“황혼!<Dusk>”

 

-파앙!

 

하얀 실선이 레이베리아의 몸을 꿰뚫었으나, 잠깐만의 경직이 있을 뿐 곧이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다시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면역이 된 건가?

 

“제길.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에너지인가.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르군...”

 

“그럼 못 먹는 거냐?”

 

“아니. 빛으로 이루어진 건 껄끄러울 뿐. 다만 먹기엔 좀 거부감이 있지. 마치 가지 볶음을 처음 먹는 듯한 그런 기분 말이야.”

 

“어째서 예시가 구체적이냐?  그 미묘한 식감에 대해선 나도 동의를 하지만...”

 

세상을 집어삼키는 녀석이 그 세상의 극히 일부인 채소를 껄끄러워 한단 말이야? 날로 갈수록 이 녀석도 편식이 늘어가는구나?

 

“너의 힘은 창조주와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창조주를 이미 뛰어 넘었다! 그런 나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레이베리아의 눈을 당당히 마주하며 나는 입을 연다.

 

“그래? 마법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확실히 인간이 일으키는 기적은 마법이라고 하지. 그렇다면 그 마법은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기적 중 하나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를 나락으로 몰아넣을 위대한 기적을 보여줄게. 히드라! 내뱉어라!”

 

나의 말에 맞춰 지금까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먹어 치운 에너지들을 거대한 검은 광선으로 내뱉었다. 리제로트와 월터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지만, 그래. 이게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기괴한 싸움방식이긴 하지.

 

“네가 황혼<Dusk>마저 먹히지 않으면 이걸 써야지?”

 

본래 창조의 에너지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의 틀을 넘어설 수 없는 나에겐, 간편한 옷이나 무기를 만드는 제작마법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틀을 벗어나 우주의 이치를 알고, 모든 걸 통달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은 나야 말로 최악의 신이 되리라 생각한다.

 

“극야!<Polar Night>”

 

모든 것을 다시 어둠으로 바꿨다.

말 그대로 더 이상 빛이 없는 장소.

모든 장소 중에서 가장 고독하고 추운 곳이다.

 

“뭐...뭐야? 이건? 방금 전에 걸어왔던 그 터널인가?”

 

“아니. 여긴 좀 달라. 이곳은 내가 추방하고 싶은 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만든 공간. 각본가는 이곳에서 퇴장한다.”

 

리제로트에게 설명하면서 내 손을 슬쩍 보았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일까? 뭐, 그건 둘째치고...

 

“뭐야. 이 공간은? 어째서 또 다른 내가 잠들어 있는 거지? 방금 전에 미래로 갔던 ‘나’마저?”

 

“이번 기적은 월식의 힘을 빌렸어. 솔직히 나 혼자서 이런 바보 같은 공간은 만들지 못하거든. 그리고 솔직히 너만 불러오려고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월식의 힘이 또 다른 차원까지 영향 받은 모양이네.”

 

당황하는 레이베리아와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레이베리아‘들’

 

“네가 가장 미래에서 왔으니까. 너만 깨어있는 거야. 시공간의 규칙을 부수고 돌아다니는 불멸자에겐 가장 잘 어울리는 벌이지.”

 

“흥! 그렇게 따지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아니, 적어도 리제로트만큼은...”

 

오해할 여지가 있으니 아직까지 질질 붙잡고 있던 레이베리아에게 말했다.

 

“아니. 그건 좀 다르지. 첫째로 나는 모순덩어리에 불과해. 그리고 둘째는 리제로트는 아직 잡화점의 의뢰인이야. 의뢰인이 자신의 결과에 만족하면 의뢰는 끝나지만, 의뢰인으로 남아있을 때까진 잡화점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긴 한다고? 그리고 셋째로...잡화점은 나보다 더 강하거든.”

 

-콰앙!

 

“결국 인간을 벗어났구나. 이래서 골치덩어리는 잡화점의 주인일 자격이 없다니까?”

 

흔히 카린의 모습처럼 코발트 블루의 긴 머리를 한 소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잡화점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다급하게 잡화점의 규칙을 바꾼 거 아냐. 내가 잡화점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슬슬 가자. 너 때문에 일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버렸어. 신경 쓰지 않고 되돌아가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새침한 눈으로 보다니. 츤데레같잖아.”

 

“네가 츤데레처럼 생겼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무슨 농담이 그러냐...

내가 어딜 봐서 츤데레라고?

 

“자, 잠깐 기다려!”

 

한 때 여신이였던 존재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언제 다가와서 붙잡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을 좀 하면 지금도 무서운 여신이잖아?

 

“이대로 날 두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모든 시공간에 있는 각본가를 없애다니? 지금 이렇게 돌아가면 너의 평상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고!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잡화점 멤버들을 그저 나 하나 때문에 버릴 셈이야?”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거 같으니 말해주지.”

 

리제로트와 월터를 먼저 잡화점에 데려가라고 세린에게 눈치를 추고, 레이베리아의 눈높이를 마주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네가 조작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그녀들이 날 좋아하도록 만들어서 나는 수많은 죽음을 뛰어넘었지. 모든 것에 대해 모순으로 비틀며 살아갔으니까. 각본은 어디서부터 시작한 건지 몰라도, 어린 레시아가 나를 만났던 것부터. 너의 각본은 오랫동안 진행되었어. 그러니...이제 너의 각본이 없는 진짜 세계를 내 눈으로 볼 예정이야.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쉬도록 해. 그 누구도 너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아냐...절대 안 돼! 지금의 나라면 몰라도! 유랑극단으로 타락한 나라면 몰라도! 적어도! 한 때 위대한 창조주를 따라 정의감으로 무장한 각본가는 풀어줘!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완전하게 엉망이 될 거라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붙잡힌 소매를 거칠게 옆으로 털었다. 힘에 끌려가듯 레이베리아의 몸은 휘청거리며 옆으로 돌아갔고 확실한 거절을 위해 짧게 대답했다.

 

“거절하지.”

 

“안 돼! 돌아와! 제발 이 아이만큼은 데려가 달란 말이야!!!”

 

잠들어있는 레이베리아 중. 한 명을 들고 힘겹게 몸을 끌어보지만, 내가 잡화점에 도달해서 문을 닫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검은 나무로 칠해져 있는 나무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곧 이어 잡화점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이베리아를 극야<Polar Night>로 내던져버린 이후...

 

“주변에 방이 완전히 다 사라졌네.”

 

이변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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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패러독스가 시작 됩...<-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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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10

593

 

 

 

이 시공간을 의심했던 순간은 언제부터일까? 그건 후손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후손이 어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300년이 지난 이후 나의 자손이 어찌 생겼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유전적인 경우를 뛰어넘어 300년이 지나도 내가 아는 사람은 대부분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갔다면, 300년 이전에도 레시아의 행방이나 다른 이들의 흔적을 찾았어야 했지만, ‘일기장’이라는 수식어 하나만으로 이곳의 시공간이 안전하게 지나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레인이 일기장을 보고 있다는 시점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분명 레인은 일기장에 적혀있는 내용대로 수행할 것이고, 나는 그 내용을 모르고 그 일기장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되는 일. 결과적으로 그 일기장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레인은 리제로트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

 

“후손과 내 일기장이라는 타이틀로 이곳에 오랫동안 발을 묶거나, 정해진 미래대로 나조차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 도달할 때까지라...과연, 내 사고방식은 역시 인간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혹은 다시 돌아올 거란 것도.”

 

“그럼. 저란 존재도 가짜인가요?”

 

“아니. 그건 아냐. 이 시공간 자체를 창조하고 생명을 만들었으니까, 가짜는 아니지만 이곳에 날아든 잡화점 멤버를 제외하곤 생사여부는 레이베리아에게 달려있다는 거지. 그걸 따져봤을 때, 레인이 살고 있는 잡화점에 일기장은...단순히 레이베리아의 각본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되는 거고, 이 여신은 결국 방구석에서 내가 스스로 자멸할 때까지 볼 생각만 했다는 거야.”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군. 언제까지 자신의 각본에 맞아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걸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조된 시점부턴 이미 가짜는 아닌데, 과거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너를 증인으로 사용할 수 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과거로 날아갈 거야.”

 

“좋군요. 과거로 간다니. 제 기억 속에 있는 과거가 맞는지, 아니면 당신의 추측대로 이것이 전부 조작된 것인지 확인해보겠어요.”

 

동의는 얻었다.

그러면...

 

“히드라. 힘을 좀 나눠줘야겠다.”

 

내 왼팔에 잠들어있는 사슬에게 외쳤다.

 

[과거로 가기 위해 나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가?]

 

“별거 아냐. 과거로 가기 위해선 네가 좀 같이 움직여야 하거든.”

 

생각을 해보면 시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지만, 어째서인지 내가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고, 남에게 꼭 힘을 빌려서 가야 하는 슬픔. 나중에 스스로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봐야겠다.

 

“다양한 시공간과 평행차원에 퍼져있어도 하나인 존재잖아. 월식이란 건 그런 거 아냐?”

 

[그렇군. 종족의 특성을 이용해 이 차원의 과거로 갈 생각인가?]

 

“맞아. 제대로 이해했으면 빨리 진행하자고. 방해꾼이 찾아오면 내일 가야 하니까. 귀찮은 일은 오늘 안에 끝내놓고 잡화점 운영을 해야, 다음날에도 일찍 일어날 수 있어.”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기엔 좀 무리가 있어도, 마음의 평화라는 건 별도의 문제니까. 사슬이 자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9개의 쇠사슬 끝에는 단검이 허공에 박히기 시작했다. 박혀있는 장소에 마법진이 나타나면 꽤나 멋있는 연출일 것 같지만, 블랙홀처럼 검은 원형의 공간만 나타날 뿐.

 

“자. 과거로 가자. 어찌 되어먹었는지 확인하자고?”

 

자연스럽게 리제로트를 인도하며 발을 앞으로 향했다. 이러니까 이상한 나라로 끌어들이는 토끼처럼 느껴지는데? 아니, 그래도 하트 여왕은 안 나오니까 상관 없나? 어두운 공간은 얼마든지 걸을 수 있고, 우리의 목적지가 나올 때까진 무조건 걸어가야 한다. 뛰어가든 날아가든 상관은 없는데, 언제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뛰고 날다간 쉽게 지쳐버리니까.

 

그리고...

 

“제, 제발...좀 천천히 걸어요...”

 

“월터에게 업어달라고 하던가? 얼마나 체력이 안 좋으면 고작 15분정도 걸었는데 지치는 거야?”

 

“당신은 3보 이상 자동차 몰라요?”

 

“너의 장래가 심히 걱정된다.”

 

세상에 리제로트가 먼저 만담을 열다니. 심리상태를 꿰뚫는 건 아니지만, 나와 있으면서 경계를 하는 모습은 많이 풀어졌다. 물론 월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기 시작했지만...

 

“그런데 이 공간은 뭐죠? 위험하지 않나요?”

 

“당연히 위험하지. 날 놓치고 다른 길로 가면 시공간적으로 미아가 되어버려서, 찾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니까.”

 

“당신은 어떻게 이 길을 잘 알고 있는데요?”

 

“내 왼팔에는 이 공간을 열어준 존재가 있어. 그 존재를 믿고 따라가고 있는 거야.”

 

[그래도 이 몸이 만약 그대를 다른 길에 방황하게 만드는 함정을 팠다면?]

 

[만약 그러면 넌 레시아와 시나에게 맞아 죽는 일 밖에 없어.]

 

대부분 주인공들은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매우 강하거나 강해지는데, 나는 왜 아무리 강해져도 주변에서 보살핌을 받는 걸까? 정형적인 클리셰 중에 여주인공이 맨 처음에 남주인공을 지켜주다가, 남주인공이 각성하고 강해지면서 거의 마지막쯤에는 여주인공을 지켜주지 않는가?

 

근데 나는 아무리 강해져도 아직까지 초반부마냥, 레시아와 시나 이외에도 잡화점 멤버들에게 지켜지고 있다. 맨 초기에는 혼자 구르면 거의 반은 죽어서 왔어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잡화점 멤버들에게 반정도 죽는 일이 더 많다.

 

그 바보 같은 백장미만 아니었어도...

 

“과거로 가서 충격이나 받지 말라고. 처음 보는 과거에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서슴없이 하는 바보 같은 녀석이 아니길 빌어야지.”

 

“과거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뇨?”

 

“너는 그 영화도 안 본 거냐? 자동차 타고 과거로 갔다가 본인이 사라질 뻔했잖아. 다행히 해결책을 찾고 겨우겨우 미래로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그 영화는 마지막에 미래가 바뀌었잖아요?”

 

솔직히 그 영화가 지금 시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째서 이렇게 잘 아는지 금시초문이다. 본적도 없는 지식이 마음대로 흘러 들어오는 일은 이렇듯 좋은 일은 아니다. 아무튼...

 

“슬슬 다 왔는데.”

 

기나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처음 본 광경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진짜냐? 이 상황?”

 

모든 땅이 전부 메말라있었다. 그 누구도 없고 생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 언제부터 이 일이 계속 진행되어왔을까?

 

“내가 너무 과거로 돌아와서 이 땅이 이렇게 된 건가?”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는 창조가 되었는지, 적합한 환경에 의해 진화를 한 것인지에 대해, 이 세계는 창조와 진화를 반반 섞어버린 닭마냥, 물을 만들고 산소를 만들고, 태양빛에 보호하는 오존층대신 다른 보호막을 씌웠다.

 

“레이베리아는 없나 보네.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망해버린 세상은 이런 거야. 그보다 이곳 시간대가 언제야? 내가 왜 이런 꼬맹이와 같이 어린 왕자를 찍어야 하는데?”

 

“제가 꼬맹이가 아니라 당신이 늙은 거에요. 어린 왕자는 또 뭐에요? 당신이 왕자라고 말할 정도로 젊기라도 해요?”

 

“아직 젊어! 아직 20대밖에 안 됐어!”

 

“거기에 300은 추가로 붙여야 하잖아요!”

 

“300을 왜 붙여! 스파르타냐!”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무렵. 이곳의 현재시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레시아와 시나가 있으면 더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내 능력에도 대략적인 결과값을 찾아낼 수 있으니, 잠깐만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뜨자. 내 시야 위에 13자리 정도 숫자가 나타났다.

 

“내가 아까 있던 곳과 상대적인 숫자를 알려줄래...”

 

내 혼잣말이라도 들었는지 순식간에 줄어드는 숫자. 최종적으로 줄어든 숫자를 보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5년전의 파이론이라고?”

 

“5년전?”

 

모든 이들이 5년전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데? 뭐, 무슨 일이 있는지 그리 궁금하지 않지만, 확실히 재창세가 되기 전에 모두가 사라졌다.

 

내가 넘어가버린 세계는 결국 5년만에 만들어진 가짜란 소리다. 아니, 가짜 세계는 아니지만, 나를 속이려고 만든 세계니 내 입장에선 가짜.

 

“그래서 이 세계는 왜 다시 만드는 거지? 너의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무조건 다시 부수고 만드는 건가?”

 

허공에다 외치는 듯한 내 소리는 방향을 정확하게 찾아 날아갔다.

 

“레이베리아!”

 

“결국 잡화점의 주인은 이곳까지 찾아온 건가?”

 

“결국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니 내가 지금쯤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보네?”

 

4쌍의 날개는 대체 뭘 의미하는지 이제 기억이 잊을 정도, 여신이라는 태그가 붙으면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그건 일반인이나 신앙심이 가득한 사람의 경우다.

 

“모든 건 멸망했어. 이런 미래는 원하지 않았지.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멸망의 시. 잡화점의 주인. 그건 모두 당신 때문이야.”

 

“나 때문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경우는 머나먼 미래의 일이니까.”

 

아무리 봐도 295년 이후의 일이잖아.

그렇지 않나?

 

“잡화점의 주인. 아니...카일. 이 각본에는 당신이 기록되어있지 않아.”

 

“그보다 각본에 하나하나 적을 생각부터 하는데?”

 

“우주의 별 하나마저 모두 끝이 존재하지. 그 끝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든 이들을 각본에 적을 필요가 있어.”

 

“그렇다고 쳐도, 재창세를 하기 위해 모조리 갈아 없는 건 문제가 있는데? 아니, 애초에 모조리 갈아 없애는 것에 문제 유무는 따지지 않도록 할 게. 하지만, 가짜 일기장을 레인의 잡화점까지 집어넣을 정도로 날 묶어놓을 이유가 뭐야? 너 또한 300년 이후의 미래보다 더 머나먼 미래에서 온 레이베리아잖아.”

 

지금 이 시간대의 각본가가 아닌,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맞아. 나는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유랑극단 최후의 단원이자 단장. 다른 미래에도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해버렸지.”

 

“꼭 내가 살아있으면 모든 게 망해버린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 같은데. 당연하게도 내가 살아있으면 너희들이 손해보고, 너희가 살아있다면 내가 손해를 봐. 하지만, 다른 존재들은 그런 거에 신경이나 쓸까?”

 

“뭐라고?”

 

“불멸자든 필멸자든 언젠가 끝이 있다고 해도, 전부 너의 각본대로 움직여서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얼마나 대단하든 차원에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할 수 없는 일이니까.”

 

격노하는 듯한 레이베리아에 투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금 죽이면 미래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 같은데...글쎄? 불가능하지 않을까? 넌 나를 각본에 적을 수 없잖아?”

 

“직접적으로 적을 수 없지만, 네가 데리고 온 그 계집을 이용하면 가능하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보니까 저 레이베리아는 상대적으로 미래에서 왔으니까, 리제로트의 최후에 대한 각본은 이미 적혀있겠지. 그러나 여기서 문제...

 

“각본이 없다면 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그 질문 하나가 모든 공기를 멈추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엔 공기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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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리벳팅을 했어요.

솔리드 리벳 죽이고 싶어요.

 

어째서 수동으로 쥐어 짜내야 하는 건가요...

내 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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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

사랑하는 아이에게

그 애는 건강한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

그 애는 웃음이 많고 밝음을 잃지 않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타인을 존중하는 사려 깊은 미소와 자신 역시 챙길 줄 아는 똑똑한 아이.

냅다 앞만 보고 달리지 않고, 가끔은 뒤도 돌아볼 줄 아는 눈망울이 깊은 아이.

그 아이가 좋은 것만 보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그것에 왜곡되지 않는 강인한 마음.

아픔을 부정하지 않고 실컷 울음을 흘린 뒤 다음 날 아침, 부은 눈으로 벌떡 일어날 수 있는 씩씩함.

남몰래 슬픔을 가끔씩 꺼내도 보는 그런 잔잔한 감성을 갖으면 더욱 좋고.

자신의 고통을 꾹꾹 눌러담지 않고 울고불며 자신의 존재를 선명하게 그려낼 줄 아는 아이.

다가올 일에 도망도 칠 줄 알고, 때론 용기 내 맞설 줄도 아는 아이.

가식적인 감정을 쏟아내며 자신을 썩히는 일은 분명하게 걸러낼  수 있는 아이.

 

남을 물어뜯지 않고 자신을 경계 할 줄 아는 아이.


당당함이 가득 차고, 타인을 비춰내는, 그런 반짝이는 눈빛.

그 아이는 일곱 살이 되어 웃음과 울음으로 온 세상을 칠할 것이고,

열살이 된 아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선명한 미소를 지닌 당찬 꼬마가 될 것이고,

열세살이 된 소녀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줄 알고, 조그마난 주먹도 움켜쥘 것이다.

열일곱살이 된 소녀는 깨인 시간이 늘어나고, 생각하는 시간도 많아질 것이다.

스무살이 된 아가씨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과 절망을 겪을 것이다.

스물여섯살이 된 아가씨는 몸 구석구석 그녀만의 은은한 무언가가 나풀나풀 될 것이다.

서른살이 된 여인은 무거워진 어깨를 주무르며, 고요한 태양 빛을 즐길 줄 알게 될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는 그녀의 얼굴엔 주름과 세월이 스며들고, 청춘은 희미해지고, 뜀박질은 뜸해지고,

 

어여쁘다는 말을 듣기 힘들어진대도 그녀는 웃을 것이고 울 것이며, 바라볼 것이며, 미소를 띨 것임에 확신한다.

그녀가 받는 사랑이 누가 봐도 자신 있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였으면 한다.

그녀는 날 구해준 고마운 아이면서도, 등 뒤를 쳐다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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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 폰을 찾다

꿈을 보여준 누군가에게 그 꿈에 대한 감상문을 보냅니다.

 아직 이른 새벽인데 매미 한 마리가 처량하게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니 사실 그건 핑계일 뿐이고 슬픈 꿈을 꿔 울컥하여 잠에서 깨어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지금은 그리운, 연인이 될 뻔하였지만 과거의 내가 결단력이 없어 친구로 그냥 남아버린, 지나간 사랑을 만나 밥도 먹었다.

 

 꿈속에서 나는 무심코 폰에 저장된 사진을 봤다. 나 혼자 찍은 사진 밖에 없었다. 외로웠다.

 

그 때 알림음과 함께 누군가가 찍어준 내 어릴적 사진들이 전송되어 왔다. 어릴때 동생과 노는 사진, 내가 아기 일 때 진한 화장에 한복을 입은 뚱뚱한 여자에게 안겨있는 사진. 군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진. 나의 어릴 적부터의 인생을 계속해서 옆에서 몰래 찍은 것 같은 스냅사진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어릴 적 시절은 아직 폰이 없던 시절이다, 오직 필름 카메라로만 추억을 남길 수 있던 시절인데 그 사진들이 누군가의 폰으로 찍혀 현재의 나의 폰으로 전송 되고 있었다.

 

 나는 이 귀중한 사진들을 모두 놓칠 수 없어 하나하나 나의 앨범목록으로 저장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어머니가 아직 젊은 얼굴을 한 사진이 도착했다. 대략 지금으로부터 20년 아니, 30년 정도는 젊어보였다. 윤기 있는 얼굴에 부기도 없고 피부도 축 늘어지지도 않은 젊은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사진은 증명사진처럼 혼자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계셨다. 나는 울컥하였다.

 

부끄럽게도 나의 휴대폰에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어릴 적 학생 때는 여름방학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바다나 산, 절 같은 곳을 찾아 아버지의 낡은 티코를 타고 여행을 많이 갔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그 무거운 필름카메라를 챙겨가 우리 가족을 찍어 추억으로 남겼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면 사진관에서 사진을 뽑아 가족끼리 돌려가며 보는게 연례 행사였다.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은 여행은커녕 가족 간 대화도 많지 않다. 여행도 가지 않고 최근에 함께 찍은 사진도 없다.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 그동안 사진하나 찍지 않았다. 먼 미래에 지금을 회상할 사진하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내가 가족들을 어색하게 생각했을 때부터였을 텐데. 그 시점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울컥했다. 눈물이 났다. 꿈속에서

전송되어 오는 사진을 내 폰에 저장하며 나는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어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폰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핸드폰 사진목록에는 없다. 예전 지역 축제를 취재할 일이 있어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어머니와 간적이 있는데 그때 지역의 축제 모습을 찍은 동영상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잠깐 지나간 적이 있다. 내 폰에 가족이 등장한 것은 그게 다이다.

 

과거에 비해 우리 가족관계에서 수분이 사라진 것은 가족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나의 성격변화 때문이겠지.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느끼는 어색함을 못 참고 혼자 벗어나려는 나 때문이겠지. 나는 이 새벽에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함을 느꼈다.

누가 이 새벽에 그 꿈을 나에게 보여줬을까. 누가 꿈속에서 내 인생의 과정을 찍은 사진과 젊은 어머니의 사진을 내 폰에 전송했을까.

 

 언제부터인가 매미가 울음을 그쳤다. 장마전선이 내려가면 이제 찌는 한 여름이 시작될 것이다. 그 한 여름이 시작되기 전 너무나도 일찍 나온 매미가, 너무 이른 새벽에 나무를 오른 매미가, 나의 꿈을 깨운 매미가, 생명을 다해버렸는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른 새벽 짝을 찾기 위해 울어재꼈건만 그 매미는 이 새벽에 짝을 찾지 못하고 힘을 다해 버렸는가보다. 땅속에서 태고의 시간을 기다려 비로소 땅속에서 올라와 나무를 타고 노래한 매미의 짝을 찾는 노력은, 짝을 찾지 못하였어도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저 울음소리에 나 또한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과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으니.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고 소설을 쓰고, 시나리오를 쓰고 마땅한 돈벌이 없이 골방에서 꿈틀대는 나의 작은 몸짓이 세상을 변하게 하지는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생각할 건덕지라도 던져 주지 않겠는가. 게을러서 또는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땅속에서 올라와 울어보지도 못하고 땅속에 영원히 묻힌 채 죽음을 맞이할게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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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에게 찾아온 습작들

이야기 63-9

592

 

 

 

싸움보단 말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의미한 폭력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하게도 나는 평화주의자이기에 평화롭게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평화 최고. 혼돈은 멀리하고 평화를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평화고 뭐고 없구나.”

 

쓰러져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단검을 집어 넣었다.

 

“카일 씨...왜 그렇게 강해요? 591에서 592로 넘어갔다고 느닷없이 제가 져있잖아요?”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가 남는 그런 기묘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지금은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보다 일기에도 네가 지게 되어있는 거야? 아니면 지금 내가 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일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 일기의 가이드라인을 생각해보면 탈선의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우주로 날아가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과거로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래도 레인은 원망을 하거나 한숨을 짓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레인의 성격상 오히려 일이 엉망으로 되었을 때 수습하는 걸 더 좋아하는 기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쓴 일기도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네. 그래도 지금은 내가 결정한 것에 따라가야지. 그보다 아이리스는 다 완치가 되었다면서?”

 

“카렌 씨는요?”

 

카렌? 아...

그렇지. 어째서 카렌은 활동하지 않는 이유라고 하면...사춘기라고 해야 하나? 자립심이 너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선 보이지 않은 게 흠이다. 돌아갈 장소가 또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어차피 내 복제품과 비슷하기도 하고,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일단 복수에 대한 건 진심이든 아니든 접어둬. 지금 이렇게 해도 별 다른 이득은 없어.”

 

“이익중심으로 움직이는 건가요?”

 

“아니. 평화중심이지.”

 

내 마음속의 1순위는 언제나 평화다. 그런데 현실은 평화가 왜...

자괴감이 든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라니...

 

“이미 미래는 뒤틀리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리제로트가 죽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을 때, 오히려 리제로트가 안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있으니까 죽거나 심하면 침을 흘리겠지.”

 

“최소와 최대가 바뀌었지 않았나요?”

 

이 말버릇 레시아에게 전염된 건가. 빨리 고쳐야겠다. 리베리티아 고원의 특유한 바람은 300년이 지나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곳은 개발도중 청정구역이라고 지정한 모양이다. 사실 청정구역인지 다른 마법적인 요인으로 손을 대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쾌하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뒤로한 채, 뒤에서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리제로트에게 돌아갔다.

 

“너는 아까 내가 위험했을 때 도와주지도 않더라?”

 

“해결사가 해야 하는 일을 의뢰인이 꼭 도와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도 협조나 도움은 줘야 할 거 아냐. 방금 전에 레인이 던졌던 마법공학 유탄을 다른 시공간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이 일대가 지금 다 사라졌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은 기억도 없고,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라 초능력자라서요.”

 

초능력자라고 해도 마나는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의 길을 좀 가란 말이다.

 

“뭐 어떻게든 위기는 넘겼으니 상관 없겠지.”

 

리제로트는 차를 놓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푸른색의 컬러렌즈로 자신의 초능력을 봉인하지만, 어느 사이에 짙은 보라 빛의 눈으로 돌아와있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저를 과거로 데려다 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보라 빛의 눈은 혹시라도 정신오염이 먹힐 거 같아서?”

 

“칫.”

 

인간성이 어디로 간 거냐 넌...

 

“여전히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괴하네. 뭐, 그래도 너의 초능력은 강력한 최면술일 뿐이니까. 결국 망각의 샘물을 먹이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너의 인형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나는 이미 인외의 존재로 되어가는 중이라서, 명계에서 퍼 올리는 망각의 샘물이 아닌 이상 잘 듣지도 않을 걸?”

 

한 때, 내가 만약에 신이 된다면. 이 지상을 평화롭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쨌든 슬슬 이곳도 정리할 거니까 어서 돌아가기나 해. 라 캄베리의 영애는 자신의 일정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되는 거야?”

 

“어차피 오늘 일정은 없는 걸요. 오늘 하루 디즈니에서 나오는 쥐나 보면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싶기도 하고요. 거추장스러운 남자 둘이서 이리저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제가 보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서 문제네요.”

 

“거기서 선정적이란 단어가 왜 나와?”

 

그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잘도 봐온 주제에.

 

“아이고...삭신이야...이럴 줄 알았으면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거 멸망의 지름길이니까 가져오지 말아줄래?”

 

레인의 섬뜩한 소리가 내 귀에 흘러가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서 위험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마법공학 수류탄을 레인이 직접 던지는 바람에, 지도가 완전히 바뀔 뻔했지만, 지금은 우주 어딘가 터지면서 안전한 처리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생각을 해보면 모든 위험한 것들은 우주 밖으로 내던지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블랙홀에 내던지는 방법도 생각해봐야겠다.

물론 블랙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그러면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운명을 바꾼다는 건 모든 걸 바꾼다는 의미야.”

 

나는 주변이 황폐해진 리베리티아 고원으로부터 손을 뻗어 힘을 집중했다.

 

“모든 걸 바꾼다는 건 재창세와 같지. 그걸 원하는 건 레이베리아도 그렇겠지만, 사실상 이 힘은 창조주와 거의 같다고 봐도 괜찮아. 레이베리아는 창조주의 근원 중 일부인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뿐이고,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재창세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거지. 내 모든 힘을 뽑아서 빌려 쓰기 위함이기도 해.”

 

“그러면 당신이 신이 된다면?”

 

“아니. 나는 결국 반신이 한계야. 기껏해야 최대로 할 수 있는 게 엉망인 걸 고치거나, 이 세상에 있는 물품을 보고 이해해야 겨우 제작할 수 있는 정도지. 그 이외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로 나누는 귀찮은 작업까지 해야 하고.”

 

서서히 자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리베리티아 고원을 바라보며, 리제로트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유용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을 손쉽게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그거야 아직 내가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인간이었다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인간의 이해 범위 밖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를 하겠어?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지금 이렇게 수복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솔직히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길을 어느 정도 걸어봤다면 가능한 마법이다. 이런 광범위한 공간을 모두 되돌리기 위해선 거대한 마나가 필요하긴 해도, 마나만 받쳐준다면 이런 일은 마법사라면 가능하단 소리지.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영역에 발자국을 살짝 가져다 댔는데, 안 보이는 벽에 의해 선만 아주 살짝 밟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만일 내가 신이 되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그만두고 지루할 만큼 평화를 가지고 사는 건데.

 

“아냐. 아무것도. 그러니까 결국 너의 의뢰를 해결하려면 모든 걸 다 바꿔야 해.”

 

“모든 걸 다 바꾼다면?”

 

“너의 과거로 가야지.”

 

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와 상반된 리제로트의 얼굴은 마치 썩은 달걀을 본 눈빛이었다. 아니 썩은 달걀을 봐도 지금 저 표정보단 더 좋겠지.

 

“당신 정말 변태네요.”

 

“변태라니. 내가 곤충도 아니고 탈피하지 않는다고?”

 

“하아...저는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닐 텐데요!”

 

헉! 화났어! 무서워!

월터도 주먹을 들었어! 날 때리려고 하다니! 무서워!

 

“그런데? 각본가의 각본을 찢자는 건요?”

 

“아. 그거? 너무 위험해서. 나란 사람은 또 온순하고 평화적이잖아?”

 

“온순과 평화란 단어는 당신에게 절대로 안 어울려요. 그리고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죠? 그보다 제 과거로 가서 뭘 캐낼 생각이에요?”

 

“과거로 가서 지금의 ‘너’를 지울 거야.”

 

어마어마한 시간차를 뚫고 겨우 “네?”라고 대답한 리제로트의 말. 절망이 담겨있는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 서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어떤 사람에게 “지금 당장 당신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 겁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다고 “오! 예!”라고 대답하겠는가?

 

자신의 모든 삶을 부정하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월터가 스스로 움직였다.

 

-슈아악!

 

어마어마한 발차기가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마법방패<Magic Shield>를 전개해 막아내고 있는 동안, 날카로운 외침이 내 귀를 쑤셨다.

 

“어째서요! 당신은 제 편이 아닌가요!”

 

“당연히 너의 편이지. 너는 운명을 거부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월터의 거대한 주먹이 마법방패를 뒤흔들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의 말도, 지금 모든 걸 버리면 우리가 보호해주겠다는 간접적인 메시지였어. 하지만 너는 거부를 했지. 내가 말했잖아? 너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눈에 띄는 거라고, 결국 레이베리아에게 찍힌 거고 각본에 쓰여진 거야.”

 

그리고...그 각본의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각본이든 내 일기장마저 무시하고 다른 선택지를 골랐어. 그 뜻은 결국 이 시간대는 원래 없는 시간대나 마찬가지야!”

 

월터의 공격이 멈췄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리제로트는 자신의 존재가 허황된 가짜라는 사실에, 그만 무릎을 꿇고 넋을 놓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은 내 가설에 불과하지만, 너를 데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개판이 벌어졌길래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어. 유랑극단이 시간을 숨기고 공간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겨우겨우 해결했다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일기장마저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거든. 그리고...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슬슬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엘티노스는 자서전인 마냥 일기 같은 걸 잡화점에 남기고 있어도.

나는 단 한번도 내 일기장을 잡화점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남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내 전용 아공간에만 일기장을 넣고 다닌다고?”

 

그래. 처음부터 레인이 읽은 일기장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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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계주는 급커브를 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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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다샴

※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샴 

1. 악마들의 총괄 책임자, 악령들의 제왕.

2. 날씨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 질병과 재난을 몰아내었다고 함. 고대에서 숭배받았음.

                                                 

소년은 동전 한 닢으로 강을 건넜고 얕은 냇가에서 제 발로 걸어와 마을에 당도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빨래하고 물긷던 여자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 그를 흘끔거렸다. 

 한 사람이 여자들의 틈에서부터 잽싸게 빠져나가 반쯤 허물어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작은 여자 하나가 나왔다. 두 손으로는 넓적한 그릇을 받쳐든 채로, 다샴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다. 옷가지를 널어 말리던 아낙 하나가 물가에서 빨래하던 여자를 향해 황급히 눈짓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가지고 오던 소녀의 뒷통수를 갈겼다. 여자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빼앗고 소녀를 꾸짖었다. 아낙들은 사뭇 일상적인 광경을 대하듯 모른 척 빨래에만 몰두했다. 다샴 같은 탁발승이 마을에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생존에 지친 여자들은 그악스러웠고 경계심이 강했다. 낯선 승려에게 보시할 여력이 없었다. 다샴은 직감적으로 다른 마을로 자리를 옮겨야 함을 알았다. 모래 바람 날리는 마을은 다들 비슷비슷했으나 그 안의 양상과 처지는 제각기 달랐다. 긴 걸음을 했건만, 이번에도 수확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다샴은 집 몇 채를 돌며 구걸하다가 종교를 신봉하는 노인 두어 명으로부터 음식 약간을 얻었고 그들이 내어준 헛간에서 잠이 들었다. 헛간은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에 나 있었다. 

 이리의 울부짖음 같은 핏빛 메아리가 공기를 찢었다. 

 다샴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이질적이고 기묘한 느낌이 신경을 흔들었다. 목덜미까지 소름이 쭉 끼쳤다. 낯선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분명히 아니었다. 

다샴은 헛간 문을 열려 했지만 빗장은 바깥에서 잠겨져 있어 허사였다. 낯선 소년이 밤을 틈타 도둑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노인들의 까닭 없는 경계심 탓이었다. 졸지에 갇힌 꼴이 된 다샴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오래된 경첩이 내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적을 매단 달빛 아래 기묘하게 번득이는 남자들의 흰 동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놀라지 말게. 

 

무리의 수장인 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내색하지 않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물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특정한 대가를 바라고 찾아왔음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임을 알았다. 

 수장은 직접적인 대답을 꺼렸다. 따라오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다샴을 향해 눈짓했는데, 노인의 주위에 기립한 남자들의 눈과 자세는 일체의 거절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다샴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순수한 의도에서 노인을 따라갔을 것이었다. 다샴은 횃불을 든 남자들의 선두에 선 수장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불빛이 마을의 끝편,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었고, 곧이어 바닥에 깔린 참혹한 광경을 비추었다. 돼지와 소, 닭과 같은 갖은 가축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숲 속에는 악령들이 살고 있네. 이 악령들의 왕은 사악한 요정인데, 그는 악령들을 마을에 풀어놓지 않는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산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네. 그게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일이로군. 

 

곧이어 남자들이 주둥이 부분을 단단히 묶은 포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능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다샴은 답변을 요구하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남자들에게 물었다.

 

잘 데리고 왔느냐? 착오는 없었고?

 

예, 어르신. 원하신다면 보여드릴까요?

 

노인은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어린 계집애면 충분해. 지금쯤이면 잠에 곯아떨어졌겠느니....

 

남자들이 포대를 이끌고 숲 가까이로 갔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포대 안에 갇힌 제물이 꿈틀거리고, 주위의 것을 발로 마구 차고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호소하고 애원하며 한바탕 난동을 피운 것이었다. 남자들이 포대 위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짓밟았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귓속을 파고들었다. 

 

...꼭 저렇게 해야겠습니까? 제가 숲 속으로 들어가 악령들의 왕과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무고한 사람은 풀어주시지요. 

 

다샴이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서 굳이 이 밤중에 저를 깨워 이곳으로 함께 온 것은 제게 이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어제 이 마을에 와 이곳 분들의 후의를 얻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일은 승려가 아닌 다른 누가 하겠습니까?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나 나한테나 안된 일이지만, 오늘의 제물은 꼭 바쳐야 하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한테 한 번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자네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거야. 오늘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악령을 부리는 그 요정이 진노하고 말게야. 저기 붉은 달이 뜬 게 보이나? 오늘이 바로 그날일세. 자네는 재수 없는 시기에 우리 마을에 온 셈이야. 

 

가축으로 제물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요정은 사람을 선호한다네. 그것도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또 우리가 어디 가축을 주어버릴 형편인가. 그게 전부 우리의 소중한 재산일세. 저게 모두 낭비라는 말이야. 

 

다샴의 눈 아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제가 저 사람 대신 제물로 가지요.

 

난데없는 파격에 노인은 당황했다. 안될 것은 없었지만...

 

난 요정을 쫓아낼 경이나 읊어주기 바랐지 자네한테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아. 자네는 나이 어리나 승려이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악령을 쫓는 신통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애먼 목숨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 아닙니까? 내일 같은 시각까지 차분히 기다려 보시지요. 제가 그리 하겠습니다. 

 

어르신, 하는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둘 사이의 대화를 끊었다. 

 

붉은 달이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악령들이 찾아올 시간이 지났어요. 조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물을 던져넣을까요? 

 

노인은 다샴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짙고 검은 눈은 일체의 빛을 반사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 것처럼 반들거렸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요정이 마음을 바꿨군. 같은 시간에 이 장소에서 보겠네. 

 

 다샴은 짧게 눈을 붙였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헛간에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옮길 것을 권유 받았다. 사람들의 태도와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다샴은 그들에게서 희망과 기대감을 보았고, 번들거리는 욕망 또한 읽었다. 횃불을 든 남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노인의 눈이 그러했다. 

 그가 지내던 헛간의 아래 틈은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너비가 있어서 캄캄한 와중에도 흘러가는 물결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이 일을 끝낸 빨래터, 다샴이 건너온 냇물은 거대한 강과 이어져 있었다. 다샴은 한가히 앉아 있을 때나 그들을 위해 부적을 쓰고 처방을 한 후에면 그 강을 생각하곤 했다. 

 그는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물살이 칼로 자른 듯 깨끗이 끊어졌다. 

 다샴이 노인의 집에서 함께 밥상을 받을 때, 작은 여자 아이는 부엌 안에서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샴이 혼자 남자 소녀는 쭈뼛대며 그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다샴의 옷자락을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고 그는 순순히 따라왔다. 소녀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들릴락말락했다. 소녀가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자 다샴은 그가 전날 밤의 희생물로 지목되었던 아이였음을 알았다. 

 

스님, 저는 오늘이 두렵고 내일이 두렵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나 현실을 자각하면 안도감이 들어야 마땅할 터인데, 실제를 인지하자마자 꿈 속과는 다른 종류의 또다른 지옥이 밀려옵니다. 꿈에서도 괴롭고 현실에서도 괴롭습니다.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손을 비틀며 흐느꼈다. 아이의 피부에는 온통 검보라색과 누런색의 멍이 피어 있었다. 

 

제 친척들은 제가 제물로 선별되었을 때도 군말 없이 저를 넘기신 분들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저는 결국 오갈 데 없이 친척에게 몸 하나를 의탁하는 어린 여자아이일 뿐입니다. 그 분들에게 저는 쓸모가 없어요. 저를 팔아버리거나 내쫓으려는 생각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스님, 기억하시나요? 스님이 오신 날 저는 음식을 들고 스님께 가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스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인심 사나운 이곳 사람들도 후한 대우를 베풀어주실 겁니다. 그때는 제가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스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제가 스님의 사당을 차려 대대로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아이를 축복하고, 그가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다샴에게 조개껍질이며 소라기둥을 받은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정신없이 손 안에 쥔 것을 매만지고 들여다보던 아이가 물었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연유로 방랑하는 중이 되셨나요?

 

다샴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것은 소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제 어미는 간음하여 그 죄질이 더럽다고 하여 사람들이 쫓아냈습니다. 어미가 통정하여 낳은 아이인 저를, 사람들은 경멸하지요. 이와 같은 사건이 10년 전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 이곳에 붙어있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더욱 무자비해서, 간음한 남자는 추방하고 여자는 죽여 숲 속 깊은 곳에 묻은 후, 그 둘 사이의 갓난아기는 들개가 뜯어먹도록 외진 곳에 버려두었다고 합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노파 한 명이 아기의 이름을 손수 지어 옷 아래에 바느질로 새겼는데 다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기가 살아남았다면 스님과 같은 나이일 테지요. 

 

소녀는 그렇게 말했고,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밤이 찾아왔다. 달은 전날의 그것처럼 붉었다. 소름을 동반한 이상한 파동이 다샴의 몸 안팤을 뒤흔들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전날과 다름없이 횃불을 들고 선 남자들은 제 발로 걸어오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 않는 그를 두고 걱정했다. 

 

어이.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다샴은 고개를 돌렸다.

 

마셔. 저기 있는 귀신 새끼들 족쳐버려야 될 거 아냐.

 

다샴은 남자가 건넨 병을 들어 마셨다. 걸죽하고 독한 술이었다. 다샴이 쿨럭대자 남자는 병을 치워버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지독하게 아팠다. 

 

 자. 그만하면 되었네.

 

뒷짐을 진 노인이 고개만 돌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앞에서 까마득하게 솟은 숲은, 그야말로 넓고 깊숙한 미궁이었다. 까만 유리알 같은 노인의 눈이 위로 휘어지며 웃었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게. 

 

횃불의 무리가 일렁이는 어둠을 뒤로 한 다샴은 그보다 한층 깊고 습한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울창한 잎이 우거진 저 위쪽은 새카매서 하늘과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렸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작은 동물이 풀숲을 헤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자 짐승의 기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곳은 오롯한 생명이 있되 동적인 생물은 없는, 얼어붙은 시간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나무와 풀 뿐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이 멈췄다. 정적이 온 몸을 휘감았다. 몸의 내부와 외부를 뒤흔들던 파동이 더욱 거세어졌고, 미약하게 시작되던 두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놀았다. 피가 달아오르고, 사그라들고, 달아오르며 올라오다가 중간에서 차게 식으며 목덜미까지 죽 뻗었다. 

 

- 다샴...다샴....

 

유령들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았다.

다샴은 정신을 잃지 않으며 애썼다. 빠져나가려는 것을 최대한 붙잡으며, 악령들의 숲 사이를 한발 한발 걸어나갔다. 그의 목적은 그들이 아니었다. 

 암흑 속에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숲은 계곡으로 이어진 통로였고, 사당은 계곡이 시작되는 탁 트인 저편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순수한 정념의 결정체가 다샴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잠식했다. 분노, 억울함, 황망함, 슬픔, 혼란스러움. 어떤 감정은 오롯히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악령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의 혼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그것 또한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애꿎은 골칫거리를 더 늘린 셈이었다. 다샴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극한 슬픔이 몰려와 그는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홀려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최악의 경우, 악령들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조종해 숲 밖을 나오게 한 다음 사람들을 해치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정념만이 공명되었지, 그의 정신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치 숭배하는 것처럼 사당을 올려다보았다. 요정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을 해치는 악한 요정에게 어떻게 사당이 존재하는 걸까? 나지막한 집은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아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있었고,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푸른 이끼가 집을 뒤덮었다. 흰 물살이 쏟아져내려 귓청을 적셨다. 붉은 균열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눈이 까마득하게 흐려졌다. 

 그가 깨어난 곳은 모래 바람 부는 사막이었다. 여타의 사람들이라면 즉시 홀리고 말았겠지만, 그 곳은 요정이 만들어낸 환상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붉은 균열이 사막 전체를 번개처럼 내리치며 시선을 혼란케 했다. 다샴은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골랐다. 요정은 그에게 최후의 심판을 선고했으며 최종적 전투를 선언했다. 무엇이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검은 회오리 바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몰아쳐왔다. 부르짖고 우짖는 영혼들로 가득했다. 땅으로 꺼지지도,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지도 못한 뭇 짐승과 인간의 영혼들이었다. 비늘이 달린 검은 새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처럼 울어댔다. 그 세계의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노인은 사내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이동했다. 불타오르는 횃불의 무리는 달과 그 빛을 겨루기라도 하듯 한 자리에서 고요했다. 

 

공간이 깨졌고, 시간이 얼어붙었다. 외계적인 고요함이 함께했다. 거대한 침묵이 그의 미세한 입자를 빨아들였다. 어떤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함을 잊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오리 바람은 잦아들고, 약해졌다. 나비의 날갯짓 만큼이나 미약하게 줄어들었다.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영혼들은 생기 있는 먹잇감을 찾아, 그들을 받아들여줄 그릇을 찾아 거진 빠져나갔다. 

 육체는 구부려진 활이었다.

푸른 이끼로 휩싸인 사당에 절로 균열이 생기더니, 천천히 갈라지다가 맥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집은 흙 부스러기로 돌아갔다.

 숲 바깥의 그들은 붉은 달이 어둠에 먹히고 자취를 감추어버린 과정을 맨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달은 본래의 흰 빛으로 돌아왔다. 경이와 두려움과 경탄에 찬 웅성거림이 일었다. 

 횃불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지만, 숲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에는 더 이상 악령이 출몰하지 않았다. 악령들을 부리는 요정이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숲의 중심부까지 다가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가 숲을 통해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방랑자와 여행객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숲의 중심부 너머 탁 트인 곳에는 흰 계곡이 있다고, 그리고 그 앞에는 허물어져 쓰러진 작은 사당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어린 탁발승은 정말로 자기 일을 잘 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억을 잊었다. 기억만이 진실이 된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죽고 썩었다. 기록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는 열 여섯이 되자 마을을 몰래 빠져나왔다. 숲 속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 사당이 쓰러지고 잎사귀가 우거진 검푸른 곳에는 언젠가 작은 묘석이 세워질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맹세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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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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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자장가를 불렀을 때, 레시아와 시나의 정신이 앞들과 뒷동산으로 출타하는 동안, 운명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생명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데. 그걸 자연의 섭리라고 보고 운명이라고 한다. 죽음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네크로멘서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는데 시체로 되살아나버린 경우에는, 그것 또한 그 시체의 운명인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운명 또한 무질서한 무언가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운명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면 운명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의뢰는...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저 앞에 당돌하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소녀.

리제로트에게 받은 의뢰에 대해 정확한 내용으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너를 보자고 한 이유야 의뢰 때문이지.”

 

“그래요? 해결할 수 있나요?”

 

그리고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켜서 틈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짧은 시간.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아니.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대신...”

 

정확한 내용을 수정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뭐라고요?”

 

어처구니 없어서 한숨이 입 밖으로 출타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지만,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빠르게 치고 나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의뢰는 사실상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거든. 그저 이야기 책에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게 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나의 말에 리제로트는 째려보며 대답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죽어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도 맞지?”

 

“당신은 지금 살아있잖아요.”

 

“아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태 새벽부터 고찰한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기로 하자.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는 이유야, 원래 나는 이 평행차원에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야.”

 

는 거짓말이고 사실 그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잡화점의 대마력이 방어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시공간은 본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지, 하지만 과거에도 각본가의 책에 적혀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존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본래 없었던 거야. 그거 있잖아. 죽음의 기사 4명 중에 하나가 왠 이상한 차원에 떨어져서 영문도 모르고 악마와 싸우는 그런 이야기. 아마 내가 케이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지.”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난 이 차원의 사람이 아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려고 절 이곳에 불러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한 거에요?!”

 

“당연하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만 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소망 하나는 들어줄게. 그리고 나는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소망 하나가 분명.

리제로트가 원하는 의뢰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뭐든지요?”

 

“아. 그렇다고 높은 수위의 기묘한 소원은 안 받아줘. 노블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19세 마크가 없다고?”

 

리제로트가 원하는 소망 하나를 들춰내는 것도 정말 어렵구나. 소녀의 마음이라는 건 이런 건가? 내가 잡화점 멤버의 장난으로 소녀가 되어본 적은 있긴 하지만, 음...지금은 무슨 심상인지 까먹었네.

 

“그럼...”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내적갈등에도 입을 연다는 그 자체가 결정했다는 소리니까...

 

“전 죽기 싫어요. 그러니...살려주세요.”

 

과연.

운명에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건가.

 

“방법이야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아.”

 

저런 소망을 듣고 절대로 공짜로 해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살아나는 거니까 최대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잃는 거라면?”

 

“우선 루니아 누나의 말처럼 그 힘을 버려야겠지.”

 

“제 초능력이요?”

 

“아. 물리적으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순하게 봉인하는 절차니까. 위급한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만 잠깐 발동하도록 만들 거야.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발현된 초능력을 마법적으로 봉인한다는 그 자체는 개념이 달라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힘은 근본적으로 마나를 뛰어넘은 자원이다. 그러니 봉인마법과 이미지만 어떻게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죠? 힘이 있어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잠깐 생각을 하고 나는 한숨을 지었다.

 

“애초에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게 아냐. 오히려 힘이 있든 없든 운명은 존재하지. 아니, 난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니까 종착지라고 표현을 하자. 어쨌든 그 끝에 다다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힘이 없어서도 있지만,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 힘이 있든 없든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삼손도 대머리로 죽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넌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힘이라는 그건 어떤 것도 상징할 수 있지. 라 캄베리의 영애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유랑극단의 간부이기도 하고, 너의 초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내 정신방어마저도 흔들어버릴 정도야. 게다가 아이리스를 건드려서 레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했고, 레이베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살려주다가 놓친 이후로, 나와 이렇게 몰래 만나면서 레이베리아에게도 죽을 위기에 놓여졌다. 결국 각본가는 너의 죽음에 대한 각본을 썼을 테고, 너는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지. 맞잖아?”

 

“마, 맞아요.”

 

“각본가의 각본은 또 언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각본을 적기 전에 내용을 본 거 같으니까. 지금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이네.”

 

내가 레이베리아라면 배신자에게 어떤 각본을 써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나라면 깃털로 간지럼을 태워서 죽였을 거 같은데...

 

“당신. 저질이군요.”

 

“아니. 남의 독백을 읽고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사생활침해라는 거 몰라? 나는 뭐 상상의 자유도 없나? 자유도도 없는 GTO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O가 아니라 A겠죠...아무튼 절 볼 때마다 그런 상상만 했어요? 변태.”

 

“그런 상상만이라니. 이 상상은 지금 처음 하는 거고, 앞으로는 안 할 상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형벌 중에 간지럼은 예로부터 내려온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 중 하나란 말이다. 염소가 네 발을 지속적으로 핥아본 적 없잖아?”

 

“당신도 없잖아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궤변을 늘어뜨려도 그 사이에 포인트만 집어서 공격을 하다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철한 아이였다.

 

“뭐 아무튼. 자세히 어떤 죽음을 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쓰여졌겠지. 아니면 지금 쓰고 있거나, 아니면 슬럼프가 와서 마감이 다가와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거나. 그러다가 담당자가 찾아와서 으름장을...아니, 이건 너무 갔구나.”

 

“하아...이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미래가 걸렸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 바보에게 실례군.”

 

“바보에게 실례인가요...”

 

지쳤는지 태클도 밍밍하게 들어오는군. 즐거운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자. 어쨌든 바보에게 미안한 내 입은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어쨌든, 그런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예를 들어 죽는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거나...”

 

“그거 영원히 죽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진실을 덧씌우는 거지.”

 

“그런 능력은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말했잖아.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예를 들자면...그래,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거나.”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는 방법을 상상이라도 했겠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막강해서 그럴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여신 중에서 가장 강력해진 레이베리아의 힘이 깃든 각본을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일 터.

 

“그러니. 각본을 찢고 자유가 되면, 불안정한 운명 속에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불가능해요. 다른 방법은 있나요?”

 

여전히 부정하는 리제로트. 그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있지. 당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야.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리제로트는 날 악인 취급하고 있을까? 심각하게 경계를 하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조심스레 작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안한 것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뭐죠?”

 

“가장 높은 건 당연히...”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각본을 찢고 불태우는 일 밖에 없지.”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했는지 리제로트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리제로트의 동요는 찻잔 하나를 깨먹고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거 레이베리아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나지막하게 웃은 나는 지금쯤 리제로트의 옆머리로 슬쩍 손을 뻗었다.

 

“다, 당신 바보에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점점 가까이 오는 거에요! 설마 소녀의 첫 키스라도 뺏을 작정으로...!

 

-파바박!

 

손에 따끔한 통증이 도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등에 박혀있는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꽂혀있는 상황.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너의 첫 키스를 가져가는 거냐? 지금 당장 살기를 품고 암살하려는 녀석부터 막아야지.

 

“내 한숨이 너의 말 때문에 가출해버렸잖아. 책임져.”

 

“채, 책임을 지라뇨!”

 

“어라? 카일 씨?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암살하려던 녀석이 태연하게 내가 뭘 하는지부터 묻는 거냐? 그리고, 지금 리제로트를 죽이지는 마라.”

 

내 말에 어깨를 으슥이던 레인은 감정이 알 수 없는 가면으로 들이댔다. 그보다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지금 덥지도 않나?

 

“리제로트를 죽이지 말라는 그 말은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가요?”

 

“이용가치가 아니라 의뢰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의 의뢰를 받고 정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있냐?”

 

“없죠.”

 

“그거 자랑 아니거든?”

 

가늠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뭐, 한번 잘 막아보세요? 어차피 피도 흘리지 않는 걸로 봐선, 카일 씨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모양인데 말이죠?”

 

“뭐. 인정은 하지. 그래도...신은 아니잖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은 있어도, 신의 영역에 돌입하는 인간은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레인과 어쩔 수 없이 한판 벌여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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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이라니!

내가 동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