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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때때로

1

이 주말에, 날 궂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일기예보는 꿈쩍도 않고 연일 물방울 잔뜩 맺혀 있다. 낮기온이 무려 17도를 육박할 모양이다. 잠깐 날이야 궂은 들, 이랑에 들 정도면 도라지밭을 꽤나 매 놓을 수 있을 텐데.

 

엊그제 들판으로 빠득 빠득 서릿발 울지 않았던가. 그런 벌써 땅이 질어 들일 할 수 없음을 근심하다니, 흙이 마를 때를 기다려 호미를 들게 하는 봄날의 변심을 보겠다. 천기가 그리 하자면, 사람이 어찌 그리 하지 않을 수 있으랴.

 

2

세상사, 목마름을 따라 이루어진다. 들판에 풋것들이 그렇고, 산 속에 짐승들이 그렇고, 하다 못해 헛간 처마에 일렁이는 거미줄이 그렇다. 사람이 그 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누가 날빗질로 오지랖에 복줄을 제 손으로 걷어낼까.

 

사람도 목마름을 따라 발길 떼어 놓는다. 선한 목마름으로 호미를 들면 선한 밥을 얻을 수 있고, 선한 목마름으로 고개를 들면 선한 소리를 구할 수 있다. 목젖을 열고 넘어가는 것이 그렇고, 목청을 떨며 새어나는 것이 그렇다. 산 것들의 하루가.

 

3

뒤척이던 선한 밤이 지나고 날 밝았더니, 촌부의 발을 묶어 놓을 봄비가 창밖에 촉촉하다. 서운타.

 

빗소리 잠 깨어 눈 비비면, 춧담돌 하얀 고무신 속으로 지린 것이야 아무도 몰랐던, 그 소박한 소리들을 이 도시는 다 잃고 말았다. 그립다.

 

앞산에 구름 피어 무심히 흐르는데, 너머로 너머로 들판 하늘은 온데 간데 없다. 날 개어도 이랑에 흙이 다 마르려면, 이 3월도 상순이 훌쩍 지나고 말테다. 아쉽다.

 

4

또닥 또닥, 타닥 타닥, 도록 도록, 어쩌면 또륵 또륵 그렇게 울려 줄 빗소리, 도라지꽃이 피기 전에 들을 수 있겠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 부뚜막 한 켠으로 청국장 진득했던 허기는 어찌 메울까.

 

때때로 촌부는 목마르다. 때때로 그렇게 서운타. 때때로 또 그립다가, 그러다 늘 아쉽다. 오늘처럼 봄비가 오는 날에는, 도라지꽃이 피기 전에 더 멀리, 까마득 돌아 들어 치미는 상념에 허기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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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일기

일상을 가지런히 일기하는 이들이 있다. 촌부도 그 중의 한 사람일 게다. 무엇 별스런 사건이나 화제가 없어도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나마 일상 속의 생각들을 촘촘히 일기하려 든다. 꽤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늘 자신과 마주 앉는 일이다.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는 것과 일기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생각은 일부러 지우지 않아도 소각된다. 그러나 일기는 생각의 모순을 지워 내야 소각된다. 꼭 태워야 한다. 늘 자신을 지우는 것으로, 자기를 수정하는 과정이 일기가 아닐까.

 

말은 어떻게 하는지. 어투의 버릇은 겸손한지. 어법의 순서는 고른지. 생각과 의도는 어떻게 전달하려 드는지. 어떤 선입견이 작용하는지. 또 어떤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지. 심지어는 심리적으로 어떤 장애를 갖고 있는지.

 

일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과 마주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지우는 일, 그리고 스스로를 수정하는 일, 그런 일기는 `쓰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어떤 글을 쓰셨나요?" "오늘은 또 무엇들을 지우셨나요?" 아마 같은 말일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기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기록하지 않는 말, 말하지 않는 기록, 그 두려운 것들을 나누며 사는 용기, 분명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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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봄

정서와 스토리

`엘사`와 `안나`는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자매 공주다. 돌이 지날 무렵의 아기로부터 청소년기 세대를 훌쩍 넘겨 저 얼굴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것도 주제곡을 비롯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다.

 

얼마 전, 어느 프로그램에서 `겨울왕국`의 히트(흥행 성공이거나 작품성인지는 모르지만)에 관한 대담이었을 것이다. 아마 `겨울왕국`의 원작이거나 제작과 관련되었거나 한 백인 남성 게스트와의 인터뷰로 보였다. 건성으로 켜져 있던 채널에서 흘러나왔다. "세 가지 요소를 들 수 있는데, 한국인은 그 중에서도 스토리가 부족하다" 하는 지적이었다. 응? 잠시 하던 일손을 놓고, 대담의 끝 부분을 지켜보게 된 동기다.

 

"한국인은 스토리가 부족하다?" 곱씹어 볼 겨를도 없이 필자의 고민거리 `골롬인격`이 듬성 듬성 오버랩 된다. 어쩌다가 `골롬`은 인간의 온갖 본성을 모두 내재한 캐릭터가 되어, 그런 추상의 모습이어야 했을 것은, 분명 원작의 용기이자 독자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스토리가 부족하다?" 그 말이 마치 스크레치처럼 귓가에서 톡톡 튀고 있었다. "스토...스토...스토리가...!"

 

그렇지. 필자가 전문가는 아니지. 그 세 가지 요소 중에 `스토리`를 제외한 나머지 둘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는데, 이 지면에서 아는 체 엉덩이 덜썩일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포괄적 기술력`에 해당하는 기둥 하나는 분명히 그 요소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추측을 곱씹어 본다. 나머지 하나는 역시 포괄적 기획이거나 홍보 같은 상업력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보았다. 그런 한국은 두 요소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마치 속이 빈 강정 같은 진단 과제를 남겨 놓는 것으로 프로그램은 마무리 되었다.

 

DNA, 정서, 유교가치관, 사대소국, 쇄국100년, 개항100년,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분열, 동족상잔, 생이별, 민둥산, 불구하고 빵, 한강의 기적, 와우아파트붕괴, 삼청교육대, 민주화분신, IMF, 산으로 산으로, 구국의 돌반지, 아무도 몰랐던 `나는 알아요`, 욘사마, 기획한류, 광속으로 IT강국, 여전히 분단 70년, 지상에는 예능천국, 한 쪽에서는 수구꼴통, 또 한 쪽에서는 종북좌빨, 세계 1위 저출산 국가, 고령화, 통일은 대박...대박 스토리...스토리가 부족...?

 

누가 `휘리릭`을 일컬어 `전광석화`에 비유했다. 참으로 온갖 귀울림들이 번갯불처럼 휘리릭 피고 졌다. 우에서 좌로 -한국인은 스토리가 부족하다- 빠르게 흐르는 자막의 날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 모든 귀울림들이 `휘리릭` 한 것이다.

 

정서는 하루아침에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그 때 오뎅은 아직도 오뎅이다. 심지어는 `닭도리탕`까지 생산되었다. "입에 붙어서 그만...!" 단순히 입에 붙어서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닭도리탕`은 생산되지 말았어야 한다. 그래야 입질탓이라도 할 수 있다. 하기야, 팔로 수백만이라는 이 땅의 이야기꾼도 `닭도리탕`이 우리말이라고 설전을 폈다니, 잠시 세간의 입질에 오르내린 바 있다. 물론 필자가 직접 그 진위를 당사자로부터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여지는 남아 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잠이 들 깬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정말 무엇이 부족한지 돌아봐야 한다. 그렇다고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정서의 간극을 무시하고, 돈 되는 따옴표를 남획하는 접근은 더 위험하다. 그것이 곧 사이비다. 이 땅에서 짝퉁은, 그 시절의 핸드백 정도에서 끝나야 한다. 그래야 `창조 문화`라는 고매한 언어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기장에 당당히 쓸 수 있을 것이다. 창작은 고사하고라도, 필자 따위의 `정서`니 `스토리`니 그런 케케묵은 잡사난설일까.

 

혹시 우리의 `이야기`는 골목의 잡담이고, 저들의 `스토리`는 `백조의 호수`가 아니었던지 돌아봐야 한다. 온통 하얀 옷을 즐겨 입던 `동방의 백의족`이, 저들의 `마르코폴로`에게는 신세계 스토리가 아니었을까 돌아봐야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이야기를 천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무엇 대단한 배경이라거나 걸출한 인물이라거나 그런 사건이 없어서였던 것일까. 아니면 혹시 "쓸데없는 짓거리!" 그 무덤 속에서 싹도 못 피우고 다 썩어버린 것은 아닐까.

 

`황당한 아이`를 `온전한 아이`로 키워내는 문화? `온전한 아이`를 `황당한 괴물`로 변신시켜 내는 찬란한 정서? 이만한 스토리를 구사하는, 그래서 그 찬란한 다리라는 것이 서로 다른 표정의 얼굴들이 비껴갈 수 없는 꼭두의 외나무다리가 아니었던지 돌아봐야 한다. "요즘 세상에 무슨 케케묵은!" 교실은 시끄럽다 못해 난장판이라고 특집이다. "요즘 세상에 무슨!" 하나는 통할 듯한 과거정서고, 하나는 분명히 안 통할 것 같은 현실정서다. 불구하고 저출산 국가를 견인하고 있다.

 

한 국가의 문화와 정서, 유연한 감성들을 견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 한류, 징조는 현실인데 징후는 억측? 어느 스토리의 엔딩이다. "I see you" 그렇게 "only you'를 지향할 때, 그것은 스토리가 되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뜬구름을 불러 타고 다니는 원숭이도 스토리의 캐릭터였지만 말이다.

 

가슴으로 느끼는 감동이란, 특히 그 대상이 영상작품이나 문집작품 같은 허구의 이야기일 때, 작품 전반에 걸친 감정 동화는 무엇보다 정서 정합율이 매우 높았을 때 작동되는 심리반응일 것이다. 물론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감동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아님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적의 본질을 형편대로 이해하려 드는 것은 방종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다음과 같이 수용해 볼 참이다. "한국인은 다양한 스토리가 부족하다" 하면, 필자의 형편에서는 대강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또 무슨 대담을 곁듣게 될 지 두렵다. 혹시라도 "한국인의 감성은 유연하지 못하다?" 응? 온 머리 속이 `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아, "감성이 유연하지 못하다?" 이 주제를 꼭 잡사난설로 한 번 두드려 보고 싶다. 허접한 삼단이면 어떻고, 하다 못해 개똥을 밟아도 괜찮다. "감성이 유연하지 못하면 다양한 스토리를 수용해 낼 수 없고, 다양한 이야기를 수용하지 못하면 감동에 힘겨운 협곡인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 푸념하는 것으로. 거칠고 투박한 필자의 날빗질에 앞마당 공기만 뿌옇게 흐려 놓았을 지 모른다. 곧 솥뚜껑만한 자목련 꽃살이 더러워지기 전에, 그대의 후한 심상에서 말끔히 정화되기를 소망한다. `유연하지 못한 집단감성?` 그 뿌리를 어떻게 캐 내야 하나. 봄이다. 얼마지 않아 그대는 저 살진 자목련 꽃살의 변심을 볼 텐데, 꽃살이 지고 말면, 저 나무가 백목인지 자목인지 갸우뚱? 짧아도 한 해 남짓 다시 피기 전까지는 그대의 몫일 테다. 그래도 아직은 날이 있을 것이니, 끝내 비겁하지 않을 것은, 그대의 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것으로 다리를 고쳐 앉을 것이다.

 

*본문 중에 오자나 실자 맞춤 등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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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봄

바스켓

 

1

진실이란 무엇일까. 순간으로 놓여지는 순간 순간, 그 뿐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모든 인과(因果) 또한 반드시 선순환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그 원인에 매달려 있지 않으며, 그 결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순간으로 이어지는 순간 순간, 그 자체로 진실일 뿐이다.

 

또한 진실은 너와 나에게 같은 진실이 아니다. 모두 다른 진실이다. 나의 순간과 너의 순간은 같은 순간이 아니다. 모두 다른 순간이다. 진실은 오직 나의 순간에 내 곁에 있고, 진실은 또한 너의 순간에 네 곁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은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일 뿐, 그 흔한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거나 하는 따위의 친구가 아니다.

 

2

헛소리는 `허리비틀기`를 시작으로 `파도타기`가 끝나 갈 무렵까지다. 사회적 약자들이나 흔들고 간다는, 공원 귀퉁이에 있는 운동기구다. 그것도 비가 오는 날에는 못 간다. 새벽 어둠 속에서 까만 자전거에 마스크를 하고 오는 사람이거나,  털이 없는 카키파카를 입고 걸어서 오는 몇 사람이 고작이다.

 

유령처럼 나란히 흔들리거나, 강시처럼 마주 벌떡이거나, 좀비처럼 허공을 휘젖다 말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질 뿐이다. 그 흔한 `굿모닝`도, 자리를 떠는 `헛기침` 조차도, 깡깡 언 바닥에 한 톨 흘리는 일이 없다. 그저 녹슨 베어링들이 삐긱 삑깍 삐긱 삑깍 흔들렸을 뿐, 그것이 불협화음이라는 생각 따위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3

먼동이 틀 무렵에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다 가끔 그 곳에도, 간 큰 이가 찾아들 때 있다. 드라큐라의 아침이 오기 전에, 텅 비워 놓아야 하는 곳인 줄 알 턱이 없다. 밤은 길었을 것이다. 파고 드는 냉기에 온몸은 얼었을 것이다. 간밤의 도시는 아무 일 없이 아침을 시작할 것이다. 베어링들도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생명에게서의 진실? 희망의 끈이라고는 다 끊어진 듯, 새벽 어둠 속에서 혼자 공 던져 넣기를 하던, 텅 빈 바스켓 아래 검은 베낭이 자리를 떴다. 이 겨울에 어디서 잠을 잤을까. 초인일까. 인간은 얼마나 고독한 사색을 할 수 있을까. 놀이였을까. 단 한 번도, 바람 빠진 공은 바스켓 속으로 들어가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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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봄

달그늘

들쑥 날쑥, 2월의 기온답다. 이제 한 주일 남짓, 벌써 3월을 시작해야 한다니.

아, 가슴 벌렁거리게 할 들판의 흙내음을 어찌 감당해야 할까. 겨울 서릿발에 누렁잎 지웠어도, 파랗게 살아 남아 봄 봄!

봉기를 들고 일어설 봄동군의 샛노란 단내는 또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정월대보름이다. 둥근달을 볼 수 있을까. 들판에도 달빛 내려 온통 하얀, 천길 만길 일렁이는 광목바다를 펼쳐 줄까.

그 날에도 얼마나 달빛은 밝았던가. 호롱 덮어 놓고 삽짝 밀쳐 달려 나가면, 달그늘 따라 담장 아래 숨어 든 녀석들, 온 동네를 다 깨우고도, 달 지도록 숨바꼭질은 끝나지 않았다.

 

그 달은 늙지도 않았을 테니, 오늘 밤에도 그 달그늘 지워 줄까. 일곱 살 아가야! 앞산너머로 노을빛 지고 땅거미 내리면, 대낮 같은 전등불 꺼 놓고 달 보러 나가볼까? 꼬옥 잡은 손 어찌하나! 그 날에 담장은 다 스러졌고, 빌딩숲 아래 온데 간데 없을 달그늘, 솟대놀이터 솟대 뒤에라도 숨어볼까?"

 

아름다운 동화가 동화책 속에 있는 것만은 아닐 게다. 생을 관통해 스멀 스멀, 유년의 기억 속에도 기록되어 있다. 동화책을 사 주고,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도 아름답다. 더불어 생활 속 동화 같은 기회를 포착해 주고, 동화 같은 사건을 체험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동화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