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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속(從屬)

-그 남자의 日記

 

 

 종속된 채 살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쓰고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내게 허락된 자유와 또 그에 걸 맞는 풍경은 딱 저만큼인가. 계절이 변하고 있다. 찬란하지만 차갑던 볕도 이제 서서히 온기를 더해가고, 앙상하게 떨던 나무들도 조금씩 습기를 띠고 있다. 종속 된 삶이란 것은 무엇인가.

 어딘가에 적迹을 둔다는 것은 정말이지 쓸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어디의 소속이며, 나의 상관은 누구이며, 내가 이곳의 소속원이 된다는 대가로 지불되는 매달 얼마의 돈. 이 모든 것이 나는 무척 쓸쓸하기만 하다. 나는, 변화, 변신 혹은 흐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소속의 변화이던, 내가 머무는 거처의 변화이던,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의 변화이던. 나는 변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변화라도 좋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더라도 나는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거대한 벌레로 변화한 내 몸뚱이를 보며 구석을 쫓아가고,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다시 또 다른 내가 되기를, 그렇게 또 변화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얼마나, 그것이야 말로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일이 아닌가.

 아내는 종종 그런 말을 한다. 이정도로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고. 고요히 머문 침대 속에서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잠이 든다. 웅덩이처럼 고인 침대 위에서의 밤. 적막과 고요만이 방안을 가득 채운 매일의 밤을 나는 견디기 힘들다. 건너 방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잠꼬대 소리도 귀 기울여 듣다보면 변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의 잠꼬대는 그 애들이 겪은 일상의 반복이다. 그 애들 역시 어딘가에 몸담고, 누군가의 학생이며, 나와 내 아내의 아이이며, 가족이라는 단위의 구성원이다. 적을 두고, 멈춘 채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쓸쓸한 일인 것이다.

 어딘가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 쓸쓸한 일이라고 소리 내 말한 적이 있다. 세 번. 술에 취한 밤,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여자가 생겼냐고. 아니라고 하자 그럼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도 아니라고 나는 아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데 진땀을 빼야했다.    그리고 어느 날, 몇 년 만에 찾아온 친구 영석과 술을 마시다 나도 모르게 적을 두었다는 것이 참 쓸쓸하다고 소리 내 말했다. 영석도 아내처럼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숨만 푹 내쉬는 그의 거무튀튀한 얼굴을 보다가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결국 그 술자리가 파 할 때까지 그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종속된 자의 슬픔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문득 나는 세상에 나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며칠 그 의문으로 멍한 나날을 보내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생전의 그 모습처럼 낡은 옷을 반듯하게 차려입으시고 거기 서 계셨다. 거기, 바로 아버지의 무덤 앞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으셨지만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태어나 죽고, 죽고 난 다음까지도 어딘가에 끊임없이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종속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 자신에게서 조차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종속된 채 사는 것이다. 죽으면 땅으로 종속되어야 하고, 누군가의 기억에 종속되어 추억되는 것이 인간이 아니더냐고. 아버지는 웃으셨지만, 우셨다. 참으로 쓸쓸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눈물이 맺힌 눈을 비비며 일어나니 아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아버지를 봤어.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일은 무슨…. 나는 돌아누우며 내 귀에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종속된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곧 아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고, 나도 어느 덧 아득한 잠 속으로 빨려 들었다.  잠에 종속된 나는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고, 한없이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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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스토리가 있는 진해 근대역사길

진해 근대역사길(김구선생 친필 시, 영해루, 수양회관)

김구선생 친필 시 (창원시 근대건조물 지정 : 2015년)
남원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시비가 세워져 있다. 김구 선생이 가장 존경하던 이순신 장군의 시 진중음(陣中吟)의 구절 가운데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아준다’가 새겨져 있다.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귀국 후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삼남지방 순례에 나섰는데 1946년 9월 진해를 방문하였다. 김구 선생이 진해를 떠나기 전 지역 유지들이 글을 요구했고, 서울로 올라간 김구 선생이 글을 써서 내려 보내 시비가 북원로타리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잦은 방문과 충무공 동상 건립을 위해 진해역 창고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시비가 깨졌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시비를 남원로터리로 옮겨오게 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영해루 (설계/년도:1948년)
영해루는  6.25전쟁 UN 군 포로가 된 중공군 출신 장철현씨가 1950년 중순경에 ‘영해루’라는 상호로 문을 열었다. 이후 서울 선린동에서‘태화관’이란 중국식당을 하던 중국 화교인 진검제가 이것을 인수한 후 그 후손에 의해 지금도 운영되어지고 있다.
현 ‘원해루’는 간판은 현 주인의 불찰로 “영해루”라는 상표등록을 하지 않아서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에 내려오면 종종 이 집에 들러 “만두”를 즐겨 먹었으며, 아시아반공연맹을 창설하기 위해 진해를 방문한 대만 장개석 총통과 함게 2층에서 만두를 먹은 곳으로 유명하다.

 

 

  

 

 

 

수양회관(설계/년도:1983년)

빨간색의 지붕이 뾰족하게 세워져 있어 뾰족집으로 불리는 중국풍의 3층짜리 6각 누각은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생들이 기거했던 곳이다. 

중원로터리에서 한눈에 들어올 수 있는 위치에 건립된 이 건물은 당시 신시가지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한 ‘랜드마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초소로 사용되었다. 

대지 모서리에 주출입구를 둔 6각 지붕 정자형 건물로 창문 및 내부 돌림계단 등이 독특하고 창문의 인방의 아치 형태와 난간은 다양한  장식으로 마감되어있다.  

본래는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대칭되어 남, 북으로 각각 1채씩 2채가 건축되었으나 북측건물은 멸실되고 1개만 남아있다.