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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 창업몬

[창업몬①] 청년사업가 4인방의 솔직 담백 창업이야기

  ▲ 팟캐스트 - 창업몬의 '로고'

 

2015년 11월 30일. 1인 기업을 운영하는 4명의 청년 사업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팟캐스트 - 창업몬'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체득한 노하우를 후배 창업가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스스로 결성한 인터넷 라디오 방송 제작 프로젝트이다.

 

4명의 DJ들은 창원에서 창업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인 '창창포럼'에서 만났다. 1인 기업의 특성상 혼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일이 아닌 '외로움'이었다. 그런 외로움을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간 모임이 바로 창창포럼인것이다.

 

1회차 창창포럼에서 만난 그 들은 모두 다른 분야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외로움'이라는 키워드가 서로에게 의지를 하게 만들었고 공통의 주제인 '창업'이라는 주제로 '팟캐스트 - 창업몬'이라는 프로젝트를 결성하게 되었다. 최근 TV에서 모 아르바이트 업체의 광고가 아주 큰 히트를 치면서 대한민국 청년들의 웃지못할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사회의 현실을 비꼬아 그 아르바이트 회사의 이름을 패러디하게 되었고 결국 '창업몬'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몬'이라고 하면 괴물을 뜻하는 '몬스터'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장난감'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팟캐스트 - 창업몬의 멤버들은 각자의 닉네임 뒤에 '몬'을 붙여서 스스로가 괴물이자 청취자분들의 아바타와 같은 장난감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몬스터 하면 점점 강해지는 '진화'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제 갓 사업을 시작한 4명의 DJ들이 앞으로 점점 자신의 사업체를 키워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겠다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제네시오 매직 팩토리>라는 이름으로 마술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제네시오몬', <복합문화커뮤니티 참새>라는 이름으로 지역에서 독서모임과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참새몬', <삼방동 고급잡부>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결혼식 콘텐츠 제작 유통을 하고 있는 '아빠투툼몬', 녹음실과 연습실을 운영하며 지역 뮤지션들과 함께 공연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하는 <플레이 댓 뮤직>의 '젬베몬' 모두가 다른 분야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멤버들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창업'이라는 길을 선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 <창업>을 선택한 4명의 청년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상상을 만들다.' <제네시오 매직 팩토리>는 성당에서 받은 세례명인 '제네시오'가 회사의 이름이 되었다. 주로 하는 일은 마술 공연과 마술 학원 운영, 마술과 관련된 각종 콘텐츠 제작을 하고 있다. 마술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방과후 교육 출강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쉬운일이 아니지만 마술사가 되는것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주 기쁘게 일하고 있다.

 

아직 지역에서 '마술'이라는 콘텐츠만을 가지고 공연을 하기에는 수요가 부족해서 어려운게 현실이다.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사에서 '조미료'와 같이 마술 공연이 짧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는 주변의 다른 마술사들과 함께 마술 공연 시장을 더 키워서 '단독 콘서트'를 해보고 싶은 꿈이 있다. 짧게는 2018년 부산에서 열리는 마술 올림픽에서 '입상'을 하는게 목표이기도 하다.

 

'참새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복합문화커뮤니티 참새>는 평소 동호회처럼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시작됐다. 독서 모임과 더불어 전공인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참새몬 역시 예전에 직장을 다니면서 '갖힌 삶'을 살아왔는데 너무 답답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고 병원까지 찾게 되었다. 이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유'를 찾으면서 점점 그 병도 치유될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살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복합문화커뮤니티 참새'를 설립했다.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콘텐츠의 모든 것' <삼방동 고급잡부>는 아빠투툼이 운영하고 있는 네이버 카페의 이름이다. 19세에 사회에 나와 15년간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그에게 남은 건 '갑상선암'이라는 병을 얻어 죽음과 맞써 싸워야 했던 시간이다. 다른 직장인들처럼 남들을 짓밟고 빠르게 올라서야만 내가 행복해질줄 알고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막상 '죽음'앞에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는 대기업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평소 좋아하던 '취미'를 가지고 창업을 했다.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을 통해 쉽게 그를 찾을 수 있도록 블로그와 카페를 통해 고객들을 만나고 있다. 결혼식 축가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축가 이벤트를 만들 수 있도록 음악과 영상 콘텐츠를 제작해주는 일로 시작된 삼방동 고급잡부는 현재 토탈 웨딩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가 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먹고 자고 음악하는' <플래이 댓 뮤직> 역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마음 한켠에서는 '음악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젬베몬'이 설립한 공연기획 단체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취미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던 그 는, 음악을 하고 싶지만 어디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편하게 음악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플래이 댓 뮤직을 찾으면 혼자라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음악 할 수 있는 있다. 또한 그 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도록 지역 뮤지션들을 모아 버스킹 공연 및 미디어 콘텐츠 제작을 통해 그 들의 음악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수 있도록 한다. 누구나 즐겁게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 그 것이 바로 플래이 댓 뮤직이다. 아울러 팟캐스트 - 창업몬의 소중한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각자 다른 꿈을 꾸는 4명의 청년들이 의기 투합해 모였다는 사실 자체로도 '팟캐스트 - 창업몬'은 재미있다. 어찌보면 골치아프고 어렵기만한 '창업'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어려운 창업 이야기를 재미있는 입담을 통해 편하게 전달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들의 '경험' 에서 우러나오는 솔직 담백한 이야기가 벌써부터 지역 사회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청년들의 처절한 몸부림' <팟캐스트 - 창업몬>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http://www.podbbang.com/ch/10627 (팟캐스트 - 창업몬 듣는 곳 "팟빵")

https://www.facebook.com/changupmon (팟캐스트 - 창업몬과의 소통 공간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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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산행(山行)

 

 

 

 

 

    “그만 그만! 내려줘!”

 

  나도 모르게 악다구니를 쓰고 만다. 지나가던 산 손님들이 히죽거린다. 몸을 거꾸로 서게 하는 인버전 테이블(일명 ‘거꾸리’라 불리는 운동기구)의 각도가 슬그머니 조정된다. 옆을 슬쩍 보니 아버지가 내 등을 받치고 서 있다.

 

  “아빠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

 

 

 

 

 

  서른, 회사를 옮겼다. 그것도 연봉을 엄청나게 깎으면서 말이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결정이었다. 나에게는 돈보다 내 여유와 만족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는 철딱서니 없는 선택이라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 아닌 것엔 참 정확하고 이성적이니까. 타인의 꿈이나 생각, 목표, 가치관을 재단의 대상으로 삼아 줄자나 가위 따위를 들이대는, 아주 못생긴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것이 현실의 세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내 영혼을 갉아 먹히는 일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었다. 한없이 시들시들해진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을 매듭지었다. 이게 내 하향이직(下向移職)의 시시한 전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왔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나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가치판단에 매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렇게 굳힌 결심이 반드시 최선의 결론이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철옹성 같던 마음도 나이 앞자리가 바뀌니 결국 야들야들해져, 남들의 눈과 입에 내 만족감의 일부를 맡기게 되니 말이다.

 

  씩씩하고 당당하게 前 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사실 나는 심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특히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들의 시선과 표정에 일희일비하며 체한 듯 지내야 했다. 부모님과 남동생 모두 나에게 아무런 타박을 주지 않았지만, 잊었다 싶으면 다시 떠오르는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동생에게 좋은 선물 하나 사주지 못하게 된 누나로서의 민망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 복합 미묘하고도 못생긴 감정 탓에 한동안 주말에 외출도 자제하고 지냈더니, 가족들이 대뜸 산에 가자며 두꺼운 옷을 던져준다. 등산이 그렇게 좋대, 살랑살랑 웃는 어머니 뒤로 눈을 찡긋 하는 동생과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아버지의 등이 보인다.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등산 고수, 어머니와 남동생의 자취를 쫓으며 열심히 걸어본다. 하지만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크고 작은 돌부리에 자꾸만 걸려 새끼강아지마냥 캉캉거린다. 다행히 내 옆에는 그가 함께 걷고 있다. 평소보다 보폭을 줄여 딸의 엉성한 걸음에 박자를 맞추어주는, 나의 아버지.

 

  여기 있는 건 국산 소나무가 아니야. 아빠 어릴 땐 기온이 영하 20도로 떨어지는 날이 많아서, 바깥에서 놀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언 발이 녹느라 간질간질 했었어. 저기 보이는 건 골프연습장인데, 공이 이쪽까지 넘어와 등산객들을 괴롭게 할까 봐 이렇게 산길에 철조망을 만들어 놨나봐. 조금 뒤에 쉼터가 하나 나오니까, 거기에 앉아서 다 같이 커피 마시자. 믹스도 있고 원두도 있어, 취향대로 골라 마시면 돼.

 

  딸은 그저 ‘응, 응.’ 하는 무뚝뚝한 대답만을 내뱉을 뿐인데,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온다. 묘하게 화제의 중심을 비켜나간 듯한 우리의 대화는, 공허하지만 배려가 가득하고 군데군데 애정이 묻어 있다. 언쟁 없이 느슨하게 이어지는 말의 화음 위로 평온함이 밀려든다.

 

  “아빠 있으니까 넘어져도 괜찮지만, 힘들면 이거 잡아.”

 

  집에서 들고 온 기다란 나무 지팡이를 쑤욱 내밀며, 아버지가 앞서 걷기 시작한다. 두 걸음 정도의 거리는 딸의 걷는 속도를 고려한 배려의 폭이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가 쏟아낸 질문들처럼, 애초에 내가 내린 결론은 중요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나의 결정을 오롯이, 아버지는 믿어주고 있구나. 나는 슬며시 그가 내민 나무 봉을 잡아 본다. 신기하게도 겨울의 차가운 온도가 아닌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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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Adulthood

 

 

 

 

    어른이 되면서 잃는 것과 얻는 것이 있다. 성인이 되고 난 뒤 가장 좋았던 것은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적어도 학창시절엔 같은 반에서 생활하는 아이들과 서먹하면 1년이 고달팠으니, 나는 그런 불편함이 싫어 서른 명이 넘는 모든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수고로움을 택하는 아이였다. 덕분에 1년이 모두와의 우정으로 꽉꽉 들어찼지만, 한편으로는 피곤하다는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억지로 애쓰지 않았다. 입학 첫 학기에는 친한 친구들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그 '손에 꼽히는' 친구들과는 정말로 많이 친해져서, 서로 온 마음을 내어주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함께 하는 사람의 숫자는 적어졌지만, 공기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나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일당백의 감정들. 서로를 위해 울고, 웃어주는 나날들이 좋았다.

 

  정말로 친한 사람들과의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다수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제법 융통성있게 잘 엮어갈 수가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나이를 먹으며 능글맞게 어떤 일을 웃어넘기기도 하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과 어쩌다가 마주쳐도 반가운 것처럼 인사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한 편으로는 내가 정말로 어른이 된 것 같아 편하고 좋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일, 모든 사람에 최선을 다해야만 성이 풀렸던 순수하고 에먼 열정이 사라진 것만 같아 슬프기도 했다.

 

  확실히, 이건 어른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여 우선순위를 둘 수 있다는 것.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잘하는 일과 하기 싫은 일, 불가능한 일, 잘 못하는 일을 나누고 '내 영역'을 선택하는 것. 그래서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2순위로 제쳐둘 수도 있는 것.

 

  그러니 어른으로 사는 일도 꽤 할 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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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너도 그럴 거면서

 

 

 

 

 

 

M : 남녀관계에서 '영원'을 말한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속에 진실성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지.

 

W : 맞아. 난 순간의 진심이라는 걸 믿어.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함에 대해 말할 수는 없을거야.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영원이란 정확한 개념이 아닐거야. 그건 '지속'의 의미겠지. 시간 안에 있는. 순간들을 이어붙인. 응, 분명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실제 개념상의 영원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거지. 뭐, 어찌됐든 상관은 없어. 사실 나도 습관적으로 시간 안에 영원을 포함시키곤 하니까.

 
M : 운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W : '영원하지 않으니까 운명적이지도 않다' 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

 
M : 나도 그래. 운명이 꼭 기계적인 결정론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사실 몇 억의 인구 중 두 사람이 만난다는 건 엄청난 운명이면서도 또 엄청난 우연이기도 하잖아. 만남이라는 건, 우연이기 때문에 더 운명적인 걸지도 몰라.

 
W : 사랑할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별 후에는 그 생각이 어떻게 바뀔까? 분명 '우리는 운명이 아니라 우연이었던거야' 라며 한숨짓겠지. 사람은 참 간사해.

 
M : 너도 그럴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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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고대하던 출구에 다다랐음에도,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터널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적잖이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포크질이 서툴던 동네 꼬마를 떠올렸다. 왜 내가 그 순간 꼬마를 떠올렸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꼬마의 얼굴 같은 건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 동네를 떠난 지 벌써 15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또 갓 싹을 틔워낸 떡잎들처럼 아이들의 생김새는 엇비슷하기 마련이다. 만약 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여기에서 그 꼬마를 찾아보세요.’ 라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 올바른 답을 찾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아이들 틈에서 꼬마를 단번에 알아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김새 따위가 아닌 다른 힌트를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공기의 질, 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현재의 시간과 이미 지나간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기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정확히 내가 걸어온 만큼의 길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마도 입구 혹은 또 다른 출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따끔거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웬일인지 이전만큼 두렵지가 않다. 주변의 공기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운 냄새에 몸이 흠뻑 젖었다. 

 

  그렇게 나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는 올바른 경로를 이탈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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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사랑하다

 

 

 

 

    드라마 <밀회> 7화에는 선재(유아인)가 모텔방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는 순전히 혜원(김희애)의 말, 그러니까 "집이라는 데가, 가끔은 직장 같을 때도 있단다." 라는 그 말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보통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집에서까지 쉬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쉼표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ATM기를 통해 확인한 통장 잔액은 채 20만원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에서 제일 좋은 방"을 보여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되어서, 선재는 안심한다.
 

 

 

 

  영화 <희극지왕>에서 사우(주성치)는 창녀인 피우(장백지)와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잠든 그녀의 곁에 자신의 코 묻은 전 재산과 꾸깃한 연기교본을 놓고 돌아선다. 가난한 엑스트라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간절하게 배우가 되기를 소망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 여자들 중 가장 예쁜 피우를 사랑하게 된 그는, 그녀를 위해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당신을 먹여 살리겠노라고 용기 내어 소리쳐 보지만, "당신 앞가림이나 잘해, 바보!" 라는 답변을 남긴 채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우는 마음이 쓰리다. 돌아선 그녀는 그가 준 돈과 시계, 연기교본을 끌어안고 엉엉 운다.

 

 

 

 

  선재의 모텔방과 사우의 연기교본은 순수한 사랑과 진심의 상징이다. 영화 <서유기-선리기연>에서처럼 당신이 내 몸 속으로 들어가 심장을 볼 수는 없을 테니, 당신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거다. 사랑은 그런 거다. 없으면 없는 만큼 내어주는 것. 그러니까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도 사랑은 사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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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먹어 봐야 아는 것들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알아?"

 

  척 보면 딱 아는데, 왜 굳이 함정에 빠지고, 위기에 봉착하고, 어려움을 몸소 겪느냐는 말이다. 경험이라는 것의 가치를 높게 생각하는 나는 이 말에 매번 반감을 표하는 편이다. 이 세상에는 분명 '꼭 먹어 봐야 아는' 것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는 그 안에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파악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하나의 소우주인 한,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 역시 그러하며, 사람들이 얽히고 섥혀 만들어내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시도나 도전의 결과값이 'Perfect'가 아닐 경우, 지나치게 날선 시선을 보내곤 한다. 그런 따갑고 차가운 세계에서, 내가 가진 재료들이 이 세계에 던져졌을 때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매 순간 실험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움을 얻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충만한 나'를 만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매우 위험한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삶이 보여주는 다양한 색채 중 겨우 한두 개의 것만 알아채고 살아가야 한다면,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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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성장일기

 

 

 

 

   중학교 1학년 때 쯤, 키가 멈췄다. 지금의 키는 169-170cm 정도. 그러니까, 학창 시절 나는 늘 맨 끝번호였다.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 성장이 느린 탓에, 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보통의 남학생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초등학교 때는 1년에 10cm씩 쭉쭉 자라서, '이러다 내가 고목처럼 거대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는데, 성장은 생각보다 빨리 멈춰버렸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X반의 키 큰 애'였던 나의 성장 속도가 극단적으로 멎어든 것과는 상관 없이, 어떤 아이들의 성장 속도는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급격하게 빨라졌다. 곧 나와 다른 친구들의 신장 차이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보다 작았던 남자아이가 훌쩍 자라 내 정수리를 보며 이야기하게 되는 상황도 생겼다.

 

  더 이상 내가 'X반의 키 큰 애'라는 수식어로 불리지 않게 되면서, 그 '성장'이라는, 눈에 보이는 척도를 통해 나는 사람마다 제각기 자라나는 속도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물을 마시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볕을 쬐어도, 실은 모두 저마다의 페이스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구나.

 

  이건 인체의 신비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삶의 진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비단 키나 몸무게 같은 것뿐만 아니라, 저마다 품고 있는 어떤 것이 폭발적으로 터뜨려지는 시기가 있다. 모두가 귀여운 종달새 같았던 초등학교 4학년 때 폭주기관차처럼 격렬한 사춘기의 시간을 보낸 친구도 있고, 학창 시절 내내 침잠해있다가 거의 서른이 다 되어서야 폭풍우 한 가운데로 들어가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애늙은이도 있는 걸 보면.

 

  그래서 누가 더 자랐고 덜 자랐나에 대해서는 지금이 아니라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지금 내가 요만하다고 해서 계속 요만한 채로 인생을 마감하는 건 아닐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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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1

하루해가 저문다. 창으로 들어와 비스듬히 누운 저 빛살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부딪는 것은 모두 본색을 드러낸다. 붉은 바탕은 더 붉고, 누른 바탕은 더 누르다. 그래서일 것이다. 가을날에 `타는 노을`은, 가슴도 태운다. 이제 곧 빛의 경계를 스칠 것이다. 아주 잠깐 동안이겠지만, 실체가 아닌 허상으로서의 `빛덩어리`를 보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 실체가 아닌 허상임을 하루에 두 번 일깨워 준다. 만약, 그 경계를 따라 머물 수만 있다면, 평생 허상을 보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실체도 그 진상을 보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허상이 실체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의식보다 훨씬 짧은 찰나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시하는 것으로,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찰나다. 그러나 그 실체의 허상이나 증거는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일컬어 `태초에 빛이 있어라`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경계너머로부터의 조화를 무엇이라 경험할 수 없기에, 다만 `신`이라 일컬어 인간의 의식영역 안으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신(神). 의인화된 대상이라고 추적해 보면 어떨까. 벌떼처럼 부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빛의 경계너머로부터의 조화를, 일컬어 `절대찰나`로 수용해 낼 수는 없을까. 인간의 의지가 어찌해도 가닿을 수 없는 찰나, 그러나 그 방대한 에너지 속에 존재하는 것들, 그 경계의 밖으로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아니,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 다만 인간의 의식 속에서 제 모습쯤으로 어림잡았을 뿐인 대상, 신(GOD)이라는 불림으로 말이다.

 

2

빛의 경계를 따를 수 없으니, 그 사이에 어둠 속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밤이라고 말하는 시간이다. 인간의 의지로 관장할 수 없는 시간, 이 어둠 역시 `절대찰나`가 만들어 놓은 시간의 다른 모습이라고 하자. 태초에 시간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좁게는 궁창(穹蒼) 아래 생명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우연과 필연의 경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리킨다. `너`와 `나` 그리고 `그`라고 가리킨다. 때로는 한데 아울러 `우리`라고 가리킨다. 이와 같은 가리킴은 모두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개입으로부터 성립될 뿐인 가리킴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데 가리키려 들어도 `무엇`이라 가리킬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개입되지 않은 모든 `나`는, 달리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다. 그저 `나`들일 뿐이다. 무심결에 `너희`라고 지칭하는 순간 `나`는 개입되고 만다.

 

오로지 `나`일 뿐인 존재, 그리고 또 다른 `나`일 뿐인 존재, 그러므로 그 모든 `나`라고 하는 존재, 그 무엇도 개입되지 않은 `나`를 `무엇`이라 지칭할 수가 없다. 그렇다. `오로지 나`일 뿐인 `나`로, 잠시 감았던 눈을 떠보자. 어쩌면 시간의 지배로부터 잠시 자유로운 존재임을, 의식은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체로서의 `나`로부터 분리된 `나`, 존재로서의 `나`로부터 분리된 `오로지 나`를 의식은 수용하려 들 것인가.

 

지금까지 `너`의 소리로, `나`의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들이, 비로소 `오로지 나`의 소리가 되어 들려올지도 모른다. 다시 `나`를 개입시킨 가리킴으로서의 `그대의 의식`이 `오로지 나`를 수용하는 순간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순간을 역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식`이라고 해 두자. 이제 눈을 감으나 떠나, 또는 존재하거나 존재했었거나 불문하고, 의식에 들려오는 모든 말과 글과 문장과 계(戒)와 시(詩)의 소리를, 하물며 바람소리까지도, 무엇이라 가리킬 수 없는 바로 그 `나`의 소리로 듣게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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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굴거리 아저씨를 만나던 날

1

꼼짝없이 집에 머무는 하루다. 봄비가 질어 들판에 나서지 못하고 발이 묶인 것이다. 이 비 그치고 나면, 검불 들판은 제법 파릇파릇 봄빛을 띠기 시작하겠다.

 

저녁에 영화 한 편을 본다. 이미 티비로 봤던 영화의 재탕이다. 이틀 전에 드리운 넓은 스크린에서 한 번 더 보고 싶어 제안한 `인터스텔라`다. 영화의 감상은, 여기 소소한 일상의 사색에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자.

 

2

다시 날은 밝았고, 늦잠을 잤다. 맑은 커피 한 잔을 저어서 아침을 시작하는 것으로, 그리고 주섬주섬 지인 몇 동행하는 등산길 반 산책길 반 들녘으로 나선다. 잔 방울 서넛 얼굴에 느꼈지만, 비는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생강꽃이 노랗게 방울졌다. 꽤나 그 둘레가 길쭉한 저수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 옆에서다. 나지막한 능선 길을 돌아올 때, 솔숲 샛길로 몇 몇 마른 관목의 말초에 보일 듯 말 듯, 연둣빛이 찍혀 있었다. 하아, 앞으로 한 주일이면 키 작은 관목들 사이에서는 제법 입소문이 퍼질 것이다.

 

3

돌아와 날 갠 오후는 왁자지껄, 일요일 아이들을 공터로 불러낸 모양이다. 핑계 삼아 따라 나섰을 리야 없겠지만, 겨우내 사람 보기 힘들었던 작은 콘크리트 광장 안에 어른 아이 처음으로 북적댄다. 비로소 사람 속에서 봄의 활기를 느낀다. 그것은, 대형 마트 계산대 앞에 늘어선 무료함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다.

 

잘 조성된 나무벤치에도 앉아 본다. 나무들 사이로 화강 디딤돌이 말끔한 여기 이 정원들과 그 속의 것들, 아직 인사도 나누지 못한 첫봄을 맞는 사이들이다. 이제 곧 인사들 나누게 될 것이다. “안녕? 굴거리 아저씨!”

 

4

가지와 잎이 무성해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도 있고, 그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가지와 잎을 내는 나무도 있다. 만약 그대가 나무라면 어떤 가지와 잎을 갖고 싶을까. 그늘이 깊은 나무일까. 아니면 볕을 나누는 나무일까.

 

그런 저 `굴거리 아저씨`는 볕을 나눌 모양이다. 앞으로도 이 정원을 독차지하려는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아래 키 작은 관목들과 들풀들의 아우성도 없을 것이다.

 

5

때때로 `그늘`은 `품`이 되기도 하고, `일학(一鶴)`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비애(悲哀)나 `좌절(挫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름표에 `굴거리`라 적힌, 절제된 가지와 잎으로 그 둥치 아래 볕을 나누는 이방의 나무, 사람으로는 치켜뜰 수 없을 것 같은 비장의 격(格)이라도 품은 듯하다.

 

해거름에 잠시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정원을 지켜보던 산 것, 찐득이 엉덩이를 떼어내며 고작 중얼거린다는 소리다. “그 이름 한번 촌스럽다 굴거리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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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때때로

1

이 주말에, 날 궂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일기예보는 꿈쩍도 않고 연일 물방울 잔뜩 맺혀 있다. 낮기온이 무려 17도를 육박할 모양이다. 잠깐 날이야 궂은 들, 이랑에 들 정도면 도라지밭을 꽤나 매 놓을 수 있을 텐데.

 

엊그제 들판으로 빠득 빠득 서릿발 울지 않았던가. 그런 벌써 땅이 질어 들일 할 수 없음을 근심하다니, 흙이 마를 때를 기다려 호미를 들게 하는 봄날의 변심을 보겠다. 천기가 그리 하자면, 사람이 어찌 그리 하지 않을 수 있으랴.

 

2

세상사, 목마름을 따라 이루어진다. 들판에 풋것들이 그렇고, 산 속에 짐승들이 그렇고, 하다 못해 헛간 처마에 일렁이는 거미줄이 그렇다. 사람이 그 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누가 날빗질로 오지랖에 복줄을 제 손으로 걷어낼까.

 

사람도 목마름을 따라 발길 떼어 놓는다. 선한 목마름으로 호미를 들면 선한 밥을 얻을 수 있고, 선한 목마름으로 고개를 들면 선한 소리를 구할 수 있다. 목젖을 열고 넘어가는 것이 그렇고, 목청을 떨며 새어나는 것이 그렇다. 산 것들의 하루가.

 

3

뒤척이던 선한 밤이 지나고 날 밝았더니, 촌부의 발을 묶어 놓을 봄비가 창밖에 촉촉하다. 서운타.

 

빗소리 잠 깨어 눈 비비면, 춧담돌 하얀 고무신 속으로 지린 것이야 아무도 몰랐던, 그 소박한 소리들을 이 도시는 다 잃고 말았다. 그립다.

 

앞산에 구름 피어 무심히 흐르는데, 너머로 너머로 들판 하늘은 온데 간데 없다. 날 개어도 이랑에 흙이 다 마르려면, 이 3월도 상순이 훌쩍 지나고 말테다. 아쉽다.

 

4

또닥 또닥, 타닥 타닥, 도록 도록, 어쩌면 또륵 또륵 그렇게 울려 줄 빗소리, 도라지꽃이 피기 전에 들을 수 있겠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 부뚜막 한 켠으로 청국장 진득했던 허기는 어찌 메울까.

 

때때로 촌부는 목마르다. 때때로 그렇게 서운타. 때때로 또 그립다가, 그러다 늘 아쉽다. 오늘처럼 봄비가 오는 날에는, 도라지꽃이 피기 전에 더 멀리, 까마득 돌아 들어 치미는 상념에 허기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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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일기

일상을 가지런히 일기하는 이들이 있다. 촌부도 그 중의 한 사람일 게다. 무엇 별스런 사건이나 화제가 없어도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나마 일상 속의 생각들을 촘촘히 일기하려 든다. 꽤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늘 자신과 마주 앉는 일이다.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는 것과 일기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생각은 일부러 지우지 않아도 소각된다. 그러나 일기는 생각의 모순을 지워 내야 소각된다. 꼭 태워야 한다. 늘 자신을 지우는 것으로, 자기를 수정하는 과정이 일기가 아닐까.

 

말은 어떻게 하는지. 어투의 버릇은 겸손한지. 어법의 순서는 고른지. 생각과 의도는 어떻게 전달하려 드는지. 어떤 선입견이 작용하는지. 또 어떤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지. 심지어는 심리적으로 어떤 장애를 갖고 있는지.

 

일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과 마주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지우는 일, 그리고 스스로를 수정하는 일, 그런 일기는 `쓰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어떤 글을 쓰셨나요?" "오늘은 또 무엇들을 지우셨나요?" 아마 같은 말일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기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기록하지 않는 말, 말하지 않는 기록, 그 두려운 것들을 나누며 사는 용기, 분명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